평범한 학교 납품업자였던 내가 상인 운동에 뛰어들게 된 때는 1년 전이었다. 당시 무상 교육의 일환으로 각 지자체와 교육청이 '준비물 없는 학교'에 예산을 지원했고, 그 덕분에 나는 한창 돈벌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물건을 대주시던 도매 사장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잠깐 이야기나 나누자며 나를 붙잡았다. '준비물 없는 학교' 제도라는 학습 준비물 무상 지원 제도 때문에 전통 골목 상권이라 할 수 있는 학교 인근 문방구들이 현재 심각한 운영난에 처했고, 이대로 간다면 소매점뿐만 아니라 생산 업체들까지 위기를 맞이하며 결국 산업 전반이 붕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준비물 없는 학교' 제도에 투입되는 예산이 커지면서 입찰 시장이 활기를 띠던 때였다. 나는 입찰 시장에서 꽤나 쏠쏠하게 수익을 올리고 있었기에 이러한 도매 사장님의 문제의식에 크게 동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도매 사장님은 곧이어 이런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단체를 조직해 상인 운동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내가 그 단체의 업무를 맡아주길 바란다는 부탁까지 했다.
지방의 성공한 문구 도매상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던 거래처 사장님이 어쩌면 한 산업의 생존이 걸린 상인 운동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현재 제도로 오히려 혜택을 보고 있던 나에게 이런 운동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러나 내 고민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맑은 물이 있는 곳에 고기들이 몰리듯이 언젠가 입찰 시장에도 대기업들과 유통재벌들이 뛰어드리라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국학습준비물생산유통인협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지면서, 거래처 사장님은 이 단체의 협회장이 되었고 나는 사무국장이 되었다.
당시까지의 상황은 이랬다. 학습 준비물 지원 제도의 예산이 커지면서, 각 학교들은 학습 준비물을 공동 구매하기 위해 입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 인근 문방구들에게 이 입찰의 혜택이 거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은 컴퓨터의 마우스 클릭조차 제대로 못하는 문방구 사장님들이 전자 입찰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너무나 요원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입찰 시장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가족 단위로 영세하게 운영되던 문방구들이 가격 경쟁력과 인원 동원력을 갖춰 낙찰받기란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결국 학습 준비물 통합 구매 입찰은 도매와 소매 간의 정상적인 유통 과정마저 붕괴시켰고, 그 혜택이 일부 경쟁력 있는 도매 업체들에만 돌아가고 있었다.
▲ 학교 앞 문방구 ⓒ민들레
복지 제도와 중소 상권은 공존할 수 있다
나는 협회의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가장 중요한 원칙 하나를 내세웠다. 학습 준비물 지원 제도라는 복지 제도 자체를 부정하거나 축소하자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복지에 대한 정치적 신념도 있었지만, 자칫 현재 제도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고 있는 학부모들이 반발할 경우에는 운동 자체가 자영업자들의 이득을 위해 복지 제도를 반대하는 양상으로 비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복된 시행 착오를 거치면서 협회의 입장은 몇 가지로 정리됐다. 첫째는 교육 당국에서 현재의 부족한 예산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실제 작년 기준으로 전국의 학생들은 평균 3만 원 정도의 학습 준비물 비용을 지원받았다. 방학을 고려하면 한 달에 약 3000원 정도의 금액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금액은 실제 효용성보다는 상징성이 더욱 큰 것이 문제였다. 학습 준비물 지원 제도의 사회적 관심도가 높아졌지만, 학부모들은 지원 금액 적정성에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자녀들의 준비물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만족도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협회에서 교과서를 분석한 결과 실제 교과서의 교육에 필요한 학습 준비물 비용으로 3만 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학교들은 준비물이 부족하면 그냥 실습 없이 넘어가거나 개개인에게 부담을 최소한 줄여주는 방법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부족한 준비물을 개개인에게 부담시키면 학부모들이 반발하리라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협회의 조사에서 몇몇 학교들은 리코더나 멜로디언 같은 구강을 이용한 악기마저 비용 절감을 위해 공동 사용한다는 조사 결과까지 나왔다.
결국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학용 문구 소비가 감소하면서 문구 시장 전체 규모가 축소돼버렸다. 이 줄어든 문구 시장을 풀어주려면 예산을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폭으로 늘리거나 혹은 부족한 준비물을 개개인이 구비하도록 유도해야 했다. 학용 문구 시장의 축소는 그만큼 수요의 축소를 의미했고, 이 수요의 축소는 결국 교육의 부실로 연결된다는 것이 협회의 입장이었다.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들의 교육이 대두되기 때문에 교육 당국이나 일선 학교, 그리고 학부모들도 문제 인식에 크게 동감하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대기업 중심 입찰 구매, 골목 상권 침해
둘째, 현재의 입찰 시스템을 어떤 방법으로든 탈피하는 것이 중요했다. 우려했던 대기업들의 학습 준비물 시장 진입이 올해 들어 본격화되면서 무엇보다 현재의 입찰 구매에 대한 보완이 필요했다. 특히나 대기업들이 직접 생산 품목을 가지고 전국을 지사 체제로 운영하면서 대규모 마케팅을 하면 도저히 대책이 없었다.
실제로 올해 초 LG유플러스라는 통신 대기업을 파트너로 삼아 교육 쇼핑몰을 운영한다고 신문에 보도된 교육 디지털 콘텐츠 전문 회사인 ㅅ사는 이미 직접 생산 라인을 가동하고 지사 체제로 전국 운영을 준비하고 있다. 이제 ㅅ사의 제품이 입찰 품목에 올라오면 지사들을 제외한 다른 업체들은 입찰 참여는 물론이고 판매 기회조차 보장받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기존에 독점적으로 교육 디지털 콘텐츠 시장을 점유하고 있던 ㅅ사가 홈페이지를 바탕으로 디지털 콘텐츠를 학습 준비물과 연동하면, 입찰뿐 아니라 나머지 시장에서도 거의 독점적인 점유율을 확보할 수도 있어서 더더욱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결국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학습 준비물 예산을 입찰이 아닌 학교 인근 문방구점과 수의 계약을 맺어 사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협회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가장 먼저 발길을 향한 곳은 대한민국 국회였다. 여야를 막론하고 교과위 소속 의원들 가운데 학습 준비물 문제에 관심이 있는 의원들을 수소문했다. 당시는 대선 이전이어서 각 정당이나 캠프가 자영업자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리라는 막연한 믿음도 있었다.
그러다 현재 야권의 차기 당권 주자로 거론되는 한 유력 의원실과도 접촉하게 됐다. 비록 의원이 아닌 보좌관과 한 면담이었지만, 협회는 이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안도의 한숨이 통곡의 눈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골목 상권은 나라도 못 살린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력이 없으면 도태되지 않겠느냐?'와 같은 도저히 믿기 힘든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비록 의원 본인이 아닌 보좌관의 발언이었지만, 여당에 비해 그래도 골목 상권에 관심이 많으리라 믿었던 제1 야당의 유력한 의원의 보좌관의 발언이라는 사실에 좌절감은 더 커졌다. 이후에 나는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사회와 활동을 같이하면서 경제 민주화나 골목 상권 살리기를 주제로 야당과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 지도부의 자격으로 참석한 그 의원을 바라보면서 나는 분노와 역겨움의 구토를 참느라 꽤나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이후로도 수도 없이 국회와 대선 캠프들을 들락날락거렸지만, 내게 남은 추억은 국회를 나와 한강변에 머물며 흘려야 했던 눈물들뿐이었다. 결국 영세한 문구 업계의 목소리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기까지 가장 큰 도움이 됐던 곳은 정치권이 아닌 시민사회였다.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을 위한 국민운동본부'의 안진걸 사무처장을 만나 문구 업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내 손을 잡으며 짧게 '앞으로 저희와 함께하시죠'라고 했다. 나는 아직도 이때 안진걸 사무처장이 내민 손의 따뜻함과 고마움을 생각하면 눈에 눈물이 맺히곤 한다.
국회에서 외면받고 찾은 시민단체
이후에 협회의 활동은 이전과 정반대의 양상으로 전개됐다. 참여연대,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을 위한 국민운동본부', 중소상인 살리기 전국네트워크, 전국유통상인연합회와 같은 시민·상인 단체들에게 현재 문구 업계의 상황을 알렸고, 이제 그들과 함께 크고 작은 목소리들을 내고 있다. 학습 준비물 지원 제도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해결이 가능할지 의문이라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꺼렸던) 유통 재벌들이 운영하는 대형마트들에서 문구 판매를 자제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낼 수 있게 됐다. 이전에는 단 한 번만이라도 언론을 통해 우리의 목소리를 알릴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수많은 취재와 인터뷰 요청으로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영세한 문방구들의 생존 문제가 국민에게 생생히 전달되고 있다. 여기에 식약처의 '학교 인근 문방구점의 식품 판매 금지 조치'는 아이러니하게도 더더욱 영세한 문방구들의 생존의 목소리를 시대적 화두로 만들고 있다
복지 제도의 그늘에 가려, 행여나 이기주의로 매몰될까 전전긍긍하던 문방구 사장님들의 목소리가 이제 대한민국 골목 상권의 최후의 보루로 인식되면서 생존을 호소하는 목소리로 연일 매스컴을 타며 전파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국민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는 풀리지 않고 있다.
지난 1월 서울시 김형태 교육위원의 제안으로 협회는 서울시, 서울시교육청, 학부모 대표, 교사 대표 등과 함께 '학습 준비물 지원 제도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그리고 그 토론회를 확장해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체를 구성했고, 지난 주 그 첫 번째 회의가 서울시교육청에서 열렸다. 우리는 언론에 이미 학습 준비물 제도와 이로 인해 퇴출의 위기에 몰린 문방구들의 문제점이 충분히 보도된 만큼 이전보다 좀 더 전향적인 방향에서 해결책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협의체에 참가한 상대 구성원들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교육 복지 차원에서 학교 인근 문방구들은 사라지는 것이 옳다는 주장부터, 복지를 위해서 여전히 일부 상인들의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력 없는 업체들이 사라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라는 주장에 더해 문방구들은 더럽고 불결해서 사용하기 꺼리게 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결국 협회의 입장에서 이런 대응에 대해 일부 회원사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눈물로 호소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로 흐르고 말았다. 결국 협의체는 5월 중에 다음 만남을 약속하는 선에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을 내고 말았다. 그러나 5월에 있을 다음 협의체 모임에서 과연 어떤 변화가 있을지 여전히 미지수다.
강력한 상생 방안 마련해야
서울시나 서울시교육청 차원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미 반강제적으로 입찰을 해야 하는 현실에 대해선 이미 몇 가지 조치가 취해지고, 일선 학교들에 학습 준비물 구입 시 학교 인근 문방구들과 적극 협조하라고 권고가 내려진 것도 커다란 변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협회는 단순 권고가 아니라 좀 더 강력한 상생 방안을 바라고 있다. 법으로 규제되는 상황을 왜 서울시에만 자꾸 재촉하느냐며 국가에 항의하라는 협의체 참가자의 목소리가 못내 서운하면서도 한편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누구 하나 나서는 이가 없기에 우리는 서울시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서울시라는 상징성 때문에 서울시에서 구체적인 결과가 나와 전국적으로 확대되길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학습준비물생산유통인협회의 사무국장으로서 내가 만들고 싶은 복지국가가 있다. 복지의 수혜는 양적·질적으로 점점 더 늘려가면서도, 관련 산업의 영세한 자영업자들이 피해를 보지 않는 상생의 복지가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복지국가를 기대하는 대한민국은 현 시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 여전히 협회의 앞날에는 여러 가지 길들이 놓여 있다. 그러나 협회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이든지 그 길이 내겐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