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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 8월 15일 일요일 성모 승천 대축일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Blessed are you among women,
말씀의 초대 ☆☆☆ 오늘의 묵상 ☆☆☆
주님께서는 모든 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에 대한 ‘믿음’이 적은 탓입니다. 그러기에 가족의 평화를 청하면서도 ‘그렇게 된다는’ 확신에는 약합니다. 모든 것에 앞서서 주님께서도 우리의 행복을 원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 성모님의 승천은 성모님께서 곧바로 천국에 가셨음을 의미합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만한 삶을 사신 분이시기에 당연한 일입니다. 성모님의 생애를 평탄한 생애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과 아기 예수님께서 함께 사셨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으셨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가장 행복한 성가정을 이루셨으니 고통도 고뇌도 없고, 마음 상하는 일이나 말썽도 없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성모 승천은 당신을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내맡기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 참여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순간부터 이 세상 삶을 마칠 때까지,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은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곧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거룩하게 되셨고, 그 목표인 구원에 이르게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성모 승천은 마리아를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근원적 구원은 모든 사람의 구원이요, 그 충만함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 승천은 우리가 사도 신경을 통하여 고백하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의 신앙을 거듭 확인하는 것입니다.
깨진 항아리가 되지 않게 도와주세요 " -홍승모신부- 오늘은 한국천주교회가 수호자로 모시고 있는 성모님 승천 대축일이며 또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이한 날이기도 합니다. 이 뜻 깊은 날을 맞이해 성모님 은총과 축복이 모든 교우들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루가 1,39-56)
and blessed is the fruit of your womb.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면서,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쓰고 나타난 여인을 소개한다. 그 여인이 해산하려고 하자, 크고 붉은 용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키려고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다. 여인은 성모님이시고, 아이는 예수님이시며, 용은 반(反)하느님적 세력(사탄)을 상징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죽음은 한 사람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왔고, 부활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원죄로 죽음이 들어와 인간을 파멸로 이끌었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사정이 달라졌다.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문일 뿐이며,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이가 구원되어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제2독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신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께 “행복하십니다.”라는 인사말을 건네고, 마리아께서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신다(복음).
마리아께서 승천하신 날입니다. 마리아께서는 곧바로 하늘로 들어 올림을 받아 하느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마리아께서 구세주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삶을 잘 모르고 그분의 승천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천사가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할 때, 처녀인 자신의 처지를 포기하고 ‘주님의 여종’임을 솔직히 고백하십니다. 이로써 마리아께서는 이제 개별적 인간 마리아가 아니라, 주님의 여종으로서 철저하게 주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십니다.
처녀인 마리아께서 주님의 거룩하신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로 불리게 되신 것은 주님의 은총이기도 하지만, 성모님의 신앙 고백적인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곧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축복의 표지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자신의 온 생애를 오로지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하여 바치셨습니다. 그러한 성모님을 주님께서는 곧바로 하느님 나라로 들어 올려 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성모님과 같은 삶을 산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믿지 못하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어야 행복해집니다. 생각이 마음을 바꾼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느냐는 ‘시각’이 인생을 바꾸는 것이지요.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찬양하면서 자신의 삶에도 변화가 왔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핵심은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는 구절에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모든 것’의 원인이 주님이심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묵묵히 예수님을 추종하며 사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승천하시기에 마땅한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성가정을 단순하게 아무런 문제도 없고 다툼도 없는 가정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강한 개성과 고집을 지닌 분들이 사셨기에 어쩌면 남모르는 아픔이 더 많으셨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분들은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며 사셨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가정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성모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승천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산 사람에게 내려지는 축복의 예표입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살면 주님께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성모님께서 함께 계신 초대 교회에는 하느님의 힘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곁에도 수많은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성모님을 닮아 또 다른 마리아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곧 우리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 서문은 주님 잉태 기별을 받은 순간부터 마리아가 경험한 신앙체험으로 시작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찬송하는 이유가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표현합니다. 마리아는 고통스런 종의 처지를 돌보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고 있으며,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과거의 삶을 딛고 일어나 미래의 희망을 고백합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49).
마리아는 자신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행복이 모든 사람들에게 펼쳐지게 된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삶만 바라보는 이기적인 마음을 넘어서, 주님의 모든 백성과 구원의 역사를 함께 조명하고 있습니다. 주님 은총을 깨닫게 된 마리아는 지금 주님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으로 당신 자녀들을 사랑해 주셨는지, 그 신비를 밝힙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우리는 여기서 마리아가 깨달은 주님 마음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마음이란 거룩하신 분으로만 여겨져, 우리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주님께서 당신 자녀들의 고통스런 처지를 결코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고통스럽고 낮은 모습으로 사셨지만, 주님께서 그분을 들어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모 승천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요한 23세 교황님의 「영혼의 일기」에 이런 기도가 적혀있습니다.
"오, 주님. 제가 물을 담아두지 못하는 깨진 항아리가 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현세의 좋은 것들을 즐기느라 눈이 멀지 않게 하시고, 가난한 이들, 병자들과 고아들의 절박한 외침이 제 마음을 그냥 지나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깨진 항아리는 내면의 삶과 외면의 삶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봅니다. 깨진 항아리는 마음이 갈라져 자신의 실제 모습을 허황되게 평가해 진실에 눈멀게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결정과 행동만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러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물을 담지 못하는 깨진 항아리가 된다면, 자신의 실제 모습을 외면하게 돼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눈을 가리게 될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의 마음이 둘로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4,6-7).
항아리나 질그릇은 모두 깨지기 쉬운 것들입니다. 곧 우리의 영적 내면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세상의 유혹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깨지기 쉬운 항아리나 질그릇 속에 주님을 식별하는 빛을 주신 것입니다. 그 빛은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생명의 원천이 되게 하는 주님의 놀라운 힘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서지기 쉬운 존재임을 아시면서도,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주십니다. 성모님도 똑 같은 희망을 주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모님께 간구하여 그 응답을 얻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모님이 인간적 고뇌와 고통을 갖고도 주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응답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신앙은 수동적 응답이 아니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하신 성모님처럼 능동적 응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삶에 어려운 시련이 닥치더라도 성모님께 기도하면 기대 이상의 것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우리들의 어머니가 돼어려움과 시련에서 우리들을 보호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뜻깊은 성모 승천 대축일에 성모님께 기도드려봅니다.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 우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모든 위험에서 항상 우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여!
순종한 여인의 마지막은 영광
-손용환신부-
티치아노(Tiziano, 1488-1576)는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를 이끈 화가입니다. 그는 1516년에 산타 마리아 데이 프라리 성당의 제단화를 의뢰받았습니다. 그는 2년여에 걸쳐 생기 넘치는 색과 빛으로 〈성모 승천〉을 그렸습니다. 결국 이 작품은 1518년 5월 19일에 제막되었고, 그 결과 베네치아 최고의 화가로 등극했습니다. 비평가 루도비코 돌체(Ludovico Dolce, 1508-1568)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 작품에는 미켈란젤로의 위대함과 경이로움이 있고, 라파엘로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있으며, 자연의 진정한 색채가 있습니다.”
야코부스 데 보라지네(Jacobus de Voragine, 1228-1298)가 쓴 〈황금전설〉에는 마리아의 마지막 지상생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무치는 마음이 마리아의 흉중을 사로잡습니다. 먼저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 생각 때문입니다. 그 순간 마리아는 천사를 목격했습니다. 천사는 손에 들고 있던 종려나무 가지를 마리아에게 건네줍니다. 임종의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두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제자들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과 사탄이 당신의 영혼에 근접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소망이 그것이었습니다. 그 소망대로 요한을 비롯하여 제자들이 구름을 타고 마리아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마리아는 죽었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몸과 영혼이 천사의 보호를 받으며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티치아노는 그 광경을 관례적 표현방식으로 그렸습니다. 아래에는 열린 무덤과 제자들이 있고, 중앙에는 떠오르는 성모 마리아가 있으며, 위에는 열린 하늘이 있어 모든 천사들과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금색과 붉은색으로 그린 충만한 화면은 티치아노만이 그릴 수 있는 색채의 향연입니다. 바로 이 화려한 색채를 통해 그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화려하고 밝은 금빛에 둘러싸여 승천하십니다. 크게 펼친 두 팔과 상기된 얼굴 표정은 승천의 기쁨을 대변합니다. 특히 성모의 베일과 옷은 아름다운 율동미를 보이며, 상승하는 순간의 역동성을 실감나게 해줍니다. 그분은 가난한 마음을 상징하는 청록색 베일과 하느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상징하는 붉은색 옷을 입고 하늘로 오릅니다. 가난한 마음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결합할 때, 천국 문이 열림을 말해주듯이 말입니다.
아기 천사들은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도우면서 송가를 부릅니다. 축복 속에서 마리아의 얼굴은 천상을 상징하는 원형의 중심에 있습니다. 천상에서는 하느님께서 두 팔을 벌려 마리아를 받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사랑스런 눈빛으로 마리아를 응시하십니다. 천상은 모두 금빛 광휘에 싸여 있습니다. 금빛은 하느님의 영광을 더욱 빛내고 있습니다. 하느님 곁에서 대천사가 하늘의 여왕이 되실 마리아를 위해 왕관을 준비합니다. 하느님께 순종한 여인의 마지막이 영광인 게 모든 이에게 위안이 됩니다.
그림 하단은 지상인데 열두 사도가 보입니다. 이들의 몸짓은 성모 마리아를 우러르며, 그분은 따르겠다는 약속처럼 보입니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성모 마리아를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요한은 어머니와의 이별을 슬퍼하듯 옷깃을 여미고 눈물을 글썽이며 그분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토마스는 손가락으로 그분을 가리키며 승천을 확인합니다. 어떤 사도는 두 팔을 크게 벌려 몸을 그분께로 향하고, 어떤 사도는 겉옷을 벗어젖히며 마리아의 뒤를 따르려고 합니다. 어떤 사도는 가슴에 두 손을 모으며 승천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어떤 사도는 자기를 위해 빌어달라며 그분을 향해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이것으로 제자들도 천국을 그리며 주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그림은 기쁨과 환희에 찬 순간을 화려한 색채로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고 차분한 명상적 분위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천국을 그리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정진석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광복 65주년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또한 올해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루빨리 남북이 화해하고 용서하며 분단의 상처와 아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성모님의 전구와 하 느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예수님 구원사 업의 완벽한 협조자가 되셨던 성모님의 승천을 기뻐하며 무한한 희망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성모님께서 하늘에 올림을 받아 하느님 영광 안에 드셨듯이 우리도 장차 하늘에 올라 하느님 영광 안에 들 수 있다는 희망을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그분이 하느님 말씀을 듣고 온전히 따르는 신앙의 모범을 보인 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오래전부터 성모님을 특별히 공경해왔습니다.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님은 1838년 12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한국교회의 주보성인으로 정해 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하셨고 184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승인을 계기로 한국교회의 성모신심은 더욱 활성화됐습니다. 또한 성모 승천 대축일에 조국이 광복되는 기쁨을 맞으면서 한국교회의 수호성인 성모 마리아에대한 신심은 더욱 각별해졌습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은 우리를 하느님께 필요한 은총을 전구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평화만큼 소중하고 절실한 가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민족의 대립과 긴장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 부자와 빈자, 세대와 지역 사이에 여전히 다양한 형태의 분열과 갈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우리 사회의 갈등과 마찰의 원인으로 소통의 부재를 꼽습니다. 정부의 대규모 국책 사업 중 몇몇 사안들은 지금도 찬성과 반대의 극단으로 나뉘어 갈등과 분열로 치닫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적인 찬성과 반대가 아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끊임없이 대화하며 해결점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분명한 것은 그 해결점이 개인 또는 특정 단체의 이해관계에 치우쳐서는 안 된 다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왜 사람들 사이에 소통이 어렵습니까? 사회 공동체의 소통을 가로막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과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서로 가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함께 사는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평화는 요원한 것이 됩니다. 결국 참 평화를 만드는 것은 사랑과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지도자들은 국민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소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서민들과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더욱더 많은 관심을 갖고 배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사회 는 갈등을 극복하고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미움과 갈등과 절망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와 희망을 이루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세상에 평화를 이룸으로써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9). 따라서 우리 신앙인들이 먼저 가정과 사회에 평화를 이루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갑시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점점 더 밝아지고 행복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다양한 갈등과 다툼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완전히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되기를 기원합니다. 다시 한 번 성모승천 대축일을 맞아 온 겨레에 평화의 인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열두 번째 선수 성모님 - 윤원진 신부- “붉은 악마”를 아십니까. 우리나라 축구선수들이 국가대항 경기를 할 때마다
행복하신 성모님? -안소근 수녀- 오늘 복음에서는 두 번 성모님을 일컬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먼저는 엘리사벳이 성모님께 “행복하십니다.” 라고 말하고, 이에 응답하여 성모님이 “이제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의 삶은 행복하셨을까요?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내지만, 꼭 한 달 후인 9월 15일에는 성모 통고 축일도 지내게 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전삼용신부- 얼마 전에 어떤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오래 된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수십 년 전에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실 때 아내는 부모를 모시랴 자녀를 돌보랴 밭에서 일을 하랴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안타까워 남편은 세탁기나 전기밥솥이라도 사주고 싶었지만 아내는 그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거부하였습니다. 남편이 보기에 하도 안 돼서 몰래 세탁기를 사 놓고 하우스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세탁기를 사 놨다고 한 번 들어가서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왜 시키지 않은 일을 했느냐며 화를 내고 세탁기를 쳐다보지도 않고 밭으로 다시 일을 하러 나갔습니다. 집에 들어와서도 일주일 동안이나 그 세탁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살짝 세탁기를 보았고 버튼 하나로 세탁이 되고 탈수까지 되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편한 것을, 왜 진작 사용하지 않았을까?’하며 후회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시집살이가 힘들어서 남편까지도 원망스러웠고 그래서 남편이 주는 것까지도 받기 싫었던 것 같습니다. 받는 것도 사랑입니다. 남편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여자는 남자에게 감사할 일도 없고 사랑에 보답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여자는 남자가 주는 것을 받고 그렇게 다 주는 사람에게 자신을 주면서 서로 한 몸이 되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받는 것은 주는 것 만큼 어렵습니다. 받는 만큼만 줄 수 있고 그 만큼만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부부는 하느님께서 묶어 주신 한 몸이고 그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몸이 되는 관계는 항상 주고받는 움직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먼저 남자가 주고 여자가 받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다시 남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일치의 신비를 이루어갑니다. 이 관계의 모델이 삼위일체입니다. 아버지는 남자로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하여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십니다. 아들은 이런 아버지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립니다. 다시 성령님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혼인의 일치는 그래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하는 신비입니다. 성자는 이번엔 남자가 되셔서 삼위일체 신비를 받아야만 사는 여성성을 지닌 인간과 이루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생명과 함께 영원성이 있는 거룩한 신성을 인간에게 내어주십니다. 이것이 곧 성체입니다. 인간은 그 성체를 모셔 그 분과 한 몸을 이루고 또 우리 자신을 그 분께 봉헌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이고 하느님나라입니다. 그러나 혼인의 신비도 구체적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델에서 출발하였듯이, 하느님과 인간과의 일치도 구체적인 모델을 준비하셨습니다. 구체적이지 않으면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 모델을,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한 몸이 되는 혼인관계”로 삼으셨습니다. 이 두 분의 한 몸이 되는 혼인의 신비가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 신비의 모델이고 우리 개인이 그리스도와 맺어가야 할 혼인의 모델입니다. 성부께서 사랑을 위하여 성자를 영원으로부터 나게 하셨듯이 성자에게서 역시 마리아가 나오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왔듯이 성자에게서 마리아가 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원죄를 입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그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로부터 순결한 육체를 물려받으십니다. 왜냐하면 인류 구원을 위해서는 죄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제물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은 성자에게서 나와서 그 분과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성모님으로부터 육신을 취하셔서 성모님과 한 몸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체의 출발은 결국 성모님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의 인사를 듣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무엇이라 했습니까?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성령으로 충만해서 부르짖는 소리는 개인의 생각이 아니고 진리의 성령님께서 직접 일러주시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즉,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을 “내 주님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성모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취하시지 않으셨다면 과연 ‘주님의 어머니’라 불리실 자격이 있으실까요? 엄마라 불리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할 가장 큰 조건은 태중에서 키워주고 낳아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녀에게 자신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성자로부터 받은 당신 자신을 다시 성자께로 돌려드려 성자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자신을 주면서 한 몸을 이루어 성모님이 교회의 구체적인 모델이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뜻은 그분에게 당신의 염색체와 육체를 나누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죄가 있으셨다면 예수님도 그 죄를 물려받고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흠도 티도 없는 육체를 물려받으셨고 그 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몸으로 하느님나라에서 살기에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에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몸을 가지고 아버지께 올라가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온전한 인간은 하느님 삼위일체의 모상을 닮아 “영, 영혼, 육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육체가 없는 인간은 온전한 인간이 아니고 육체까지 구원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주신 몸을 가지고 아드님이 하느님나라에 올라가셨다면 그 어머니께서 당신의 깨끗한 몸을 지니시고 하늘나라에서 살지 못하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모님의 아드님이 승천하셨다는 말은 곧 그에게 당신 자신을 나누어주신 분도 승천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모님의 아드님이라 불리신 예수님의 승천이 곧 성모님께서 승천하셔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역시 인간은 하느님의 삼위일체를 닮아 영과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는데 우리의 행복이 영혼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육체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나라에서의 행복도 영과 영혼과 육체가 모두 행복을 느껴야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육체로 고통을 받으셨기 때문에 당신의 육체도 천국의 행복을 나누어 받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모님께서도 당신의 육체로 구원사업에 동참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육체도 천상행복을 누려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도 지금의 죄 있는 육체가 썩어 없어질지라도 마지막 날에는 모든 육체들이 부활하여 자신의 육체를 지니고 그 육체와 함께 영원한 행복을 완벽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취하신 성모님의 육체는 죄로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시고 어디에 갔다 놓으셨습니까? 바로 에덴동산에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비록 에덴동산의 흙으로 만들지는 않으셨지만 죄로 물들지 않은 깨끗한 몸이었기 때문에 하느님나라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육체에 죄가 들어옴으로써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하느님나라에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쫓겨났고 그의 후손들도 그들로부터 육체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죄로 물들어 태어나게 된 것이고 그것이 원죄입니다. 그리고 죄로 물들어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이 말씀은 아담(아담은 흙이란 뜻도 있지만 사람이란 뜻도 있습니다)이 죄를 지은 이후에 벌을 주시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죄의 결과이고 하느님의 벌입니다. 죄가 인간을 썩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35절에서 바오로는 시편 16편 10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께서 땅속에서 썩지 않고 부활하셔야 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가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입니다.” 새 번역에서는 ‘죽음의 나라’로 나와 있지만 원 희랍어로는 그렇게 번역되어서는 안 되고 ‘당신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가 썩는 것을 보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번역해야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썩게 만들고 거룩함은 썩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도 원죄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불마차는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의 마차에 탐으로써 그의 원죄까지도 모두 씻어진 것입니다. 하물며 원죄도 없어 성령님으로 처음부터 가득 차셔서 가브리엘 천사가 “은총(성령님)이 가득 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고 인사하셨던 성모님께서야 하늘에 오르지 못하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뜻은 이미 하느님나라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사시는데 이미 성모님과 함께 사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계신 곳이 곧 하느님나라입니다. 예수님이 태중에 있는 동안에는 하느님나라에 있는 것이었고 성모님과 있을 때는 아버지와 성령님과 함께 하느님나라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께 다가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 다가가는 것이며, 성모님께 다가가는 것이 곧 삼위일체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며, 성모님께 다가가는 것이 곧 하느님나라에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남자인 아담은 제 부모를 떠나 인류와 혼인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마리아와만 온전히 한 몸이 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 분만이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순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없으셨다면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는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누구도 하느님 자신을 받아들일 만큼 순결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는 하느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일치도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당신의 온전한 육체까지도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당연히 성모님은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모델로 삼고 닮아야 할 우리의 참 어머니이십니다.
하늘로 불러올려질 희망 살기 -상지종신부-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이면서 광복절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 공동체 모두에게, 특별히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날입니다. 성모님께서 영광스럽게 하늘로 불러 올라가심을 축하하는 오늘, 우리는 그저 성모님만을 바라보고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하늘로 불러 올려질 것을 간절히 희망하게 됩니다. 사실 오늘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통해 우리를 똑같이 초대하시는 날이며, 주님의 초대에 우리의 삶을 새롭게 맞추어보는 다짐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희망, 즉 하늘로 불려 올려질 것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그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이들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꿈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향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응답을 하는 이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약속이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희망을 산다"라는 말을 합니다. 희망은 먼 곳에 있는 목표가 아니라 우리 삶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희망의 산 증인을 만납니다. 성모 마리아가 그분이시죠. 그런데 이 희망은 주님과 주님의 뜻에 대한 확고한 믿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천사가 예수님의 잉태 사실을 당신께 전하였을 때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응답하심으로서 희망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혼인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낳을 때 돌에 맞아 죽어야만 했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성모님의 이러한 응답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목숨을 내건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했던 응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당신의 생명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신 성모님은 당신의 희망을 "마리아의 노래" 를 통해 아름답게 주님께 봉헌하고 계십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던 이스라엘의 한 여인, 생명까지도 주님께 온전히 내어놓았던 성모님의 희망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대신한 부귀영화가 아니라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들이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무는 것이 바로 성모님의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사회적, 종교적 위계질서가 명확했던 당시에 이러한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보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겼던 성모님의 용기와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담은 희망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하느님에 의해 하늘로 부러 올려진ㄴ 영광으로 실현되었습니다. 하늘로 불러 올려진다는 것은 단지 우리가 죽고 난 후에 일어나는 기적같은 사건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고단한 삶 가운데서 주님과 함께 사는 기쁨을 누리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내려질 주님의 은총을 희망하며 살아갈 때,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바로 이렇게 받아들여짐으로써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늘로 불러 올려지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정과 불의가 만연한 오늘, 자유와 정의와 민주를 외치다 감옥에 갇힌 양심수들은 여전히 묶여있으면서, 부정부패의 주범들은 조건없이 풀려나는 이 시대에 인간적인 기쁨과 희망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삶의 기쁨과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두운 이 세상 한 가운데서에 살아가면서도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만연한 부정과 불의를 거슬러 살아가는 우리를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몸짓을 외면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살아가는 것이 힘이 들고, 주님의 따르는 정의로운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때가 성모님을 떠올려야 할 때입니다. 성모님의 용기있는 응답을 우리의 것으로 되새김해야 할 때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를 우리의 노래로 삼아 힘차게 불러야 할 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그저 믿으라니 믿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에서 루가 복음사가는 잉태사건 이후 마리아가 처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길을 떠나 걸음을 서둘러 즈가리야의 집으로 들어갔다." "걸음을 서둘러"란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마리아의 내적, 심리적인 상태가 얼마나 불안했겠는가에 대해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당시 마리아가 처했던 현실은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한 가냘픈 소녀, 아직 정식으로 결혼도 하지 않은 소녀의 배가 점점 불러온다는 것, 참으로 당혹스런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것에 대해 똑 부러지게 변명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동네 공동 우물가에 모인 아낙네들은 모였다 하면 이 미혼모 마리아를 향해 갖은 상상과 험담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당시 마리아의 하루하 루가 얼마나 고통스런 나날이었겠는지 손에 잡힐 듯 합니다. 이렇게 마리아의 생애는 우리가 여러 상본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처음부터 화려한 왕비의 생활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무정하고 황량한 세계의 사막 한 가운데서 기진맥진하기도 했던 한 시골 처녀가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견뎌내기에 너무도 벅찼던 마리아는 사촌 엘리사벳이 사는 아인카림으로 떠나갑니다. 나자렛으로 부터 걸어서 사흘이나 걸리는 먼 여행이었지만, 점점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마리아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엘리사벳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천사 가브리엘로부터의 언약의 말씀은 들었지만 아무런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듣지 못했던 마리아였기에 늘 긴가민가했었지요. 그런데 엘리사벳의 확증을 통해 마리아는 다시금 힘과 용기를 내게 됩니다. 마리아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됨으로 인해 자신에게 다가올 갖은 고통과 십자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걸었습니다. 하느님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조건도 내걸지 않으십니다. 우리처럼 손익계산이나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일어서라" 하시면 일어섰고, "길을 떠나라" 하시면 길을 떠났습니다. "믿어라"고 하시니 그저 믿었습니다 믿는다는 것 우리가 알다시피 얼마나 어렵고 고된 일입니까? 마리아는 예수 잉태 사건을 통해 믿는다는 것은 일생일대를 건 하나의 투쟁이란 사실을 깨닫습니다. 믿음의 길이란 때로 피가 철철 흐르는 가시밭길을 통과해야 하는 아프고 쓰라린 길이라는 것을 인식해 나갑니다. 마리아에게 있어 혈육으로 예수를 낳기는 쉬웠을 것입니다. 산달이 되어 산고의 진통을 겪고 나면 어려움은 끝입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예수를 낳는데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마리아가 신앙으로 예수를 낳는데는 베들레헴에서 갈바리아에 이르기까지 항상 예수를 품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세월을 통해 마리아의 신앙은 크나큰 비약과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 고통의 세월을 통해 마리아는 어렴풋이 나마 자신을 도구로 이 세상을 구하시려는 하느님의 의도를 파악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쁘게 자신을 희생시킵니다. 보다 큰 일, 하느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내어놓습니다. 여기에 바로 마리아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소박하면서도 충실한 믿음을 배경으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한 끝에 영광스럽게 하느님 나라에 올라가신 마리아를 바라보며 우리의 삶 역시 마리아처럼 하느님에게로 높이 들어올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한 마리 연어처럼 -양승국신부- 모리스 웨스트는 ‘삶’이란 자신의 저서에서 요한 23세 교황님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시성(諡聖)하여 정식으로 교회달력에 실리는 성인(聖人)으로 만들고 싶겠지? 그러나 나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나는 그분의 본모습 그대로, 정다운 분, 단순한 사제, 겸손한 사목자로 언제나 평범한 우리 가운데 남아계시기를 바란다. 그래서 부족한 우리들도 언젠가 그 편안한 교황님을 디딤돌 삼아 구원의 언덕으로 올라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요한 23세 교황님께서 서거하시기 며칠 전 쓰셨던 ‘영혼의 일기’에는 이런 기도가 적혀있었습니다. “오, 주님 제가 물을 담아두지 못하는 ‘깨진 항아리’가 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현세의 좋은 것들을 즐기느라 눈이 멀지 않게 하시고, 가난한 이들, 병자들과 고아들의 절박한 외침이 제 마음을 그냥 지나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분을 잠시라도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요한 23세 교황님은 너무나 파격적인 교황님이셨답니다. 교황님 같지 않은 교황님,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교황님,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교황님, 그래서 그 누구든 부담 없는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는 그런 교황님이셨습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에 너무나 편안했던 요한 23세 교황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모님도 요한 23세 교황님 같은 분이 아니셨을까 생각합니다. 부족한 우리와는 너무나 까마득한 거리감이 있는 위엄과 영광, 성성(聖性)과 광채로 빛나는 그런 모습이기보다 다정다감한 시골 아주머니 같으신 분, 객지를 떠도는 아들 위해 늘 노심초사하시는 어머님 같은 모습을 지니신 분이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깨진 항아리가 되지 않기 위해 한 평생 조심조심 침묵과 기도 속에 살아가셨던 분,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해 언제나 발 벗고 나서셨던 분, 따뜻한 인간미를 평생토록 간직하셨던 소박한 분이셨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어떤 모임에서 한 자매님께서 이런 신앙 체험 나누기를 해주셨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뜹니다. 일어나는 즉시 성모상 앞 초에 불을 붙입니다. 그리고는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한명 한명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한 명당 묵주기도 다섯 단 씩 봉헌합니다. 모두 합해 한 시간 반 이상 걸리지만 정성을 다해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묵주기도를 시작한 후로 자녀들의 얼굴이 그렇게 예뻐 보일수가 없습니다.” 새벽마다 촛불을 켜고 지극정성으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님, 사실 성모님 삶의 전부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처음 받던 날부터 성모님 특유의 ‘트레이드마크’인 ‘순종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남들은 자유를 좋아한다지만 나는 복종이 좋아요.”라고 고백했던 한용운 시인의 시구가 곧 성모님 한 평생 모토가 되었습니다. 보다 큰 뜻, 보다 거룩한 부르심, 보다 숭고한 계획에 복종하기 위해 성모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청춘, 나름대로의 계획, 인간적 욕심, 단란한 결혼생활... 그런 포기와 버림의 과정이 아무런 내적 갈등이나 고민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성모님 내면 안에서는 자기 포기와 자기 극복을 위한 치열한 투쟁이 한 평생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성을 거스르기 위한 투쟁, 마치 한 마리 연어처럼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투쟁, 자기 자신이란 가장 큰 장애물을 넘어서기 위한 목숨 건 투쟁이 성모님 일생 동안 계속되었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는 책제목처럼, 가장 사랑했던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받으셨던 성모님의 상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자신의 삶이 더 이상 자신의 삶이 아님을 파악하셨던 성모님, 때로 실망도 컸을 것입니다. 때로 생의 막다른 골목에 선 기분, 깊이를 알 수도 없는 큰 구덩이에 빠진 느낌도 받으셨을 것입니다. 보다 큰 것에 순종하는 겸손함 없이 얻어지는 참 행복, 참 깨달음, 대자유가 없음을 깨달으셨던 성모님은 마침내 하느님께 깨끗하게 백기를 드셨을 것입니다. 그런 험난한 과정 끝에 성모님의 신앙은 비약적인 성장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상 예수님처럼 온전한 자기증여, 온전한 투신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성모승천대축일은 교회와 전 인류가 그토록 바라던 최종적인 희망이 실현됨을 보여주는 축제일입니다. 성모승천은 인류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모승천대축일을 경축하는 모든 신앙인들은 오늘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실망스럽더라도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좌절이 클수록, 고통이 커질수록, 우리가 나아갈 길이자, 역할모델이신 성모님을 바라봐야할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온전히 아들 예수님께로만 향했던 성모님, 당신의 그 온전한 투신, 그 순수한 신뢰, 그 앞뒤재지 않는 믿음을 오늘 이토록 나약한 우리, 그래서 늘 흔들리는 우리에게 주시길 간청합니다.
어머니
-임문철 신부- 저희 어머니는 사제관에 좀처럼 오시질 않으십니다. 오시더라도 잠시 얼굴만 보고 그냥 가십니다. 행여나 아들 신부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늘 조심하시지요.
`알마` 의 승천 -전의이 수녀- 천대받고 버려진 이방인의 땅 갈릴래아, 나자렛 시골 마을의 처녀인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튼4?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소식을 전한다.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한다.
성모승천대축일 -홍승모 신부- 오늘 우리는 성모 승천 대축일 복음으로 ‘마리아의 노래’를 듣습니다. 라틴어로 마니피캇(Magnificat)이라 불리는 ‘마리아의 노래’는 구원의 역사를 요약해 놓은 찬미가입니다. 교회는 전례적으로 저녁 기도에 이 ‘마리아의 노래’를 바치고 있습니다.
- 홍금표 신부- 오늘은 성모님이 지상 생애를 마친 후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영광으로 올려짐을 기념하는 승천 대축일입니다. 이 교리는 일찍부터 교회의 전승으로 받아들여지다가 1950년 믿을 교리로 선포된 교리입니다.
-유영봉 몬시뇰- 묵상 길잡이
새벽을 열며 제가 어렸을 때, 명절 때만 되면 저희 집에는 많은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들이 때로는 선물도 들고 오셨는데, 그 선물 중에서 최고의 선물은 바로 ‘종합선물과자세트’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만 해도 과자가 귀한 시절이었고, 그래서 먹고 싶은 과자도 얼마나 많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종합선물과자세트에는 과자뿐만 아니라, 사탕, 영양갱, 젤리, 껌 등……. 그리고 운이 좋을 때에는 조그마한 장난감까지 이 선물세트 안에 들어있었으니, 이 선물세트가 들어오길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따라서 종합선물과자세트를 가지고 오시는 손님이 너무나 멋지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었었지요. 빠다킹신부 광복절의 어머니 -김광태 신부- 1945년 8월 15일. 아버지와 삼촌들은 징용에 끌려갔고, 어머니 혼자 눈먼 할아버지를 모시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일본 사람들이 탈탈 털어가고, 대신 건네주는 콩 몇 되 받아서 겨우 연명하던 처지였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김흥주 신부- ◆오늘은 우리 신앙과 구원의 모델이시며 희망이신 마리아께서 하늘로 들어높임을 받으신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 마리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서도 드러나기를 간절히 희망하면서 어머니 마리아의 승천을 경축하는 것이다.
성모 승천 대축일
- 김정호 신부- 그러다 보니 성모님은 우리 평범한 인간이 하나도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혼자만 다 누린 분이고, 그래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신 분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기회에 성모님의 삶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도록 그분이 받으신 특권이라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봅시다. 다시 말해서 성모님의 생애를 다른 눈으로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아퀴나스의 토마스 성인께서는 인간의 삶을 두 가지의 말마디로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는 ‘나옴’(exitus)라는 말마디이고 또 하나는 ‘되돌아감’(redditus)라는 말마디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창조를 통해 이 세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는 장차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감으로써 한 개인의 역사를 끝냅니다. 즉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다, 하느님께로 되돌아갑니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성모님의 삶도 바로 이러한 인생 여정 중의 하나입니다. 즉 성모님의 삶은 모든 인간이 걸어가게 되어 있는 길이고, 그 길을 미리 앞서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성모님에게 베푸신 것들은 장차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즉 인류 전체에게 주실 은총을 미리 맛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인류의 삶이 장차 완성될 모습을 성모님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은 특권을 통해서 혼자만 배타적으로 누린 삶이 아니라, 우리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될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삶인 것입니다. 굳이 특권이라고 하자면 성모님께서 그것을 제일 먼저 받았다는 것이지, 우리는 전혀 받을 수 없는 것을 혼자만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하늘로 올림을 받으신 것도 오로지 성모님에게만 허용된 은총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도 장차 주어질 은총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 이 축제를 지내면서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비극적인 시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서 받으신 영광이 우리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전제 조건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하려는 자세,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태도 그 자체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런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이 말한 것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진정으로 믿고 주님께 의탁하고 그대로 따르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루카 1, 45 참조). 성모승천대축일은 바로 우리 인류 전체가 완전하게 되는 마지막 날의 모습을 마음속에 새겨주는 축제입니다. 우리가 올바로 알아듣든 그릇되게 알아듣든 간에, 우리 인류에게는 하느님에 의해 들어 올려지는 새로운 역사가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에 따라 지어내신 최대의 걸작품인 우리 인간이 멸망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결코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인류의 삶을 평가함에 있어서, 괜히 우리 자신이 인간적인 기준만 갖고 지나치게 냉혹하게 평가하고 심판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냉혹한 심판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여정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모님의 삶을 바라보면서, 믿음이 약한 모든 사람들에게, 걱정에 가득 싸인 모든 사람들에게, 나약해진 모든 사람들에게, 슬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로운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의 쓴맛을 본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어떤 것인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모 승천 대 축일. - 서공석 신부 - 우리 희망의 표지인 성모 승천 † 나의 마니피캇 -박상대 신부- -유 광수신부 -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에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 안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오늘 복음을 보면 기쁨이 약동하는 것을 느낀다. 인사를 하는 사람이나 인사를 받는 사람이나 모두가 기쁨의 소리를 전하고 기쁜 말로 응답한다. 그 기쁨이 점점 더 커져서 마리아는 마침내 기쁨에 찬 노래를 불렀다. 서로가 칭찬하는 말이요, 상대방에게 듣기 좋은 말이요, 하느님이 이루신 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남이 들을 때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들이지만 그들은 서로 말이 통하고 또 그 말을 상대방이 이해해주고 받아주니까 더욱 신이 나서 이야기가 이어지고 나중에는 노래까지 부르게 된다. 이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들은 모두가 영적인 이야기로서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며 하느님이 자기들 안에서 이루신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루가 복음은 이렇게 다른 복음과는 달리 기쁨을 전해주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 기쁨이 점점 더 커나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모든 복음이 다 기쁨을 전해 주는 복음서이지만 특별히 루까 복음은 복음을 통해서 기쁘게 사는 이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기쁨의 원천인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그로 인해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 즈카리야의 노래를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환호하는 천사들과 목자들의 기쁨을 전해주고 있다. 즉 기쁨의 메아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다. 복음 선포의 대표적인 모델이 마리아에게서 찾아 볼 수 있겠다. 우리는 여기에서 마리아의 영혼이 어떻게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 나의 영혼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내 마음이"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영혼과 마음은 주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하는 주체이다. 마리아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는 늘 주님을 찬양하고 있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리아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이라는 것이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마리아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주어가 나에서 주님으로 바뀐다. 즉 이제부터 마리아에게 역사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마리아가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신 일들이 너무나 놀랍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마리아 자신에게 이토록 큰 일들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주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그 이유를 밝히신다. 그래서 마리아의 노래는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오직 주님을 찬양하고 구원자 하느님을 즐거워한다는 것 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해 주신 놀라운 일들을 열거한 것이다. 우리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려면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놀라운 일들을 발견할 때 가능하다. 즉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 볼 수 있을 때 우리의 영혼도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찬양할 수밖에 없고 즐거워 할 수밖에 없다. 놀라운 선물을 받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오래 전에 모 수녀원에서 년피정을 지도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날 마리아의 노래에 대해서 강의를 한 후 수녀님들에게 각자 자기의 마니피깟을 써서 찬미가를 불러 보자고 하였다. 수녀님들은 자기 안에서 이루신 주님의 놀라운 이들을 적어 한 사람씩 자신의 마니피깟을 불렀다. 정말 아름다웠다. 정말 수녀님들의 영혼은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하였다. 우리의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해 주신 놀라운 일들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영혼이 놀라운 일이 없는데 찬양하겠는가?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왜 나의 구원자이신지를 알지 못하는데 그리고 나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데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기쁨과 찬양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놀라운 것을 체험하였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청자 항아리군! 꽤 오래된 골동품이네요. 값이 제법 나가겠는데요?”
두 번째 사람은 항아리의 뚜껑을 열어서 속을 들여다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또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맛도 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술이 담겨 있는 청자 항아리입니다.”
누가 더 그 항아리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야기했을까요? 당연히 두 번째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두 번째 사람의 모습보다는 첫 번째 사람과 같이 겉모습만 보고서 판단하고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 방법이 훨씬 쉬우니까요.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속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앞서 항아리를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뚜껑을 열어 냄새도 맡아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맛도 보는 수고로움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수고로움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고로움을 너무나도 싫어하는 우리들입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 그렇지요. 저 사람의 또 다른 모습은 보는 수고로움은 생략한 채 그냥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님의 자리는 사라지고 맙니다.
수고로움이 없는 행동은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경직되게 만들어 아무것도 못하게 만듭니다. 제가 학창 시절에는 운동을 꽤 한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축구, 야구, 농구, 족구, 탁구……. 어느 것 하나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지요. 그런데 지난 본당 캠프 때 편을 갈라서 축구를 하면서 ‘예전의 날렵했던 나는 어디 갔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을 발에 제대로 맞출 수가 없는 것은 물론 조금만 뛰었는데도 숨이 목까지 차오르면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신부가 된 후 축구를 한 적이 거의 없었고 그래서 이렇게 몸이 굳어 버린 것이지요.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랑의 노력도 하지 않으면 이렇게 딱딱하게 굳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약간의 수고로움은 경직된 나를 부드럽게 해주는 것은 물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의 실천을 할 수 있는 원천이 됩니다. 그 결과 이 세상 곳곳에 계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성모님을 떠올려 봅니다. 성모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수고로움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잉태했음에도 불구하고 편한 길로 가려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세상의 영광보다는 고통과 시련이 가득한 수고로움의 연속인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가 기념하듯 영광의 자리에 오르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내 앞에 놓인 수고로움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수고로움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 길을 힘차게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을 이 세상에 뿌리 내리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뿌리 내릴 때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영광의 자리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큰 소리로 응원하며 선수들에게 힘을 주는 응원팀입니다. 이들은 비록 선수처럼
공을 차지는 않지만, 경기장 밖에서 어느 선수 못지않게 함께 땀 흘리며
선수들과 호흡합니다. 혹시라도 선수가 실수할 때면 “괜찮아! 괜찮아!”라고
크게 외치며 위로하고, 골이 들어가게 되면 마치 자기들이 직접 차 넣은 것처럼
기뻐 뛰며 눈물까지 흘립니다. 누가 우리의 붉은 악마를 두고
“너희들은 직접 뛰는 선수가 아니니 축구하는 자리에 함께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12번째 선수”로서 우리나라의 승리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성모님에게 “직접 복음을 전한
사도가 아니니 공경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보아라, 너의 어머니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9,27).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함께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시면서 그들을 응원했던 분, 사도들의 어머니 성모님 없이
어찌 복음전파를 이야기하겠습니까.
사실 천사가 찾아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그 순간부터 성모님의 삶은 뒤흔들렸을 것이고, 무죄하게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받아 안으신 때까지 그 고통은 이어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성모님의 고통이 예수님의 삶과 결부되어 있다면, 성모님의 행복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복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믿음에 있었듯이, 성모님도 역시 당신 삶 안에 이해할 수 없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순간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믿으셨기에 행복하셨던 것입니다.
그 행복을 완성하고 확인해 주는 순간이 성모 승천의 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캄캄한 밤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도 믿음을 가지고 어둠 속으로 발길을 내디디셨던 성모님의 삶이 무의미하거나 부조리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그분 삶의 마지막 순간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모님은 수난하고 죽으신 다음 부활하셨던 예수님의 길에 끝까지 동참하십니다.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삶 안에서 불행하게 보이는 순간도, 우리가 길을 벗어나 방황하거나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받아들이기가 고통스러운 순간까지도 ‘전능하신 분이 큰일을 해주시는’순간임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도 하늘나라의 기쁨에 참여할 날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부가 되면 마음 고생이 끝나나 했더니, 신부가 되고 나니 더 바늘방석이라고
하는 다른 신부님 어머니의 말씀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뵈면
불효자가 된 것 같아 늘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어느 날 그런 어머니가 제게
조심스레 부탁을 하셨습니다. “아무개 자매에게 고맙다고 인사 좀 해라.”
“아니, 왜요?” “그 자매가 이번에 큰 거 하나 들었는데, 그거 다 너 보고 한 거지, 나 보고 한 거냐?” 당시 저의 어머니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보험회사를
다니고 계셨는데, 그걸 안 어느 자매가 어머니에게 큰 보험 하나를 가입한
모양이었습니다. 아버님이 편찮으셨을 때, 어머니는 “누가 문안 왔더라.
누가 무얼 갖고 왔다” 하고 제게 일일이 보고를 하셨습니다. 다 저를 보고
한 것이니 제가 갚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관에 값비싼 선물을 놓고 간 분보다도 어머니에게 잘해드린 분이 더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오로지 아들 예수만을 마음에 품고 사셨던 성모님께서
이제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시듯, 우리 어머니께도 호강 한번
시켜드려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리아는 그 응답으로 이 세상에서 죽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문을, 아담의 죄로 닫혀버린 에덴동산의 문을 열어주신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한 새로운 하와 마리아의 응답으로 가능해진다.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 위해 비워진 그릇을 하느님께서는 성령으로 감싸 안으신다. 하느님께서 간택하신 마리아는 ‘동정녀’로, 히브리말로는 ‘알마(hml[)’이다. 이 단어가 이사야서 7장 14절에서는 아하즈 왕의 부인을 지칭하는데, 그녀를 통해 하느님 뜻에 충실한 왕자가 태어날 것을 예고하였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부분을 인용하여 동정녀 마리아한테서 구약의 성취인 메시아가 탄생한다고 예고하였다(1,23). 마리아는 진정 하느님께서 간택하신 ‘알마’이다. 오로지 하느님만을 위해 비워지고 바쳐진, 오직 하느님만을 담기를 열망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잉태한 알마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인사를 받았을 때 즉시 구약성경 안에 계시된 말씀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메시아의 오심을 통해 자신 안에서 시작될 구원 역사를 찬양하였다.
그녀는 이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주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당신을 맞아들이는 이들, 곧 당신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주셨다. 그러나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욕에서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이제 우리도 마리아처럼 말씀을 잉태할 ‘알마’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거처하실 때’ 가능하다. ‘알마’가 된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서 하늘나라로 불러올리신다. 구약의 에녹이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고, 새로운 시대의 관문인 아버지께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님이 그러셨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올라 천상 모후의 관을 쓰신 우리의 어머니가 그러셨고, 또 예수님을 쫓아 알마가 된 사도들이 그랬고, 이제 하느님의 알마가 되기를 갈망하는 우리들도 그렇게 하늘나라로 올라갈 것이다.
‘마리아의 노래’ 첫째 부분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에 대한 마리아의 개인적 감사의 노래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루가 46-50절). 여기에는 하느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를 열거합니다(루가 48-49절). 둘째 부분은 하느님께서 마리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이 하느님 백성 전체에 미치고 있다는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루가 51-56절).
마리아의 노래’에서 묵상할 것 중에 하나는, 마리아께서 깨달은 하느님을 향한 새로운 시각입니다. 새로운 시각이란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분으로만 여겨, 우리 인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하느님께서 비천한 여종인 당신 자녀의 처지를 결코 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루가 1,48-49).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마음이 교만한 사람이 아닌 겸손한 사람에게만 해당합니다(루가 1,51). 우리가 마리아에게 배워야 할 신앙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천하고 낮은 사람으로 처신한 것입니다(루가 1,48). 그러나 교만은 자기 자신의 실제 모습을 외면하게 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마음의 눈을 가리게 합니다. 교만은 자신의 실상을 허황되게 평가하고 진실에 눈멀게 합니다. 그래서 오직 자기 자신의 생각과 결정과 행동만이 옳고, 남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증오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겸손한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새로운 마음의 눈을 떠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섬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스스로 낮추어 하느님의 권능에 복종하십시오. 때가 이르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을 돌보십니다”(1베드 5,5-7).
이 교리가 교회의 전승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신앙적 이유 때문입니다. 교회는 뛰어난 덕행으로 하늘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공적으로 인정한 사람들을 성인이라 표현하는데 성모님은 성인들 중의 으뜸 성인이요 신앙의 모범입니다. 때문에 성모님이 하늘나라에 계시다는 사실은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고, 승천이란 이러한 성모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극적인 표현입니다.
그러기에 성모승천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는 교훈을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희망입니다. 인간의 몸을 지니신 성모님께서 하늘로 올림을 받았기에 우리도 하늘로 오를 수 있다는 표시요, 성모님처럼 우리도 하늘(구원)로 올림을 받을 수 있도록 성모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호소가 바로 이 사건의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성모승천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묵묵히 이겨나가신 성모님의 모습을 우리 삶속에서 본받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축일을 지내면서 오늘 복음과 연결하여 필자가 묵상하고자 하는 바는 신앙의 성장 과정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기에 성모님은 처음부터 완성된 신앙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사람이라 생각하며 그분께 교훈을 얻기 보다는 부러워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성모님의 신앙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의 신앙이 아니라 갖가지 장애와 혼란을 극복하고 완성으로 나아간 신앙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 일면을 복음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건과 성모님의 노래로써 이 두 부분은 서로 상반되는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건. 많은 이들은 엘리사벳 방문 사건을 엘리사벳을 도와주기 위한 방문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만 성서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아닙니다.
성서가 마리아의 선행을 강조하고자 했다면 마리아의 도움이 가장 필요할 때, 즉,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은 후에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도와주었어야 했는데 마리아는 아기를 낳기 직전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임신 후 여섯달이 되던 때 방문하여 세달을 머물다가 출산이 임박할 때 나자렛으로 돌아갑니다. 도와줌이 목적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인데 말입니다. 이 사실은 방문의 목적이 출산을 돕기 위함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방문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마리아에게 있어 엘리사벳의 잉태가 갖는 의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잉태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준 상징입니다. 자신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처녀로서 임신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이를 못 낳는 늙은 여인 엘리사벳의 임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혼란스러운 마음, 흔들리는 신앙에 대한 증거를 찾고자 함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라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응답을 했음에도 마리아는 연약한 처녀였기에 양가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이 혼란스러운 마음에 해답을 얻고자 함이 바로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리아의 신앙은 후반부에서는 극적으로 변화됩니다. 마리아의 노래(46절 이하부분)에 나타나는 마음입니다. 이 노래는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찬미가요 감사가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양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증거를 찾고자 하는 우리의 보통 마음과 같던 마리아의 신앙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성숙한 신앙으로 변화되는데 성서는 이러한 극적인 반전에 가장 큰 역할을 엘리사벳 성녀의 마리아에 대한 찬양과 축복의 말에서 찾고 있습니다. (1, 42~46 참조).
지면상 서둘러 결론을 내려 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질 수밖에 없는 혼란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혼란이 나쁜 것이긴 해도 성모님처럼 답을 얻고자 한다면 혼란은 또 다른 성숙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기억해야 할 점은 우리가 마리아의 신앙을 변화시킨 또 하나의 엘리사벳이 됨으로써 혼란을 겪고 있는 이 시대의 작은 마리아들이 위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변화하도록 칭찬과 격려, 축복의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축일은 지상생활을 마치신 성모님께서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늘나라로 들려 높여졌음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4세기 이후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이 성모님의 죽음과 승천 축일로 받아들여졌으며, 7세기경에 서방교회에 전해졌고, 8세기에 8월 15일로 확정되었다.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교회의 오랜 전통으로 믿어오던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성모님의 승천은 모든 이의 희망의 징표이며, 마지막 날의 완성을 미리 보여준다고 하겠다. 오늘은 성모님의 축일 가운데 가장 큰 축일이다.
1.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함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가 어떤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했다고 하면 갑자기 교회가 그런 교리를 만들어 법을 선포하듯이 발표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교리를 교회의 권위로 공적으로 확인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성모 승천 교리도 마찬가지이다.
비오 12세 교황은 이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면서 ‘사도 성 바오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의 믿음과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제르마누스’ 등 수많은 교부들의 한결같은 믿음의 증거를 제시하였다. 말하자면 교회가 사도시대부터 교부들과 함께 믿어왔던 교리를 교황이 교회의 권위로서 공적으로 확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모님의 승천은 그 믿음의 결과이다
성모 승천은 성모님께서 무덤의 부패를 겪지 않으시고 영혼과 육신이 함께 승천하셨음을 고백하는 교리이다. 그러면 교회는 왜 이 교리를 주저 없이 받아들였던가? 한마디로 성모님의 승천은, 세상 종말 곧 세상이 완성될 때에 모든 신앙인이 누리게 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그 영원한 세계를 성모님께서 가장 먼저 누리게 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세상 종말의 본질은 흔히 생각하듯이 비극적인 파멸이나 재난이 아니라, 그 재난을 겪어낸 정화된 이들이 누릴 세상의 완성이 그 핵심이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해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 하고 말한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하시며,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인데도 주님께 당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맡기시고 전적인 신뢰를 드렸던 것이다. 마리아의 하느님께 대한 그 믿음은 변함이 없으셨다.
아들 예수님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었을 때에도, 아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고, 급기야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려 비참하게 죽게 되었을 때에도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계획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신 채 묵묵히 따르신 것이다. 참으로 마리아는 믿는 이들의 모범이셨다.
3. 마리아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가장 깊이 동참하신 분이시다
얼마 전에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이라는 영화가 화제가 되었다. 예수님의 수난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오랜 신앙생활을 한 신자들도 그 영화를 보고 예수님의 수난이 얼마나 혹독한 고통이었는지를 다시 깨달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다음에도 성모님의 고통은 끝없이 밀려왔음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흔히 우리는 “아들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부모는 그 아들을 자기 가슴에 묻는다.” 하고 말한다. 마리아야말로 십자가 아래서 사형수로서 가장 수치스럽고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는 아들을 바라보셔야만 했다. 유명한 ‘피에타 상’은 십자가에서 내린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으신 마리아의 모습이다.
성모님의 가슴은 갈가리 찢기듯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 생각해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보다 더 혹독한 고통을 겪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고통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심으로써 끝이 났다고 할 수 있지만 마리아의 고통은 그때부터 더욱 크게 밀려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박해받는 사도들과 함께 지내신 성모님은 그 뒤에도 줄곧 쫓기는 사도들과 함께하셔야만 했다. 이렇게 성모님의 생애는 참으로 고통으로 점철된 일생이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성모님보다 주님의 수난에 더 깊이 동참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믿는 이의 모범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가장 깊이 동참하신 마리아께서 예수님의 구원 공로를 가장 먼저 입고, 그분의 부활의 영광을 가장 먼저 체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앞서가신 분이며, 우리의 희망을 놀랍게 실현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모범이며 선구자이시기에, 성모님의 승천은 단순히 마리아 개인의 영광이라기보다 마리아처럼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기쁨이며 희망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교회는 마리아에게 ‘교회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렇다. 마리아는 하느님 백성(곧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백성이 가야 할 길을 당신 친히 먼저 가시고 또 우리도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전구해 주시고 돌보아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날마다 그분의 믿음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면 마리아께서 승천하셔서 누리고 있는 그 영광에 반드시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종합선물과자세트의 포장을 뜯은 뒤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큰 종합선물박스인데, 그 안에 들은 내용물은 생각보다 너무나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과자는 그렇게 많지도 않았습니다. 절대로 돈 주고 사먹지 않는 과자가 그 종합선물세트 안에 들어있으니 실망도 컸지요.
어쩌면 우리들은 이런 종합선물과자세트만을 추구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겉은 크고 화려해 보이지만 풀어 놓으면 별 것도 아닌데, 그렇게 겉으로만 그럴싸한 삶이 최고라는 어리석은 생각만 가졌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히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과자 한 봉지에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얻는 것처럼, 비록 겉으로는 초라하고 작아 보이지만 그것이 나를 이 세상에서 살게 하는 커다란 버팀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종합선물과자세트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단번에 겉만 크고 화려한 인생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번에 주어진 인생이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줄까요? 오히려 더 큰 실망감으로 인해서 힘들지 않을까요?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바로 주님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하느님에게서 받으신 영광을 찬미하는 날입니다. 이런 성모님이 부럽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 승천까지 하셨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이러한 영광이 단 한 번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예수님의 죽음 때까지 성모님께서는 엄청난 고통을 당신의 가슴으로 안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모든 고통과 시련 끝에 성모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성모님의 삶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면서, 성모님과 같은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던져 봅니다. 그리고도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순간에도 성모님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찬양과 기쁨의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종합선물세트를 받을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질 것입니다.
헛농사 짓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왕성하게 자라는 피를 놓아둘 수가 없어서,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논에 나가 허기를 참으며 일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한낮의 열기에 지쳐갈 무렵, 동네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오며 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중 잘 알던 사람 하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소화(昭和, 당시 일본 천황)가 항복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얼떨결에 한 말씀. “워메, 그럼 이 쌀은 다 누가 가져간디야.” “가져가긴 누가 가져가. 다 당신네 거지.” 그것도 모르느냐는 투의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어렸을 적에 너무 자주 들어 그 전말을 아예 외우게 된 나의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권세에 짓눌리고, 굶주리면서 비참하게 살던 성경 속 이스라엘의 모습이 일제 하의 처지와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처지가 그랬기에 성모님의 노래 역시 현실을 도외시한 채 서정적인 분위기로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체험하면서 억압당하는 백성과 함께 해원(解寃)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생각하면 꼭 광복절의 우리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이렇게 칭송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았을 때부터 마리아는 하느님의 엄청난 계획과 약속이 미천하기 그지없는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이렇게 마리아는 오로지 주님께서 우리 인류에 대한 당신 구원 계획을 실현하실 수 있도록 철저한 믿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셨기에 하늘에 올림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부른 ‘마리아의 노래’에서 스스로를 “주님의 비천한 종”이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선택된 삶이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지금 자기 영혼이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을 설레는 마음으로 노래하면서 우리를 그 기쁨에 초대하고 있다. 마리아의 노래처럼 이 세상에서 정말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 섭리에 온 삶을 의탁하는 믿음을 지니며,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마리아의 행복, 그것은 하느님의 뜻과 부르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은총인 것이다.
따라서 성모 승천 대축일은 우리에게도 커다란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는 날이다. 하느님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자라 할지라도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큰 능력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도구로 쓰시어 영광을 주신다는 사실을 성모 승천을 통해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남의 삶을 두고 평가할 때, 끊임없이 고생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는 불행하다고 말하고, 삶이 언제나 밝은 앞날을 바라보고 있다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공경하며 축하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삶을 평가하자면 아마도 두 번째의 경우처럼 아주 행복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우리가 갖지 못한 특권을 많이 누리셨기 때문입니다. 우선 태어날 때부터 원죄에 물듦이 없으셨습니다. 또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경축하는 바와 같이 하늘로 올림까지 받으셨습니다.
나자렛 산골에서 자라난 한 순박한 처녀. 그 안에 기뻐 춤출 수 있는 창조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 춤은 하늘나라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고, 그것이 성모님에게 전해진 것이고, 장차 영원한 천상 잔치에서 우리가 추게 될 춤입니다. (*)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듯이 성모님도 그 생애의 종말에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승천은 우주가 세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믿던 시대에 사용되던 낱말입니다. 과거에는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 우리가 사는 땅, 죽은 이들이 가는 지하 어둠의 나라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주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모 승천 축일을 성모님이 그 생애 종말에 하느님에게 가셨다는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믿음을 기억하는 축일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 후 하느님 안에 살아계시듯이, 성모님도 죽음 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내는 ‘성모승천 대축일’은 주님성탄, 주님부활, 성령강림 대축일과 더불어 교회의 4대 의무 대축일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성모승천 대축일이 이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다른 세 가지 대축일과는 달리 많은 신자들에게 조금은 멀리, 그리고 낯설게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두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는 전자의 3대축일이 하느님 예수와 성령에 관한 대축일인 반면에 오늘의 대축일은 우리와 같은 인간 마리아에 관한 대축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모승천 대축일’을 정확히 표현하여 ‘성모몽소승천 대축일’이라고 한다. ‘성모몽소승천’이란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신 후 그 육신과 영혼이 마리아의 자력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하늘에 올려짐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주님성탄, 주님부활, 성령강림 대축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세상에 펼치신 인류구원사건인데 비하여 성모승천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 마리아에게 베푸신 최고의 은총을 기념하는 사건이다.
둘째는 오늘의 대축일이 3대 대축일과는 달리 성서상의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의 죽음이나 승천에 관한 기록은 성서(聖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거룩한 전통인 성전(聖傳)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마리아에 관한 축일은 동방교회에서부터 시작되는데, 4세기 중엽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을 제정하여 마리아의 죽음과 승천을 기념하였다. 이를 본받아 서방교회에서도 7세기초 로마의 황제 마우리씨오(582-602)가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을 8월 15일로 정하였다고 한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강림 후에 성모 마리아는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의 에페소 지방에서 요한 사도와 다른 몇몇 사도들과 함께 사시면서, 그곳의 신자들에게 당신 아들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날이 덕행과 믿음에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셨다고 한다. 당시 마리아의 소망은 단 한가지로서, 천국에서 당신 아들 예수를 다시 뵙는 것이었다.
성모 마리아는 15년 동안 이곳에서 사시다가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마리아가 임종할 그 때에 공교롭게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와 같이 토마 사도를 뺀 다른 모든 사도들이 모여 마리아의 임종을 지켜보았고, 돌아가신 후 무덤에 안치했다고 한다. 3일이 지난 후 마리아의 임종 소식을 들은 토마 사도가 급히 돌아와서, 성모 마리아께 마지막 인사라도 드려야한다면서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다른 사도들과 함께 무덤을 다시 열어 보았더니 마리아의 유해는 온데 간데 없었고 수의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목격한 사도들은 마리아께서 돌아 가신지 3일 만에 부활하여 당신 아드님처럼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을 믿고, 이러한 영광을 마리아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이를 선포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성모몽소승천은 초대 교회 때부터 사도들과 교부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믿어 왔던 은혜로운 신앙 조목으로서, 여러 차례 성모님의 발현과, 레지오마리에의 창설과 더불어 성모께 대한 공경과 신심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해온 것이다.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힘입어 ‘성모 무염시태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이는 천주의 어머니이시며 동정녀이신 마리아가 그의 양친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잉태되는 그 순간에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온 신자들이 믿어야할 교리로 선포한 것이다.
나아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가장 풍요로우신 하느님’이라는 사도헌장을 반포하여, 마리아가 죽은 후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는 교리를 믿어야할 신앙 교의로 선포하고 전통에 따라 8월 15일을 성모몽소승천 대축일로 정하였다. 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께서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 원죄의 결과가 가져다주는 죽음에 예속되지 아니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로써 전세계의 교회는 나자렛의 마리아가 하느님의 특은으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함께 나누고 있음을 경축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마리아 보다 앞서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업적, 그리고 공로로써 부활 승천하셨지만, 마리아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의하여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시는 은혜를 받으신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부활과 승천은 마리아의 개인적인 영광일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인간이 미구에 받게 될 부활과 승천의 원형이며 모델로서, 우리에게 약속된 영광이며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오늘 우리가 기뻐하며 기념하는 대축일의 크나큰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낱 인간인 마리아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틀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광이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최대의 영광과 은총은 마리아 편에서 볼 때 거저 주어진 것이지만, 하느님 편에서 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마리아의 굳건한 믿음과 겸손이다. 인간의 눈에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동정녀의 잉태였을망정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전적인 신뢰와 온전한 믿음을 걸었던 마리아의 태도가 구세주의 탄생을 가능케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구원 사업에 지대한 협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찬미를 받는다. 엘리사벳의 찬미에 이어서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를 노래하는 마리아의 ‘마니피캇’에서 우리는 그분의 지극한 겸손을 알 수 있다. 주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어 기뻐했던 마리아의 겸손, 자기에게 주어진 온갖 영광과 은총을 다시금 주 하느님께 돌리면서 모든 것이 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이라고 말하시는 마리아의 겸손, 이는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할 덕행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생활 속에서 나의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기뻐 설레어지는가? 우리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와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다시금 돌려 드리면서, 내가 하는 모든 일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그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대답이 ‘그렇습니다’ 라면, 우리도 틀림없이 성모 마리아 곁에 성큼 다가서 있을 것이며, 마리아의 마니피캇이 바로 우리의 마니피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광복절을 함께 경축하면서........◆
특별히 처음 두 장에서 잘 나타난다. 즈카리야의 노래, 마리아의 노래, 시므온의 노래, 베틀레헴 동굴에서 울려퍼진 천사의 노래는 드디어 예수님께서 등장하심으로써 구원이 도래한 사건을 노래하는 환희와 찬미와 감사의 표현들이다. 루가 복음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사도들이 성전으로 돌아와 자기 눈으로 보아 온 바를 두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는 장면에서 끝을 맺는다. 따라서 루가 복음의 특성은 교회내에서 복음선포의 직무와 봉사와 직책을 수행하는 선교사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이런 질문에 해답을 주는 복음서이다. 즉 우리가 체험한 예수님을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전할 것인가를 교육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엘리사벳의 인사를 받고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한다."고 노래불렀다. 복음 선포자의 영혼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찬양하는 영혼이어야 한다. 그리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자이어야 한다.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영혼은 참으로 복된 영혼이고 아름다운 영혼이다. 그리고 건강한 영혼이요, 구원된 영혼이다. 지금 나의 영혼의 상태는 어떠한가?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가?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는가? 나의 영혼도 주님을 찬양하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그런 영혼이 될 수 있을까? 그 비결이 무엇일까?
하느님이 마리아에게 큰 일을 하셨다면 나에게도 분명 큰 일을 하셨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한 것이지 주님께서 이루신 일들이 없기 때문에 발견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나의 마니피깟을 만들어서 주님께 불러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