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범들 | 이가을
산 아래 공원에는
전향을 거부하는 가을 낙엽들
돌 밑 은거 중인 사상범들을 끌어내 싹쓸이 소탕작전 중인
우빨 청소부의 싹쓸이 빗자루에 쓸려가는 중입니다
낙엽들 버둥거릴수록 몸 부서지지만
빛나던 사상과 열정 조소를 먹고
쓰레기가 돼 버린 청춘의 그 시절 다해
한때 열렬한 환호와 러브 로망과
누군가의 책갈피에서
추억의 견인차였던 때 있지요
청소차 분쇄기에서 사라져가는 것들
아름다운 시절을 뒤로 한 것이 낙엽뿐일까요?
구름도 바람도 그 시절 동거동락했다지만
배신에 밥 말아 먹던
변절자를 보는 일은 흔한 일,
햇빛 속 푸른 잎들 바람에 거닐던 산책
골목길 푸른 낭만이던 것을 그리워할 밖에요
피도 눈물도 없는 붉은 사상에 물들었다 해서
불려온 낙엽들
바람 감옥에 수거 중이랍니다
나치 신당의 앞잡이가 돼서 어제의 동지 채찍 들고 윽박지르는데
그렇다고 마음까지 염색할 수 있나요
그 푸르디 푸른 봄의 계절
꿈꾸는 청춘은 혈기 불굴의 의지로
시간을 엎어보리라는 분기가 붉었지요
붉은 마법을 걸어보자고 리얼리스트
사막의 여름을 지나 낙타의 귀를 잡고 걷던
뜨거운 사막이란 방울뱀 종소리가 들리고
불쑥 전갈이 올려다보는,
내 젊음 그런 것
체 게바라의 피가 혈관을 타고 뜨거워
가을이 오고 쓸쓸함이 넘치네 바닥 인생을 전전하며
삶의 희망이란 말은 거짓말, 비루하기만 해요
분계선을 넘어 난민 행렬 속에
푸르니 붉은 분자가 있을 겁니다
완장찬 초록분자들 호각 소리 삐익삑-대고 줄 맞추지만
세상이 바뀌는 시간의 순환
공중에 던진 동전의 한 면 어디에 닿을지 모르는 일이죠
건너오는 은자의 말, 햇빛 너머 듣지요
잘가라 인생! ㅣ 이가을
천둥소리 하늘 흔들자
놀란 숲 비바람에 나무들 내주었다
생은 뜬금없고 소낙비처럼 급작스러워
좁은 마당가 화단에서 꽃피던 나무가 우듬지를 꺾었다
햇빛, 부고알림장처럼 잠깐 다녀갔다
눈 충혈된 나뭇잎이 밤새 떨더니 수족관에서 물고기가 죽어 있다
죽은 물고기는 돌아누운 느낌표다
한눈팔던 잠간에도 이처럼 죽음이 가깝다니
시간이 멈추고 굵게 내리는 저녁비에 무릎을 내주었다
눈 꼭 감고 얼굴도 내주었다 사납게 나를 다그친다
애비가 가고 형이 가고 누이가 먼저 간 그 길에서
죽은 그가 벌떡 일어나 독주를 들이켠다
울지 말아요
말이 독주처럼 쓰고 빈 잔에 눈물이 일렁인다
혀 끝 쓰다 빌어먹을 !
적요, 어둠 속 노란 조등을 목울음 흔든다
어깨에서 점점 거세지는 빗발들 뚝뚝 끊기다가 격렬해진다
그가 내 안에서 불탄다
잘가라 인생!
이가을
1998년《현대시학》등단.
시집으로『저기 꽃이 걸어간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