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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길”
□ 히브리13:1-6 □
박경미(이화여자대학교・신약학)
1. 들어가는 말: 히브리서의 문학적 특성과 수신자들, 저술의도
통념상 히브리서는 편지로 분류되어 왔고, 전통적으로 바울이 보낸 편지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신약성서 안에서 바울서신들과 함께 배치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히브리서를 바울이 쓴 편지라고 보는 학자는 거의 없다. 히브리서에는 편지형식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서두 인사말도 없고, 단지 말미에(13,22-25) 나오는 인사말만이 편지 형식의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히브리서(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도 2세기 말경의 어느 신약성서 집성자가 붙인 것이다. 히브리서는 편지가 아니다.
반면 초대교회 설교의 전형적인 형식이 이 작품에 나타난다. 초대교회의 설교에는 구약성서에 대한 상세한 주석과 권면이 번갈아가며 나오는데 히브리서에서도 교리적인 내용과 목회적인 권고가 번갈아 나온다.(2,1-4; 3,7-4,16; 5, 11-6,12; 10,19-39; 12,1-13,17) 그리고 신약성서의 서신들에서 흔히 나오는 “쓴다”라는 말 대신 설교의 전형적인 표현인 “말한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2,5; 5,11; 6,9; 8,1; 9,5; 11,32). 히브리서는 편지보다는 초대교회의 설교 형식에 가깝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말이 아니라 글을 통해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수신자들의 경험에 대한 서술들(10,32-34)에 비추어볼 때 저자는 특정한 한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수신자들의 위치로는 고대로부터 팔레스틴, 그중에서도 예루살렘이 유력하고, 이밖에 로마에 있는 가정교회(J.J. Wett-stein) 사마리아, 안디옥, 고린도, 사이프러스, 에베소, 비두니아, 본도, 골로새 등지가 물망에 오른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본문 내적인 증거들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독자들의 상황에 대한 것이다. 히브리서는 어떤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일까? 신앙고백을 지켜나가라고 호소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기독교인들이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유대적 기독교인들인가, 아니면 이방 기독교인들인가, 그것도 아니면 유대교 전통에 대한 관계가 불분명한 혼합공동체인가 하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에 근거해서 본다면 독자들을 히브리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앞서 언급한 2세기의 집성자는 글의 내용상 독자가 유대인이었으리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대제사장, 제사, 그리스도와 모세의 비교, 계약 등 유대적 요소와 폭넓은 성서 인용과 주석 등이 유대인들과 맞는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후 많은 학자들이 히브리서는 일차적으로 유대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여겼으며, 또한 그들 대부분이 히브리서는 유대교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들을 막고, 유대교로부터 완전한 분리를 이루기 위해 쓰여졌다고 보았다. 이렇게 유대교로 이끌리는 경향은 성전과 제의에 대한 동경 때문이라는 오래된 견해도 있고, 이외에 복잡한 여러가지 가정들이 있다. 아마도 수신자들은 유대교가 향유하던 합법 종교의 안전한 위치에 대한 미련을 아직 못 버리고 있거나, 아니면 특정한 헬레니즘적 유대교 신학, 신비적이고 소종파적인 경건이나 믿음, 할라카적인 규범들, 또는 그러한 여러 요소들의 결합물에 끌리고 있는 것 같다.
한편 독자들의 상황과 관련해서 19세기 이후 학자들은 박해와 재림 지연, 신앙의 전반적인 약화, 의심, 권태 등 초기의 신앙적 헌신에서 벗어난 여러가지 현상들이 수신자들에게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본문 안에 나타나는 독자들의 상황에 대한 서술들을 보면 그들은 히브리서 집필 당시 이미 오랜 신앙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초보적인 교리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선행과 사랑을 멀리하는 등 열성까지 식어 있었다.(5,11-14) 따라서 신자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싫어하는 등 일종의 신앙 권태기를 맞고 있었다.(6,4-6) 더구나 박해의 위험까지 닥치고 있어서 지치거나 낙심할 우려도 있었다.
저자는 초기 기독교 전승의 여러가지 명제들을 이용하여 속사도시대의 나태성을 공박했다. 히브리서는 속사도시대의 한 특정한 공동체를 신앙적으로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의 신학적-교의적 부분들은 따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생활률적인 권면들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히브리서는 교리적인 주석과 생활률적인 권면이 잘 균형을 이룬 작품이다. 히브리서에는 기독교의 주요 교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특히 대제사장 그리스도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아들됨과 대제사장직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히브 1,1-4) 그리스도의 아들됨과 대제사장직은 히브리서에서는 역사와 종말론의 틀을 결정하는 운명적인 드라마이다. 그리스도론과 긴밀히 연결되는 교훈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된 기독교인이 걸어야 할 신앙의 길을 제시하며,(2,1-4; 3,1-4,11; 4,14-16; 5,11-6,20; 10,19-39; 12,1-13,17)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 믿음의 생활, 고통 중의 인내, 선행, 사랑, 공동체와 친교, 거룩한 생활 등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저자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역할을 상세히 설명하고 그분을 본받게 하는 것이 자신의 독자들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보았다. 저자는 신앙의 권태기를 맞은 당대의 독자들을 훈계하고 격려하기 위해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히브리서 저자에 의하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와 죽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깨끗한 양심을 지녔으며(9,14-15.26-28; 10,12)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되었다.(2,15) 그리고 성령을 받아(6,4)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었으며,(10,10.14) 하나님의 좋은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미리 체험하였다.(6,5) 그들은 먼저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그리스도(6,19-20)의 중재로 미구에 천상성소에 들어가(10,19-20) 하나님이 당신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영광에 참여하고(2,10) 영원한 유산을 얻을 확고한 희망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9,15) 그들을 이 구원에 참여케 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한번이자 영원한 효력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아직까지 완전하게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최종 목적이 달성되는 날까지 구원의 창시자요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성실히 따라야 한다. 먼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믿음을 굳게 간직하려면 많은 고통이 따른다. 그렇다고 고통을 못이겨 낙심하거나 쓰러져서는 안 된다.(12,5) 고통과 환난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보여주시는 사랑의 표지이다.(12,6-7) 고통은 인간을 정화시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12,10) 비록 현재는 고통을 참기 어렵겠지만 이를 이겨내면 멀지 않아 반드시 평화의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12,11)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께서도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기에 지금은 하나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12,2-3;1,3) 독자들도 신자가 된 후 초기에는 온갖 고난과 모욕과 환난을 당하면서도 미래의 보상에 대한 약속을 굳게 신뢰함으로써 인내하였다.(10,32-36)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믿음을 가지고 어려움을 인내로 극복하여야 한다. (12,5-7)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과 믿음의 생활을 강조하면서 독자들의 사회생활, 공동체 생활 등 실생활상의 자세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 가운데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선행과 사랑의 실천이다.(6,10;10,25;13,1.16) 형제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꾸준히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나그네를 후대하며(13,2) 감옥에 갇히거나 학대받는 사람들을 성실히 돌본다.(12,3) 그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평화를 추구하고,(12,14) 형제들의 모임에 적극 참여하여 그들과 사귀고 격려하며,(10,25)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13,16)
저자는 그밖에 올바른 신앙생활을 독려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성서의 위인들 외에 그들을 신앙으로 이끌어 주었던 죽은 지도자들(13,17)과 신자 자신들의 과거의 열성적인 생활(6,10-12)도 상기시킨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참다운 제사를 바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경건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13,15)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는 제물이란 그분의 뜻을 따르고, 당신 몸을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처럼 깨끗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며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13,15-26)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살면 선구자로 하늘 성전의 성소에 들어간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6,20)께서 그들도 안전하고 확실하게 그곳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해 주실 것이다.(6,19)
2. 본문사역
1 계속하여 형제애가 머물도록 하십시오. 2 나그네들에 대한 접대를 잊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접대하다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였습니다. 3 여러분은 묶인 사람들을 여러분도 함께 묶인 것처럼 기억하고, 여러분 자신도 몸을 가지고 있으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기억하십시오. 4 모두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 하며, 부부의 잠자리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자와 간음하는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5 돈을 멀리하는 습성을 기르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분은 “나는 너를 떠나지 않겠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6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말합니다. “주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하랴.”
3. 본문분석
13,1-17은 히브리서 전체를 마감하는 종합적인 교훈들로서 앞에서 말한 전체적인 내용과 직접 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부분은 다시 기독교인의 생활과 관련되는 교훈(1-6절)과 참된 공동체 예배에 관한 교훈(7-17)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둘 다 참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1-6절은 하나님을 기쁘게 경배하는 데(12,28) 직접 관계되는 참된 기독교인 생활을 가르치는 교훈인데 네 쌍으로 되어 있으며,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그 타당성을 증명하고 있다. 네 쌍의 교훈은 형제애와(나그네 접대) 고통받는 이에 대한 사랑(갇힌 사람, 학대받는 사람)을 보이고, 결혼생활의 정결을 지키고, 재물을 멀리하라는 내용이다.
< 1-2절 >
형제애 φιλαδελφια 가 첫머리에 나온다. 형제애는 사람들을 자신의 형제로 대하신 예수를 본받는 것이다.(2,11-12 참조)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요구받는대로 필요한 것들을 개인적으로 제공함으로써 형제애를 보여줄 수 있었다. 가령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이나 타인의 후원금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물이 형제애의 표시로 보내졌다.
아마도 형제애는 당시 소종파로서의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각각이 서로 서로에 대해 갖는 관심을 의미할 것이다. 초대 기독교가 소종파적인 종교였다는 사실은 그들의 행태나 신앙과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애는 소종파로서의 기독교가 적대적인 세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윤리적 태도였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유일하게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만 생명이 가능하다고 여겼고, 이 공동체들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다른 형제 자매에 대한 사랑의 책임을 받아들일 때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진다고 생각했다.(요일 3, 14) 이 경우 형제애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요구에 대한 돌봄까지도 포함했다. 물질적인 재산을 가진 구성원이 곤궁에 처한 형제자매를 보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요일 3,17) 특별히 독신 형제단 형태의 공동체의 경우 구성원들이 아플 때나 늙었을 때 돌봐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공동체가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만 했다.
한편 저자는 형제애의 구체적인 한 예로 나그네에 대한 사랑을 언급한다.(2절) 손님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대접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아름다운 풍습으로 구약성서나 신약성서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손님 접대에 뛰어난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은 아브라함(창세 18장), 롯(창세19장), 삼손의 부친 마노아(판관 13장) 토비아(토비 5-7장) 등이 있다. 신약의 바울도 여행 중인 교우나 교사, 또는 선교사들에 대한 접대를 강조하는데(로마 12,1; 16,2; 빌레 21; 디전 3,2;5,10) 오늘날과 같이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업이 발달하지 않은 당대에는 손님 접대가 매우 중요했다. 이 나그네 접대는 형제애와 직접 관계된다.
정통 유대인들 중 몇몇 집단들은 정결규정이나 음식물 예법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먹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특히 손님 접대, 나그네 접대가 중요했다. 이곳 저곳으로 여행다니는 사람들은 자기 종파에 속한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음식물과 깨끗한 옷, 숙소를 제공받아야 했다. 동일한 신앙을 가진 낯선 사람들이 왔을 때 기독교인들이나 유대인들은 그들을 접대해야 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동일한 규정을 준수하는 자들이 아니라면 가옥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그들을 신자들의 집에 들여서는 안되었다. 어떤 경우는 더럽혀지지 않기 위해 그들에게 인사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요이 10-11; 1QS 5,16-17; 7,25; 8,23-24;9.8-9) 지도자들은 때때로 나그네들에게 소홀한 사람들을 꾸짖었다. 만일 접대를 받지 못한다면 그들은 도저히 이방인들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지는 못할 것이므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요삼 5-8) 그러나 대체로 특정 집단의 소속원이라는 이유 하나로 손님 접대를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었으므로, 기독교인들은 이틀 이상을 머무는 나그네들은 거짓 예언자들일 가능성이 많다는 경고를 받았다.(디다케 11)
많은 학자들이 이 두 구절(1.2a절)은 본래 사랑에 대한 시적인 권면이라고 본다. 13장의 편집자는 여기에 그 자신의 설명을 덧붙였다.(2b절) 어떤 사람들, 가령 아브라함과 사라(창세 18), 롯(창세 19)과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했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온 기독교인에게 손님 접대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곧 천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 25, 35이하를 연상시킨다.
< 3절 >
묶인 자와 학대받는 자를 기억하는 것도 형제애에 속한다. 당대에는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히거나 박해받는 사람들이 많았는데(10,34; 로마 12,13; 고전 12,26; 빌립 4,10-11; 골로 4,18; 1클레 59,4) 이러한 사람들 외에도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이 관심과 보살핌의 대상이 된다. 기독교인들은 고난을 통해서 대제사장이 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특별히 동정하시는 그리스도(5,1-10)를 본받아야 한다.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는 둘 다 로마 제국 내에서 전복적인 운동을 하는 종교로 여겨졌기 때문에 신실한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은 자주 그들의 신분이나 행동 때문에 감옥에 갇히곤 했다. 동료들이 신앙 때문에 고통을 당하거나 죽어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과의 관계를 부인했고,(마태 26,69-75)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과 같은 운명을 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함께 묶인 것처럼”이라는 말은 ⌈쉰데데메노이⌋ συνδεδημενοι 인데, “함께 묶인”이라는 뜻으로서 이것은 묶인 자들과 대단히 긴밀한 일체감을 갖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을 찾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과 음식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은 묶인 사람들과 일체감을 가지며, 그들과 정치적, 종교적 견해를 함께 한다. 이러한 종류의 정체성은 이 운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고, 또한 그것 역시 형제애의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3절은 이행연구 couplet 로 되어 있는데 2행이 1행과 동의적이다. 그러므로 “학대받는 사람들”은 “묶인 자”나 그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신념이나 관습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몸을 가지고 있으니”라는 말은 독자들이 그들 자신을 “학대받는 사람들”과 동일시하고 그들의 고통을 대리적으로 함께 나누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모든 사람이 고통을 받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고전 12,12-27; 고후 5,6; 로마 12,4-5) 이것은 구절의 병행성에 보다 강조점을 준 해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함께 묶인 것처럼”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 4절 >
이 구절은 결혼에서의 신실성을 다루고 있다. “모두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 하고”라는 말은 아마도 “부부의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고”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본래 구약성서의 레위기적인 정결성의 관점에서는 모든 성적인 행위를 부정하게 여긴다.(레위 15,16-18) 그래서 가령 거룩한 전쟁에 임하는 병사는 아내와의 잠자리를 가지지 못하도록 했다.-물론 전쟁이 끝나면 그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아내들에게로 돌아가도 되었다. 성행위 자체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관점은 “아내를 가진 자들도 마치 가지지 않은 것처럼 살라는”(고전 7,29) 바울의 종말론적인 권면에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성적인 행동이 난잡한 간음행위자들이나 결혼생활에 신실하지 못한 음란한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성적으로 문란한 이방인들 가운데서 사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계명과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거룩한 신분을 들어 건전한 결혼생활과 정결을 강조했다.(고전 5,9-11; 6,13-15; ,1-3; 데전 4,1-3) 부부의 잠자리를 더럽히는 것은 혼외 성관계를 말하는 것 같다.(지혜 3,13;14,26 참조) 음란과 간음에 대해서는 유대인들조차도 기독교인들과 다른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음란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은 독신녀와의 음란한 행위나 성관계였다. 또 유대 율법은 간음에 대해서도 남녀간에 차이를 두어, 기혼 남자가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면 이혼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여자가 간음하면 이혼당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초대 기독교는 성관계나 결혼에서 남녀가 동등하다고 가르쳤다.(마가 10,6-9; 고전 7,4 참조)
< 5-6절 >
“돈에 대한 무관심”을 강조하는 이 구절은 다른 기독교 훈계들이나 태도들과 유사하다. 참된 기독교인은 재물에 대한 태도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고전 5,9-10; 6,9-10; 데전 4,3-6; 에베 5,5)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돌보시고 배려하여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물질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마태 6,34;빌립 6,4; 베전 5,7 참조) 본래 이러한 태도는 대체로 공동경제와 관련되었다. 그러나 초기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과부나 고아들, 공동체가 제공하는 사회적인 도움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을 위해 이러한 태도가 장려되었다. 저자는 당대의 철학을 이용하면서도 기독교적 정신에 입각하여 재물에 대한 욕심을 멀리하라고 가르친다.
기독교인들이 돈에 무관심해질 것을 권하는 말에 덧붙여서 저자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구약성서의 두 구절을 인용해서 자신의 논점을 더 강조한다. 5절의 인용문은 필로의 말인데 신명 31,6을 반영하고 있다. 6절의 인용문은 시편 118편 6절이다. 먼저 5절은 모세와 관련된다. 모세는 죽기 직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을 얻기 위한 사업을 계속해 나가라고 했다. 그들은 도중에 나타나는 적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먼저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배반하지도 않을 것이다.”(신명 31,6) 이 경우 하나님의 임재는 전쟁에서의 그의 능력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적들을 물리치실 것이다. 여기서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재물에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본문이 인용되었다.
6절의 두번째 인용문은 시편 118,6에서 나왔다. 신명 31,6에서처럼 이 시편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무찌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의 재정적이고 물질적인 섭리를 신뢰하도록 권면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인용했다. 저자는 돈에 대한 관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처럼(마태 6,28-30) 기독교인들은 돈과 물질에 대한 염려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도우시는 분인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들은 사람이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일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사실 경제윤리와 관련한 이러한 에토스는 신약성서 전반에서 감지된다. 산상수훈에서는 먹을 것이나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며(마태 6,25) 지상에다가 보화를 쌓지 말라고 했다.(마태 6,19-21) 또한 선교를 위해 파송된 사람들은 금화나 은화나 동전을 그들의 전대에 넣지 말고 여행용 자루도 가지지 말고, 갈아입을 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했다.(마태 10,9-12) 초대교회는 지속적으로 자발적인 가난의 교리를 주장해왔다.
자발적인 가난에 대한 이러한 언급들 배후에는 초대 교회의 특정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는 순회 선교사들을 위한 접대관습과(앞의 1-2절 주석 참조) 교회 내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호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교회는 선교사들이 여행하는 중에 동료 기독교인들로부터 음식과 옷과 다른 필요한 것들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기구인 교회가 그들을 위해 지상에 보화를 쌓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다음 날을 위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마태 6,34) 물론 이 기구가 완벽하게 기능한 것은 아니고, 또 그들 중에는 선교사들에게서 등을 돌린 디오드레베같은(요삼 5-10)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돈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 있지는 않았다. 예컨대 바울과 같은 독신자에게는 가정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제공하기를 기대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처한 어떤 상황에건 만족하는 것이 훨씬 더 속 편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초대 기독교인들이 “현재의 상황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때때로 훈계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저자는 여기서 전체적인 재정을 공동체가 공유하고 개인이 물질적인 필요에 관심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지향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설교 메시지: 공동체적인 기독교윤리의 실천
이 구절들에서 저자는 한편으로 신앙의 열성이 식고, 또 한편으로는 박해에 직면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할 윤리적인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히브리서는 대체로 80-90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당시는 도미티안 박해 이전이지만 지역적으로 소규모적인 박해가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제시된 네 가지의 윤리적 지침은 저자가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상황과 관련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해서 기술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분석에 의하면 네 가지 윤리적 권면 중 적어도 세 가지, 즉 나그네를 접대하라는 형제애에 대한 권면과 묶인 자, 학대받는 자에 대한 사랑, 물질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라는 권면은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박해받는 소종파로서의 기독교 공동체가 지닐 수 있었던 에토스를 각기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초대 기독교를 소종파적인 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또한 당시의 신분제적인 사회에서 기독교 공동체만이 거의 유일하게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신분의 사람들에게 개방된 집단이었다는 데 대해서도 학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 하나의 소종파로서의 기독교는 소외된 삶을 살던 사람들에게 소속 장소를 제공했다. 기독교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일반 사회에서와는 다른 가치와 이상들을 공동적으로 모색하고 가꿀 수 있는 대안적이고 자족적인 사회였다. 5-6절의 물질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라는 권면은 이러한 대안적인 가치와 이상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는 경쟁과 물질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과는 다른 원리, 즉 형제애와 공동체적인 이상이 지배하는 장소였다. 이들이 추구하고 관심 갖는 변화는 사회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진정한 형제애의 경험을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의식의 변화이다 (베전 2,19-20; 3,3-4. 15-16. 21) 그러나 그러한 회심을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암묵적으로는 조직화된 사회적 저항의 형태를 지닌다. 그러한 저항은 비록 발설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반저항을 불러들인다. 3절에 나타나는 묶인 자들과 학대받는 자들에 대한 관심은 적대적인 사회의 반저항으로 인해 처할 수 있는 기독교 소종파의 상황을 반영한다. 바로 기독교인들 자신들이 묶인 자들, 학대받는 자들이 될 위협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 단락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윤리적인 지침들은 기독교 공동체 내의 상황에서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들이었고, 그들의 정서를 절실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다. 가령 나그네들을 향해 형제애를 실천할 것을 권면하고 있지만, 그 나그네들은 공동체 바깥의 어딘가에 있는 막연한 사람들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 자체가 바로 그러한 나그네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나그네들을 접대하라는 형제애에 대한 강조는공동체 자체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또한 묶인 자들, 학대받는 자들에 대한 배려를 강조한 것 역시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많은 공동체로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었다. 이 권면들에 나타나는 기독교적인 태도의 기본정신은 박해받는 집단으로서 기독교의 소종파적이고 공동체적인 이상이다. 초대 기독교는 대안적인 공동체상을 제시함으로써 당시 사회에 크나큰 반향을 불러 일으킬수 있었다. 밑바닥 대중들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자신들의 인간다운 삶의 실현 가능성을 보았다. 초대 기독교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다운, 공동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초대 기독교 선교의 성공은 기독교 공동체의 이러한 사회적인 특성을 전제한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초대 기독교가 했던 것과 같은 공동체적인 이상을 실현하고 있는가? 공동체적인 이상을 지향하는 윤리를 가지고 있는가? 오늘 한국 사회에는 기독교 세력은 존재하지만, 기독교 정신은 없다. 가톨릭,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온지 각기 100년, 200년이 지났건만 기독교적인 문화, 기독교적인 정신, 기독교적인 윤리라는 말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다. 아무리 이 땅에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많다 하더라도 아직 기독교가, 예수의 복음이 한국인의 삶을 밑바닥에서부터 움직이는 원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이 본문에 나타나는 공동체적인 이상, 윤리와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거리가 멀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서 무너진 공동체적인 이상과 전통을 이어나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민족은 자신들이 대단히 공동체적인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서구인들과는 달리 정이 많고 “가슴이 따뜻한” 민족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두레나 향약, 품앗이같은 제도나 관습들은 한국인이 유구한 공동체적 전통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사실 우리 민족은 수천년 동안 촌락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면서 공동체적인 문화와 생활 습관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나라는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산업화를 거치지 않았고, 씨족 중심의 촌락공동체적 유산이 수천년 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문화 속에서는 촌락이 곧 우주가 되었다. 오랜 세월 씨족 중심의 촌락에서만 살다보니 씨족 중심의 문화는 아직도 많은 부분 남아 있지만 씨족을 벗어나서 ‘우리 동네’를 벗어나서 공공성의 단계에서 공동체성을 수립하는 데 우리 민족은 대단히 미숙하다. 가령 가족을 위해서라면 부정입학, 답안지 빼돌리기도 불사하며, 그것이 자식 키우는 부모의 심정으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이해되기까지 한다. 또한 설날이나 추석 때 피붙이와 고향을 찾아 1000만 이상의 인구가 대이동을 하는 눈물겨운 가족애를 보여주지만 그 과정에서 시민의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혈족을 찾는 끈끈한 연대의식과 새치기, 교통 무질서 등 공공의식의 부재가 공존한다. 따라서 두레, 향약, 이웃사촌 등 우리네의 공동체 의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는 사람들끼리만 하는 공동체 의식이다. 촌락, 씨족 공동체 바깥의 모르는 사람에게는 적당히 속여먹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별로 부끄러운 짓이라고 여기지 않게 만드는 오랜 정신문화적 타성이 사실 우리에게는 있다.
이러한 전근대적 타성은 힘없고 ‘빽’ 없이 국제화와 세계화의 21세기를 맞이해야 하는 오늘 보통 한국사람들의 삶을 말할 수 없이 피곤하고 지치게 만든다. 연줄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되는 일이 없지만 연줄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 한 사회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객관적으로 신뢰할 만한 법칙이나 상식에 따라 사회적인 삶이나 인간 관계가 운용되는 것이 아니라 혈연, 지연, 학연 등을 중심으로 인맥을 따라서 사회가 움직여지기 때문에 되는 일이 없는가 하면 안 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를 향하는 세계는 첨단 정보 시스템 덕택에 일원화되었으며, 동시에 세계 곳곳의 다양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을 밖의 사람들’을 의식하고 이들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룰 줄 아는 마음가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청된다. 그러나 이 마당에서도 우리의 의식은 좁은 의미의 우리의식, 옛날 촌락이나 마을의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오늘날의 세계사적 상황에 걸맞는 공동체 의식, 공공의식으로의 발전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한국에서 전반적인 공동체 의식의 파괴에 직면하여 우리의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을 되살리며, 동시에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 교회가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은 매우 크다. 전통적인 촌락 공동체는 거의 다 사라지고 촌락민의 의식만 남아 있는 지금 교회는 거의 유일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산업화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공동체는 이제 거의 완전히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 갑작스럽게 옛 삶의 공동체적 기반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또 다른 공동체를 찾았고, 어떤 면에서 그것이 교회였다. 한국 교회가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갑작스럽게 와해된 촌락 공동체의 자리를 교회가 대신해줄 수 있었다는 사회학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한국 교회는 무너져가는 한국민의 공동체 의식을 되살리고, 뿌리깊은 집단적 개체주의(가령 지역감정같은 것)를 극복하는 데 앞장서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공동체가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공동체 형성의 과제와 관련해서 이 본문은 중요한 윤리적 지침을 준다. 혈연, 지연, 학연 등, 아무 연과 상관없이 만난 사람들 사이에 이루는 아름다운 형제자매애, 이름없는 나그네들에 대한 접대는 공동체 의식의 밑바탕을 이룬다.
그러면 오늘 우리 이웃들 가운데서 집없는 나그네들은 누구인가? 오늘 이 땅에서 가장 소외된 나그네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사회적, 정치적, 법적으로, 나아가서 인종적으로 가장 무력한 약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10만에 이르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3D업종에서 일하고 있다.(법무부에 신고된 사람만 총 6만 5천여명이며, 신고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약 10만 정도라고 한다) 이들은 열악한 산업 환경과 주거 환경, 장시간 노동, 임금 체불, 산업재해 보상 문제,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 불법 상태이기 때문에 언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정신적 불안감과 스트레스, 대부분의 기업주가 이들의 여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신체적인 부자유 등 갖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그 옛날 이스라엘처럼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품을 떠나 밑바닥 일을 하며 낯선 땅을 헤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집없는 나그네로서 집을 찾기를 갈망했듯이 이들도 역시 진정한 안식을 갈망한다.
우리의 선배 기독교인들은 떠돌이 나그네들과 동류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집없는 떠돌이 나그네로서의 자의식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의 일부를 이루어야 한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이 땅의 소외된 집없는 나그네들인 외국인 노동자들을 동류로, 형제요, 자매요, 가족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함께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민족의 희년을 앞당기기 위해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을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재물에 대한 의식, 경제윤리 역시 공동체적인 더불어 삶의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공동체 파괴의 현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의 중심에 모신 공동체적인 삶의 원리를 실천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신 공동체적인 사회를 일구어 가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성윤리(4절)와 관련된 문제이다. 성서의 성윤리와 관련해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남녀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녀에게 적용되는 성윤리의 잣대가 각기 다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상속권과 가문계승의 목적을 위한 생식의 기능을 다함으로써 최상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혈통과 가문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순결과 정절은 절대적인 의무로 여성에게 부과된다. 반면 남성은 매춘이나 축첩을 통해 이중적인 성생활이 허용된다. 남녀에게 이중적인, 서로 다른 성윤리의 잣대가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결혼은 남녀의 동등한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지배복종의 관계로 전락한다.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권력관계이다. 그래서 오늘날 기형적인 결혼생활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사는 많은 기혼자들에게 결혼생활의 소중함, 부부의 잠자리의 신성함이라는 말은 전혀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한국 남성 1인당 상품화된 성(매매춘)의 사용율은 월평균 약1회이다. 이것은 성적으로 개방되고 자유로운 서구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이 술 권하는 사회, 여자 권하는 사회이다. 우리나라의 향락산업은 1980년대에 급성장해서 연간매출액이 4조원이 넘으며, GNP의 5% 이상이며, 산업구조에마저도 영향을 끼쳐 비생산적 서비스(향락산업) 중심의 3차산업 이상 비대화 현상이 나타날 정도라고 한다. 한국기업의 접대비 지출 규모는 선진외국의 100배 정도이고, 접대비는 한국전체기업이 1989년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 납부한 세금총액의 36.9%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약 10배 높다고 한다. 또한 국제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정부시책으로 기생관광을 육성했다. 그래서 전국에 120-150만 정도의 향락업소 종사 여성들이 있으며, 15-29세 여성인구의 5명 중 1명이 성적 서비스 산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사회의 총체적인 타락, 가정의 파괴로 이어진다. 잘못된 성윤리, 남녀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이중적인 성규범은 남녀 모두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성의식이 타락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타락한다. 남녀 간의 사랑은 소유되지 않고 구속당하지 않는 관계 속에서 창조적인 힘을 가지며,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활력이 된다. 사랑은 자유의 소산이지 지배의 소산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구속하거나 간섭할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며, 상대의 소유물로 예속되는 구실을 주는 것도 아니다. 공동체적인 성과 사랑은 평등한 남녀관계에 기초하며, 남녀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풍부하게 하는 진정한 언어이다. 남녀가 모두 대등한 성과 사랑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성과 사랑이 결합되고, 육체와 정신, 감성과 이성이 조화롭게 통합되는 성문화를 지향해야 할 것이며, 시장의 원리가 배제된 성과 사랑의 문화를 정립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Bruce H., The Epistle to the Hebrews, Grand Rapids, 1964.
Buchanan G.W., To the Hebrews (Anchor Bible Commentaries 36), 1981.
Michel O., Der Brief an die Hebräer (Meyersk 13), Göttingen 1975.
미헬(강원돈 역), 『히브리서』(국제성서주석).
이홍기(역주), 『히브리서』(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성서 11), 분도출판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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