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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여름, ‘거북 가방’들
한 사회학자는 “하나의 망령이 사회학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는 ‘대중 사회’라는 망령이다.”라고 말한다. 대중 사회라는 망령은 끊임없이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고, 확산시키고, 또 그 유행을 소멸시킨다.
대중 사회는 우리가 불가피하게 생존의 터전으로 선택한 도시를 근거로 하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는 도시를 “유행의 완전한 독재가 뒷받침해 주는 이 확산, 이 차이의 ‘연쇄 반응’이 일어나는 기하학적 장소”라고 말한다. 저 서울의 종로나 명동, 그리고 압구정동의 거리를 꽉 메운 채 흘러가는 인파가 바로 ‘대중’이다. 대중은 도시의 산물이다. 도시의 인파 속에 섞여 흐르는 미니스커트 또는 아랫단이 넓게 퍼진 판탈롱 바지를 입고 다니는 젊은 여자들의 등에는 한결같이 검정빛 ‘거북 가방’이 앙증스럽게 매달려 있다. 대전 엑스포(EXPO), 숱하게 생긴 노래방, 24시간 편의점, 나오자마자 품절 사태를 빚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반, 그리고 판탈롱 바지가 보여준 신복고주의와 함께 거북 가방은 1993년의 상징물로 기억될 것이다.
1993년 여름의 거리에 왜 느닷없이 ‘거북 무리’가 나타났을까. 젊은 여자들의 등에 매달려 있는 귀여운 거북들. 거북, 장수하는 수륙 양생의 동물, 때로는 남성의 성기에 대한 은어로도 통용되는 동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는 주술적 제의의 노래인 「구지가(龜旨歌)」 속의 동물, 신화적으로 해석하자면 거룩한 군주의 출현을 기다리는 백성의 뜻을 신에게 전달하는 매개자인 거북들의 느닷없는 출현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는 혼돈과 무질서의 시대인 세기말에 어떤 ‘신성 군주’의 출현이라도 고대한 것일까······.
그러나 거북 가방을 등에 지고 다니는 젊은 여자 누구도 그 거북 가방을 매는 자신의 ‘상징적 몸짓’에 어떤 의미 부여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그 여름 이 도시에 퍼진 새로운 패션, 유행에 따랐을 뿐이다. 그것은 밖으로 뿜어 나오는 싱그러운 젊음의 동질성을 확인케 하는 자연스러움이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기에. 유행은 그들의 몸과 의식을 꼼짝할 수 없도록 포박한다. 그들의 머리 모양, 구두, 옷의 빛깔과 디자인, 장신구를 보라. 그들은 새로운 유행에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진다. 아무도 그들에게 거북 가방을 매고 다니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들은 누가 시킨 적이 없어도 스스로 거북 가방을 매고 거리로 나온다. 그래서 1993년 여름 서울의 거리에는 느닷없는 거북 무리의 출현이 하나의 패션을 이룬다.
대중 문학은 바로 젊은 여자들의 등에 매달려 있는 이 거북 가방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이 보여주는 ‘상징적 몸짓’의 의미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패션에 동참하며 느끼는 즐거움을 공유하는 것. 대중 문학에 대한 탐닉은 삶의 적실성에서 비롯되기보다는 거대 도시의 대중에 의해 발견되고 확산되는 일회적인 유행, 즉 거북 가방을 매고 다니는 것과 같은 패션이다. 유행은 공감하고 공유하는 문화적 소비 행위에서 발현된다. 대중의 욕망과 동기, 감수성과 호기심에서 촉발된 유행이라는 연쇄 반응은 계급 · 인종 · 지역 · 직업 · 종교의 경계를 넘어 일어나곤 한다. 젊은 여자들의 거북 가방은 서울뿐 아니라 다른 도시로, 도시의 주변부로 급속히 확산되어 하나의 유행이 된다. 아무도 명령하거나 강제하지 않는다. 겉보기에 이런 유행은 자발성에 의해 뒷받침된다.
오늘의 대중 문화를 ‘경제적 지배 구조의 재생산’이라는 식으로만 바라볼 때 그 실체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이미 대중 문화는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매순간 들이마셔야 하는 공기와 같은 것이고, 살아야 할 일상이고, 환경이다. 오늘의 ‘일상’과 ‘환경’을 빨아들이며 성립되는 모든 예술은 그 소비 주체인 대중의 욕망과 동경, 이념과 세계관을 어느 정도 반영하며, 바로 그것이 ‘대중성’으로 나타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대중성’이란 대중 일반이 갖고 있는 성질을 말하는 것이고, ‘통속성’ 또한 이로부터 그리 멀리 벗어나지 않은 범주의 의미를 함축하는 용어다. 그것이 문학과 관련되어 쓰일 때 그것은 대체로 순수 문학과 비교해 저급한 것, 상업적인 것, 오락적인 것, 세속적인 것을 더 많이 끌어 안고 있는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일반적 성향을 가리키게 된다. ‘대중성’으로 무장된 문학에 대한 비판은 근원적인 전복력이 없고, 일시적인 위안을 주는 데 그치며, 경박하고, 인간의 자기 성찰에 대해 덜 치열하며,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지각 능력을 무디게 만들고, 현실 도피를 부추기거나 마취제 구실을 하며,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비판이 따르지 않고, 승화 기능 또는 초월성이 없다는 것 등으로 집약된다.
대중 문학, 그것은 ‘야만의 물결’인가
1993년 월간 문예지 『문학정신』 10월호에 특집 「대중 문학, 두 개의 얼굴」이 실리면서 대중 문학 논쟁이 점화된다. 김주연은 “1990년대에 범람하는 대중 문학은 현실 반영과 비판을 생명으로 하는 문학의 참의미와 거의 무관하다.”고 말하며, “오늘날 대중 문학은 광고라는 소비 조작, 인물 · 역사물이 지니는 자기 동일화 환상, 소시민적 교양 욕구 충족 등을 공통점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말 대중 문학에는 현실 반영과 비판이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해 장석주는 “대중 문학은 산업 혁명기 이후 시민 계급의 오락과 예술에 대한 수요를 배경으로 한다.”고 말하며, “오늘날 대중 문학과 순수 문학의 경계는 소멸되거나 모호해졌으며 서로 삼투하는 관계”인데, “소외, 불신이 만연한 대중 사회에서 대중의 감성과 경험, 욕망과 본능, 동경, 백일몽을 빨아들이고 그것을 낯익은 것으로 그려”내며 그것은 이 시대에 대응하고 있다고 반론을 편다.
대중 문학에 관한 논쟁은 뿌리깊은 것이다. 대중 문학 논쟁은 이미 1930년대 카프 진영에서 김기림과 임화 등에 의해 일어난 바 있고, 1960년대 초 미국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되며 문학의 정전(正典) 논쟁 형식으로 벌어진다. 1993년의 대중 문학 논쟁은 『문학정신』에서 『경향신문』 지면으로 옮겨지고, 김수경 · 홍정선 · 도정일 · 정정호 · 황병하 등이 가세해 그것의 수용과 비판적 배척의 입장으로 갈려 치열한 공방전을 이어나간다.
대중 문학을 배척하는 쪽에 선 김주연 · 홍정선은 대중 문학이 천박하고 현실 도피적인 문화 양식으로 소비자들의 자발적 의사에 의해 선택된다기보다 대량 생산 체제와 광고 및 기획 전략 등 인위적인 후기 산업 사회의 시장 원리에 의해 창출된 허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중 문학을 배척하지 않는 쪽에 선 장석주 · 정정호는 대중 문화의 수요자들은 적정한 경제적 능력과 지적 수준을 갖춘 향상된 다수로서 저희의 미적 가치관에 부합되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집단적이면서도 능동적인 소비자들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대중 문학은 무조건 배척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미래적 가능성에 대한 탐색에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고 대중 문화 수용 쪽에 선 논자들은 주장한다.1) 대중 문학은 대중을 향해 가는 문학, 대중을 향해 몸을 여는 문학이다. 왜 그 시점에 대중 문학이 쟁점이 되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것은 정말 ‘천박하고 야만적인’ 문학일까?
대중 문학에 대한 여러 비판에 아랑곳없이 대중 문학은 시장 장악력에서 우리 시대의 본격 문학을 압도한다. 순수 문학 출판물이 대중적 구매력을 잃어가는 징후는 곳곳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1990년대 초반에 출판 시장을 장악한 소설들, 1백만 부에서 3백만 부까지 팔렸다는 소설들은 『소설 동의보감』 · 『소설 토정비결』 · 『소설 목민심서』, 김한길의 『여자의 남자』,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 · 『떠오르는 태양』, 끊임없이 번역되어 나오는 시드니 셀던의 소설들, 그리고 앤 타일러 · 존 그리샴 · 에릭 시걸 · 스티븐 킹 · 토머스 해리스 같은 미국의 대중 작가들이 쏟아낸 소설들이다.
예외적으로 신경숙의 창작집 『풍금이 있던 자리』가 화제가 되긴 하지만, 그 판매 부수는 위에서 언급한 베스트셀러에 비하면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1980년대에만 해도 박경리의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같은 본격 소설들이 서점에서 위력을 떨친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면서 이들 정통 문학 작품이 누리던 권력과 대중적 영향력은 줄어들고, 이런 변화가 그대로 판매 부수의 감소로 이어지는 것이다.
1980년대에 나와 본격 소설임에도 베스트셀러에 오른 황석영의 〈장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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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는 그 동안 우리가 경멸해 마지않던, 저급하고 상스럽고 세련되지 못하고 천박한 대중 문학의 ‘야만적’인 물결이 지워진 또는 흐릿해진 경계선을 넘어 거세게 밀려와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마침내 욕망과 감수성, 의식을 점령한다. 정말로 대중 문학은 ‘야만’의 물결일까? 달갑지 않은, 뜻밖의 물결이 밀려들자 절대적, 독재적, 가치 독점적, 소수 엘리트 중심주의적 고급 문화의 생산자이며, 대중과 유리된 채 고고하게 그것을 독점하고 향유하던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일제히 ‘위기’를 외친다.
그들이 외친 것은 무엇의 ‘위기’일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혹시 그들은 전환의 혼돈스러운 움직임, 새로움으로 나아가려는 그 에너지의 요동을 ‘위기’로 읽은 것이 아닐까? 본격 문학의 쇠락 현상과 새로운 대중 작가들의 등장은 문학을 둘러싼 생산적 조건의 변화, 그리고 삶의 토대인 현실 전체의 변화와 일정한 관계가 있다. 현실의 변화와 문학의 생산 조건의 변화에 대한 성찰을 빠뜨리고는 대중 문학에 관해 바르게 말할 수 없다.
이미 문학을 포함한 갖가지 분야에서 여러 경계선이 지워지고 있거나 희미해지고 있다. 장르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으며,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높은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 이 ‘경계의 소멸’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현상의 중요한 징후이기도 하다. 1989년 11월 9일, 냉전 시대의 산물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우리 삶과 문화의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경계선이 한꺼번에, 좀 빠르거나 느리게 지워지거나 희미해진다. 중심의 와해와 탈중심화로 나아가는 현실의 갖가지 변화······. 이념에서 욕망으로 치닫는······. 이념의 시대가 지나가버린 광장에서는 지난 연대의 동상들이 철거되고, 그것이 철거된 빈 자리에서 새롭게 ‘소비의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문학의 ‘대중성’은 대중 사회의 산물이다. 알란 스윈지우드(Alan Swingewood)는 대중 사회의 출현이 “19세기 후반의 서구 자본주의의 급속한 산업화”라는 배경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산업화는 대중 사회의 출현을 불러온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조건”, 즉 “노동의 자본주의적 분업화의 발전, 대규모 공장 조직과 대량 상품 생산, 도시로의 인구 집중, 도시화, 의사 결정의 중앙 집권화, 복잡하고 광범위한 커뮤니케이션 체계의 발달, 노동자 계급의 선거권 확대에 따른 정치적 대중 운동의 증대”와 같은 조건을 성숙시킨다.
산업 혁명 이후 전제적인 지배 계급의 해체와 함께 등장하는 새로운 지배 계급은 민주주의, 평등, 생산된 물질적 재화의 분배 정의 확립과 같은 합리적인 정치 이상을 추구함으로써 대중적 기반을 구축하려고 한다. 대중 사회는 산업 혁명 이후 확산된 다원적 민주주의가 낳은 역사적인 산물이다. 대중 사회의 출현은 이런 역사적 당위를 갖고 있다. 대중은 ‘유령들’이 아니다. 오늘의 대중은 문화의 소비 주체들이며, 권력의 주체들이다. 예술을 향한 소비 사회 속에서의 대중의 권력은 무차별적이다. 그들에 의해 발견되지 않고, 구매되지 않는 예술은 소멸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기호들의 소비 흔히 오늘날의 소비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구해 쓰는 식의 압박과는 상관이 없는 잉여적 성격의 소비다. 잉여적 소비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생물학적 기초의 유지를 위한 재화의 구매와 사용이라는 범주를 넘어선 인위적 욕구에 의한 소비를 말한다. 그 소비는 엄격하게 말하자면 재화의 소비가 아니라 재화에 부여된 ‘기호들의 소비’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대의 상품 광고는 재화에 대한 기능과 사용 가치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기호들, 이를테면 행복 · 성공 · 위세 · 권위 · 즐거움 · 여가 · 여유 · 풍요와 같은 ‘꿈과 상상의 기호들’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한다. 광고는 마술을 부려 세탁기를 그저 옷이나 빨아주는 기계가 아니라, 빨래라는 고된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훨씬 많은 자유와 여가 시간을 창출해서 삶의 풍요를 안겨주는 ‘꿈의 도구’로 탈바꿈시킨다. 기호들이란 결국 실체가 없는 환영(幻影)과 같은 것이다. 환영의 소비는 아무리 계속되더라도 물리는 법이 없으며, 결코 만족을 모른다.
‘기호들’에 현혹된 소비자들인 대중은 공급되는 재화를 초과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 늘 시달린다. 이런 채워지지 않는 욕구는 그들을 ‘심리적 궁핍화’의 상태에 빠뜨린다. 심리적 궁핍감에 사로잡힌 대중은 기호들, 즉 붙잡을 수 없는 무지개와 같은 환영을 붙잡기 위해 소비로 치닫는다. 대중은 심리적 궁핍감 속에서 환영을 쫓아 영화관에 가고, 캐빈 코스트너의 매력에 감탄하거나 「원초적 본능」에 나오는 샤론 스톤의 포즈에 넋을 잃고, 서점에서 가장 잘 팔리는 『소설 동의보감』이나 『소설 토정비결』을 사고, 그 소설에 복원된 역사 공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소비 사회의 체계에서는 문학마저도 그 체계 속에서 소비될 수밖에 없는 기호의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다.
1990년대에 나와 본격 소설을 제치고 시장을 장악한 대중 소설의 하나인 〈소설 동의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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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인 대중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대중 문화’라는 용어 속에 박혀 있는 그 ‘대중’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대중의 일원일까, 아닐까? 대중 문화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포퓰러 컬처(popualar culture) 또는 매스 컬처(mass culture)의 번역어다.
포퓰러 컬처와 매스 컬처는 몇 가지 면에서 다르다. 매스 컬처는 유럽의 근대 사회 성립 이후의 문화 현상이고, 포퓰러 컬처는 이보다 훨씬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매스 컬처는 가치 부정적인 반면에 포퓰러 컬처는 가치 중립적이거나 가치 긍정적인 개념의 문화 현상이다. 영어의 매스에 해당하는 독일어 ‘마스(masse)’는 귀족이 아니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계층, 오늘날의 중류층 이하의 노동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매스 컬처란 유럽의 귀족, 법관, 성직자, 부상(富商)과 같은 상류층이 향유하던 고급한 문화의 대척(對蹠) 개념으로 하류층에 의해
수용되는 심미적 의미나 가치가 결여된 싸구려 문화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는 대중 문화는 매스 컬처라기보다 유럽에서 산업화 이후 새롭게 대두한 시민 계급의 희로 애락과 감성을 표현하고 그들에 의해 향유된 포퓰러 컬처에 가깝다. 포퓰러 컬처의 발달과 입지의 확대는 봉건 제도의 붕괴, 테크놀러지 및 교통 수단의 변화, 생산된 재화 분배의 균등화 추구와 같은 변화 속에서 새롭게 사회의 주체로 떠오른 산업 혁명 이후의 시민 계급의 ‘오락과 예술’에 대한 수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오늘의 대중이란 소득과 재화의 획득 기회의 증가로 ‘문화’를 구매하고 소비할 수 있는 부와, 고등 교육의 확산 결과 ‘문화’를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지적 수준을 갖춘 중산층 일반을 아우르며, 대중 문화란 주로 그들에 의해 수용되는 문화를 가리킨다. 우리는 문화 향유의 민주적 평등권이 확산된 시대에 살고 있다. 대중은 이제 문화의 소외 지대, 문화의 변두리를 더 서성거리지 않는다. 그들은 오늘의 문화적 소비의 주체들이며, 그들의 정서나 감수성에 부합하지 않는 문화 상품은 구매와 향유의 대상에서 단호하게 배격된다. 대중 문화는 가치 부정적인,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 아니다.
‘저속한’ 대중 문화에 퍼부어지는 가장 흔한 비판은 그것이 심미적 · 지적으로 타락한 것이며, 현실 ‘도피주의적’이라는 것이다. 낭만적인 연애담, 기담, 권력과 부에 대한 이야기, 폭력, 선정적 내용을 담은 대중 문학에 탐닉하는 것에도 마찬가지 비판이 퍼부어진다. 특히 사회주의적 전망과 이념에 매달리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대중 문학은 현실 도피적이며 “더 나은 세계를 지각하는 능력, 즉 혁명적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말살시키고 좌절시킨다.”는 비난을 사곤 한다. 정말로 대중은 ‘도피’하려고 하는 것일까? 무엇으로부터?
대중 문학에는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또는 카뮈의 문학과 달리, 그리고 최인훈이나 이청준 또는 조세희의 문학과 달리 세계에 대한 근원적 전복력이 없다. 어쩌면 대중 문학은 기분 전환, 야릇한 흥미, 정서적 위안, 이국 정취, 삶의 곤경으로부터의 일시적인 해방감을 맛보게 하는 데 그칠지도 모른다. 대중 문학이란 ‘성스러움을 상실한 것에 대한 예술’인 팝 음악과 비슷한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말하고 있듯이 팝 이전의 예술이 ‘심층적인 세계상’이라는 것에 근거한 데 반해 팝은 ‘기호의 내재적 질서에 동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시 말해 팝은 “기호의 산업적 대량 생산, 환경 전체의 인위적 · 인공적 성격, 사물의 새로운 질서의 팽창해버린 포화 상태, 아울러 그 교양화된 추상 작용에 동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오규원이나 장정일, 유하의 상품 광고시들을 보라. 그들의 시는 ‘심층적인 세계상’을 반영하지도 않고, 세속 도시에 존재하지 않는 ‘성스러움’을 찾아 떠도는 모험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쏟아내는 상품의 기호들을 만드는 상품 광고에 주목하고, 때로 그것을 작품 속에 그대로 ‘차용’하기도 한다. 이제 문학은 문학 아닌 것과 몸을 포개고 새로운 문학을 낳고 있다. 그것의 이름은 ‘저속한’ 대중 문학일까?
대중 매체의 확산과 더불어 대중 문학 시장은 날로 커지는 추세다. 그러나 대중 문학은 여전히 제도권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 오늘의 대중 문학과 정통 문학은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대중 문학과 정통 문학은 영향을 주고받는 삼투 작용에 의해 서로 속성들을 힘껏 빨아들이며 ‘제 것으로 만들기’의 흐름을 보여준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같은 작품은 대중 소설의 영역에서 훨씬 즐겨 쓰는 추리 기법을 ‘빨아들여’ 심각한 주제를 훌륭하게 전달하고 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대중 문학이 가장 흔히 다루는 주제인 성, 과잉의 에로티즘이 재현된다. 대체로 오늘의 한국 소설들은 삶의 크고 무거운 것, 이를테면 사회, 역사, 분단, 통일, 이데올로기, 도덕, 책임, 이성, 혈연적 유대, 필연성, 인과론에 관한 것보다는 작고 가벼운 것, 즉 미시적 일상, 자아, 욕망, 성적인 것을 경쾌한 어법으로 그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중 문학이 즐겨 다루는 주제를 새로운 층위에서 재현하고 있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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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마광수의 『권태』,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 하재봉의 『블루스 하우스』 같은 소설들은 이미 정통 문학과 대중 문학을 가르는 경계가 얼마나 무용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대중 문학이 뿜어내는 삶과 세계의 현란한 이미지들은 그것을 향유하는 대중의 욕망과 자의식의 결에 스며든다. 감동한 나머지 모두 눈물을 흘린 설교에 딱 한 사람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누가 그에게 왜 눈물을 흘리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꾸한다. “나는 이 교구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오.” 대중 문학이라고 무조건 저속한 싸구려 문학으로 취급하는 태도는 ‘맹목의 관점’에 갇힌 그 어리석은 사람의 태도와 다를 바 없다.
정통 문학과 대중 문학의 경계를 지우는 소설들로 꼽히는 〈비명을 찾아서〉와 〈아담이 눈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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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대중은 숱한 개체의 분열된 개성들의 집합이다. 대중은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는다. “동질적이고, 무정형적이고, 무차별적”인 그들은 현실의 중심에서 몸 비비며 악착같이 나날의 ‘살아냄의 의미화’를 일궈내기 위해 애쓴다. “소외, 불신, 원자화, 부도덕성, 순응성, 무력한 동질성, 도덕적 공허감, 익명성, 자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대중 사회 속에서 대중의 감성과 경험, 욕망과 본능, 동경과 백일몽을 빨아들이고 이를 낯익은 것으로 그려내는, 대중에 의해 ‘소비되는’ 대중 문학에 씌워져 있는, 의식을 마취시키고, 현실에서 도피하게 만들고, 건전한 사회 비판 의식을 잠재운다는 혐의는 벗겨져야 한다.
고고한 지식인의 관점에 서서 대중 문학을 업신여기고 논의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사람은, 이미, 빠르게 와버린 변화된 현실의 맥락을 아직 읽어내지 못한 사람이다. 대중 문학에 대한 논의는 열려 있어야 하며, 우리는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새로운 통찰력과 새로운 심미적 · 윤리적 기준에 의해 다시 길어올려야 한다. 대중 문학은 오늘의 소비 사회의 지평을 가로질러 황금빛을 뿌리며 날아가는 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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