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2월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청주] 으뜸중의 으뜸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1베드ㅡ5, 1 - 4
† 복음 : 마태 16, 13 - 19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본디 고대 로마에서 2월 22일은 가족 가운데 먼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관습에 따라 4세기 무렵부터는 이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이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이다. 그러나 6월 29일이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새로운 축일로 정해지면서,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축일로
남게 되었다.
★ 예수님에게서 ‘내 양들을 돌보라.’는 소명을 받은 베드로
(요한 21,15-17 참조)는 이제 자신의 서간에서 교회의
원로들에게 하느님의 양 떼를 열성을 다해 돌보라고 권고한다
(제1독서).
★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이를 고백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가진 베드로를 당신 백성의 반석으로 삼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베드로 사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의 본디
이름은 시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튼튼한 머릿돌로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름을 주신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곧
베드로 사도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베드로는 그다지 반석과 같은 인물감이 되지
못합니다. 반석이라고 하면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신앙과
변함없는 충절이 있어야 하는데, 베드로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마태 26,34 참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며 물 위를 걷다가도
그 믿음이 흔들려서 물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합니다
(마태 14,28-31 참조). 그리고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전승에 따르면 로마의 지도자가 되었던 그는 박해가 일어나자
신자들을 버려두고 로마에서 도망치려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튼튼하기보다는 나약하고, 충절이 있기보다는 배반의
사도였으며,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보다는 자주 흔들리는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인간 시몬은 나약하지만, 하느님께서
그를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약한 그는 자주
흔들렸지만,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시어 성장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어느 한 공동체의 ‘베드로’, 곧 ‘반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지 잘 아시면서도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계십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으뜸 중의 으뜸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2월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 16,13-19
으뜸중의 으뜸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여 지상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사도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더냐?”
(마태16,13)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16,15)하고 물으셨습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는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나의 소신과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마태16,16) 한 신앙고백이 베드로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오늘 나의 고백으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구세주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587년 바빌론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하여 약 50년간 바빌론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유배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갑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을 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과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여러 예언자처럼 역사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으뜸중의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만큼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소명에 귀 기울이고 복음적인 삶에 결코 소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텔레비전 시청 시간을 10분만 줄여 성경을 봉독한다면
하루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반 신문이나 잡지를 보는 시간
5분을 교회 서적을 읽는 시간에 할애 하거나 묵주기도 1단을
한다면 기도의 맛을 느끼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는 시간에 못지않게 영적인 몫을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오늘을 변화와
쇄신의 날로 삼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지금 저는 본당신부의 삶이 아닌, 교구에서 성소자 육성을
담당하는 성소국장 신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 역시
본당신부를 해보기는 했지만, 본당이 참 재미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많은 교우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사목을
하다보면, 많은 보람과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교구에 있다 보니 그러한 재미를 얻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본당 신자보다는 신학생, 예비신학생들을
만나야 하고, 오로지 신자는 한 달에 한 번 이루어지는
성소후원회 미사를 통해서만 만날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사람들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신부님도 본당신부 하고 싶죠?”
본당신부를 하기 싫다면 거짓이겠지요. 또 본당신부로 살고
있는 신부들이 무척 부럽습니다. 그런데 제가 운영하는
카페(http://www.bbadaking.com)를 통해 더 큰 보람과
기쁨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본당신부가 미사 때 강론하면 몇 명이나 듣습니까?
아무리 큰 본당이라 해도 평일에 기껏해야 2~300명 듣겠지요.
그리고 미사가 끝나면 그 강론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합니까? 아니지요. 그냥 미사가 끝나면 어떤 강론을
했는지도 기억 못하는 신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제
카페에서 보통 800~1,000명 정도가 제 강론을 읽습니다.
또 많은 분들이 제 강론을 읽고서 다른 사이트로 옮겨주십니다.
이런 식으로 제 강론을 읽는 분이 하루 몇 천에서 몇 만
명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는 인터넷이라는 공간. 그러나 이 공간
안에 저는 어마어마하게 큰 본당을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 모두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이곳저곳으로 전파하고 있었습니다(다른 사이트로 제 글을
옮겨주시고, 열심히 댓글을 다시면서 강론에 대한 피드백을
해주시는 것 등등). 얼마나 보람 있고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도 ‘본당신부’만을 꿈꾸고 있었던 한심한 제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어떠한 상황에
상관없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고백 없이 그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때로는 부정적인 행동과
말을 통해 남을 딛고 일어서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온 소중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 가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내가 아닌 주님이 첫째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베드로의 고백인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을
내 자신이 하고 있었는지를 묵상해보셨으면 합니다. 이러한
고백 없이 내 자신을 낮출 수가 없으며, 지금의 내 자리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도 보고 있는 사람이 없을 때의 당신이 당신의 참다운
모습입니다.(앤 랜더스)
여러분이 열심히 활동해주셔서 종교부분 카페 중에서
처음으로 15위를 했습니다.
기쁜 소식을 어떻게 전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우리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말씀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제가 어느 날 전철을 타고 서울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세 지긋하신 분께서 손에 성경을 들고, 또 몸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복음을 전한다고 소리
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을 하나하나 노려보면서
믿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외치며 말이지요.
솔직히 저렇게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을까 싶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도 저분 때문에 예수님
믿지 않겠다고 도망갈 것만 같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제는 앞선 분과 같은 모습이 맞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는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시는
분은 사람들을 노려보고 저주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미소와 사랑을 나눠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를 통해
주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전파. 우리 모두의 숙제입니다. 어떻게 하십니까?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비록 흔들리는 우리지만
2013년 다해 2월22일 성 베드로좌 사도직 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 16,13-19
비록 흔들리는 우리지만
그간 갈릴래아 호숫가를 배경으로 활기찬 사목활동을
펼쳐 오신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제 사람들을 떠나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람들을 피해 꽤나 멀리
올라온 것입니다.
요르단 강 상류, 헤르몬산 아래 한적한 이곳 카이사리아
필리피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결정적인
질문 한 가지를 던집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이 나의 정체성, 나의 신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은 것 같은데, 너희들이 혹시 들은 말이 있느냐?”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은 다들 그동안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말들, 차마 예수님께 직접 말씀드리기
송구했던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큰 논란거리였습니다. 그는 깡촌 나자렛
출신 사람이라는 것, 그의 부모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는 목수였다는 것, 그는 우리와
별반 다른 것이 없던 사람이라는 것...
그러나 공생활을 시작하신 후에 확 바뀐 면모 앞에
사람들은 햇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설교말씀은 이전의 그 어떤 명설교가보다
힘차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오랜 불치병을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는가 하면 죽은 사람조차 소생시켜주었습니다.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할 뿐 아니라 마귀도 척척
몰아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갔습니다. 오시기로 한 메시아가 틀림없어. 아냐,
이런 메시아께서 이런 깡촌에서 출신일수는 없어.
그럼 그분이 행하신 기적과 치유활동은 어떡하고?
메시아 아니라면 그게 가능한 일이냐구? 아냐, 그래도
메시아는 아닐거야. 혹시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드디어 예수님은 시선이 제자들 한명 한명을 훑어
지나갑니다. 이윽고 제자들을 향해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비록 간단한 질문이지만 예수님의 이 질문은 꽤나 큰
부담을 주는 질문입니다. 전 존재를 걸고 대답해야하는
무거운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응답자의 신원이 결정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응답하는
사람이 “세례자 요한이요!”라고 했다면, 그는 아직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언자 가운데 한분이요!”라고
응답하면 아직 그는 구약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대답에는 의구심이나 주저함이 조금도
없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 갖고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수시로 흔들리는 베드로였습니다. 숱한 인간적 결핍을
지니고 살아왔던 베드로였습니다. 때로 과격했습니다.
때로 소심했습니다. 상처도 많았습니다. 어디로 튈지
몰랐습니다. 때로 너무 앞서나가다가 예수님으로부터
호되게 야단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수많은 인간적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스승님 안에 하느님의 신성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자신의 눈앞에 서 계신
스승님이 곧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흔들리는 베드로, 심약한 베드로였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진리, 예수님은 곧 이 땅에 강생하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던 베드로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위에 당신의 교회를 건설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오늘 우리 역시 이런 저런 풍파에 시달리며 다양한 결핍
속에 살아가지만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메시아
하느님으로 고백함을 통해 또 다른 베드로, 또 다른 반석,
또 다른 교회로 세상 앞에 우뚝 설 수 있을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살만한 세상이 여기 소개 됩니다.
2013년 다해 2월21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 살만한 세상이 여기 소개 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종종 맞아떨어지는
세상입니다. 믿었던 친구에게 사기 당하고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도 당합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지만 살만한 세상이 여기 소개 됩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
믿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인류사에 그리스도교를
뿌리내려 커가게 했습니다. 인류에게 죽음이후 세계를
알린 계시종교가 탄생하게 된 겁니다.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마태오 16,16)”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묵상 글 -
◈ [의정부] 인간관계라는 실타래
우리는 살면서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면 본의 아니게 관계가 틀어지고, 서로 등지고
으르렁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또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미워하는 감정을 마음속에 품고 겉으로는
친한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여러
사람과 틀어진 채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결국 땅에서
매여 있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럼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하늘에서도 매여 있게 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참 기쁨과 행복을 간직한 채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인간관계라고 하는 실타래를
잘 풀어야 할 것입니다. 엉킨 실타래를 잘 풀려면
서두르지 말고 처음과 끝이 어디인지 잘 살펴서
차근차근 풀어가는 게 상책입니다. 이것이 원만한 대인
관계를 위한 기술입니다. 실타래를 풀기 위한 캠페인으로
이렇게 제시하고 싶습니다. “서로를 알아줍시다.”
서로를 알아준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드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알아주셔서 하늘나라 열쇠까지 맡겨주시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때문에 살맛 나고 베드로는 예수님
때문에 살맛이 났을 것입니다.
문득 이런 문구가 생각나네요. “서로를 몰라줄 땐 서운함
가득, 서로를 알아줄 땐 기쁨이 가득!” 서운함은 자칫 미움을
낳고, 미움은 증오를 낳고, 영적 살인인 무관심을 낳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상대방이 “제 맘 알지요?”라고 묻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줍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럼
얽혀있는 실타래가 술술 풀리고 오늘 하루가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 김경진 신부(의정부교구 대건까리따스 위원장) -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 바닥을 치지 않아도
- 이해욱신부
<후속> 22. 바닥을 치지 않아도 됩니다, 내맡기면
영적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의 공통점은
그들이 "영육간에 바닥을 쳤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영적, 육적으로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자신의 처지를
어찌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자신의 "무능과 비천"을
처절하게 체험한 후, 하느님만이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하느님께 투신(내맡김)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공통점입니다.
저 자신도 영육간에 바로 그러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그 처지를 벗어나 이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올리고 있지만, 그때 그 상황에서는 제 자신이 얼마나
한없이 무력하고 보잘 것 없는 비천한 인간인지 도저히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맨 밑바닥에 내팽개쳐진 존재임을
실감했던 것입니다.
아마 혹시가 아니라, 정말 참으로 제가 그러한 체험을 갖지
못했다면, 저라는 미약한 존재가 도저히 현재와 같은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 아주 확실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옛날
누가 외쳤듯이 "오, 복된 병이여! 오 복된 죄여!"를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크게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섭리는, 하느님의 뜻은 오묘하십니다.
저 같은 놈을 "죄와 질병"으로 당신 가까이 이끌어 주시다니
말입니다. 하느님의 그 크신 은혜에 저는 오직 "백골난망"일
뿐이며, 또한 그래서 아침마다 저는 저의 비천한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으며 감사와 찬미를 하느님 앞에 올려드리며
매일을 하느님 뜻대로 살 것을 약속드릴 뿐입니다.
그렇다면, 소위 바닥을 친 인생만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는 않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새로
나기 위해서 모든 이가 다 바닥을 쳐야만 한다면, 이 세상의
바닥이란 바닥은 오래 전에 바닥이 나서 칠 바닥조차 이미
사라졌을 것이고 그래서 바닥을 치는 사람도 전혀 없을
것입니다.
바닥을 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영적으로 새로 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내
방식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내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기에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만들었다면, 하느님도
우리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든 이가 만들어진 것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사는 사람의 주인은 "나"이며, 하느님 뜻대로 사는
사람의 주인은 "하느님"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 내 뜻대로
사는 사람이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라고 말씀하신
입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뜻을 존중해 주며
그 뜻을 따릅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 뜻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에게 "헌신(내맡김)" 합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우심, 하느님의
은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통로가 바로 "하느님께 투신하는 것"입니다.
"투신"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어떤 일에 몸을 던짐, 전력을
다함"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냥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영원히 던져버리는 것, 즉 "내던짐"을 말합니다. 자신을
내던지면 자신이 죽게 됩니다. 자신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투신(내던짐)이란
"내맡김"과 똑같은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투신, 내던집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여 하느님께 "All-in"하는 것입니다.
"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투기"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확신도 없이 큰 이익을
노리고 무슨 짓을 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신앙은 투기가 아니라 분명히 투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투기"로 얻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오로지 "투신함"으로 얻어지는 나라입니다.
신앙은 "내던짐"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던지고 내맡길 때만이,
자신의 모든 것이 없어지고, 하느님의 것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변화된 그 사람 안에서만이 하느님의 능력이
온전히 작용하시어 그 사람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바닥을 치지 맙시다. 하느님께 내맡기면(All-in),
그 다음부터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다 이끌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All-in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100배 이상 갚아주십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러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All-in한 이에게 엄청난 대가로 보답을
해 주십니다. 일부러 힘들게 바닥을 치지 않아도 바닥을 친
것 이상으로, 자신이 "하느님 앞에 한없이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 미천한 존재"라는 사실부터 자신이 하느님의
은혜로 엄청난 존재인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까지도
일일이 하나하나 다 가르쳐주시고 깨우쳐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친히 당신에 대한 "앎"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이 친히 "스승"이 되어 주십니다. 이런 일이 세상
그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직 "거룩한 내맡김"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진실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아직 지금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실 때가 아니라고요? 자신이 너무 부족한 것이
많다고요? 그러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울 그때는
언제쯤일까요?
그때는 이 세상에서는 찾을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원래 "부족함", 그 자체니까요.
그러니까 내맡기는 것,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 그것만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확실하고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 모두모두 기쁘게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깁시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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