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 개념은 공학에서도, 진화 생물학에서도, 사회학에서도, 심지어 암묵적이긴 하지만 신학에서도 쓴다. 기능 개념을 잘 사용하지 않으면 인과론이 아니라 나쁜 목적론 즉 신비주의에 빠지게 된다.
우선 효과와 기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모든 효과가 기능인 것은
아니다. 온갖 효과들 중 특별한 것만 기능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TV로 사람을 패면 부상을 입히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하지만 “사람 망가뜨리기”는
TV의 기능이 아니다. 기능 개념은 어떤 구조의 기원과 관련되어
있다.
제일 이해하기 쉬운 공학적 의미의 기능을 먼저 살펴보자. TV의 기능은
특정한 전자기파를 수신하여 영상과 소리로 변환하는 것이다. TV의 복잡한 구조는 이 기능에 들어맞게
생겼다. TV가 그렇게 생긴 이유는 TV를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들이 TV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TV를 그런 식으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논의의 편의상 아주 거칠게 TV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해 보자. 먼저 인간이 “특정한 전자기파를 영상과 소리로 변환한다”라는 기능 또는
목적을 염두에 둔다. 그리고 그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는 구조를 생각해낸다. 즉 TV를 설계한다. 그리고
그 설계도에 따라 TV를 제작한다. 이런 과정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이 고도로 지적인 존재이며 손과 같은 기관이 있어서 물체를 잘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런 설명도 목적론이다. 목적론이면서도 훌륭한 인과론이다. 여기에서 “특정한 전자기파를 영상과 소리로 변환한다”라는 목적에 대한
생각이 원인이다. 이런 생각이 인간의 놀랍도록 정교한 뇌의 작동을 거쳐 TV 설계도라는 결과를 산출하여 결국 TV가 만들어지게 된다. 훌륭한 인과론인 이런 목적론을 “좋은 목적론”이라고 부르겠다.
인간과 같은 동물의 눈의 기능은 보는 것이다. 신학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고도로 지적인 존재인 신이 “전자기파를 이용해서 세상에 대한 정보 얻기”라는
기능 또는 목적을 염두에 둔다. 그리고 그 목적에 맞게 눈을 설계한다.
그리고 인간을 만들 때 그 설계도에 맞추어서 눈도 만들어준다.
신학의 기능론은 공학의 기능론과 거의 똑 같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공학에서는 설계를 인간이 하지만 신학에서는 신이 한다. 논리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신학의 이런 기능론은
훌륭한 인과론이며 좋은 목적론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물론 나처럼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면에서는 나쁜 인과론이며 나쁜 목적론이다. 인과 사슬 중에 신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주체를 삽입했기
때문이다. 신이 끼어들기 때문에 신학의 기능론은 신비주의적이다.
진화 생물학에서도 눈의 기능이 “전자기파를 이용해서 세상에 대한 정보 얻기”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초보자에게는 매우 헷갈리는 의인화를 하자면 자연 선택이 눈을 설계했다.
하지만 자연 선택은 지적인 존재가 아니라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나 신처럼 “전자기파를
이용해서 세상에 대한 정보 얻기”라는 기능을 염두에 둘 수 없다.
자연 선택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끼리는 거친 의인화를 해도 서로 헷갈리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초보자에게는 의인화가
쥐약과 같다. 의인화를 하지 않고 이야기해 보자.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옛날로 돌아가 보자. 눈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 돌연변이들이 생긴다. 이 때 거의 모든 돌연변이들은 해로운 영향을 끼쳐서 돌연변이가 생기기 전보다 앞을 더 못 보게 된다. 하지만 소수의 돌연변이는 이전보다 더 잘 볼 수 있도록 영향을 끼친다. 더
잘 보면 대체로 더 잘 번식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돌연변이를 품고 있는 개체는 평균적으로 더 잘 번식한다. 따라서 그 돌연변이 유전자가 개체군 내에서 퍼진다. 이런 식으로
눈은 점점 정교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자연 선택 이론은 눈의 기능 때문에 인간의 눈처럼 고도로 정교한 눈이 진화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더 잘 보면 대체로 더 잘 번식할 수 있다”라는 구절에 주목하자. 시각이라는 기능이 원인이 되어 유전자가 개체군에 퍼지는 결과로 이어지고 이것은 결국 정교한 눈의 진화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것은 훌륭한 인과론이며 좋은 목적론이다.
이번에는 기능론적 사회학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마르크스주의자나
페미니스트도 흔히 이야기하는 기능론을 살펴보자. 어떤 기능론적 사회학자는 “규범의
기능은 사회 유지다”라고 이야기할 것이고,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자본주의 체제 유지다”라고 이야기할 것이고, 어떤 페미니스트는
“강간의 기능은 여성의 예속화다”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이 때 테마는 다르지만
논리 구조는 비슷하다.
만약 그 어떤 기능론적 사회학자나 마르크스주의나 페미니스트가 “규범의 효과는 사회
유지다”라고, “지배 이데올로기의 효과는 자본주의 체제 유지다”라고, “강간의 효과는 여성의 예속화다”라고 이야기했다면
내가 그들을 굳이 비판하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효과 개념이 아니라 기능 개념을
사용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기능 개념은 기원과 관련이 있다. “규범의
기능은 사회 유지다”라는 명제는 “사회 유지를 위해 규범이 존재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곧 “사회 유지라는 기능 때문에 규범이 존재하게 되었다”라는 뜻이다. “사회 유지”가 원인이 되며 “규범의 존재”가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목적론이 될 수도 있고 나쁜 목적론이 될 수도 있다.
사회학의 기능 개념을 공학적 의미로 사용하면 적어도 논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는 좋은 목적론이 된다. 사람이 TV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TV를 설계하듯이, 사람(선지자)이 규범의 기능 즉 “사회 유지”를 염두에 두고 규범을 설계했다고 보면 된다. 나는 이 가설이 실증적으로 가망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단지 논리적인 측면만 따질 것이다. 이것은 훌륭한 인과론이다.
사람의 뇌 속에 “사회 유지”라는 목적이 표상되어 있으며 이 표상은 뇌의 고도로
정교한 구조 덕분에 “규범의 구조”에 대한 설계로 이어진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이야기도 비슷한 논리 구조로 구성할 수 있다.
사람이 TV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TV를 설계하듯이, 사람(지배 계급 구성원)이
이데올로기의 기능 즉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염두에 두고 이데올로기를 설계한다.
페미니스트의 이야기도 비슷하게 구성할 수 있다. 사람이 TV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TV를 설계하듯이, 사람(남자)이 강간의
기능 즉 “여성 예속화”를 염두에 두고 강간이라는 행위를 생각해낸다.
사회학의 기능 개념이 신학과 결합될 수도 있다. 신이 “사회
유지”라는 기능을 염두에 두고 규범을 설계한다. 그리고 그 규범을 인간에게 가르친다. 또는 그 규범이 인간 본성의 일부가 되도록 인간에게 장착한다. 이것은
적어도 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훌륭한 인과론이며 좋은 목적론이다.
나는 사회학의 기능 개념을 신학과 결합해서 썰을 푸는 저명한 사회학자를 본 적이 없다.
아직 대다수 사회학자들은 진화 심리학을 거부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학의 기능 개념을 자연 선택과 결합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회학의 기능 개념을 공학적 의미로 사용하는 사회학자도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뭔가? 그들은 인과론을 내세우면서도 즉 어떤 사회 제도, 관습, 문화, 이데올로기의
기능이 그 제도, 관습, 문화, 이데올로기가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인과론의 기제(mechanism)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지독하게도 나쁜 목적론이다. 그들은
필요하면 그냥 생긴다고 믿는 듯하다. 규범이 사회 유지에 필요하니까 어떤 인과론적 기제의 도움이 없이도
그냥 규범이 뿅 하고 생긴다는 식이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이것은
논리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나쁜 목적론이다. 적어도 신학자들은 신이라는 기제를 댄다.
공학의 기능론에서는 인간의 뇌라는 기제가 기능을 구조로 변환해준다. 즉
인간의 고도로 정교한 뇌가 “특정한 전자기파를 영상과 소리로 변환한다”라는 기능(원인)에서 출발하여 TV의
정교한 구조(결과)에 도달하도록 해 준다. 진화 생물학의 기능론에서는 자연 선택이라는 기제가 “전자기파를 이용해서
세상에 대한 정보 얻기”라는 기능(원인)에서 출발하여 눈의
정교한 구조(결과)에 도달하도록 해 준다.
반면 기능론적 사회학자든, 마르크스주의자든, 페미니스트든 많은 사회학자들이 아무런 기제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기능론을 펴고 있다. 이것은 최악이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신학보다 더 신비주의적이다. 왜냐하면 신학은 적어도 논리적인 측면에서는 신비주의가 아닌 반면 많은 사회학자의 기능론은 심지어 논리적인 측면에서도
신비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자들은 자신이 신학자들보다도 더 신비주의적인 아주 나쁜 목적론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목적이 있다고 수단이 뿅 하고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뇌나 자연 선택처럼 수단 즉 목적에-부합하는-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2011-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