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핵심은 ‘쏠림’, 국토 구석구석 피가 돌게 하자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유튜브 채널 ‘도시의 정석’ 운영
1950년대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간절한 꿈은 둘, 수출 100억 달러와 1인당 국민소득 1천 달러였다. 1980년대 초 그 꿈을 마침내 이뤘고, 15년 뒤인 1995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내달려 2만, 3만 달러의 선진국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행복도는 거의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 연애도, 결혼도,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도 버거워하는 청년들. 한 해 100만 명씩이던 출생아 수는 20만 명대로 줄었고, 합계출산율은 0.8에도 못 미쳐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나라로 꼽히고 있다.
선진국인데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 원인을 바로 개발시대에서 찾았다. 속도를 강조하고 빠른 성과와 효율만 중시했던 ‘개발병’ 탓이다. 생명체가 자랄 때 필요한 시간이 있을진대 너무 빨리 성장해서 앓게 된 ‘성장통’이다. ‘민주’도 ‘자치’도 ‘분권’도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채 덜컥 선진국이 돼버린 후유증이다.
만병의 근원, 수도권 과반인구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우리는 개발시대를 살아왔다. 개발시대를 이끈 박정희 정부는 ‘빨리빨리’를 외치며 속도를 강조했다. 그 시대를 관통했던 전략은 ‘성장거점 개발론’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토를 골고루 균형 있게 키우는 대신, 성장의 거점을 집중적으로 키우자는 전략이었다.
성장의 거점으로 대기업을 육성했고, 대도시를 키웠다. 대기업이 국가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키우고, 자영업자들도 상생할 수 있게 경제발전의 주축이 되라는 뜻이었을 거다. 대도시를 키운 것도 성과와 효율 때문이었다. 1950년대 중반 157만 명이던 서울 인구는 15년 뒤인 1970년 500만 명을 넘어섰고, 다시 20년 뒤인 1990년에는 1천만 명을 돌파했다. 서울과 부산이 거대도시로 성장했고, 두 도시를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뚫렸다. 국가의 재정투자는 자연스럽게 경부 축에 집중됐다.
성장거점 개발은 빛나는 성취를 거뒀다. 단기간에 경제발전과 도시화를 이뤘고 선진국으로 도약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빛나는 성취 뒤에 깊은 그늘도 드리웠다. 대기업은 잘나가지만,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은 힘든 세월을 각자도생하듯 살아내고 있다. 서울과 부산을 비롯한 대도시들은 블랙홀처럼 사람과 활력을 빼앗아 가고, 중소도시와 농산어촌 시골마을들은 사람도 에너지도 다 내주고 소멸 위기를 앞두고 있다.
1975년 당시 수도권에는 전 국민의 31.5%가 살았다. 수도권 면적은 국토 면적의 11.8%에 불과한데, 3분의 1에 못 미치는 인구가 살았던 수도권에 2019년 기준 절반 이상의 국민이 살고 있다. 1970년대 당시 기초지자체 대부분이 인구 5만 명 이상이었고 조금 큰 도시들은 10만 명을 보유했는데, 현재는 기초지자체 3분의 1이 5만 명 미만이다.
마을과 도시를, 지역과 국토를 생명체로 보자.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 몸처럼 바라보자.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상태인가? 머리에 해당하는 수도권은 피가 너무 쏠려 터지기 직전인데, 손끝과 발끝은 피가 돌지 않아 괴사 직전 아닌가? 소멸을 앞둔 농산어촌 시골마을과 지방 소도시를 생명체로 생각한다면, 아니 내 몸의 일부로 본다면 어찌할 것인가? 피가 돌지 않아 괴사하면 잘라낼 것인가? 왼발 오른발 자르고, 왼팔 오른팔까지 자르고도 내 몸은 지속 가능할까?
대한민국이 지속 가능하려면 국토의 균형발전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고, 구석구석 골고루 피가 돌게 해야 한다. 수도권으로 더는 인구가 쏠리지 않게, 비수도권 지역에서도 행복하게 일하며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야 한다. 국가재정을 이제 비수도권에 돌려야 한다.
국토 균형발전에 가장 의지가 강했던 노무현 정부도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수도 이전의 꿈은 좌절됐고, 공공기관 지방 이전은 아주 잘한 정책이었지만 혁신도시라는 이름의 신도시를 건설해 이전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텅텅 비어 있는 지방 중소도시 원도심에 이전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구감소 시대와 저성장 시대에 새로운 개발은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새로 일을 벌일 게 아니라 빈 곳을 고치고 채우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유일한 해법 ‘일백탈수 지역민국’
내 몸 어딘가 아프면 그곳의 증후만 볼 게 아니라 몸 전체를 보고 병의 근본 원인을 찾아 치유해야 한다. 대한민국 병의 근본 원인은 쏠림이다. 편중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이대로 가면 양쪽 다 공멸이다. 피가 돌고 기가 통해야 건강하듯 한쪽으로 쏠리던 인구 흐름을 멈추고 되돌려야 한다.
지난 2021년 연구년을 맞아 지역살이를 했다. 하동, 목포, 전주, 강릉 네 곳에서 한달살이를 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로컬에서 더 행복하게 일하며 사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지역살이의 결론은 ‘일백탈수 지역민국’ 운동이었다.
“일 년에 100만 명씩 탈수도권 해서 지역에 우리가 꿈꾸는 민국을 만들자.” 이것이 내가 찾은 유일한 해법이다. 탈수도권의 인구 이동은 크게 세 흐름이다. 로컬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의 탈수도권은 이미 시작됐다. 가장 기대하는 것은 베이비부머들이 고향으로 또는 로컬 어디로든 옮겨가 ‘우아한 조연’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여생을 사는 것이다. 더 좋은 교육환경을 로컬에서 찾는 학부모와 학생들의 이주에도 기대를 건다.
수도권을 떠나 뿔뿔이 흩어지지 말고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모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우리가 주인인 나라, ‘지역민국’을 만들자. 대한민국은 시민이 주인인 지역민국의 합이어야 한다.
인구소멸 위기를 극복하는 단 하나의 해법은 로컬로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두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첫째는 살 집이고, 둘째는 자가용 없이도 편리하게 오가게 해주는 대중교통이다. 로컬에서 한달살이, 반년살이, 일년살이를 할 수 있게 머물 곳을 준비해 사람을 초대하고, 대중교통과 자전거와 보행만으로도 어디든 오갈 수 있게 ‘대자보 도시’를 만드는 데 힘쓰자.
전주 한달살이를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전북의 문제 역시 대중교통이었다. 전라북도 14개 시군을 사통팔달 연결해 주는 ‘전북 BRT’를 도청에 제안했고, 도의회의 초대를 받아 도의원들에게 설명했다. 덩치를 키운 ‘메가시티’보다 ‘소도시연합’이 더 좋은 해법이다. 가까운 시군들이 서로 인구 뺏기 경쟁을 할 게 아니라 원활한 연결을 통해 상생을 꾀해야 한다. 연결이 불편하면 각자도생의 제로섬 게임이지만, 14개 시군이 연결된다면 전라북도는 하나의 생활권이 돼 상생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멋진 나라이고 우리는 뛰어난 국민이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매우 후진적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경쟁만 시키는 ‘미친 교육’과 부동산 문제, 그리고 빤히 눈앞에 다가온 지방소멸 문제가 우리가 앓고 있는 중병의 명백한 증빙들이다. 밑도 끝도 없는 이기심이 문제고, 이는 이타심의 회복 없이는 풀리지 않는다. ‘이타가 곧 이기’라는 상식의 회복을 기대한다. 로컬은 이대로 소멸돼도 좋은가? 아깝지 않은가? 서울만 남고 지역들은 다 사라져도 좋단 말인가? 우리 고향인데도? 맑은 피가 구석구석 흐르게 하자. 대한민국의 뿌리인 넓고 깊고 풍부한 로컬을 죽이지 말고 살리자. ‘행복한 선진국, 대한민국’으로 가는 길은 로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