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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한마디 99
주님과 한 몸을 이루어야 믿음 그리고 형통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한국은 좀 있으면 설날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가장 많이 보여지는 것이 겨울철 길가에서 파는 각양의 풀빵들 입니다.
국화빵도 있고, 붕어빵도 있고, 땅콩빵도 있습니다.
재료는 같은데 모양은 제 각각입니다.
왜 그런가요? 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다양한 해석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각자가 성경을 해석하는 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적으로 해석을 하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으로 해석을 합니다.
땅에 속한 사람은 땅 차원으로 해석을 하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 차원으로 해석을 합니다.
자기가 경험한 것 안에서 성경이 주는 메시지가 다른 것이지요.
아주 이성적인 학자들은 합리적으로 성경을 해부 합니다.
거부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식적인 이야기 이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울려 나오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은 들을려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면서 성령을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하시면서 의미 심장한 설교말씀하신것이 요한복음14-16장의 말씀 입니다.
여기에서의 말씀의 주제는 JX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후에 승천하게 되면 성령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요, 성도의 삶은 그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 었습니다.
요14:2-3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롬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갈6:17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리고 오늘 살펴볼 내용은 성도의 형통 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이해하는 형통과 영에 속한 사람이 이해하는 형통이 다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적인 형통으로 이해를 하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형통으로 이해를 합니다.
육과 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릅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통을 이해하는 것도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게 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형통의 의미는 자기 유익으로 이해합니다.
자신이 계획하고, 행하는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만사형통한다고 합니다.
사업을 하면 잘 풀려 돈을 많이 벌어 들입니다.
공부하는 자녀들은 1등을 놓치지 않고 대 입시도, 취직시험도 철컥 철컥 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요셉의 형통은 그 반대입니다.
인간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요셉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가 됩니다.
요셉은 애매히 고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고 합니다.
분명히 요셉은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데 이를 형통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형통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섭리적 창조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히시어 당신의 목적하신바를 이루어 내시고자 할때에 동역하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거부감없이 받아들일때 이를 형통이라 하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형통인가요?
오늘은 하늘 차원에서 영적인 형통을 살펴볼까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는 부모와 자식 같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자식이 그 부모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의 차이와 같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식을 간섭하는 것과 잔소리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이가 바라는 사랑은 간섭하지 말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부모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아픔으로 다가올까요?
이는 우리는 우리 육신의 유익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언약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이 담고 있는 내용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간섭을 해 가십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형통입니다.
이를 요셉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셉의 출생 자체가 다른 형제들과 다릅니다.
다른 형제들은 육으로 낳지만 요셉은 합환채(성령)로 났습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합환채로 난 요셉에게 언약을 심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꿈으로 나타났습니다.
볏집단이 단체로 자기에게 절을 한다든지 하는 꿈으로 형들의 앙심을 사게 됩니다.
게다가 아버지인 야곱은 요셉이 귀엽기만 하니 형제들이 편애를 받는 요셉을 시기 합니다.
이런 저런 연유로하여 그는 애급의 보디발 장군집의 종이 됩니다.
어느날부터 장군 부인의 눈치가 이상하다 싶더니 적극적으로 유혹을 합니다.
요셉은 여인의 얼굴보다 주님의 음성이 더 앞서는 경건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장군님이 모든것을 다 맡기셨지만 장군의 부인은 맡긴적이 없어요.” 하고는 그자리에서 벗어나 도피합니다.
이 일로 억울하게 감옥에 가는 일이 발생 하지만 누구도 원망치 아니하고 만물의 섭리자이신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그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감옥살이 하면서 고급관리들의 언행을 주의 깊게 관찰할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처음 당하는 정치 이야기이기에 흥미도 있었습니다.
이런 감옥의 생활을 하나님은 “형통케 하였더라” 라고 표현 합니다.
도저히 이해 할수 없는 일이지요.
그리고 이 훈련이 끝나면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려나 했는데 왕궁으로 인도 하신 겁니다.
여러 과정을 거쳐서 아버지 야곱과 모든 형제와 그 가족들과 조카들 모두 70명의 대가족들을 애급으로 인도하여 아주 비옥하고 기름진 고센땅에 정착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모두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신 그 예언하심을 이루시는 데에 요셉이 쓰임 받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주님의 섭리에 사용되어진 것을 사명이라 하며 그 사명에 따를 때에 이를 형통이라 합니다.
종교개혁의 두 사람의 거두 하면 마틴루터와 죤 칼빈 입니다.
칼빈의 형통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31세에 결혼하게 되는데 그가 바라는 여인상은 믿음좋고, 신실한 여인이었습니다.
어찌 어찌하여 그런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은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7명의 자녀가 있는 년상의 과부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여인이라면 하나님의 일에 동역이 가능하겠다는 판단에 결혼 합니다.
도대체 고민하지 않습니다.
호세아 처럼 그는 7명의 자녀를 데리고 오는 이 여인과 결혼 합니다.
3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아들을 안게 됩니다.
그러나 몇년 살지 못하고 그 아들은 죽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도 몸이 약하여 결혼 9년만에 죽습니다.
아내를 잃고 15년동안 독신으로 지내니 얼마나 고통이겠습니까.
더구나 그는 움직이는 병원이라 할 정도로 질병이 많앗습니다.
열병, 담석증, 소화불량, 변비, 두통, 천식, 통풍 등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다가 54세 장년의 나이에 주님의 부름을 받앗습니다.
아마도 사주팔자보는 점쟁이들이 칼빈을 봣다면 되게 재수 옴 붙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상 누구도 이루지 못하는 세계의 모든것을 바꾸어 놓은 인물입니다.
그의 성경 주석이며 신학적 정리는 당시에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경지의 것이었습니다.
그의 유언은 “무덤에 묘비 세우지 말라” 이유는 그것으로 주님 영광을 가릴까 염려 했기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자!
어떻습니까??
요셉은 사명을 통하여 명성도 얻고 권세도 잡앗으며 부모 가족들도 만나게 됩니다.
정말 형통 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절대로 형통이라 할 수가 없을것입니다.
그럼에도 칼빈은 주님의 입장에서 성경적으로는 형통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칼빈은 세상 가치로 볼때에 그 어떤 복도 없었습니다.
건강하지 못했고, 늘 질병으로 고난속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자식 복도, 아내 복도 없었고, 건강의 복도,장수의 복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밝혀내는 복을 받은 하나님 나라의 형통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시34:2-9
34:2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4: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34: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34:5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34: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34: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4: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오늘은 요기까지 팡팡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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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한 순교자가 장작더미위에 맨발로 올라섰다. 이제 막 불을 질러 화형을 집행하려는 순간 자기의 화형집행 형리를 감독하던 치안판사를 가까이 오라고 했다.
“죄송하오나 판사님의 손을 내 가슴에 얹어 보십시오. 저는 이제 곧 화형을 당하는 몸이옵니다.
만약 저의 심장이 평상시보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뛴다면 저의 하나님을 부인하셔도 좋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순교자의 표정이 너무 담담하여 의아했던 그는 떨리는 손으로 순교자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순교자의 가슴은 화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침대에 잠자려고 누운 사람처럼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치안판사는 너무나 놀랐다. 이 비범한 힘이 어디서 왔단 말인가.
죽음이 불신자들에게는 불안한 것이요. 두려운 것이며 고통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으나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요. 주님이 예비하신 아름다운 영원한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니 어찌 불안하며 두려우랴.
무디 선생은 “세상이 점점 멀어지니 천국문이 열린 것이 보이는구나”라고 하며 기쁘게 세상을 마쳤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천국문이 보이지 않는다면 기쁘게 죽어갈 수 없을 것이요, 기쁘게 죽어가지 않을 자가 어찌 천국에 가겠는가. 마지막 모습이 그의 행방을 말해 줄 것입니다.
이들 모두가 주님 안에서 형통의 삶을 살으신 어른들 이십니다.
코로나 시대입니다.
갑자기 미얀마의 지인이 그리고 그 가족이 학교(수용소)에 갔고 모친은 병원에 입원 했답니다.
그리고 그 모친은 입원한지 이틀만에 세상을 떠났답니다.
보지도 장례도 모른체 화장한 유골가루 박스 하나만을 전달 받앗답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2018년, 2019년, 2020년초에 우리는 4차, 5차 산업혁명시대라고 온 뉴스를 도배를 했었습니다.
AI, Big Brothers, 로봇트, 생각하고 토론도 하는 인조 인간, 그 어떤 목사보다 더 은혜스런(?) 설교하는 로봇트가 등장한다하여 과학의 위력 앞에 모두 아연 했습니다.
Corona 19 는 모든것을 앗아 갔습니다.
현재, 그 어떤 메스컴에서도 인간의 이성의 힘이나, 과학의 알통을 꺼내 놓지 못합니다.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만 지켜 보고 있을 뿐 입니다.
그럼에도 숨 쉴틈 없이 앞만 보고 달려 갔던 모든것이 허황 되었음을 차츰 깨닫게 됩니다.
이는 가나다라를 모른채 많은 사람들을 감동주는 명작 소설을 쓸 꿈을 꾼 문학 소녀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것을 내려 놓고 자신을 돌아 보는 계기가 되어 교회도 성도도 회개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성도들은 인간, 신, 죽음, 죄, 복음, 믿음, 구원, 영혼, 사탄의 정체의 문제를 알기 위하여 성경을 펴시고, 기도하기 시작 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니늬웨의 회개 운동이 잔잔하게 일어 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생명이 이처럼 바람처럼 왔다 사라집니다.
육체의 생명은 찰라적이며 시대와 형편에 따라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는 삶 입니다.
세상 가치로서의 형통이 아닌 영원 불변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형통을 소망하시며 또 그러한 삶이 주어지시기를 축복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