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5160]김부의(金富儀)시-낙산사(洛山寺)
원문=동문선 제19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東文選卷之十九 / 七言絶句
洛山寺
一自登臨海岸高。
回頭無復舊塵勞。
欲知大聖圓通理。
聽取山根激怒濤。
낙산사(洛山寺)-김부의(金富儀)
한 번 오르니 바다 언덕 드높으다 / 一自登臨海岸高
머리 돌리매 다시 묵은 티끌 없고나 / 回頭無復舊塵勞
대성(大聖)의 원통한 이치를 알고자 하거든 / 欲知大聖圓通理
산근에 부딪치는 노한 파도 소리 듣소 / 聽取山根激怒濤
[주-D001] 대성(大聖) :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가리킨 말인데,
관세음보살은 이근원통(耳根圓通)을 얻었으므로,
세계의 음성을 다 안다고 한다.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는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던 곳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역) | 1968
김부의金富儀자유(子由), 문의(文懿), 김부철(金富轍)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김부철(金富轍). 자는 자유(子由).
아버지는 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 김근(金覲)이며,
김부식(金富軾)의 아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097년(숙종 2) 문과에 급제하고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1111년(예종 6)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추밀원부사 김연(金緣)을 따라
송나라에 가서 문명을 떨치고 귀국하여 감찰어사가 되었다.
1117년 금나라 사신이 와서 형제국이 되기를 청하자,
금나라를 회유하기 위해 화의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재상들의 제지로 왕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첨사부사직(僉事府司直)이 되어 문학으로서 우대를 받았고,
인종이 즉위하자 어사중승(御史中丞)에 발탁되었다.
1124년(인종 2) 사은부사로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성과 이부·호부·예부의
3부상서(三部尙書)를 거쳐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역임하였다.
인종이 변방문제를 묻자, 경성(京城)과 여러 주진(州鎭)의 성을 더 높이고
못을 깊이 파며 무기를 비축하도록 하고,
사자를 보내어 상벌로써 주리(州吏)를 감독해야 한다고 하였다.
1134년 묘청(妙淸)이 서경천도와 신궁건립을 주장하자
형 김부식과 함께 극력 반대하였고, 이듬해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기전략책인 평서십책(平西十策)을 올리고,
좌군수(左軍帥)에 이어 지추밀원사가 되어 출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