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람에게 '겨울, 강원도 여행'은 로망이다. 겨울이면 더욱 빛나는 설원의 풍경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취재 일정을 짜면서 '대략 난감'의 상황에 봉착했다. "강원도에도 눈이 없어요! '눈 흉년'이 들어서 큰일입니다!" 곰배령을 관리하는 점봉산 생태관리센터 최준화 팀장의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운이 좋았다. 출발 하루 전 눈 소식이 들려왔다. 덕분에 새하얀 자작나무 숲길을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으며 걸었다. 곰배령의 관문인 진동리 설피마을에서 묵을 땐 눈까지 내렸다.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과 진동리 점봉산 곰배령을 다녀온 이야기를 싣는다.
■순백의 자작나무 숲에서 힐링
원대리 자작나무 숲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원대 산림감시초소'에 들러서 방명록을 적으면 입산이 허가된다. 초소에서 탐방로가 시작되는 1코스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이하 '속삭이는 숲')까지는 3.2㎞ 임도. 속삭이는 숲에 도착하기 전에도 곳곳에서 보이는 자작나무가 자칫 지치기 쉬운 겨울 산행에 위안이 됐다. 가족 단위, 혹은 연인들이 주로 걷고 있다. 햇살을 받은 자작나무가 반짝반짝 빛났다. 수피에 기름기가 많아서 탈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고 자작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오후 햇살에도 금세 자작자작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햇살에 자작자작 소리 들리는 듯
치유·탐험·힐링코스…마음대로
설피마을, 여름과 달리 적막감만
새하얀 주목 군락지 겨울 볼거리 1시간쯤 걸려 속삭이는 숲에 도착했다. 땅도 나무도 온통 하얀 순백의 세상이다. 수피가 하얗다 못해 은빛을 낼 정도로 뽀얗다. '숲의 귀족'이란 칭호가 무색치 않았다. 숲 전체 138㏊에서 자라는 나무 총 69만 본(本) 가운데 자작나무는 40만 본. 그 중에서도 속삭이는 숲에만 5천400그루의 자작나무가 빼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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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풍광이 얼핏 떠오르는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솔잎혹파리 피해를 입은 소나무 숲을 벌채한 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산림청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인제국유림관리소 박민지 주무관이 들려준다. 박 주무관은 또 "자작나무는 특히 추운 지방에서 자라지만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은 적당치 않고 분지형 구조에서 잘 자란다"고 말했다. 그 때문일까, 속삭이는 숲 표지판이 세워진 언덕 아래 자작나무 숲으로 내려서자 매섭던 바람이 잦아들고,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늘로 쭉쭉 뻗은 자작나무의 곧음도 비로소 이해됐다.
자작나무 숲 사이로 조성된 탐방로를 걸었다. 1코스(0.9㎞), 2코스(치유 코스·1.5㎞), 3코스(탐험 코스·1.1㎞), 4코스(힐링 코스·2.4㎞)를 마음 내키는 대로 걸으면 된다. 호흡을 조절하고, 체온을 느끼면서, 마음으로 관찰했다. 자작나무의 매끈한 감촉도 느껴 봤다. 새하얀 수피에 사랑을 고백한 청춘들의 낙서는 애달프기만 했다. 걷다가 지치면 자작나무 아래서 목을 한껏 뒤로 젖힌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진은 찍는 대로 그림이 되었다. 자작나무 아래 서 있는 그 자체가 힐링이다.
날이 몹시 추운 탓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디언집, 전망데크가 있는 1코스만 돌아보고 온 길을 되돌아갔다. 왕복 3시간 정도면 넉넉하다. 코스 난이도를 확인할 겸 3코스를 걸어 봤다. 전날 내린 눈이 얼어붙어 위험천만했다. 30분 정도 더 걸렸지만 산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자작나무 숲의 위엄도 볼 만했다. 3코스에서 모진 고생을 했건만 출발점인 초소 앞에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2012년 말 1만 4천50명이던 일반 탐방객 숫자가 지난해 21만 2천400명까지 는 것만 봐도 그 이유가 짐작된다.
■눈꽃과 설경이 인상적인 겨울 곰배령 자작나무 숲 방문이 계기가 돼 인제를 찾았지만 점봉산 곰배령 트레킹도 빠트릴 수 없다. 다음 날 오전 10시 입산 예약을 해 둔 터라 진동2리 설피마을에 여장을 풀었다. 1년 반 만에 다시 찾은 설피마을은 사람들로 북적대던 여름과 달리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개점휴업 상태의 펜션과 카페, 식당도 많이 보였다. 생태관리센터 최 팀장은 "눈 흉년이 계속되면서 탐방객이 확 줄었다"면서 "탐방객이 준 것 이상으로 걱정되는 건, 눈이 많이 와야 다가오는 봄과 여름에 야생화가 많이 필 텐데 올핸 그렇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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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곰배령 트레킹의 매력은 눈꽃과 설경이지만 올핸 예년만큼 눈이 내리지 않아서 관계자들이 울상이다. 대신 번잡하지는 않아서 호젓한 산길을 걷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사진은 곰배령 정상의 모습. |
봄과 여름, 심지어 가을까지도 곰배령(1,120m)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가 있다면, 야생화의 천국이자 '천상의 화원'이라는 이유 때문일 텐데 현 상황으로는 심히 걱정스러웠다. 곰배령은 강원도 산 치고는 높은 편은 아니지만 계곡이 깊어 눈이 오면 폭설에 가까운 눈이 내려서 화려한 눈꽃과 설경이 인상적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6월 이후 '하산 탐방로'(5.4㎞)가 새로 공개됐다. 생태관리센터를 출발해서 강선마을을 거쳐 곰배령 정상에 올랐다가 같은 코스로 되돌아오는 기존 탐방 코스(왕복 10.2㎞)와 별도로 곰배령 전망대가 세워진 쪽 하산 탐방로를 거쳐 생태관리센터로 연결되는 왕복 10.5㎞ 구간이다. 어차피 겨울 산행에선 곰배령을 포함한 점봉산 일대의 국내 희귀 동식물과 천연활엽수 원시림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생태계의 보고를 느끼기엔 계절적으로 한계가 있어 눈길 걷기로 만족해야 한다. 눈 덮인 주목 군락지를 보려면 하산 탐방로를 이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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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하산 탐방로' 모습. |
올라갈 때는 비교적 평이한 산길이어서 주위의 설경을 감상하며 산책하듯 올랐다. 쉬엄쉬엄 올라도 2시간이면 너끈하다. 중간중간 나타나던 계곡은 곳곳에 얼어붙은 뒤 눈까지 소복하게 쌓여 아이젠이 없었더라면 힘들 뻔했다. 눈길 산행이다 보니 올라갈 때와 달리 하산 탐방로 구간에선 3시간이나 걸렸다. 아이젠 말고도 스패츠, 등산 지팡이까지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정도로 눈 구경은 제대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눈밭에 푹푹 빠진 발을 꺼내느라, 줄줄 흐르는 콧물을 닦느라 잠깐잠깐 멈춘 그 시간이 '꿀 휴식'이었다. 삶에도 잠깐 멈춤이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하산 탐방로 구간에는 간이 매점이나 '무허가' 식당마저 없기 때문에 물과 간식, 요깃거리는 꼭 챙기는 게 좋겠다. 이미 떠나온 인제지만 오늘도 그곳에 눈이 오기를 눈 빠지게 기도했다. 찬란한 봄날의 곰배령을 위하여!
글·사진=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
여행 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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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래나무 줄기를 삶아서 틀을 만들고 한 달간 건조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설피' 제작 공정을 설명 중인 이규학 노인회장. |
■동절기 곰배령 예약·자작나무 숲 운영 시간
곰배령은 1일 탐방 인원이 300명 이내로 제한돼 있다. 2월 말까지인 동절기 입산 시간은 1일 2회(오전 10시, 11시) 회당 150명씩. 수~일요일 입산 허용. 탐방 예약은 산림청 홈페이지(www.forest.go.kr)→'점봉산 곰배령 생태탐방'에서 매주 수요일 오전 9시부터 주 단위로 4주차 일요일까지 가능하다. 산림청 예약이 마감되더라도 진동리 일대 민박집을 통해 '마을 예약'을 할 경우도 입산할 수 있다. 문의 인제국유림관리소 점봉산생태관리센터 033-463-8166.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오전 9시~오후 6시 운영. 오후 2시 입산 마감. 인제국유림관리소 산림경영팀 033-460-8036.
■교통편
승용차나 대중교통 모두 만만치 않다. 자가운전을 할 경우, 신대구부산고속도~중앙고속도를 이용해 홍천IC로 빠져나와서 원대리 자작나무 숲 입구 주차장까지 약 5시간 30분 소요. 내비게이션 주소는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남로 784(구 주소 원대리 763-4). 자작나무 숲에서 내린천을 따라서 진동2리 설피 마을까지는 약 1시간 소요. 곰배령 입산 출발점인 점봉산 생태관리센터 내비게이션 주소는 기린면 진동리 218(혹은 곰배령 주차장).
■먹을 것과 묵을 곳
자작나무 숲 인근에선 두부 전골과 비빔밥 등을 파는 '자작나무식당'(010-8819-1582), 원대리마을에서 운영하는 '자작나무마을 향토음식체험관'(033-461-4857·전화 확인 필요), 막국수와 곰취 편육 등을 파는 '옛날원대막국수'(033-462-1515)가 눈에 띈다. 설피 마을 식당은 여름과 달리 문 연 곳이 많지 않아서 전화 확인 필수. 곰배령 주차장 약간 못 미쳐서 '산골밥상'(033-463-3888)은 직접 담근 3년 된 된장으로 만든 찌개와 강된장 드레싱 샐러드, 나물과 장아찌까지 주인의 정성이 느껴지는 음식점. 설피마을 초입의 '산골나들이'(010-2277-4643) 식당도 영업 중이다.
숙박 정보는 인제군 농산촌민박협의회(컴퓨터 www.hueplustour.com·모바일 m.hueplustour.com) 참조. 밤새 달궈진 자갈 구들장이 인상적인 진동너와촌해마루펜션(010-3785-6788)에 묵으면 설피마을 특산품 '설피(눈 신발)' 제작과 판매를 진두지휘하는 이규학 노인회장도 만날 수 있다.
김은영 선임기자
첫댓글 구경 잘하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