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은 형들이 가까이 오는 동생 요셉을 알아차리고서 죽이기로 꾀하였으나 르우벤이 형제들에게 요셉의 생명은 상하게 말자고 권고하여 요셉을 물이 없는 구덩이에 던지는 내용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형들은 요셉을 멀리서 보고 꿈꾸는 자다며 죽이기로 작정하고 모의합니다(18,19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형들이 요셉을 죽이시려는 계획을 막으시고 오히려 요셉을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할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요셉에게 이미 계시하여 주신 대로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셔서 이스라엘 언약 자손을 보호하시려고 하시는데, 형제들은 요셉의 꾼 꿈을 희롱하듯이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고 합니다(20절).
본절의 서두 ‘자’는 ‘지금 이때다’라는 뜻이며 기다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요셉을 죽이려고 계획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이끄시므로 요셉은 죽지 아니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신 제사를 드린 동생 아벨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주셨습니다. 에서는 야곱을 죽으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리브가를 통해 언약 백성인 야곱을 피신시켰고 그리고 돌아올 때에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셨습니다. 요셉 역시도 하나님께서 언약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며 뜻대로 인도하십니다. 악한 유대인들이 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여 없애려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 예수께서는 언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에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습니다(21,22절). 하나님께서 레아의 아들이자 장남 르우벤으로 하여금 요셉을 위험에서 건지십니다.
그러나 르우벤의 계획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요셉을 살려서 아버지에게로 보내려는 계획이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다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살리셔서 애굽으로 보내시려는 것입니다. 르우벤의 선한 생각도 하나님의 뜻과는 다릅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언약 자손에게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이루어 가시는데 많은 어려움을 있도록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은 하나님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며 이로써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언약을 성취하여 가시는 역사 섭리의 한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의 역사 섭리를 살펴보면, 에덴동산에서 사탄인 뱀이 아담을 타락시키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노아 시대에 죄의 권세가 온 세상을 부패하게 하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고,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대로 역사가 진행된 것이 분명합니다.
요셉에게도 하나님께서 기왕 요셉을 통하여 언약 자손을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셨다면 평탄하게 하실 수도 있으시지만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시는 것은, 언약 자손의 구원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줄을 알고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스스로 전능하심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 섭리는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어두운 권세들을 동원시켜 어려움을 겪게 하십니다. 그래서 꺾어진 갈대마저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마저 끄지 아니하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섭리이며 자기 백성을 향한 역사 섭리입니다.
21절과 22절을 주의 깊게 살피면 세 번씩이나 반복되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자(말라)’라고 하는 금지를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자(말라)’라는 단어가 한글 번역 성경에서는 같은 뜻의 단어이지만 원어에서는 이상하게도 단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나오는 ‘말자’는 원어에서 ‘로(לא)’라고 하고, 뒤에 나오는 ‘말라’라는 단어는 원어에서 ‘알(אל)’이라고 합니다. 이는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로’는 주로 ‘영원한 금지’를 명할 때에 사용하고 ‘알’은 ‘즉각적인 금지’를 명할 때에 사용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확인하면 르우벤의 의도는 요셉을 죽이려는 형제들의 행동을 영원하며 재빠르고 즉각적인 저지로서 요셉을 살려 아버지께로 보내려는 것으로 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르우벤은 부정어인 ‘로’와 ‘알’을 사용하여 세 번이나 연속적으로 요셉을 해하려는 형제들의 계획을 보다 철저하게 막아선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도착하니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화려한 옷을 벗기고서 그를 들어 구덩이에 던집니다. 그 구덩이는 비어 있었고 그 안에는 물이 없었습니다(23,24절). 너무나 갑작스럽고 황당한 일을 당했으며 그리고 옷까지 모두 벗겨진 채로 구덩이에 빠졌지만 요셉이 반항을 했다거나 구덩이에 빠져서 소리를 질렀다는 행동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빠지게 된 ‘구덩이’는 히브리 원어로 ‘뽀르(בור)’라고 하며, ‘물이 괸 곳’, ‘우물’, ‘수조’, ‘구덩이’란 뜻으로서, 물이 귀한 고대 근동지역에서 빗물을 저장하기 위해 판 것이며, 입구는 좁고 속은 넓으며 그 벽면이 미끄러워 그 속에 빠지게 되면 혼자 스스로 나올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요셉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에는 마침 물이 없는 가운데 비어 있었으므로(24절) 죽음을 잠시나마 면할 수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구덩이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형제들은 앉아 음식을 먹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마침 이스마엘 상인 한 떼가 길르앗으로부터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25절). 여기서 ‘길르앗’은 넓은 표현으로 요단 동편 지역을 말하며, 좁은 표현으로는 암몬 지역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은 어머니와 처가 모두 애굽인으로서(창16:1,21:21 참조), 사라에게서 쫓겨나 가나안 땅 아래 지역인 바란 광야를 중심으로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 거주하며 삶의 터전을 잡았습니다(창25:18 참조).
이에 유다가 형제들을 설득시켜서 동생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려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스마엘 사람 상고들에게 은 이십 개에 팔게 됩니다(26~28절). 이는 아들들의 증조부이며 열조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언약하셨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15:13) 말씀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의 마디 부분입니다. 즉 이방 애굽으로 내려가는 결정적 기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사용하심으로 형제들로 청종하게 하고서(27절) 요셉을 구덩이에서 꺼내어 은 이십에 팔고 이로 인해 요셉은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28절). ‘은 이십’은 후에, 모세가 5세에서 20세까지의 노예의 가격으로 정한 값이 되는데(레27:5) 장성한 성인 남자는 보통 ‘은 삼십’에 매매가 됩니다(출21:32). 그래서 예수님도 ‘은 삼십’에 가룟 유다를 통하여 넘겨지게 되십니다(마26:15).
29절부터 36절까지의 말씀은 형제들이 요셉에 대한 것을 아비 야곱에게 속여 말을 하는 내용입니다.
요셉이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이십에 팔려 떠난 후에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를 살폈는데 요셉이 없고 보이지 않자 당황하여 자신의 옷을 찢으며 애통해 합니다(29,30절).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자기들의 죄를 숨기기 위하여 요셉의 옷에다가 숫염소를 죽여 얻은 피를 묻혀서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며(31,32절) 거짓으로 이스라엘을 속입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그 옷을 알아보고서 요셉이 죽은 것이 틀림없다며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애통하며 부르짖습니다(33,34절). 이스라엘이 찢긴 옷을 보고 확신하는 것은 그가 직접 지어 입혔기 때문입니다(3절), 여기서 ‘자기 옷을 찢었다’는 것은 슬픔과 애통을 표현하며, ‘굵은 베로 허리를 묶었다’는 것은 고대 근동의 사람들이 슬픔을 당할 때에 극심한 고통스러움에 대한 표현입니다.
자녀들이 이스라엘을 위로하지만 이스라엘은 위로받기를 거절하면서,“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하고 자책하고 탄식하며 요셉을 위하여 울었습니다(35절). 한편 요셉을 은 이십에 데리고 갔던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으로 데리고 가서 바로의 신하이며 경호대장인 보디발에게 또 요셉을 팔았습니다(36절).
이스라엘의 사악한 아들들은 동생 요셉을 죽이려다가 애굽으로 향하는 미디안 사람들에게 요셉을 팔았고 요셉은 자기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애굽으로 와서 종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이루시고자 요셉을 형들의 손에서 팔리게 하셨고 그리고 이방에서 객이 되어 이들을 섬기게 됩니다.
여호와의 언약은 언약 자손의 행동 여하에 따라 그 결과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뜻대로 행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저들이 사악함에도 보호하시고 언약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