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가 좋아하는 만화영화가 있었다. 지금은 제목조차 흐릿하지만, 주인공이 위급할 때 긴 봉을 두르리면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린다는 내용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누군가는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든채 멈추고, 엎어진 물컵 위로 물은 공중에 정지한채 멈춘다. 세상 모든 것이 그대로 멈췄지만 주인공만 멈추지 않은 채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나이들수록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봉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세월이 가는 것도 그다지 서글프지 않을텐데.
'젊은 시절은 다시 오지 않는 법이요, 하루는 두번의 새벽이 있을 수 없다네'
도연명의 시 한구절이 가슴을 두드리는 하루다.
시간이 멈춰버린 동네, 당진 면천읍은 색다른 동네다.
화려한 볼거리가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촌스럽지도 않은 평범한 동네다.
평범함의 범주가 꽤 다양하기 때문에 평범의 의미를 어디에 둘지는 조금 애매하지만
'면천읍의 평범함'은 익숙함이라는 영역에 조금 더 가깝다.
익숙함은 평범함을 불러온다. 과거의 시간은 익숙하다. 그때는 익숙하고 당연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돌아보면 그립고 소중해진다.
면천읍에는 흘러간 시간이 켜켜히 쌓여있는 곳이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레트로'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면천읍에 도착해 먼저 콩국수부터 먹으러 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면천에는 콩국수가 유명해서 이 작은 동네에 콩국수집만 해도 여러 곳이 있다.
면천 콩국수
낮은 단층의 구옥들이 이어진 동네에는 촌스러운 간판이 그대로 붙어있는 콩국수 집이 여러개다.
어릴 적 어머니 손에 이끌려 따라갔던 콩국수집이 떠오른다. 옛날에 엄마는 '돈 아깝게 국수를 왜 사먹느냐'고 했다. 국수가 먹고 싶다고 하면 큰 소쿠리에 국수를 삶아 설탕과 간장을 넣고 금새 비벼줬다. 하지만 콩국수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콩을 불리고 삶고 여간 골치아픈게 아니기 때문에 콩국수는 가끔 외식이 가능했던 특별 국수였다.
분위기는 오래됐지만, 이래뵈도 면천 콩국수는 꽤 유명하다. 주말에는 식당들마다 오픈하자마자 사람들이 줄서서 먹을 정도로 인기다.
옥색 건물이 인상적인 콩국수집에 들어갔다. 메뉴는 서리태 콩국수 하나다. 식성좋은 사람들을 위해 추가로 곱배기가 있다.
주문하고 5분도 안돼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국수 한 그릇이 상위로 올려졌다.
쫀득한 면발에 고소한 콩국물이 알싸한 열무김치와 환상의 궁합을 이룬다. 역시 맛있다.
면천읍성&오래된 골목
동네는 아담한 성곽으로 둘러쌓여있다. 면천읍성으로 백제에 지어진 걸 조선초기에 다시 중수됐다.
면천읍성은 원래 왜구침략을 막기 위함이지만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 박해가 벌어지기도 했고, 동학농민운동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읍성하나에도 이야기가 많다. 우리나라 문화유산 여행이 소소하지만 즐거운 이유다.
읍성은 걷기에 힘들지 않을 정도로 아담하다.
읍성 초입에는 수령이 1,100여년이나 된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다. 은행나무는 수호신처럼 마을 전체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은행나무에는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에 관한 전설이 전해온다.
면천에 귀향한 복지겸은 병을 앓고 있었지만 어떠한 약도 효과가 없었다. 그의 딸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백일기도를 드렸고, 꿈에 신령이 나타났다. 신령은 아미산의 진달래꽃과 샘물로 술을 빚어 드리고, 집 앞에 은행나무를 심고 정성을 들이면 아버지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덕분에 복지겸의 병은 낫는다. 지금도 면천 주민들은 매년 정월대보름에 은행나무에 모여 목신제를 지내고 있다.
면천읍에 있는 수령 1,100년의 은행나무
면사무소 앞에는 풍락루라는 정자가있다. 설립 연도는 불분명하나 1852년 면천군수였던 이관영이 중수한 후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풍락루'라 지었다. 풍락루 앞에는 오래된 골목이 이어진다. 하지만 마냥 시간이 멈춘건 아니었다. 오랜 가옥을 개조한 카페와 서점들이 생겨나 느리지만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오래된 미래와 현재가 공존하는 골목이다.
그래서 면천읍은 걷는 재미가 있는 동네다. 골목마다 추억이 전해진다.
동네를 감싸는 면천읍성
풍락루
옛날에는 동네에 꼭 전파사가 있었다.
요즘은 가전제품이 고장나면 대리점 AS 센터에 연락하지만, 그때는 물건이 고장나면 가장 먼저 전파사를 찾았다.
전파사 아저씨는 어떤 종류의 가전제품도 다 고쳤다. 동네 사람들은 전기밥솥이 고장나도, 라디오가 고장나도 다 전파사로 가지고 갔다. 그러면 감쪽같이 새 제품이 되서 돌아온다.
오래된 집 창문에 누군가의 문구가 적혀있다.
'준비와 기회가 만나면 기적을 만든다'
준비가 없다면 기회가 와도 잡을 수 없다. 만고불변의 원칙이다.
하지만 이 반대면 삶이 좀 억울해진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다시 은행나무로 돌아왔다. 은행나무 앞에는 멋진 정자와 3.1운동 기념탑이 있다.
기념탑에는 도산 안창호의 글이 적혀있다.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문구다.
동네 서점, 그리고 커피
면천읍에는 60여년이 된 가옥을 개조해 만든 서점이 있다. 2층짜리 단독주택으로 <오래된 미래>라는 멋진 이름이 붙어있다.
<오래된 미래>는 인도 북부의 라다크 지방을 한 환경운동가의 눈으로 기록한 책이다. 환경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전통문화를 간직해온 라다크 지방이 개발로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인류 미래에 대한 메시지를 묵직하게 전달한다.
대형서점이 생기며 동네 서점이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인터넷 대형서점에서 책을 구입하고, 거대한 배송시스템을 갖춘 대형서점은 하루도 안돼 각 가정으로 책을 배달해준다.
그런데 요즘은 다시 동네 서점이 인기다. 동네 서점에는 내가 원하는 책이 없을 때도 있고, 베스트셀러가 의미가 없기도 하고, 공간이 좁기도 하지만 책방 주인의 취향이 가득한 책장에서 외의의 책을 발견하는 재미는 꽤 신선하다.
<오래된 미래>에서 3천원짜리 책 한권을 구입했다.
누군가의 손때가 잔뜩 묻어있는 책이다. 시간의 흔적을 보여주듯 종이는 누렇게 변했고 시중에는 절판된 책이다.
너무 숨겨놔서 존재조차 까먹었던 비상금을 이사할때 발견한 것처럼 기분이 좋다.
동네 서점 <오래된 미래>
이제 면천읍 레트로 여행을 마칠 시간이다.
면천읍성의 끝에는 오래된 동네 분위기에 잘 스며드는 세련된 카페 면천창고가 있다. 3천원짜리 책을 보며 시원한 라떼 한잔을 마셨다.
앞으로 이 동네에 자주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