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등 참 어렵다. 하면 할수록 더 어렵다. 영도 선배가 <한번 해봐>라며 선등 처음 권했을 때가 오히려 더 쉬웠던 것 같다. 그때는 뭘 몰랐다. 그저 등반에만 집중했다. 무엇보다 경험 많은 영도 선배가 든든하게 뒤를 봐줬다. 확보물을 어디에 어떻게 설치해야 하는지, 헷갈리는 구간에서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하강은 또 어디서 몇 번 끊어 해야 하는지 등등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당연히 등반 중에 개념도를 들여다볼 일도 없었다.
그런데 어제 인수봉 크로니길 등반 중에는 개념도를 몇 번이나 들여다봤는지 모르겠다. 하필이면 안경도 집에 두고 와서 눈살을 있는 힘껏 찌푸려야 했다. 두 번째 피치까지는 개념도대로 등반했다. 문제는 세 번째 피치였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슬랩 구간인데 볼트가 몇 개 보이길래 볼트 따라 계속 올랐다. 볼트가 생각보다 많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보통 볼트는 어려운 슬랩 구간에나 촘촘히 박혀 있고 쉬운 슬랩 구간에는 한두 개 있을까 말까 하다. 일단 가까운 쌍볼트에 확보했는데 그게 개념도에는 없는 엉뚱한 확보점이었다.
거기서 다시 크로니길을 찾아갈까 아니면 아예 다른 루트를 등반할까 고민했다. 오른쪽으로는 아미동길이나 인수b 등반이 가능했다. 뒤이어 확보점에 도착한 김도미는 감기 기운이 도졌는지 말수도 부쩍 줄고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두 번째 피치 트래버스 구간 건너올 때만 해도 신나게 욕도 잘했는데 말이다(트래버스 또 할 바에 차라리 항암 한 번 더 받겠다나 뭐라나).
사실 그 트래버스는 나도 정말 무서웠다. 산양처럼 절벽 가로지르는 트래버스 가뜩이나 싫어하는데 그걸 선등으로 하려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트래버스 구간이 아무리 짧아도 중간에 볼트도 한 개 없고, 발밑을 보고 싶지 않아도 발자리를 찾으려면 발밑을 봐야만 하고, 혹시라도 발을 헛딛어 추락이라도 하면 어떤 식으로 어디까지 떨어질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미친듯이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어 확보점에 다다랐을 때의 안도감은 한동안 못 잊을 것 같다.
내 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아서 못다 한 크로니길은 숙제로 남겨두고 작년에 실컷 했던 인수b를 복습하기로 했다. 안 좋은 컨디션에도 인수b 정도는 거뜬할 줄 알았다. 인수봉을 뜨겁게 달구던 해가 넘어가자마자 바위가 머금고 있던 습기를 토해낼 줄은 몰랐다. 안 그래도 미끄러운 바위가 더 미끄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크랙에는 며칠 전 비로 흙이 잔뜩 쌓여 있었다. 두더지처럼 크랙에 쌓인 흙을 부지런히 파내며 등반을 이어갔다. 내 꼴이 얼마나 우습던지 등반 도중에 혼자 끅끅 웃었다.
등반은 김도미와 2인 1조로 진행했습니다. 저희를 비롯한 등반객과 등반 교육하는 팀이 적잖아서 인수봉이 평일 치고 제법 소란스러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평일 인수봉 등반은 크나큰 호사 아닌가 싶습니다. 첨부한 사진은 등반 마치고 떠날 무렵 다시 고요해진 인수봉입니다.
월례회의도 정말 즐거웠습니다. 다만 너무 취해서 하마터면 또 오이도까지 갈 뻔했는데 정총무님 덕분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정총무님, 고맙습니다.
첫댓글 용득!
후기 좋다.
난독증이 심한 내가 한참에 읽혀지니
역시 작가님이라 필력이 훌륭 하다 생각된다.
정신력, 체력, 등반기술, 리더쉽, 등반경험...
어느것 하나 모자라면 선등이 쉽지 않으니...
선등은 어렵다.
하지만 우리 용득!
잘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말씀 고맙습니다, 등반은 하면 할수록, 또 알면 알수록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등반이 지금보다 좀 더 편해질 수 있도록 분발하겠습니다.
점점 더 강해지는 용득형.
하나도 안 강해졌ㅋㅋㅋ 물기 조금만 있어도 곧바로 쫄아서 후퇴하는 판인데ㅋㅋㅋㅋㅋ
내가 다 트래버스하는 기분이네 ㅎㅎ
도미랑 형도 몸이 다 안좋은데 등반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사실 나는 멀쩡했는데 등반하면서 안 좋아진 거야. 등반이 마음먹은 대로 잘됐으면 오히려 없던 힘도 펄펄 났을 텐데ㅎㅎ
형은 오이도? 나는 새벽에 포천 대진대학교 많이 갔는데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