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산 97호(2023. 하반기)가 택배왔다.창밖엔 눈이 내리고 나는 잠시 지난 초가을의 천태산 풍경을 반추한다.
평화를 노래하는 신성한 은행나무
- 영동 천태산, 영국사, 은행나무
차용국
먼바다로 빠져나간 파도가 갯고랑을 들썩이며 돌아오듯이 입추를 넘어온 햇빛이 강물을 타고 일렁이며 흐른다. 저 산야를 굽이치며 흐르는 강의 물결이 비단결 같다는 뜻에서 금강錦江이란 호칭을 붙인 것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영동에 와보니 저절로 알겠다. 전북 장수군 수분리 신무산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의 물결은 진안, 금산의 크고 작은 냇물을 아우르며 달려와 영동 양산면 산야와 어우러진 절경을 펼쳐 보인다. 천태산은 양산8경*의 길목이며 시작이다.
* 양산8경: 영국사(1경), 강선대(2경), 비봉산(3경), 봉황대(4경), 함벽정(5경), 여의정(6경), 자풍서당(7경), 용암(8경)
영동군 양산면과 금산 제원면의 경계에서 천태산은 시야가 넓고 밝다. 정상(715.2m)에 올라서면 멀리 속리산·계룡산·덕유산·성주산·서대산 등이 보이고, 인근의 높고 낮은 산자락으로 둘러싸인 들과 마을이 환하다. 북쪽에서 비를 몰고 내려오던 먹구름은 영동의 산마루와 능선에 걸려 넘어오지 못한다. 사방으로 첩첩이 연결된 영동의 산세山勢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외성外城처럼 견고해 보인다. 그곳에서 양산8경의 1경(영국사)과 스스로 12경*을 품고 있다.
* 천태산12경: 영국사 은행나무(1경), 천태동천(2경), 삼신할멈바위(3경), 3단폭포(용추폭포, 4경), 75m바위(5경), 공릉능선(6경), 상어흔들바위(7경), 윷판(8경), 연화석(9경), 거북바위(10경), 망탑(11경), 진주폭포(12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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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은 은둔의 땅이다. 가끔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계곡의 숲길은 대체로 한적하고 아늑하다. 산객이 늘 북적거리는 서울 인근의 산길은 말라서 발목에 먼지가 달라붙는데, 천태산 숲길은 촉촉이 젖어있다. 돌을 스쳐 흐르는 물소리는 쉼 없이 맑고, 계곡의 크고 작은 나무는 초록의 이끼를 입고 있다. 이끼를 덮고 자라는 나무는 건강하고 생명의 혈기가 왕성하다. 숲은 물을 품어 푸름을 더하고, 물은 숲에서 태어나 사람 사는 들과 마을에 삶을 보시普施한다. 숲과 물은 생명의 원천으로서 본래 한 몸이었을 듯싶다. 나는 3단폭포(용추폭포) 문을 열고 힘차게 쏟아지는 물의 행차를 바라보았는데, 물보라에 젖은 머리는 말고 눈이 환해졌다.
3단폭포 아래에 큰 바위 하나가 서 있다. 몇 개의 널찍한 바위가 가로로 층층이 쌓여 있는 형태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이 바위가 생긴 모습이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주름을 닮았다고 ‘삼신할멈바위’라고 한다. 층층이 쌓인 바위마다 틈이 있는데, 이곳에 작은 돌을 던져서 떨어지지 않으면 삼신할미가 자식을 점지해 준다고 한다.
이 설화가 전해지는 경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민담이 되어 소문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는 유효기간이 지났지만, 주름투성이 바위를 보면서 삼신할멈을 연상하고 이야기를 전한 사람들이 소망했던 속내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상상력은 간절한 소망에서 솟아난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무엇을 염원하고 어떻게 상상하며 살아갈까? ‘삼신할멈바위’는 말이 없고, 3단의 바위를 깎으며 3단 뛰기로 떨어지는 폭포는 산에 들어와서는 너무 많은 생각 하지 말고,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보며, 머물다 가라 한다.
천태산 준봉峻峯을 배경으로 영국사寧國寺 대웅전과 극락보전은 나란하고, 대웅전 앞마당에 삼층석탑과 보리수 한 그루가 서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고종 8년(1893)과 1934년에 중수하고, 1980년에 해체 복원한 건축물이다. 이곳이 주존불인 석가여래좌상을 모신 불전이며, 경내에는 보물 제534호로 지정된 원각국사비가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다포계 맞배집인데 공포는 내ㆍ외삼출목으로 쇠서 전각의 기둥 위에 덧붙이는 소의 혀와 같이 생긴 장식 위에 연화를 조각한 조선 후기의 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창방 위에 놓이는 평방은 건물의 측면 앞쪽에만 짧게 놓여 이 지방의 특징인 다포계 맞배집을 꾸미는데 흔히 볼 수 있는 구조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만들어진 일반형 석탑으로서 2중 기단 위에 3층으로 만든 몸돌을 세운 것이 특징이다. 원래 옛 절터에 넘어져 있던 것을 1942년 주봉조사가 이곳으로 옮겨 와 복원하였고, 대웅전 건물이 향하고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탑을 옮겨 세울 때 2중 기단의 위층과 아래층이 바뀌었던 것을 2003년 문화재 보수 정비 사업 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신라 후기(9세기 말경)에 건립한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재료는 화강암이다. 상륜부와 다른 부재들은 일부가 없거나 훼손되어 사찰 내에 보관 중이며, 현존하는 통일신라 후기 탑 중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
보리수는 각수 또는 사유수라고 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성수라고도 한다. 보리는 범어 bodhi를 음역한 말로 각, 지, 도라고 번역해서 쓰는데, 모두 부처님께서 얻은 깨달음의 지혜를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 외 과거와 미래의 부처님도 각각 다른 보리수가 있다고 한다. 미륵불의 보리수를 용화수라 하고 열매를 염주로 만들어 사용한다. 가을날 보리수에 단풍이 찾아왔다.
영국사의 창건연대와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 문무왕 8년(668)에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후 고려시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국청사國淸寺라 이름 짓고, 원각국사圓覺國師 덕소德素가 규모를 크게 늘렸다고 한다. 국청사가 영국사로 불리게 된 것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 와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1361년에 홍건적이 침입하자 공민왕은 천태산 인근의 마니산성馬尼山城으로 피란하였다. 마니산(640m)은 기암절벽이 금강을 향해 문어발처럼 뻗어 내려간 모양인데, 공민왕은 그곳으로 피난 가서 암벽을 토대로 성을 쌓고 거처했다. 바위 벼랑과 급경사로 이루어진 천혜의 피난처였다. 지금은 성터와 공민왕의 거처로 쓰인 절터가 남아 있다.
공민왕은 피란 중이 영동 개울가에서 천태산 쪽으로부터 울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그곳에 국청사가 있음을 알게 된 공민왕은 그 절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예배를 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폭우로 부풀어 오른 개울을 건널 수가 없었다. 공민왕의 뜻을 안 신하들과 마을 주민들은 산에서 칡넝쿨을 걷어 와서 새끼줄처럼 꼬아 다리를 만들었다. 그 덕분에 공민왕은 다리를 건너가 예불을 마칠 수 있었다. 그 후로 국청사는 공민왕이 다녀간 뒤, 왕이 와서 백성의 편안함을 빌었다는 뜻에서 영국사寧國寺로 고쳐 부르고, 칡넝쿨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간 마을을 누교리樓橋里라 불렀다고 한다.
영국사 앞에서 천년을 살아가는 은행나무 거목은 여전히 은행을 생산한다. 유구한 세월이 무색하게도 이 천년 거목의 생산력은 왕성하고 생육의 방식 또한 특이하다. 원래의 거목은 높이 31미터, 둘레 11미터나 되고, 서쪽에 있는 가지 하나가 땅으로 내려와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서 높이 5미터 둘레 20센치미터에 이른다. 얼핏 보면 두 그루의 독립 개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마치 어머니와 자식이 탯줄로 연결된 모습의 연리목이다. 사람들은 이 나무에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나의 수목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영세해서 그 신령과 믿음의 근원을 해부할 수 없고, 사실을 밝혀 말할 수 없다. 어쩌면, 천년의 생명을 유전하는 모태의 사랑 방식은 아닐는지?
천연기념물 223호로 지정된 영국사 은행나무는 수령이 1천 년 안팎으로 추정되는데, 국가에 재난이 있을 때 울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 울음소리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호기심을 억누르고 참기로 했다. 나는 지금 울음소리를 듣고 싶지 않고, 앞으로도 쭉 듣지 않기를 바란다.
영동 사람들은 이 신성한 거목에 제를 지내며 마을과 나라의 태평을 기원한다. 천태산 영국사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시인들은 매년 가을 시화전을 개최하고 출품한 시를 모아 시집을 발행한다. 나는 이 은행나무가 평화를 노래하는 신성한 시향으로 영원히 기억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