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오백년!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123
대한제국 1- 독립협회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궁궐에 있는 것이 두려운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은 주체성있는 한 나라 왕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관파천은 조선에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을미사변 후 일본에 의한 개혁인 갑오경장으로 김홍집 개화정부는 갑신정변 주모자들의 반역죄에 대한 사면령을 내린다. 아쉬운 것은 갑신정변 지도자인 김옥균은 갑오경장 몇 달 전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 명성황후 측이 보낸 홍종우라는 자객에게 암살 당하고 말았다.
만약 김옥균이 갑오경장 당시까지 생존해 있었더라면 일본은 김홍집내각이 아닌 김옥균내각을 탄생시켰을 것이 분명했다.
그랬다면 조선의 미래는 조금이라도 달라 졌을까?
조선역사를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뭔가 꼭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다.
어쩌든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십 년이 지나 갑오경장으로 갑신정변 주모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졌다.
여러분들은 내 역사 글에서 갑신정변 당시 육군생도로서 행동대장 역할을 한 서재필이라는 젊은청년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바로 그 서재필이 갑신정변 당시 미국으로 도피 해 11년 만에 미국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고 의학박사가 되어서 환국했다.
서재필은 이때부터 자기이름 뒤에 고유명사처럼 박사가 붙는다. 즉 우리가 역사 책에서 배웠다시피 그 유명한 '서재필박사'가 된다.
서재필은 조선에 귀국하자마자 미국에서 어렵게 받은 의학박사에 머무르지 않고 언론인으로 변신한다.
육군생도에서 미국 의학박사로 그리고 다시 언론인으로 변신하는 서재필의 변화무쌍함이 놀랍지만 그 변화는 우리나라 언론사에 한 획을 긋는다.
학창시절 국사시험에도 자주나왔지만 내 기억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은 조선정부에서 발간한 한성순보(漢城旬報)이다. 하지만 한성순보는 한자로 쓰여 있었던 탓에 백성들이 쉽게 접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서 돌아온 서재필박사가 이런 백성들을 어엿삐 여겨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급받아 1896년 4월 7일 한글신문 인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이로서 우리나라 민중들은 나라소식을 한글로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개화기 우리 민족정신을 일깨우는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백성들에게 신학문·신사고를 유도하여 민족 계몽에 중대한 역할도 했다. 그리고 독립협회 창설에도 원동력이 된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이 나온 지 3개월이 채 못되어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을 주도하고 그 고문이 된다.
독립협회는 아관파천 당시 사회정치단체로서 열강에 의한 국권침탈과 지배층에 의한 민권유린 상황 속에서, 자주국권·자유민권·자강개혁사상에 의해
민족주의·민주주의·근대화운동을 전개한다.
독립협회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 단체였다.
1896년 7월 2일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창립사업 일환으로 하여 발족되었다.
독립협회는 구미파의 총본산인 정동구락부세력, 갑오개혁의 주동 인물들의 모임인 건양협회 세력, 자주개화정책을 추구하는 실무급 중견관료층 세력 등,
당시 형성되고 있던 각계 각층의 신흥사회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설립 되었다.
신흥 사회세력의 하나는 신지식층이었다. 개항 이래로 해외 시찰·해외 유학·신교육·신문과 서적 등을 통해, 근대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계관과 지식 체계를 가진 신지식층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근대시민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서구적 지식층과 동도서기사상(東道西器思想)에서 발전한 개신유학적 지식층으로 구분된다.
또 다른 신흥 사회세력의 하나는 시민층이었다. 이 무렵 시전(市廛) 상인은 근대상인으로 개편 되어 갔다.
또 각종 상회와 회사가 출현하면서 시민층이 대두되고 성장해갔다. 이 시민층은 열강의 경제적 침탈로부터 그들의 권익을 수호하고 조선의 전근대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농민층도 19세기 이래로 거듭되어온 민란과 동학농민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반봉건·반침략의식이 강화되어 신흥사회세력의 하나를 이루었다.
또한 광산이 개발되고 개항장 무역이 시작되면서부터 광산 노동자와 부두 노동자 등 임금 노동자들이 열강의 경제적 침탈을 체험하면서 저항의식이 높아져 또 다른 신흥사회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 신흥사회세력 가운데 독립협회의 지도적 구실을 담당한 것은 신지식층이었다.
서구에 유학을 다녀 와 서구시민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서재필·윤치호·이상재등이 최고 지도층을 이루었고 개신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남궁 억·정교등이 중간 간부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그들의 대변지인
≪독립신문≫·≪독립협회회보≫·≪황성신문≫, 그리고 토론회와 강연회 등을 통해 새로이 성장하고 있는 광범위한 사회세력을 계몽, 포용하고 그들의 지지를 받아 가며 독립협회를 민중단체로 발전 시켜 나갔다.
독립협회는 가장 먼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 국민적 상징물로서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영은문이 있었다. 영은문은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이다. 우리나라가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영은문을 없애고 독립문을 세운 것은 조선이 자주국임을 천명하는 일이었다. 당시만해도 독립협회는 서재필의 지도 아래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의 조성 등 창립사업에 주력하던 시기이다.
자주독립의 기념물 건립을 위한 창립사업은 모든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일으켰다. 독립협회는 사회 일반의 참여 뿐만 아니라 관료와 왕실의 지원을 받아 짧은 기간에 거대한 사회단체로 부각되었다.
거의 모든 고급관료와 다수의 일반 민중이 독립문 건립 보조금을 내었고 독립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독립문 건립에는 다른 의견도 있다. 독립문은 모든 외세로 부터 우리나라 자주독립을 추구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닌 단지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의 댓가로 조선이 청으로 부터 독립을 기념하기위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립문 건립에 일본이 배후에 있었고 일본의 자금도 많이 들어 갔다는 의견이다.
이 점은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하다.
당시 조선의 일부 개화파 지식인들은 조선을 수 백 년간 억 눌려왔던 청을 물리친 일본을 아주 높게 평가했다.
당시 개화파 일부 지식인들은 일본의 야욕을 모르는 채 단지 청으로 부터 조선을 독립시켜 준 것을 고마워 했다.
사실, 을미사변도 조선의 개화파 일부 지식인들에게는 눈에 가시같은 명성황후를 제거 해주었다 생각했다.
독립협회 창립총회에서 선임된 임원진은 고문에 서재필,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 위원에는 김가진·김종한·이상재 등 8명, 간사원에는 송헌·남궁 억 등 10명 등으로 당시 국내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망라되었다.
친일민족반역매국노로 이름이 높은 이완용이 독립협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는 것은 당시 우리나라 기회주의 지식인층들의 변화무쌍 함의 끝을 보여 주고 있다.
1896년 말에는 독립협회 회원수가 2,000명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일반 민중회원은 아직 표면에 나서지 못했고, 독립협회는 개혁파와 보수파 고급관료의 주도 하에 있었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는 고급관료의 사교 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어쩌든 독립협회는 조선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 오로지 백성들의 성금을 모아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또한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은 독립관으로 개수하여 독립협회의 집회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일대를 독립공원으로 꾸몄다. 지금도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 일대이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열강들의 이권침탈을 성토하고 고종이 러시아공관에서 나오길 꾸준히 주장한다.
이러한 독립협회의 주장과 성과에 고종도 충격을 받고 1897년 2윌 20일 경운궁으로 환궁한다.
그리고 고종은 8개월 후 독립협회 주장을 받아 들여 드디어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고종은 대대적으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천명하면서 대한민족 독립의 기개를 한껏 분출시키는 계기를 만든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지 오백년이 넘어 다 꺼져 가는 불에서 마지막 타오르는 화려한 불꽃이었다. 어쩌든 조선은 오백년 창업이래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황제국을 칭한 것이었다.
사실 그동안 조선의 종주국 노릇을 한 중국이 청일전쟁에 패해 조선에서 손을 뗐고 새로운 종주국 노릇을 할 일본은 러시아가 주동이 된 삼국동맹으로 조선에서 반쯤 물러 서고 있었다. 그런 일본이 을미사변이라는 무리수를 두게 되었다. 조선은 을미사변으로 인해 아관파천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만들어 냈다. 이에 조선은 러시아 보호 아래로 들어 가고 만다.
닭쫒던 개 지붕쳐다보는 꼴이 되어 버린 일본은 분노가 넘쳐났지만 당시로서는 거대한 러시아 제국은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조선에서 이권침탈에만 열을 올렸지 조선을 영원히 속국화 할 생각은 없었다.
이처럼 조선에 열강들 힘의 공백기가 생긴 것이다.
바로 이 틈에 조선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민족 자강운동이 일어 났다. 그리고 고종은 독립협회의 요구대로 황제국을 칭하는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좋았다.
조선에 이렇게 새로운 기회가 왔지만 고종과 조선의 지도층들은 또 다시 멍청한 짓을 하며 이 기회를 놓쳐 버린다.
고종은 이 기회에 독립협회와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입헌군주국으로 가야 했는데 대한제국은 이름처럼 그 동안 개혁을 모두 되돌려 황제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하려는 대반동의 정치를 펼쳐갔다.
어쩟든 여기까지 봐서는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협회 창설을 주도한 서재필박사 행적이 눈이 부시다.
그러나 서재필박사에 대한 다른 견해들도 있다.
이어서 대한제국 2- 서재필과 독립신문 편이 이어집니다.
마지막 사진은 서재필박사 실제 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