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대한 선교 온전한 선교가 무엇인가 얘기할 때 요한복음서 20장에서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를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너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과도 연관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대적하는 악한 영적세력이 너희를 잡아 삼키려고 하고, 노예 삼으려고 하는, 고발자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셩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이제는 그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형상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이제 너희는 예수님의 온전한 증인이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온갖 모욕을 다 당하십니다. 고발과 험담 음해 등 쫓겨나기도 하시고 목숨을 잃을 뻔도 하십니다. 결국에는 많은 사람이 환호해맞이하는 듯 하였지만, 일주일 만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치는 수많은 음모자에 둘러 싸인체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로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셨고 구원하셨습니다, 초대교회부터 주님의 몸된 교회는 주님이 하신 일을 계속해서 증거하고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그분은 잠잠히 계셨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린 양과 같이 순종함으로 그렇게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보인가요, 그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아니라 고발자 고발에 사로잡혀서 내가 죄에 노예가 되고, 하나님이 잘못되었다고 대적하는 고발자에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이 온전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아셨기에 그분은 침묵하셨고 잠잠한 가운데 계신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오히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다 이루었다. 그리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죄를 다스리고 인생을 다스리고 세상에 주님이 살아 계심과 주님에 승리하심을 너희가 증거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미가서와 관련해서 보면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공정함 공평함 정의로 기초를 놓으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 공정함을 누리며 살라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타락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타락하기 이전 세상에서도 하나님에 형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에게 말씀하셨던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개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에덴 중심에 있는 동산에서 사람들이 퍼져나가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 곳곳이 열매 맺는 세상이 되도록 너희는 일하면서 살고 다스리며 청지기로 살아가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청지기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 형상으로 살아가는데 각자 다른 고유한 하나님 형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 교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는 갈등과 오해가 분명히 존재하게 됩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나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지 하나님이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세상에서 있을까요? 그러나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죄에 노예로 다스림 받는 자가 아니라 승리한 자가 살아가는 곳이기에 그 증오가 불법으로 변질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승리한 인간관계는 진실과 참다운 인간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주님께서 기초를 놓으신 것입니다. 미가 예언자는 우리에게 얘기하시고 또 그를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따라 가야 한다는 말씀이 6장 9절에 나옵니다.
사무엘상에서 한나의 기도를 보면, 한나가 자녀를 낳지 못함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봅니다. 그것을 가르켜
오래전부터 기독교 영성가들은 ‘영혼에 어두운 밤을 보여 주는 성경적인 증거를 말합니다. 영혼에 어두운 밤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 경험했던 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결국에는 사울이 쓰러졌습니다. ‘너는 도대체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늘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했을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하십니다. ‘너는 이제 다마스커스로 가라’ ‘내가 너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줄 것이다.‘ 사울이 일어났지만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사울은 3일간이나 눈이 먼 상태로 금식하며 있었다고 거룩한 누가는 얘기합니다. 이것이 영혼에 어두운 밤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이것을 주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물론 매를 맞았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매를 맞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인이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꾸중을 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인이 왜 영혼에 어두운 밤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중요한 핵심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네가 주님과 함께 온전함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가인에게 영혼에 어두운 밤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강력한 빛을 맞이한 그 당시에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허락하신 어두움은 다시 주님에 강렬한 빛 가운데서 완전히 살아질 때 주님과 함께 더불어 더 깊은 생명에 관계를 누릴 것을 우리 주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사에서 나오는 한나에게 자녀를 낳지 못함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는 모습에서도 사울과 같은 영혼에 어두운 밤을 허락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영혼에 어두운 밤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이 미워해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얘기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생명에 말씀 전하고 사랑을 증거하고 진정한 청지기 왕 같은 제사장이 무엇인지 진정한 왕 들에 삶이 무엇인지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증거하는 것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송축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상이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그런 어두움을 지나가게 하시는지, 우리가 빛 가운데로 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렇지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얘기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불법을 행하고 있었던 완전한 죄에 노예였습니다. 악에 노예였고,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였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음에서 건지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기에 영혼에 어두운 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어두운 밤은 이전에 우리가 주님을 몰랐을 때 경험한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사도 요한은 선포합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형제자매를 서로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유대인 출신에 성도와 비유대인 출신에 성도가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특별히 요한 서신은 언제쯤 쓰여졌을까요? 요한 계시록이 쓰여지기 전 즉 밤모섬에 유배당하기 전에 쓴 것입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 당한 AD60년 경 이후다고 합니다. 유대인 성도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비유대인 출신에 성도들은 점점 유대인들에 성도들을 멀리하는 간극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시기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사요 요한도 사랑하라 말한 것은 유대인 출신 성도와 비유대인 성도들이 서로 먼저 사랑하라는 것을 넘어서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죄가 삼켜버린 사람 가운데서 자신도 삼킴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에 마음을 다스리고 승리하는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생명이 머물지 않는 자 입술을 통해서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마음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자신에 마음속에서 고발자의 고발을 단호하게 아니다고 외치며, 예수님 이름으로 물리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기에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모든 수모를 당하시고 완수하셨는지를 우리가 본다면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죄에 노예가 되지 않으시고 죄에 이기는 자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과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유대인 출신 성도와 비유대인 출신 성도가 서로 미워하는 일들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나이 많은 지도자를 젊은 지도자들이 쫓아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일을 두고 로마교회에서 주교가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보냈습니다. 3대 주교였던 크라이엔트 주교가 ’그래서는 안됩니다‘ 등 다양한 얘기를 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로마교회에서 고린도교회에 일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주적 몸된 공동체로서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아픔은 단순히 고린도교회에 아픔만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 아픔입니다. 나는 로마교회에 주교이지만 동시에 고린도교회에 형제로서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로마교회에 지도자로 세웠다는 것은, 다른 지역에 모든 교회에 조언할 수 있는 지도자로 세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문제를 그냥 넘길 수 없습니다. 미움이 가득하여 불법이 행해진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기에 말합니다.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때가 AD 120년 경입니다. 요한 일서는 사랑에 대해서 많이 얘기합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것이지 두루뭉술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과 요한 그 뒤를 이은 속 사도인 클리아멘트 폴리캅이 사랑을 이야기 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란 주제로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한 몸입니다. 이것을 지켜야 합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들에게도 갈등이 있었고 그 갈등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요한 일서는 그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극대화되고 로마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우겨싸고 있는 그 가운데서 우리는 이 영혼에 어두운 밤을 죄에 노예로 먹히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이 순간에 우리는 진실한 주님에 증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최고에 이 시기를 지나갑시다.
요한일서 3장17절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형제자매에 도움을 주라고 하십니다. 실제적인 도움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에게 머물겠느냐 하십니다.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샬롬이 있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죄에 노예를 이겨낼 수 있고, 샬롬을 지킬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이미 주셨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품고, 하나님에 형상을 가진 자입니다. 성령 하나님 영원한 임재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죄이든 주님에 이름으로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그의 죄가 용서함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주님이 하십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선교이며 가장 온전한 선교입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공동체가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하는 선교일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 사회를 갱신합시다. 이런 정도에 수준으로는 진실로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 가운데, 우리는 우겨 쌈을 당할 때도, 영혼에 어두운 밤을 통과할 때에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기 에 이 영원한 어두운 밤을 가지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고 죄에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미 이긴 사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백성임을, 나의 모든 삶 속에서 증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에 생명을, 하나님의 사랑을, 내 인생을 통해서 증명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고 다시 한번 자신에 형상으로 삼으신, 중요한 핵심입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