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 23,1-6; 에페 2,13-18; 마르 6,30-34
+ 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간 안녕하셨어요? 지난 한 주도 비가 많이 왔는데요, 요즈음의 극한 호우와 지구 온난화가 관계가 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바닷물 온도가 뜨거워지면서 예전과 다른 기후 현상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 주교회의 기후변화 회의에 주교님을 모시고 참석했었는데요, 그때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래 130년 만에 홍콩에 내린 기록적 폭우 영상을 보며 모두가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영상을 몇 년 뒤 이제 우리나라 뉴스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줍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로부터 파견된 제자들은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는데요, 이 회개는 오늘날 생태적 회개를 수반한다는 것을 되새기며, 우리 자녀와 후손들이 살아갈 수 있는 지구를 물려주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중요한 소명 중 하나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오늘은 농민주일인데요, 폭우로 시름이 더욱 깊으실 농민들을 위해 기도드리고 우리의 관심과 연대의 마음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일,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되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말씀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가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달려와서 먼저 다다르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인상적인 것은, 맨 처음 제자들이 예수님께, 자기들이 ‘가르친’ 것을 보고한다는 것이고, 또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4)고 전합니다. 그런데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 마음으로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로 치유입니다. 우리를 잘못된 속박으로부터 해방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르침’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풍조가 있습니다. 배우려 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드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가르침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고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 참된 가르침은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는 목자들을 꾸짖으시는 하느님 말씀을 전합니다.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하느님께서 꾸짖으시는 목자들은, 이스라엘의 왕과 사제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양 떼를 잘 돌보지 않았고, 참된 가르침을 전해주지 않았기에, 결국 이스라엘은 바빌론에 점령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목자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이들을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신 후, 당신의 양들을 유배지에서 다시 모아들여,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서는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그 목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성경에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표현하는 여러 가지 상징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목자와 양입니다. 본래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비유는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 비유가 가장 아름답게 표현된 노래는 아마도 시편 23장일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이 시편은 오늘 화답송이면서 입당성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시편을 쓴 사람은 어디에서 이 시를 지었을까요?
“파란 풀밭에 이 몸 뉘어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이끌어 주시네.” 이 구절 때문에 우리는 아마도 파란 풀밭에 누워서, 어쩌면 팔베개라도 하고 이 시를 노래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시편을 전공하신 안소근 수녀님 해설에 의하면, 그 뒤에 이어지는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최민순 신부님 번역으로는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에 나오는 ‘죽음의 골짜기’가 바로 이 시편이 씌어진 곳일 거라 합니다. 시편의 저자는 지금 죽음의 골짜기에서 이 노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아무 걱정거리 없이 파란 풀밭에 누워서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이 없나이다.”라고 노래한다면, 이 노래는 전혀 절박하게 와닿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둠의 골짜기에서, 절망과 좌절 한 가운데서,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이 없나이다”라고 노래하며, 주님께서 나를 파란 풀밭으로 이끌어 주실 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 더 맞는 해석일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연도를 할 때 이 시편을 바치는 것이 무척 어울린다고 하겠는데요,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지나는 연옥 영혼이,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라고 노래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즉, “원수들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고, 술잔이 넘치도록 가득한 그곳”을 향한 여정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에, 시름은 가시어서 든든하외다.”
여기서 막대와 지팡이는 말을 듣지 않으면 혼내려고 들고 계신 도구가 아닙니다. 막대기는 맹수를 쫓기 위한 것이고, 지팡이는 양이 길을 가다 빠지게 될 웅덩이가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정말 나의 목자라고 여기고 있을까요? 주님의 가르침을 신뢰하고 따르며, 그분의 보호에 나를 맡기면서 의지하고 있을까요?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노래하고는 있지만 마음으로는 다른 것을 따르고 있지는 않을까요?
정말 주님을 나의 목자라고 여기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단순한 길은,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라는 말씀을 되뇌는 것입니다. 정말로 아쉬운 것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나의 주인이시고, 그분께서 나를 보호하고 인도하고 계시다고, 즉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아쉽다면, 어쩌면 그것이 나의 주인일 수 있고, 그것이 나의 목자 노릇을 하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아쉬운 것은 늘 있게 마련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의 목자께서 그것을 알고 계심을 믿고, 그분께 맡겨 드리느냐, 아니면 그 아쉬움 때문에 목자를 신뢰하지 못하고 목자를 따라가지 못하느냐가 큰 차이입니다.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이 없나이다.” 이 말씀이 우리 영혼에 새겨져, 살아서든 죽어서든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피정 집 경당에서 본 글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세 문장으로 되어 있는 글인데, 기도할 때 큰 도움이 됩니다.
“너를 바라보고 계신 그분을 바라보라.
네게 말씀하고 계신 그분께 귀 기울이라.
너를 사랑하고 계신 그분을 사랑하라.”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보호하고 인도하고 계신 목자이십니다. 언제나 나를 바라 보고 계신 나의 목자에게 나의 시선을 맞추어야겠습니다.
“너를 바라보고 계신 그분을 바라보라. (Guarda, colui che ti guarda)
네게 말씀하고 계신 그분께 귀 기울이라. (Ascolata, colui che ti parla)
너를 사랑하고 계신 그분을 사랑하라. (Ama, colui che ti ama)”
(2008년, 이탈리아의 한 피정 집 경당에서 본 글입니다.)
https://youtu.be/3c_huP0poQE?si=waMUU7NCcG76UD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