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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칼럼] 영화 ‘크루엘라’ - 2021년 감독 크레이그 질레피
복수는 더 큰 악을 낳을 뿐
살다 보면 억울한 일도 많고, 상처도 많이 받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용서’란 말을 되뇝니다. 기도 중에도 빼놓지 않지요. 용서는 주님의 소중한 가르침이니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죽음 앞에서도 그것을 실천하셨습니다.
그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일흔 번은 고사하고, 일곱 번도 말입니다. 입으로는 용서를 말하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상처와 억울함, 분노와 미움에 사로잡혀 있곤 합니다. 용서가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면서도 조건을 붙입니다. “당신이 뉘우치고, 사죄한다면.”
그러니 어떻게 조금의 죄의식도 없고, 후회도 하지 않는 사람까지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복수가 훨씬 강렬하고 효과적이고 후련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수는 내가 당한 만큼의 상처와 고통을 되돌려줌으로써 후회와 반성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복수심은 참회의 간절한 갈구의 표현이다.’라고까지 합리화 할 수도 있죠.
<크루엘라>에서 크루엘라(엠마 스톤 분)는 그래서 복수에 당당합니다. 악을 응징하기 위해 악을 거리낌 없이 저지릅니다. 그 대상이 친모(親母)여도 조금의 갈등이나 망설임이 없습니다. 양모(養母)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고는 “나는 착한 크루엘라가 될 수 없다. 주님의 계획이 그렇다.”고 외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수를 끝내고는 더 강력하고 당당한 악녀로 남습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만나는 악은 대부분 섬뜩하고 흉측하고 우울하고 어둡습니다. 악에 대한 두려움, 배타성, 부정적 심리를 반영한 것이지요. 이 영화에서 크루엘라의 친모인 남작 부인의 오만하고, 괴팍하고, 악랄한 모습이나 <배트맨>에서 캣우먼의 기괴하고 사악한 이미지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크루엘라는 다릅니다. 빼어난 미모에 패션 디자이너로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매력적인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런 이미지가 그녀의 악에 너그러움을 갖게 만듭니다. 게다가 영화의 화려한 시청각적 연출, 매끄러운 이야기의 흐름과 등장인물들의 유머 감각이 그녀의 복수에 대한 쾌감을 크게 합니다.
원작인 <101마리 달마시안>에 등장한 크루엘라의 악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면서 <크루엘라>는 그녀의 악이 ‘태생적’이라고 말합니다. 그 악을 억누르고 살려 했지만, 세상이 폭발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으며, 어둠 속에 숨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로 이어지죠. 그리하여 악이 마치 선인 양 행동합니다.그러나 사회적 상처가 원인을 제공했다 하더라도 악이 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의로운 복수와 선을 위한 악도 악이며, 더 큰 악을 낳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착한 사람으로 살기를 희망하는 주님의 계획에 “나는 착한 크루엘라가 될 수 없다.” 역시 들어있지 않습니다.
다음에 만나는 그녀는 자신의 내면의 악과 세상의 다른 악을 용서하고 치유하는 ‘에스텔라’이면 좋겠습니다. 머리 색깔이 전부 검은색으로 섬뜩하게 변하지 않기를 빕니다. 훨씬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나올 테니까요. 심리학자 마이클 맥컬러프는 “용서 역시 진화된 인간의 본성”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영화 칼럼] 영화 ‘잃어버린 아이들’ - 2015년(국내 개봉 2021년) 감독 팽삼원
내 아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감히 누가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픔에 ‘대신에’와 ‘만약에’는 없습니다. 중국 고사(故事)는 ‘모원단장(母猿斷腸,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라고 했지만, 그 어미가 아니고는 진정으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들여다보고 나누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아이와 어미에게는 또 하나의 ‘희망’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실종 아이의 이야기는 대부분 실화입니다. 그만큼 여전히 세상 곳곳에서 그런 비극이 계속되고 있으며, 어느 하나 ‘모원단장’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아이들> 역시 유괴로 사라진 두 살 난 아들을 찾아 나선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레이저콴(유덕화 분)은 집을 떠나 1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때론 노숙을 하면서 오토바이에 아들 사진을 인쇄한 깃발을 달고 중국 전역을 돌아다닙니다. 길에 있어야 아들한테 덜 미안하고, 그 애가 어디 있든 아빠가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를 바랍니다. 혼자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부주의로 손자를 잃었다는 죄책감으로 살고 있는 어머니,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아내를 볼 자신이 없습니다. 길 위의 날들은 그가 살아야 할 이유이자, 스스로에게 내린 벌이기도 합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는 어떤 심정일까요. 네 살 때 유괴되었고, 양부모 밑에서 자란 청년 쩡솨이(정백연 분)는 기억이 없으니 꿈에서라도 태어난 곳과 엄마를 만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한 번도 엄마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는 세상에 대고 외칠 수 있지만, 난 그럴 수도 없었어요. 처음에는 부모님을 만나기 전에 내가 죽을까 걱정했는데, 크고 나니까 내가 찾기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실까 봐 겁이 나요.”“부모가 어떻게 자식을 잃을 수 있느냐.”는 쩡솨이와 “세상에 자식을 잃어버리고 싶은 부모는 없다.”는 레이저콴이 오토바이 수리점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마음을 위로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처럼 함께 부모와 아들 찾기에 나섭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쩡솨이가 새롭게 기억해낸 ‘한 마을에서 두 아이가 동시에 유괴되었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공유한 인터넷과 제보의 힘으로 친부모를 만납니다.
모든 잃어버린 아이들과 부모들이 이런 해피엔딩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레이저콴은 다시 오토바이에 깃발을 달고 길을 떠납니다. 유괴로 18개월 된 딸을 잃어버린 젊은 엄마는 한 청년의 신고로 경찰이 유괴범을 잡고 아이를 되찾은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해 강물에 몸을 던집니다.
길에서 만난 승려는 레이저콴의 “아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제 아들은 살아있나요?”라는 물음에 부처님의 ‘인연’이라는 화두로 답을 대신합니다. 주님이라면 어떤 말씀을 주셨을까요.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은 늘 내 앞에 서 있다.(이사 49장)’가 아닐까요. 영화는 그렇게 끝났지만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인 궈강탕은 7년 후인 2021년 7월 기적처럼 아들을 찾게 했으니 말입니다. 이처럼 레이저콴이 메모장에 마지막으로 쓴 ‘아이는 부모에게 돌아가 행복하게 살았다.’가 세상 모든 실종 아동들과 부모들에게 현실로 찾아오기를.
[영화 칼럼] 영화 ‘돈 워리’ - 2018년 감독 구스 반 산트
‘나’ 자신을 용서할 때까지
존 캘러핸(1951~2010), 미국 포틀랜드 출신의 카툰 작가입니다. 굵은 펜으로 단순하게, 때론 거칠게 그린 만화는 거침없는 소재와 농담, 풍자로 유명합니다. 이것뿐이라면 할 이야기가 별로 없겠습니다만, 태어나서 6개월 만에 버려지고 열세 살 때부터 술을 마신 알코올 중독자로 스물한 살에 사지가 마비된 인물이라면 다르겠지요.
<돈 워리>는 불우하고 절망적인 시간과 그 시간을 이겨내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그의 자서전입니다. 줄담배에 금단현상(손 떨림)으로 일어나자마자 술부터 사서 길이나 공원에 주저앉아 마시고, 숙취 없이 잠을 깨는 일이 거의 없는 나날들. 친구와 술집을 옮겨 다니며 진탕 마시고는 시속 140㎞로 달리다 온몸이 부서진 것은 당연한 결말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존(호아킨 피닉스 분)은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립니다. 마음에 원망과 미움만 가득합니다. 설상가상 사고로 이제는 손만 겨우 움직일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살아. 나에겐 미래가 없어.”라고 울부짖으면서 휠체어에 앉아서도 여전히 술만 찾습니다.
정말 ‘이런 몸’ 때문에 그의 미래가 없어진 걸까요. 그럼 ‘이런 몸’이 아닌 때에는 미래가 있기는 했나요. 그는 자원봉사자 아누(루니 마라 분)와 알코올 중독자 치료 모임의 멘토인 도니(조나 힐 분)를 만나면서 그것이 아님을 깨달아 갑니다. 아누는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다. 앞으로 인생을 멋지게 살 것이다.”라고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깊은 사유와 성찰의 소유자인 도니는 “하느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주시고, 그 차이점을 아는 지혜를 주소서.”라고 기도해 줍니다.
한 인간이 절망과 자학, 상처와 자기연민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핑계로 오랫동안 술독에 빠져있었다면. 존 역시 술로 삶이 피폐해졌음을 인정하고, 어떤 큰 힘이 맑은 정신을 준다고 믿고, 의지와 삶을 주님의 보살핌에 맡기지만 유혹과 의심, 두려움에 흔들리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도니는 충고합니다. 도움받을 수 없다고 믿을 때는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꼭 예수님한테는 아니더라도 믿고 요청해라. 믿음에만 매달리지 말고 행동해라.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떠넘기고 싶을 때는 이건 하느님의 선택이라고 믿고 하느님 바구니를 만들어 종이에 문제를 적고는 구겨서 던져 넣어라.
발견과 깨달음의 순간들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상처도 저절로 치유되지 않습니다. 어떤 고통은 영영 사라지지 않아 매일 그것과 씨름을 해야 합니다. 도니는 그 고통과 상처를 이겨내는 길은 용서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대로 존은 자신을 미워한 고교 선생님과 양부모, 도움을 거절했던 사회복지사, 함께 사고를 당했던 친구를 만나 사과하고 용서합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어머니는 물론 과거와 지금 그대로의 ‘나’까지 용서합니다.
그 용서의 힘으로 풍자만화를 그리고, 아누와의 사랑도 시작한 그가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걱정 말아요. 희망은 멀리 가지 않으니까!(Don't Worry, He Won't Get Far on Foot!)”
[영화 칼럼] 영화 ‘가구야 공주 이야기’ - 2013년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
천국에서도 잃어버리지 않는 기억은?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일본의 가장 오래된 설화(다케토리 모노가타리)를 아름답고 정감 넘치는 동양적 선과 채색, 일본풍 수채화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가구야 공주 이야기>에서 가구야를 달(천국)로 다시 데려가는 천사는 그곳이 “이 땅의 모든 것을 잊게 해, 슬픈 일도 더러움도 없어지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가구야 공주는 영원한 삶이 있고, 행복만이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싫어합니다. 천상(달)의 아이로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본 그녀는 이렇게 반박합니다. “더러움 같은 건 없어. 이 땅에 사는 것은 모두 생기가 넘쳐!”
손바닥만 한 크기로 죽순에서 태어나서는 순식간에 ‘대나무 순’처럼 쑥쑥 자라 아리따운 소녀가 된 그녀라고 행복한 나날만 계속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 산골에서 자신을 길러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너그러운 사랑, 오누이처럼 지낸 스테마루와 마을 아이들과 함께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던 즐거움이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준 보물로 부자가 된 할아버지가 그녀를 공주처럼 키워 귀공자와 결혼시키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도시로 이사하면서 끝납니다.
귀공자들은 물론 왕까지 탐내는 아름다운 처녀가 되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좌절과 속박, 외로움과 슬픔 속에서 자연과 고향의 친구들을 그리워합니다. 고향 뒷산의 나뭇잎이 새순을 감추고 봄을 기다리며 견디듯 언젠가는 그곳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지만,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욕심으로 그녀에게 수치심과 두려움, 죄의식만 심어줍니다. 그녀를 돌아갈 수 없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이 땅에 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먹는 순간, 그 소원을 달(천상)에 비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어디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온 것인지 깨닫습니다. 먼 옛날 이 땅에서 달에 간 사람들이 기억을 모두 잃어버려 기쁨도 슬픔도 없건만 “돌아오라, 돌아오렴, 아득한 시간이여, 돌아와서 마음을 떠올려다오. 새, 벌레, 짐승, 풀, 나무 꽃, 사람의 정을 키우고 키워서 기다린다고 하면 지금 돌아가리라.”라고 노래 부르면서 눈물을 흘린 마음을 알게 됩니다.
때론 슬프고 괴롭겠지만 새와 짐승처럼 그녀는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스테마루에게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먼 옛날 이 땅에서 온 사람들 역시 기억을 잃었지만, 그 시간만은 잊지 못해 언제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가구야는 달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이미 달(천상)에 온 사람들도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누구에게나 이 땅에서의 삶은 한 번뿐이니까요. 기억을 지우고 달로 돌아가는 먼 하늘에서 가구야가 고개를 돌려 멀어져 가는 지구를 보면서 흘리는 한줄기 눈물이 그래서 더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설화는 인간의 삶을 투영합니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 역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에서 행복을 느껴야 하는지 말해줍니다. 이 땅에서 주어진 모든 것들에 감사하면서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야말로 천국에서도 잊지 못할 행복한 기억으로 남지 않을까요. 그 기억이 있기에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지 모릅니다.
[영화 칼럼]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 2005년 감독 크리스티앙 카리옹
영원히 멈추게 하소서!
해마다 성탄절이면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경배합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는 그분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 땅에 자비와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평화는 믿음과 사랑으로 이웃과 함께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고귀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주님의 섭리를 따르려는 인간의 의지이며 실천입니다.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는 그것을 보여줍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 프랑스 북부 전선. 불과 100m 거리를 두고 독일 군대와 프랑스, 스코틀랜드 군대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벌어지는 전투로 젊은 생명들이 무참히 쓰러집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와 불안,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절망과 고통의 신음 소리가 이어지는 그곳에도 크리스마스는 찾아옵니다.
독일군에 성탄 트리가 전달되고, 성악가인 장교 슈프링크는 황제의 특혜로 면회를 와서, 후방으로 가자는 아내 안나에게 “오늘 밤만은 동지들을 위해 노래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때마침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고향을 꿈꾸네>를 합창하고, 그 노래가 끝나자 슈프링크가 어느 병사의 하모니카 연주에 맞춰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면서 전쟁터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크리스마스이브 하루 동안만 휴전합시다.”
독창은 합창이 되고, 독일군의 성탄 트리가 참호 밖에 세워지자, 병사들은 총을 놓고 걸어 나와 한자리에 모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의무병으로 참전한 팔머 신부의 백파이프 연주에 독일 병사들이 <어서 가 경배하세>를 부르고, 안나의 <아베마리아> 열창에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눈물을 흘립니다.언어가 달라도 샴페인과 포도주를 나눠 마시고, 초콜릿과 담배를 건네주고, 지갑에 간직한 아내의 사진을 서로 보여주고, 카드놀이를 하면서 그들은 적이 아닌 ‘서로 마음을 함께 하는 이웃’이 됩니다. 미사를 집전한 팔머 신부는 강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밤 우리는 한겨울에 불가로 끌리듯 제단으로 왔습니다. 어쩌면 함께 있기 위해, 어쩌면 전쟁을 잊기 위해.”
그들의 성탄절 기적은 하루 더 이어집니다. 세 나라 병사들은 들판에 버려두었던 동료들의 시신을 모두 거두어 묻어주고, 후방에서의 포격을 서로 알려주고는 함께 참호로 피해 목숨을 지켜줍니다. 각자 자리로 돌아갈 때 <올드 랭 사인>을 부르고 서로가 살아남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니 더 이상 총부리를 겨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증오와 적대감을 부추기며 그들을 전쟁터로 내몬 자들은 그 ‘평화’를 적군과 놀아난 반역으로 규정해 팔머 신부를 쫓아내고, 독일군 부대는 해산됩니다. 그래도 그들은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팔머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 생애 가장 중요한 미사로 인도하셨다.’고 믿고, 독일 병사들은 참혹한 러시아 전선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애잔하게 스코틀랜드의 <고향을 꿈꾸네>를 콧노래로 부릅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1914년 겨울, 독일 점령하의 벨기에 이프레스 지역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그날의 ‘기적’을 만든 군인들은 계속된 전쟁에서 대부분 목숨을 잃었습니다. 주님이 주시려는 평화는 성탄절 하루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이 땅에 어떤 전쟁도 영원히 사라져, 인간, 나아가 모든 생명체가 언제나 공존의 기쁨을 누리는 평화를 빕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영화 칼럼] 영화 ‘뷰티풀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
화가 납니까?
화를 참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사소한 일에 흥분하고, 소리 지르고, 폭력을 휘두릅니다. 아무 상관 없는 타인에게,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무턱대고 화풀이를 하는 비열하고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화를 참는 것이 최선은 아닙니다. 참고 쌓아두면 한국 사람에게만 있다는 ‘화병’에 걸리거나, 엉뚱한 곳으로 나아가거나, 어느 날 한꺼번에 폭발해 더 큰 화(禍)를 불러옵니다.
영화 <뷰티풀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의 잡지 기자인 로이드도 가슴에 화가 가득합니다. 그 화는 죽어가는 엄마와 어린 남매를 두고 오래전에 집을 나간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 상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고립된 인간관계, 세상에 대한 냉소, 대화가 아닌 주장, 일에만 몰두하기,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글로 대신합니다. 그 글로 때론 아무도 못 보는 진실을 밝혀내고, 망가진 세상을 고치게 하고, 연말에 특집 기사 상까지 받으면 뭐 합니까. 정작 자신은 망가진 사람인데. 그가 자조(自嘲) 하듯 ‘사회 부적응자’로 아내와 어린 아들과는 점점 멀어지고, 모두가 인터뷰를 꺼리는 외톨이로 ‘악명’만 높아져 가는데. 그런 그가 내키지 않은 한 인물을 만나면서 바뀝니다. 어린이 TV쇼 <미스터 로저스의 이웃>의 진행자 로저스입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로저스는 TV쇼에서 ‘좋은 날, 최고의 이웃’으로 그를 맞이해 일방적 질문과 대답(인터뷰)이 아닌 대화를 시작합니다. 예상 못한 상황을 처음에는 거부하지만, TV쇼에서의 로저스와 실제 삶에서의 로저스를 보면서 로이드도 마음을 엽니다. 화를 녹여버리니 소중한 가족이 보이고, 아버지의 사랑이 보입니다.
뻔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가슴 깊이 와 닿는 것은 로저스로 분한 노배우 톰 행크스가 특유의 어눌한 말투와 동요로 전하는 메시지가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이해하고, 쓰다듬기 때문입니다. 처음 만난 로이드와 기꺼이 ‘이웃’이 되어 그 가족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겸손한 모습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끔은 사랑하는 사람을 용서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아이는 자라지 않습니다. 최고의 양육은 우리가 어떻게 자랐는지 생각해보고 아이들이 겪는 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어서 특별합니다. 전 이 모습 그대로를 참 좋아합니다.”
삶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고, 화날 일도 많습니다. 로저스는 그럴 때, 자신과 타인을 해치지 않고 자기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은 많다고 했습니다. 찰흙 덩어리를 주먹으로 치거나, 피아노 건반을 열 손가락으로 ‘꿍’하고 두드리거나, 전속력으로 수영을 하거나.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성자(聖者)는 아니니까요.
로이드에게서 제 모습을 봅니다. 신문기자로 글에 날을 세워 찌르기에 매달렸던 그때는 몰랐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것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나의 상처였음을. 5년 전(2016년) 가톨릭평화방송 · 평화신문의 신앙체험 수기(대상 수상)를 쓰면서 다짐했지만, 이따금 글에 가시가 툭툭 나옵니다. 어리석게도 버리지 못한 화가 있나 봅니다. 그럴 때마다 기도를 합니다.
[영화칼럼] 영화 ‘나의 산티아고’ - 2016년 감독 줄리아 폰 하인츠
왜 그 길을 걷는가?
길은 시간이고 역사입니다. 누군가가 지나가고, 또 지나가야만 생깁니다. 길에는 그곳을 지나간 수많은 생명들의 삶과 시간이 스며있습니다. 길은 거기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길은 길로 이어져 가다 보면 다른 길과 만나고, 어디쯤에서는 작은 길이 큰길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런 ‘길 위의 날들’이 인생이기도 합니다.
길을 걷는 목적이 오로지 이동이라면, 걷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일지 모릅니다. 인간에게는 가장 원초적인 힘인 두 다리보다는 얼마든지 효율적인 다른 수단이 있습니다. 편안히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갈증과 허기,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며 험한 산길을 걸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걸었습니다. <나의 산티아고>의 독일 인기 코미디언 하페는 800㎞의 산티아고 고행에 나섰고, <와일드>의 주인공인 미국 여성 작가 셰릴은 장장 4,285㎞의 아메리카 산악길인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혼자 걸었습니다. 그들뿐만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었고, 또 걷고 있습니다.
과로로 쓰러진 하페에게 그것은 휴식도, 여행도 아닙니다. 순례자 흉내를 내고 싶었던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세상의 어느 길을 선택하든 길은 걷는 자에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페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흘린 땀과 눈물, 환희와 절망이 만들고 지킨 멀고 험한 산티아고 길에서 그 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발자취가 남은 성스러운 길은 어떤 약속도 하지 않은 채 가진 것부터 모두 버리라고 말합니다. 배낭에 들어있는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듯 욕심을 버리고, 생각을 버리고, 시간까지 버리라고. 앞서 그 길을 걸었던 브라질 소설가 코엘류도 “늘 우리를 이끌어주는 손이 있음을 믿고 매 순간 우리 시간을 온전히 내맡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회의와 고통과 눈물의 여정이 육체의 한계를 넘어 조금씩 믿음과 기쁨과 깨달음으로 변해갈 때 길은 나에게 살아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 순간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듯 하페는 눈물을 쏟아냅니다. 그는 그것을 “신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도 그와 같은 속도로 걷고, 헉헉대고, 쓰러지면서 하루하루를 함께 합니다. 빨강머리의 영국 여자 앤, 마음이 넉넉한 뉴질랜드 중년 여성 쉴라도 함께 만납니다. 영화가 이따금 담아낸 감탄을 자아낼만한 풍경 역시 눈이 아닌 마음에 담습니다.
길은 사유와 자유를 이어줍니다. 샛길을 어슬렁거려도, 가다가 멈춰서도, 가던 길을 되돌아와도, 길을 잃고 헤매도, 거기에는 성찰과 사색과 주님과의 대화가 있습니다. 영화와 책이 아무리 느리게 걷더라도 그것들을 오롯이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영상으로 지나가는 길, 글로 걷는 길보다는 느리고 힘들지만 직접 그 길을 걸으려 하는지 모릅니다. 저마다 인생이 다르듯 그 걸음 또한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의 버킷리스트에도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당연히 누릴 수 있다고 여겼던 것들조차 멀어지면서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후회는 늘 머뭇거림에서 오나 봅니다.
[영화칼럼] 영화 ‘기적’ - 2021년 감독 이장훈
마음의 상처, 감추지 마세요!
육체의 상처는 쉽게 드러나고, 또 빨리 드러냅니다. 고통을 호소하고, 눈에 잘 보이니 도움의 손길도 빠릅니다. 그와 달리 마음의 상처는 잘 드러나지도 않고, 쉽사리 드러내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 상처를 들여다보고 치유해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깊숙이 숨겨두거나, 상처에 갇혀 살거나, 스스로 상처에 소금을 뿌려대곤 합니다.
영화 <기적>의 주인공인 경북 봉화 오지에 사는 고교생 준경(박정민 분)도 두 개의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숨기고 있습니다. 그 상처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 남긴 것입니다. 어머니는 산고 끝에 그를 낳고는 세상을 떠났고, 누나 보경(이수경 분)은 그가 도내 수학 경시대회 우승으로 받은 트로피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다 철교에서 강물로 떨어져 목숨을 잃습니다.
준경은 그들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로 인한 상처와 죄책감을 아버지에게조차 드러내지 않습니다. “내가 도전할 때마다 안 좋은 일만 생겨. 항상 그랬어.”라면서 수학 천재로 우주과학자가 되는 꿈과 기회도 포기합니다. 마음과 시간을 가두어 버린 채 “아직도 누나는 나한테 있다.”면서 한 가지에만 매달립니다. 오갈 수 있는 길이라고는 철로뿐, 철교와 터널을 세 번씩 지나야 하는 마을에 간이역을 세워달라고 대통령에게 54번이나 편지를 씁니다.
자책하고 포기한다고 상처가 치유되고 죄책감이 씻어질까요. 간이역을 세우고, 살던 집을 떠나지 않는다고 누나가 살아 돌아올까요. 그것이 자신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한 누나가 바라는 일일까요. 아버지(이성민 분)가 “그래, 고생 많았다.”라고 칭찬을 해줄까요. 아닙니다. 환상속의 누나는 그에게 “네가 먼저 ‘내 갔다 올게’ 그래야 나도 웃으며 떠날 것 같아. 그날만 기다려.”라고 말합니다. 정부의 지원을 기다릴 수 없어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 지은 간이역을 기관사인 아버지는 규정을 내세우면서 열차를 세우지 않고 지나쳐 버립니다.
아버지는 왜 그럴까요. 그도 같은 상처를 안고 있으며, 그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근무 규정에 집착해 아내와 딸을 죽게 만들었다고 자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을 보면서 아들까지 그렇게 될까 무서워,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들킬까 봐 준경을 외면합니다. 그렇게 서로 숨겨왔던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의 상처가 준경의 천재물리학협회 미국 유학생 선발시험 도전을 계기로 확인되고 드러남으로써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준경의 시험을 위해 간이역에 열차를 과감히 세우고, 준경은 “내 갔다 올게.”라면서 누나를 기쁘게 떠나보냅니다. <기적>은 마음의 상처야말로 그 어떤 것도 아닌 마음으로 치유할 수 있으며, 그 마음이란 바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입을 때가 있습니다. 크건 작건 그때마다 감추지 말고 ‘아프다.’고 소리쳐야 합니다. 진정으로 그 말에 귀 기울이고, 상처를 쓰다듬고 씻어줄 손길이 가까이에 없다면 크게 신음하면서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신다.”’(시편 34,19)고 했습니다.
[영화칼럼] 영화 ‘배드 지니어스’ - 2017년 감독 나타우트 폰피리야
주님의 그물은 성긴 듯하지만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거짓말과 속임수도 ‘치밀하고 교활(cunning)’합니다. 남들이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속이고, 불법을 저지르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고 상대를 곤경에 빠뜨립니다.
태국 방콕의 타이판야고교에 다니는 여학생 린(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 분)의 커닝 방식도 귀신을 속일 만큼 기발합니다. 수학 경시대회 1등의 천재적 지능을 가진 그녀는 피아노 건반을 치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이용해 시험 시간에 24명의 급우들에게 답을 알려줍니다.
그들 중에는 단짝인 그레이스(에이샤 호수완 분)와 부잣집 아들인 그녀의 남자친구 팻(티라돈 수파펀핀요 분)도 있습니다. 물론 재미나 우정으로 린이 그런 짓을 한 것은 아닙니다. 1인당 3천 바트(약 10만5천 원)를 받았습니다. 피아노 교습비를 받은 것이라고 둘러대며 아버지의 옷도 사줍니다.
거짓과 속임수로 부정을 저지르고, 악행을 일삼아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만든다.” 이혼한 아버지와 가난하게 사는 린도 터무니없이 비싼 등록금, 자발적이라면서 사실상 강제인 기부금, 그 돈을 학생들을 위해 쓰지 않고 교사들이 챙기는 불합리하고 부패한 학교를 탓합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 구걸하지 않고 나의 재능으로 학비를 벌었다, 나름대로 피나는 노력을 했고, 누군가 손해를 보지 않고 서로 이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빈틈없고 교묘한 속임수도 전교 1등을 다투는 남학생 뱅크(차논 산티네톤쿨 분)의 고발로 린의 부정행위는 들통이 납니다. 장학금은 취소되고, 아버지는 “내가 널 잘못 키웠다.”며 절망합니다. 여기서 나쁜 재능이 멈추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번 악(惡)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은 더 큰 악과 손을 잡습니다. 악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먼저 속이지 않으면 당하고 마는 것이 인생이야.”라고.
악은 절대 혼자 가지 않습니다. 늘 옆에 있는 선(善)에게 손을 뻗칩니다. 세탁소를 하는 홀어머니와 힘들게 살아가는 뱅크를 끌어들입니다. 아버지의 강요로 실력도 없으면서 미국 유학을 가야 하는 팻이 폭력배를 동원해 그를 절망의 상태에 빠뜨립니다. 이렇게 해서 린과 뱅크가 함께 시차를 이용한 STIC(미국 유학 시험)의 커닝 작전을 벌입니다. 둘이 호주에 가서 시험을 보고 그 답을 외워서 휴대폰으로 4시간 늦게 시험을 보는 태국에 답안을 보내는 기발한 방법. 천재가 아니면 불가능한 시도로 멋지게 성공하는 듯했지만 화장실을 오래 쓰는 뱅크를 의심한 다른 응시생들의 신고로 결국 발각되고 맙니다.
긴 인생을 남겨놓은 그들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용기 있는 고백으로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천재성을 선하게 쓸 것인가, 아니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망치게 하는 나쁜 천재로 남을 것인가. <배드 지니어스>에서 “더럽게 버는 돈은 이제 나한테는 의미 없다.”는 린과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힌 뱅크는 서로 다른 선택을 합니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거짓말과 속임수, 부정과 악행이란 없습니다. 그 죄도 언젠가는 반드시 받습니다. 주님(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하지만, 하나도 빠뜨림이 없다(天網恢恢 疏而不漏)고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