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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모서리의 고백록
-민정순, 『따뜻한 모서리』
“어떤 예술 작품의 가치는 암시된 감정 자체의 풍부성에 의해 측정된다.”- 베르그송(Henri Bergson)
배옥주
1. 애잔한 들숨과 평화로운 날숨
모서리 뒤편에서 써내려간 민정순의 고백록을 펼친다. 디카시를 쓰는 시인이 들려주는 목소리는 피사체들의 순간을 렌즈에 담아둔 사진처럼 선명하다. 순수서정으로 투사되어 기록된 빛과 어둠의 대비가 애잔한 들숨과 평화로운 날숨으로 직조되어 있다. 민정순은 우연히 대상을 만나는 순간 사유를 향해 주의력을 집중시킨다. 이때 시적 대상에 대한 주의력은 정확하게 인식하는 순간을 시로 포착하는 힘으로 발현된다. 민정순의 시는 하찮은 사물 하나에도 생명을 부여하는 근원적 질서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정서로 표출된다. 그녀의 그늘진 내면을 희디흰 그리움으로 채우는 꽃술 앞에서 ‘가난하고 높고 외로운’ 시성詩性을 지닌 ‘백석’을 떠올린다. 늙은 어머니와 사랑하는 이를 읽어내는 ‘흰 바람벽’(「흰 바람벽이 있어」)처럼. 시의 본질이 성정性情에 있다면 민정순 시의 성정은 필시 순조로운 의지에 닿아 있을 것이다.
시인이 체험한 일상은 타인에 대한 보편성을 획득한다. 민정순의 시는 자신의 감정 안에서 홀로 써내려간 뜨거운 흔적들이다. 그녀의 고백록은 하잘 것 없는 대상과 조응하는 사랑의 힘이며, 체념할 수 없는 마음들이 써내려간 세월의 기록이다. 민정순의 시세계는 대상의 과거부터 미래까지 감싸 안는다. 그래서 그녀가 건너온 시의 연륜에 손이 닿으면 금세 따뜻해진다. “진실한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평화롭다”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말처럼 그녀가 그려내는 시의 손금 안으로 들어서면 월구月邱의 평화와 마주하게 된다. 민정순이 지향하는 감정선은 “온기의 바깥을 살아내는 작은 새”가 되기도 하고 “어릴 적 그리움을 소환”해 “연분홍 꽃물”에 들기도 한다. 때로는 손수레를 끄는 할아버지를 위해 “일찌감치 비켜”서 있거나, 새벽녘“고압선 난간”에 앉은 겨울새를 지켜보며 조용히 “숨을 고르”는 바람이 되기도 한다.
시인의 소소한 기억들 속에서 진실을 승화하는 미적 인식을 만날 수 있다. 비어있되 가득하고 그윽하게 쓸쓸한 그 마음의 공간에는 미처 보내지 못한, 아직은 보낼 수 없는 그리운 숨결로 가득하다. 문장 곳곳에 꾸욱, 꾹 눌러 담은 그리움의 이미지가 어느날 문득 떠나버릴 꽃무더기임을 알기에 여운이 더욱 깊다. 가을하늘에 “쓸쓸을 섞어 진하게 갈고 있”는 벼루와 먹의 새카만 마음에 귀 기울이면 민정순의 고백을 들을 수 있다. 그 목소리에는 떠난 것들을 불러 세우는 희디흰 쓸쓸함이 배어 있다.
탈현대를 지향하는 이성의 시대. 다시 서정으로 돌아가려는 시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서정적 감성이 유려하게 이어지는 민정순의 시는 전위적인 시를 밀어내고 편안한 시세계를 지향한다. 시에서 절제되지 않는 감상주의나 친절한 화자 개입은 독자의 상상력을 침범하여 시의 탄력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그녀의 시편들은 시적 일상의 진정성이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어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긴장감의 여백을 순순히 풀어낸다. 시인의 체험으로 이루어진 감각적 시세계는 누구라도 선뜻 다가가 만져볼 수 있어서 편안하다.
2. 우리들의 사원을 포용하는 시선
민정순의 시세계로 들어가면 외로움에 흠씬 젖는다. 그녀의 시세계는 사회를 비판하는 현실 참여의 복잡한 세상을 기웃대지 않을뿐더러, 능숙한 언어 기교를 자랑하거나 충격적 정황으로 우리를 놀래킬 마음은 더더욱 없다. 다만 시인은 작은 생명과 진리의 싹이 움트는 작은 꽃밭을 돌보며 이웃과 더불어 자신의 시세계를 확장해나간다. 민정순의 시에서 표출되는 평범한 일상에서는 보편성의 힘을 노정하는 정신적 가치의 고귀함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시인이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의 본성은 공동체를 감싸 안는 정체성을 보여준다. 소소한 일상을 탐구하는 감각적 서정성은 가족이나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로 형성된 공동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시인은 우리들의 사원으로 초대한 이웃 모두에게 무한 애정을 쏟아낸다. 어쩌면 시인은 ‘우리들의 사원’을 펼쳐두고 자신의 외로운 심경을 위무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민정순의 시는 구석진 곳을 채우거나 흐린 곳을 밝히는 긍정의 힘을 배태하고 있다. 시인의 시선은 울퉁불퉁한 손마디에 세월을 입은 채 ‘손두부를 파는 할머니’나, 구석진 동네 어귀에 세워둔 트럭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생선장수 노인의 팔리지 않는 생선’ 또는 늘 그 자리에서 지워진 기억을 캐고 있는 ‘치매 걸린 할머니’를 향한다. 이처럼 ‘손수레’가 지나가도록 골목 끝에서 오래 “비켜설” 줄 「스쳐가는 길」아는 시인의 지향점은 아프거나 쓸쓸한 것들을 돌아보고 배려하는 근원으로 향한다. 다음의 시 「마타리꽃」에서는 공동체의 울타리에서 내미는 손길을 잡을 수 있다.
세월의 울타리 안에서
곱게 물들어가던
마타리꽃이 서럽다
건너온 시간을 봉인한 채
비바람에 후드득 떨어진
꽃잎의 낱장
가을녘 예고 없이 찾아온
공포의 덫에 걸려
잃어버린 행간마다
캄캄한 파열음
늘 거기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할머니
늙은 마타리꽃이
지워진 기억을 캐고 있다
- 「마타리꽃」 전문
‘마타리’는 들판을 노랗게 물들이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노란 마타리는 여름이면 산과 들로 번져가는 야생화로 생명력이 강해서 잘 자란다. 시인의 시선은 “늘” 같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지워진 기억”을 캐고 있는 할머니에게로 향하고 있다. “세월의 울타리 안에서 곱게 물들어가”던 늙은 마타리꽃은 점점 사위어가는 할머니를 대신해 서러운 생명체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시인의 눈에 포착된 할머니는 “예고없이 찾아온 공포의 덫” ‘치매’라는 세월의 “비바람”에 삶의 “낱장”마저 “떨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잃어버린 생의 행간마다 “캄캄한 파열음”으로 가득하다.
치매는 마음이 지워지는 정신적 추락을 의미하며 일상생활을 이어나가기 힘든 상태가 된다. 치매는 병을 앓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치명적인 고통을 주는 무서운 질병이다. 시인은 늘 같은 그 자리에서 잃어버린 기억을 캐내듯 호미질을 하고 있는 치매 할머니를 자주 보게 된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늘 같은 자리에 같은 시간을 뿌리내리는 마타리꽃을 떠올린다. 저 할머니에게서 가정을 이루며 자식을 키우고 강하게 한 세상을 지켜온 우리의 어머니를 떠올렸기 때문이 아닐까? 야생으로 자라는 마타리꽃이 들판에서 꽃대를 뻗어가는 모습은 할머니가 “지워진 기억을 캐”기 위해 시간을 뻗어가는 모습과 대비된다.
이 시는 마타리꽃과 치매 할머니가 오버랩되는 이미지를 통해, ‘캄캄한 파열음’을 캐고 앉아 있는 마타리꽃이 될 수도 있을 우리들의 미래에 대해 상념에 젖게 한다. 시인의 시선은 타자에게로 향하고 있다. 다음 시편들에서도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시인의 성정과 깊은 시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민정순 시세계에서는 일상에서 발견하는 생명의 진리를 또 다른 일상에게로 옮겨간다. 아래의 시편들에서는 노점상에서 ‘손두부를 파는 할머니’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녀와 이웃인 ‘옥이 엄마’의 서사가 펼쳐진다.
밤새운 어둠을 하얗게 빚어
노점상에 진열해놓고
조그마한 나무 조각에
할머니 미소 같은 문패
두부 사가세요 손두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붙박이 삶을 꾸린 햇살 그늘
오래 말랑하다
-「할머니와 손두부」 부분
그녀는 왜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을까
<중략>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녀
마을 공터 소문을 휘젓고 다닌다
- 「허공의 소문」 부분
오일장 한 모퉁이에
옥이 엄마도 푸성귀 몇 소쿠리
정갈하게 펼쳐 놓았다
쪽진 머리에 비녀를 꽂고
놀면 뭐 하노
심심해서 세상 구경 나왔다
환하게 웃으시는,
- 「오일장」 부분
시인은 손두부를 파는 할머니의 붙박이 자리에서 “두부 사가세요 손두부”라는 나무 문패를 본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손수 만든 손두부를 팔아 사각의 가계를 이끌어나갔을 울퉁불퉁한 손마디를 “꽃으로 피었”다는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이웃의 모습에도 시인은 손을 내밀어 그들의 배경이 되기를 자초한다. 시인의 심사는 “낮은 밀차를 끌고 대구역 근처로 푸성귀를 팔러가는 ‘청도댁 할머니’에게로 이어진다. 푸성귀를 담은 밀차와 기차에 오르는 ‘청도댁 할머니’를 뒤에서 앞에서 밀어주고 올려주는 마음이 담긴 ‘이응’ 속에는 타자와 약자를 편견 없이 포용하는 시인의 둥근 자세가 담겨 있다.
시인의 내면 깊숙이 흐르는 여린 성정은 다음 시 「오일장」에서도 이어진다. ‘옥이엄마’는 이웃이다. 시인은 장날 어느 “모퉁이”에서 옥이엄마를 만나게 된다. 옥이엄마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장성한 자식들을 독립시킨 후 “푸성귀 몇 소쿠리 펼쳐놓”고 장터에 앉아 있다. “쪽진 머리에 비녀를 꽂”은 정갈한 모습의 옥이엄마는 “심심해서 세상구경 나왔”노라며 시인을 반긴다. 시인은 “볕 한줌”씩 얹어놓은 옥이엄마의 소쿠리를 보며, 옥이엄마의 모습 속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허공의 소문」에서도 시인은 “한쪽 날개가 꺾”여 ‘불구가 된 비둘기’에 대한 소문으로 말문을 연다. 비둘기는 왜 한쪽 날개가 꺾인 걸까? “나무에서 떨어졌”거나 “태어나면서부”터 불구이거나, 먹이를 구하려다 “돌멩이에 맞았”다는 등 무성한 풍문이 떠돌아다닌다. 우리가 살아가는 “슬픈 생존의 바닥 도처”에는 예견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린다. 그래서 삶은 더욱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불현듯 덮쳐오는 공포스런 사건들 앞에 서면 연약한 인간의 실존에 대해 돌아볼 수밖에 없다.
비둘기 사건은 “그녀”에게로 전이된다. 시인은 “창문 밖으로” 투신한 그녀의 비보를 접한 후 착찹한 심경이 된다. 사실 시인은 ‘그녀’와 생면부지의 관계다. 풍문으로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녀’는 “인테리어”도 하고, “살림살이도 새 것으로 장만해놓”고 부부가 잘 살 일만 남은 사람이라 생각하기에 갑작스럽게 몰아친 불행이 믿기지 않는다. 다만 “공사로 인한 소음으”로 이웃과의 갈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무슨 연유일지 시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그녀’가 놓친 행복한 시간의 여운을 곱씹어본다. 그래서 시인은 “마을공터 허공을 휘젓고 다”니는 소문에 걸어둔 안타까운 시선을 거두지 못 하는 것이다.
이렇듯 시인이 바라보는 시선은 불구이거나 약하거나 여린 타자를 향한 포용과 배려의 시선으로 집약된다. 사람 냄새 물씬한 구배기의 정 넘치는 할머니와(「구배기에 가면」), 골목시장 참기름집 할머니를 통해 흔들리는 마음 자락들을 다잡아 빈 자리를 채워준다.(「골목시장」) 또한 시인은 좁은 골목에서 손수레를 밀고 오는 노인을 위해 한켠 자리를 비켜 기다려주는 배려를 잊지 않는다. 그들이 주고받는 고맙다는 인사가 골목길을 환하게 지펴줄 수 있는(「스쳐가는 길」) 이유는 시인이 한 걸음 뒤에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대자존재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향한 온화한 시선을 일체유심조의 마음으로 지켜나가는 시인의 모습이 아름답다.
3. 동행하는 내 안의 사원
가족은 서로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가족은 동일한 공간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며 일체감을 형성하는 친밀하고 상호의존적인 운명공동체다. 가족은 동고동락하며 서로 의지할 수 있는 큰 힘을 제공하는 존재이므로 갑자기 이별과 맞닥뜨릴 때, 엄청난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대체적으로 현대시에 등장하는 가족은 가족 이데올로기 속에 배치된 비정상적인 관계로 내적 갈등을 형상화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가족공동체가 붕괴되는 부정적 인식의 가족 모티프가 더 자극적인 소재로 사용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민정순의 시에 등장하는 가족공동체는 결이 다르다. 시인의 사원에 깃든 가족 공동체는 보편적인 정서와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이는 가족에 대한 상실감에서 비롯되는데, 그녀의 연출무대에는 ‘부모님과 남편’을 잃은 상실감의 심경이 절절이 녹아 있다. 민정순은 오래도록 물이 새지 않는 유년의 물항아리 ‘드무’를 잊지 못 한다. “유년의 달우물” 속에는 숨찬 가슴으로 고개 넘나들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출렁이고 있기 때문이다.(「드무」) 민정순이 시 속에 풀어놓은 생언어들은 굳이 숨길 것 없는 모든 심사가 솔직한 서정으로 표출된다.
없어도 있고
있어도 없는
당신을 잃고 빈방
무시로 폐허가 되고
울음이 갇혀 있는
삭제되지 않는, 저편
내 말은
아직도......
그때도
지금도
믿어지지 않아서
-「곁에」 전문
너는 한결같이 침묵하며
훌쩍 떠났다가 돌아와도
습관처럼 바라보기만 했지
강물의 맥박처럼 출렁이거나
낡은 열꽃의 상처에서
기억이 짓무르거나
<중략>
강언덕 큰돌 벤치
늘 낮은 등을 내어주지
- 「나의 사원」 부분
“내 말”은 그때처럼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당신을 잃”은 세상은 “빈방”이며 “폐허”로 변해버렸다. 곁에 있어야 할 당신은 먼저 떠났고 시인은 울음이 삭제되지 않는 “저 편”에 갇혀 있다. 당신을 먼저 떠난 보낸 시인은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감정으로 자신의 심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생활하며 강한 일체감이 형성된 가족의 중심에 있던 당신이 어느날 문득 사라질 때, 닥쳐오는 상실감과 불행은 가족이 얼마나 긴밀하게 상호 의존하는 공동운명체인가를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당신’은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 시인의 ‘곁’이 되어 영원히 함께 한다. 얼마 전에 영감을 먼저 보냈다는 여든 넷 할머니가 적적할 때마다 부른다는 ‘고향무정’을 들으며(「고향무정」), 시인은 그 적적하고 애절한 노랫가락에 자신의 마음을 얹어 허전한 심정을 달래는 것이다.
나의 사원에는 “늘 낮은 등을 내어주”는 “강언덕 큰돌 벤치”가 있다. 시인이 떠났다가 돌아와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바라봐주는 존재다. 시인은 늘 같은 자리에서 낮은 등을 내어주는 벤치처럼 ‘당신’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믿는다. “눈시울 붉어진 석양”이 꺼내주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당신’을 느낀다. 시인에게 ‘잔설’로 남아 있는 “오랜 사랑 하나”가 눈물처럼 “고여 있”는 것이다(「잔설」). 시인이 에둘러 말하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내는 그리움의 정서는 부모님 또한 마찬가지다.
느티나무 벤치에
모로 누운 아버지
마른 지팡이 세워두고
깊숙이 한 서린 노랫가락
느린 허밍으로 장단 맞추네
- 「허밍의 그늘」 부분
아픈 자식을 지키려는
등 굽은 아버지
한쪽 어깨를 밀착하여
서로의 곁을 따뜻하게 데우며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
-「동행」 부분
어진 암소 한 마리
늙은 마굿간에 얹혀 있다
- 「소와 가마솥」 부분
시인에게 부모님은 서로의 곁을 데우며 동행하는 존재다. 시인은 어머니가 주신 아버지의 유품 ‘벼루와 먹’을 보며 “쓸쓸을 섞”어 새카매진 마음을 진하게 갈아본다.(「벼루와 먹」) 아버지의 유품을 전해주던 가마솥 같고 어진 암소 같던 어머니는 “묵은 서랍 속”에 참기름 냄새로 번져 있다. 시인의 영원한 “안식처”(「깻묵 경전」)인 어머니는 생명의 원형과 연계된 상징성을 갖는다. “두 손 꼭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를 보며 시인은 “울 엄마 아부지도 들꽃 꺾어들고 꿈으로 오”시기를(「마음액자」) 간절히 소망해본다.
4. 더 낮은 자리의 괴로움까지도
시에서 드러나는 내면의식은 오랜 시간 쌓인 시인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의 시선은 바닥 더 아래의 낮은 곳까지 샅샅이 보듬는다. 그녀의 생은 상처 입은 생명들을 보살피는 따뜻한 모서리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생명이 있는 것은 미물이라도 혼신의 마음을 나눌 줄 안다. 시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대하는 시인의 진심을 통해 그녀의 타고난 온정을 느낄 수 있다. 다음의 시 쟁퉁이 까치에 시인의 심성이 잘 드러난다.
까치들이
미처 떠나지 못한 고양이
한 마리를 쪼아댄다
은행나무와 동거하는 뒷골목 발소리에
휙 돌아보던 까치는
나무 위에 휘파람을 걸어 놓는다
고양이를 자식처럼 돌보는
이층 캣맘,
새끼를 낳으면 반기를 드는
전단 뒤로 숨어들고
늘어나는 고양이 비린내에
나붙은 붉은 깃발을 읽었는지
배곯은 고양이들이
슬금슬금 돌아보며 떠나가고
방석 위에 앉은
고양이가 되고 싶던, 떼 까치들
정겨운 목소리로 남의 불행을
즐기며 휘파람을 분다
- 「쟁퉁이 까치」 전문
요즘은 길고양이의 개체 수 증가로 인해 배설물이나 악취 소음 등의 심각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사람들이, 캣맘의 고양이 돌보기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유기동물 보호로 인간과 동물의 공존과 공감대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개체 수 증가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유기동물과 인간의 공존은 피해만 늘뿐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위 시는 그런 문제들로 인해 고양이를 돌보는 캣맘의 먹이주기가 줄어들고 배곯는 유기고양이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서사가 진행되고 있다. 고양이 한 마리가 길고양이 가족을 따라 미처 떠나지 못 하고 남겨져 있다. 남겨진 고양이 한 마리가 쟁퉁이 까치에게 쪼이며 공격당하는 모습을 통해 고양이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시인의 성정이 오롯이 드러난다.
한때 이 고양이는 고양이를 자식처럼 돌보는 캣맘의 온정으로 방석 위의 따뜻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 고양이의 삶을 보며 부러워했던 까치는 내심 배 아팠는지, 혼자 남겨진 고양이의 불안한 처지를 즐기며 휘파람까지 불어재낀다. 쟁퉁이까치의 심술을 걱정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의 화자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문장을 다스리는 언어 곳곳에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물론 한때 고양이는 캣맘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방석 위의 삶처럼 안락했지만, 그 시간을 지나왔다 하더라도 남겨진 고양이의 신세가 애처로운 것이다. 그래서 남의 불행을 즐기며 즐거운 목소리로 휘파람을 부는 까치에게 한 마디 전하고 싶어 하는 시인의 심사가 잘 이입되어 있다. 이런 시인의 정서는 다음의 시 「절간으로 간 묘공」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를테면,
너를 어둠 속의 카오스라 불렀다
야생의 숲
저잣거리가 쳐둔 경계의 덫에 걸려
촘촘한 길 위
속도를 잃어버린 세 발 불굴의 몸
'넘어져 본 적 없는 자는
흉터를 비웃지 말라' 신조로 삼았다
한쪽 다리를 잃고
거리에서 밀려난 생,
잃은 한쪽 기억을 내려놓을 때쯤
타종 소리에 이끌려 절간 마당으로
들어섰다
길을 혼돈 속에서 밀어내며
허상에 집착하지 말라
큰 스님 공덕경 읽는 소리에 귀 열고
도량에서 공양으로 살아가는
표충사 묘공 보살
- 「절간으로 간 묘공」 전문
위 시의 묘공은 세 발의 불구다. 로드킬은 아니지만 “저잣거리가 쳐둔 경계의 덫에 걸”려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다리 하나가 적은 묘공은 타종소리가 이끄는 표충사 마당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불구의 묘공은 큰 스님 공덕경 소리로 업을 씻어가는 보살이 되었다. 절간에서 살아가는 세 발의 고양이를 화자는 “어둠 속의 카오스”라 부른다. 고양이가 겪었을 혼돈의 세계는 인간이 겪고 있는 카오스와 다를 바 없다. “넘어져 본 적 없는 자는 흉터를 비웃지 말라”는 다리가 부족한 불구의 고양이가 얻은 흉터가 앞으로 고양이가 살아갈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준다.
불교의 세 가지 보편적인 진리 중 첫 번째 진리인 ‘괴로움의 진리’에서 고통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할 때 괴로워지지만, 고통의 실재를 인정함으로써 애착과 욕망을 버린다면 만족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 시인은 절간의 불경을 공양으로 삼아 살아가는 불구의 묘공을 통해, 더 가지지 못해 갈급하는 인간의 욕망을 돌아보게 한다. 세 개의 다리로도 혼돈의 길을 밀어내며 “허상에 집착하”지 않고 ‘공덕경’에 귀를 여는 고양이와, 먹을 만큼만 먹이를 가져가는 체로키족 원주민의 양심처럼 우리도 허상의 집착을 버리고 비우며 살순 없을까. 넘어지고 깨어지면서 만나게 되는 상처의 흔적을 자랑스러운 신조로 수용한다면, 지금처럼 “묻지 마 칼부림” 앞에 억울하게 쓰러지는 피해자의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5. 모서리의 감정
민정순의 시에 깃든 깊은 사랑은 감정의 모서리에서도 곡선으로 분출된다. 시인이 써내려가는 고백에서 타인까지도 보듬는 품 넓은 사랑이 각진 감정을 모나지 않게 연마하기 때문이 아닐까? “가장 깊은 진리에는 가장 깊은 사랑이 존재한다”는 간디(Mahatma Gandhi)의 말처럼, 민정순이 써내려가는 모서리의 고백이 서럽도록 따뜻한 이유는 그녀의 마음자리 곳곳 ‘사랑’이 들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둠과 빛의 간극 사이에도 사무치는 그녀의 고백은 들켜버린 쓸쓸함이라 할지라도 서럽지 않다.
세상 만물을 성실하게 껴안는 민정순의 시를 감히 ‘포용의 시학’이라 단언한다. 민정순 시의 정신적 가치가 고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낮은 자리를 품는 진정성 그대로의 성정을 시적 이미지로 쏟아낸다는 데 있다. 그녀의 시는 우직한 눈길로 현실의 가장 낮은 바닥을 어루만진다. 그래서 민정순의 고백에서 진심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녀가 고백 속에 들여둔 개똥나비며 조각보며 가을비에 젖은 하얀 서러움 한 가닥까지 진심이 아닌 것이 없다.
개똥 위에 나비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개똥철학을 연구하는 나비의 날갯짓이 자분자분 햇살을 들인다. 민정순이 풀어가는 절대 가볍지 않은 개똥나비의 개똥철학이 문득 궁금해진다. 모서리가 뜨겁다.
배옥주 약력
2008년 <서정시학> ‘시’ 신인상, 2022년 <애지> ‘평론’ 신인상에 당선되었다. 시집 『오후의 지퍼들』과 『The 빨강』이 있으며 평론집 『언어의 가면』이 있다. 연구서로 『이형기 시 이미지와 표상 공간』이 있으며, 『여성과 문학』, 『김명순에게 신여성의 길을 묻다』 외 여러 권의 공저가 있다. <요산창작기금>을 수혜하였으며 <김민부 문학상>과 <두레 문학상>을 수상했다. <부경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부경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부산작가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