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추 ; 삼국시대에 장신구의 발달이 세분화되고 기술이 고도화함에 따라 계급별 의복을 착용하게 되고 계급을 표시할 만한 장식물의 하나로 단추가 제작되었던 듯하다. 고구려 고분 출토물 (평양시 연화동 고분 발굴) 가운데 금제 단추 형 장식이 다른 장신구와 함께 출토된 바 있다.
글안의 왕이 관복을 고려에 보내오는 것 (1043년, 10대 청종?) 을 계기로 글안인의 관복제도의 영향으로 인하여 장신구가 변천하기 시작하였는데 11대 문종 때 (1049년부터 약 29년간 )에는 송(宋) 신종 (神宗)이 여섯 차례에 걸쳐 구장복(九章服)을 비롯한 여러 가지 관복과 장식품을 사여하게 됨에 따라 송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접목하게 되었다.
끼움단추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원삼 같은 예복에 사용하였던 것이나 개화기 이후 저고리나 여름철 적삼에도 간편함을 쫓아 달게 되었다. 예장용에 사용하던 것은 금·은·옥석으로 만든 단추가 있었고, 일반용으로는 끈으로 만든 맺은 단추가 있다.
예장용 단추는 나비·박쥐·국화 등 여러 가지 모양을 본뜨기도 하였고, 네모진 것에는 각종 문양을 새기기도 하였다. ≪궁중발기≫에 나타난 단추는 ‘ 적의 단추, 직금 원삼 단추, 자적 장삼 단추, 다홍원앙 노의 단추 ’ 등이 있다.
마고자 단추 가운데 나비 형태(사진자료) 등은 중심부에 구멍을 만들어 둔 곳으로 한 쪽에 연결 되어 있는 꼭지 같은 연결부위가 밑에서 끼워지면서 앞에서 보면 구멍과 꼭지가 완전히 맞물려 나비의 조형적 요소가 드러나고 멋을 내면서 채워지는 기능을 갖게 되는 것이 전해져 오고 있다. 유사한 기능을 갖는 단추가 매우 다양하게 전승 되어 온 것 가운데 세 점을 재현하면서 구해지는 자료들을 관찰하며 색상을 유물과 같게 재현하였다. 일반적으로 표면에 구멍이 있는 것과 표면에 구멍이 없는 것으로 대별한다. 크기는 1 cm 내외에서 3 cm 내외까지 있다.
* 나비 문 조끼 단추 ;
나비모양의 은제 단추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더듬이가 작게 말려 있으며 먼저 나비의 날개 모양을 새긴 후 그 위에 날개 윗부분은 노란색 아랫부분은 보라색 테두리는 파란색의 파란으로 장식하여 화려하게 꾸몄다. 뒷면에 은봉을 구부려 U자형 고리를 부착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노리개의 띠돈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단추는 원래 포류(袍類)에 속하는 적의(翟衣) · 노의(露衣) · 장삼(長杉) · 원삼(圓衫) 등에만 사용하였던 것이고 저고리나 적삼에는 옷고름을 달고 단추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한말에 접어들면서 편의에 따라 적삼이나 저고리 등에도 사용되었다. 은으로 된 나비모양 단추로 파란을 입혀 아름답게 장식한 흔적이 보이며 양 날개 위에 둥근 산호가 물려있다
은파란 끼움단추 유물과 재현 노용숙
*왕실 전용이었던 오얏 꽃 모양 조끼 단추 :
* 은파란 당초문 마고자단추 등 각종 단추의 재현 , 노용숙 ;
권기호 제작 마고자 , 단추 재현 노용숙
각종 끼움단추의 재현 노용숙
은칠보삼작노리개 , 조끼단추 ( 심영미매듭, 박술녀 한복 )
* 은 칠보 쌍희자 식물문, 수(壽)자문 단추의 재현, 노용숙
( 주(註) ; 단추의 역사 ; 단추는 선사시대 때부터 만들어 졌다고 볼 수 있다. 원래는 신분의 상징이어서 아무나 단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단추류(fastener)의 기원은 BC 6000년 전 고대 이집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단추 형태는 지금과 달리 두 개의 옷자락을 겹치게 한 뒤 동물뼈나 금속핀 등으로 찔러 끼우는 형태에 불과하였고, 그러던 것이 BC 1세기부터 브로치 형태의 두 개의 금속고리를 연결하는 방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후, 둥근 구슬 모양의 금속 단추, 루프형태 모양의 단추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루프 형태의 고리에 끼우는 단추가 등장하여, 그 모습이 마치 꽃봉오리와 같은 모습을 지녔다고 해서 라틴어로 ‘bouton’이라 부르던 것이 버튼(button)이 되었다.
1770년 독일의 위스터가 발명한 금속 단추 제조기술은 18세기에 들어와서 단추 제조 기술이 엄청 발달해서 쇠붙이에서 상아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재료로든 단추를 만들 수 있게 된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기계화의 보급에 따라 천연재료 등으로 대체되는 등 급속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중국은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옷감을 이용한 매듭단추인 청령두(蜻蛉頭 :잠자리 머리 모양)가 등장하여 일반적 의복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한국에는 조선시대 마고자나 무관들의 공복(公服) 가운데 하나인 철릭 등에 단추를 사용하여 오다가 갑오개혁 이후 일반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은파란 박쥐문 가락지 ,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소장
* 은파란 박쥐문 가락지 ;이 가락지는 은으로 제작된 것으로 안은 판판하고 밖은 도톰하게 만든 단아한 형태이다. 조선시대에 상류층에서 패용했던 것으로 겉에는 박쥐 문을 음각하고 그 위에 파란을 올렸다. 궁중에서는 2월1일 문안 때 머리에는 옥모란 단잠이나 매죽잠을 장식하고 공단당의를 입고 은파란 가락지나 은파란 반지를 패용했다.
* 반지 ; 손가락에 끼는 장식물로 안은 판판하고 겉은 퉁퉁하게 만든 두 쪽의 고리로 되어 있다. 한 짝으로 된 것은 반지라고 한다. 지환(指環)은 가락지와 반지의 총칭이면서, 가락지만을 뜻하기도 한다. 가락지의 유물은 조선시대 이후의 것만 볼 수 있다. 당시 가락지는 기혼여자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미혼여자는 반지를 사용하였다.
이로써 볼 때 가락지는 조선시대가 유교를 지도이념으로 삼고, 그 사상이 생활윤리 전반을 지배하던 시대이므로, 혼례를 인간대사의 하나로 삼는 가운데 이성지합(二姓之合)과 부부일신(夫婦一身)을 상징하는 표지로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락지는 한 짝의 고리인 반지를 두 짝으로 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반지나 가락지나 그 재료나 기교면에서는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유물에 의하면 재료는 은에 도금(鍍金)하거나 은(銀)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명나라에 대한 진공(進貢)이 어려웠을 뿐더러 면진공정책(免進貢政策)을 위해서도 금의 사용을 금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은파란 반지나 가락지 외에도 옥 · 마노 · 호박 · 비취 · 진주 · 구리 등으로 만든 것도 있다. 상류사회나 궁중에서는 그 재료에 따라 계절에 맞추어 끼었다. 반지는 인간이 사용한 장신구 중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사용하였고 지금까지도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장신구 중의 하나다.
반지는 남녀의 성혼의 의미로 교환하는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각종 단체의 기념반지나 서약을 의미하는 의식에 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관습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관습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약 4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시대에는 화랑이 반지를 패용하여 단원들 간의 신의를 나타내고 단원임을 입증한 징표로 쓰인 듯이 보이며, 엄격한 가부장제도 밑에서 사치성을 띤 과분한 수식을 할 수 없었던 조선시대에도 가락지와 반지가 널리 패용되었는데, 궁에서조차 금의 사용을 금지했던 시절에는 도금한 것이나 은을 사용한 가락지, 반지를 패용하였다.
' 사절복식자장요람(四節服飾自粧要覽, 조선조 제24대 헌종 후궁인 경빈 김씨가 그녀가 거처하는 순화궁에서 궁체로 쓴 《국기복식소선(國忌服飾素膳)》과 《사절복식자장요람(四節服飾資粧要覽)》 두 권의 필첩 중 하나이다. 일명 순화궁 첩초라고도 불리우며 국기복식소선의 내용은 왕과 왕비의 기일인 국기에 비빈을 위시한 내시의 복색 · 머리모양 · 화장 · 노리개 · 반지 등의 수식의 갖춤에 관한 것이다. 사절복식자장요람은 궁중 제일의 명절인 탄일과 정월 · 동지 · 망간의 문안예시의 복식을 설명한 것이다)'에 나와 있는 반지 사용의 예를 보면, 가락지는 10월부터 정월까지 금지환을 끼고, 5월 단오 견사 당의를 입을 때는 옥가락지나 마노지환을 끼며, 8월 광사당의를 입을 때와 9월 공단 당의를 입을 때까지는 파란지환을 낀다. 규칙이 이러하니 여름에는 금을 사용하는 것을 규제하고 겨울에는 옥을 규제하나, 봄, 가을에는 옷에 따라 마음대로 낄 수 있는 자유로움이 허용되었다.
조선조 때 사화(士禍) 등으로 구족 (九族)이 화를 입고 가족이 뿔뿔이 헤어질 때는 모두 가락지를 신표로 나눠가졌다. 후에 죄가 씻어지면 이 가락지를 유일한 증거물로 하여 혈육을 찾았고, 아내들은 남편이 죽을 경우 가락지 한 짝을 관 안에 넣고 다른 하나는 옷고름에 달아 일생동안 어루만지며 독수공방의 한을 달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