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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5편 3절-5절: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3절: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능한 자여.’ 무엇을 충분히 잘 해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칼을 허리에 차고.’ 싸움을 할 수 있다는 말이고, 싸우게 되면 4절에 ‘승전하소서’ 라고 한 것을 보면 정복을 한다는 말이고, 이래서 왕의 영화와 위엄을 갖추고 있다는 거다. 왕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 일반적으로도 왕이 되려면 실력을 닦아야 한다.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면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행실을 보이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지도자를 뽑을 때 표를 몰아준다. 인격자의 세계는 그렇다.
일반적으로 물질이 많이 있으면 물질로써 사람을 사겨야 한다. 그런데 물질이 있으면서도 물질로써 사람을 사귈 줄을 모르고 자기만 입고 마시는 구두쇠가 있다. 이러면 이 사람에게 사람이 붙느냐? 사람이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우리 기독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깨달으면서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진리와 아가페로 정복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아닌 말로 자기가 세상의 왕이 되더라도 자기의 말을 잘 듣지 않겠느냐? 이게 없이 많은 사람을 자기의 원수로 만들어 놓는다면 자기가 왕이 되었을 때 자기를 죽이려고 날마다 음모를 할 거다.
인격자의 세계에서 지도자가 되려면 갖출 것은 갖춰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 가겠다고 하는 생각이라면 아예 돈이라도 많이 벌어라. 예수 믿는 것도 시원찮고, 세상에서 돈도 못 벌고 산다면 한심한 사람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인간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사는 게 옳은 거다.
우리 기독자가, 예수 믿는 사람이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다른 사람에게 진리이치의 교훈을 주고 죽는다면 신령천국에서 상급도 있고 존귀 영광성이 있는 거다. 성경에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은 욕심 없이 현실에 만족하며 살라는 말씀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속에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예수를 잘 믿는 것 이상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리고 ‘부자 되기에 힘쓰지 말라’는 말씀도 있는데, 이것 역시 우리 기독자는 그 날 그 날 먹고 살 수 있다면 예수 믿는 것 이상은 없다는 걸 말하는 거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가 결국 남는 것은 예수 믿는 것 하나밖에 없다. 자자손손 전해줄 것도 예수 바로 믿는 것 하나밖에 없다. 이게 끊어지면 대가 끊어지는 거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우리가 깨달은 이 귀한 진리로 무장을 해서 전투를 해야 한다. 하루 하루 먹고, 예수나 믿고, 교회에 왔다 갔다만 하는 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정복이다.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 진리의 성질이 그렇다. 달려가는 것. 정복하는 것. 자기가 한 세상 살다 가는데 이왕이면 정복을 하면서 살아라. 정복을 하는 자가 아름답고 좋은 것을 다 가지는 거다. 원리가 그렇다. 정복을 하는 자가 가진다. 이를 위해서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우리는 왕이다. 왕 같은 제사장이다. 또한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리이치를 가르쳐 주고 깨닫게 해 줘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선지자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라. 이런 의미도 들어있다. 그래서 이 교훈을 배우는 우리 입장에서는 책임이 막중한 거다. 우리에게는 자기 어깨에 짐이 매여져 있다. 주님께서 ‘너희는 온 천하를 다니며 제자를 삼고’ 라고 하셨듯이 진리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내 어깨에 매여져 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실력이 들어가야 하고, 실력이 됐느냐? 그러면 정복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러면 왕이다. 선악과 따먹은 세상도 보면 각자마다 어느 부분적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는 왕이 있더라. 직장에, 직업에, 각 분야에 있어서 왕이 있다. 왕이 되면 돈도 많이 들어온다. 체육계의 왕, 권투계의 왕이 되면 돈이 많다. 그리고 명령을 할 수 있고, 제자를 기를 수도 있다.
예수를 믿으면서 직장을 가졌느냐? 그 직에 있어서 왕이 되어라. 왕이 된다고 해서 예수를 못 믿는 것은 아니다. 왕도 안 되고, 돈도 제대로 못 벌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진리로 무장된 것도 없다면 이게 뭐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자기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한 번밖에 없다. 한 번밖에 없는 이 세상에 사는 자기 존재의 귀중성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신앙의 세계에서 왕이 되려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구비하고 갖춘 것처럼 우리도 모든 걸 잘 갖춰야 한다. 왕이라면 인격 면에서나, 지혜지식적인 면에서나, 성품적인 면에서나, 그리고 진리이치 면에서 첫째는 신적 지혜지식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 모든 지혜지식의 근원을, 출처를 알고 있어야 하고, 또 그 결과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도 자기가 왕이라면 자신의 신하가 비진리적인 지식을 가지고 어떤 일을 추진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고 하며 막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 결과가 빤한 거니까. 왕이면서 이상한 신하들이 움직이고 활동하도록 내버려두면 그 나라는 풍비박산이 되고, 그 책임은 왕에게 돌아간다.
우리는 ‘영에 속한 지혜지식인지, 육에 속한 지혜지식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고, 가치판단 평가성이 확실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내리는 판단이 하나님 앞에서도 옳다고 인정을 받는 판단이어야 한다. 자기가 자기에게 내리는 판단, 그리고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내리는 판단, 그리고 한 사람에게 내리는 판단이나, 열 사람에게 내리는 판단이나, 백 사람에게 내리는 판단이 똑같아야 한다. 그래야 공의가 되는 거다. 사람의 신앙을 올려주기 위해서 방편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어떤 경우에도 그 결과는 영원에 내려져 있어야 한다.
재판은 누구에게 속한 거냐? 하나님에게 속했다. 가르침에 있어서 잘잘못을 판단하고, 영의 것과 육의 것에 대한 구별력 이런 게 판단에 속하고 재판에 속하는 성질들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고 확실한 것이라야 하나님의 재판에 속하는 거다. 이런 것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왕이 되겠느냐? 진리지식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왕으로 세우시겠느냐? 이러면 하나님 당신이 우스꽝스럽게 된다.
신앙의 세계에서 왕이 되려면 두 번째는 신적 도덕적인 면에서 고차원적이라야 한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대함성에 막힘이 없고, 성격과 성질과 성분 면에 있어서도 생명적인 것인지, 사망적인 것이지 구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세 번째는 능력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질적 본질적으로 고차원적이라야 한다. 능력성에는 뭐가 있느냐? 의와 주권성이다. 그러니까 진리로 된 의인지, 선악과 따먹은 세상지식으로 된 의인지 알아야 하고, 임시성적 의인지, 영원히 가는 의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적 의를 주장해야 한다. 하늘의 의를 가져야 이것이 왕이다.
옳은 것을 가지면 이 사람은 주권이 있다. 틀린 것을 ‘틀렸다’ 하고, 비뚤어졌으면 ‘비뚤어졌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주권이 있다. 도덕성적인 면에서도 옳은 것을 많이 가졌으면 이 사람은 주권이 강하니 능력이 있는 거다. 그런데 능력성이라고 할 때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어떤 한 가지만 달랑 생각해서 안수해서 병자를 고치는 능력을 달라고 한다. 그러나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정신 사상을 고쳐놓는 거다. 사람의 정신 사상은 하나님의 옳은 것이 아니고는 고칠 수 없다.
선악과 따먹은 이후로 모든 사람의 양심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다 병이 들어있는 상태다. 성경에 보면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으니 육신의 병도 자기의 성격과 성질로 인해 걸리기도 하고 고쳐지기도 하는 거다. 이걸 분명히 알아라. 우리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속에 암이 돋아나면 수술을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머리가 돌아간 것은 어떻게 할 거냐? 칼을 댈 수 있느냐? 머리를 찍으면 정신적으로 돌아간 것이 보이느냐? 그러니 어떻게 고치느냐?
항상 말하지만 사람이 우선이다. 돈이고, 논이고, 밭이고, 재산이고, 직업이고 이건 나중 문제고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 정신이다. 뭘 하든지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이 일을 위해 태어났느냐, 사람을 위해서 일이 있는 거냐? 사람을 위해 일이 있는 거다. 그런데 이게 거꾸로 돌아가 있으니 얼마나 고통이 많으냐?
지혜지식적인 면에서, 도덕성적인 면에서, 능력성적인 면에서 성장이 되어야 하는데 이 영능의 실력을 갖추지 못하면 믿어갈수록 도태 당한다. 다른 사람들은 앞서 달아나는데 성장을 안 하면 도태가 된다. 영능의 실력을 갖추지 못하면 무능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등한시하기 쉬운 것은 지식적으로 배우면 귀문만 열려서 남을 정죄하기 쉬운데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지혜지식적인 면에서 배웠으면 인인 연관관계 도덕성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을 보고 좋은 점은 배우고 나쁜 점은 안 가지면 된다. 자기 실력을 키우라는 말이다. 배우고 깨달을수록 반드시 자기 성찰을 하라. 자기 성찰이 들어가면 다른 사람은 그냥 보이는 거다. 눈이 밝으면 사람이 다 보인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교회를 거치면서 신앙실력을 쌓은 대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실력대로 그 땅을 정복을 했듯이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오늘날 교회인 영적 이스라엘도 광야교회인 이 세상에 살면서 진리와 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정복을 하는 거다. 실력이 좋으면 제일 좋은 것으로 정복을 하는 거고, 정복을 했으면 그 신앙사상이 그대로 후손들에게 내려가야 하는데 구약시대에 보면 무능한 왕이 백성들이 노고와 재산을 착복하고, 백성들은 갈수록 신앙정신이 자꾸 변질이 되고, 얻어맞고, 잡혀가고, 서로 죽이고, 속고 속이고, 이러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만드는 악한 왕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살지 않으려면 영능의 실력을 가져야 한다.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왕의 영화와 위엄이 어디로부터 오겠느냐? 왕이 자기 위엄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 키보다 큰 칼을 차고 있으면 이걸 보는 사람이 ‘아이고 무서워라’ 하고 절을 하고, 작은 칼을 가지고 있으면 ‘아따, 저걸로 뭘 할까?’ 하며 얕보느냐?
깡패들 세계를 보면 가슴이나 팔이나 등에 호랑이나 용을 그려넣는데, 이런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지능지수가 높은 사람이다. 지능지수가 높은 사람은 꼭 힘을 들여서 몸으로 싸우지 않고도 사람을 눕혀버린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눕혀버린다. 사람들을 선동도 하고, 선동이 된 사람들을 잠재울 수도 있다.
왕의 영화와 위엄이 어디로부터 오느냐? 하나님의 지혜지식성과, 하나님의 도덕성과, 하나님의 능력성으로부터 오는 거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다. 하늘의 것을 가져라 그 말이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하늘의 것을 가졌느냐, 땅으로부터 솟은 걸 가졌느냐? 자기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을 받고 있고 주고 있는지를 잘 심사를 하라.
4절: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진리’는 사람을 영원히 행복을 느끼도록 살린다. 곧 사람을 사망계에서 생명계로 영원히 구해내는 도리다. ‘온유’는 신의 성품을 입는 것이고, ‘공의’는 편견 없는 영원히 신령천국에까지 옳음의 판단이요 심판이다. 이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신령한 성품에 관한 것들이다.
왕의 통치성은 하나님의 공의라야 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야 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위한 싸움이어야 한다. 그래서 왕의 통치성은 진리로 가르쳐야 하고, 온유의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가진 공의의 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영적 이스라엘이 주고 받는 통치요, 이 성질이 곧 교회의 통치라야 한다. 그러니까 교회의 통치는 신정통치, 말씀통지, 진리이치 통치, 생명이치 통치, 도덕이치의 통치라야 한다.
이 통치를 안 받겠다고 하고, 이 통치를 반대를 하고, 이 통치를 말살시키려고 하는 세력들은 모두 악한 정신 사상적 마귀의 세력들인 줄 알아라. 영적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령하고도 온전한 성품을 입지 못하게 하는 세력들이 사단 마귀의 세력들이요, 거짓 종들의 세력인데,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게 얼마나 많으냐? 교회 안에만이 아니라 자기 집안에도 있을 수 있다. 자기 집안에만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에도 있을 수 있다.
믿는 우리는 각자가 하나님의 온전을 입기 위해서 이런 세력들과 싸워야 하고, 모든 교회에게도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나가야 한다. 이것이 곧 자기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싸움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자기를 붙잡고 싸워라. 원수는 제일 가까운 자기 속에 있다. 이 싸움이 싸움 중에 제일 고상하고 어려운 싸움이다. 남을 잡고 싸우는 것보다 자기 속의 거짓된 자기를 잡고 싸우는 게 어려운 싸움이다. 그리고 제일 큰 싸움이다. 그리고 이 싸움은 그 성격 성질이 하늘의 싸움이다. 하늘에 속한 싸움이다. 거짓된 교회들은 영의 눈이 어두워서 이 싸움을 할 줄 모르고 늘 주님과 반대 편, 곧 불에 타질 세상의 거짓된 정신 사상에 붙어서 그 정신 사상과 합세해서 주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에 대적을 한다.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위엄이 어디서 나오겠느냐? 하나님의 공의를 행사하는 데서 나오는 거다. 이것이 아니면 위엄이 아니며, 또 영적 싸움에서 승전할 수 없다.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면 이길 수 없다. 영적 싸움의 승전은 부귀나 명예나 영광을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왕의 오른손’이란 영능의 능력을 말한다. 곧 힘 있는 세력이요 권능의 역사를 말한다. 사람을 사망권에서 생명권 안으로, 세상으로 가는 것을 천국 쪽으로 올려놓고, 넓은 길에서 좁은 길로, 임시성에서 영원성으로, 이질에서 본질로, 비진리에서 진리의 세계로, 만물 아래에서 만물 위로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 왕의 힘 있는 오른손의 사역이다. 이게 곧 하나님의 역사다. 사람을 하나님 쪽으로 인도하고 주님께 밀착을 시켜놓는 역사는 전부가 하나님의 오른손에 붙들린 종들의 일이다. 곧 성령님의 역사요, 주님의 역사요, 복음의 역사다.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친다는 것은 현재 매 순간순간마다 사건 환경과 시간을 거쳐 가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못하면, 신정통치에서 만들어지지 못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누적되는 것을 말하는 거다. 왕의 싸움은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는 싸움이다. 또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되게 하는 싸움이다. 세상정신 사상과 싸워서 존귀 영광자로 빼내는 싸움이다.
비진리요 세상 거짓된 신앙자들은 사람을 영원히 멸망 받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교인들은 이런 거짓된 신앙사상들이 활개를 치지 못하게 진리로 세워나가고, 진리로 세워지고, 진리로 무장이 되어야 한다. 진리로 무장이 되느니만큼 정복이 들어가는 것이니 싸워야 한다. 그리고 이 싸움에 있어서 자기를 쳐다보고 고치고, 또 타가 잘못됐거나 비뚤어졌거나 모르는 상태를 자기 등에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를 해야 한다. 이게 다 싸움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싸움은 언제나 축복된 전쟁이다. 이 싸움은 싸운 것만큼, 앞으로 나간 것만큼 언제나 승전이다. 승리다. 축복된 싸움이다. 이 싸움은 하나님으로부터 허용이 되어있다. 싸우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 싸움은 싸우기 전에 이미 승전이 확정된 싸움이다. 싸웠다 하면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다.
여호수아가 아모리 사람과 싸울 때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라고 기도를 하매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 해와 달이 온 종일 안 넘어갔으니 몇 시간을 싸운 거냐?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기고 있는 것을 해가 멈춰서 구경을 했다는 거고, 또한 ‘내가 밝혀주고 있으니 신나게 싸워라’ 이런 의미가 있는 거다.
저녁때가 되었으면 해가 넘어가야 할 텐데 중천에 그대로 떠 있으니 해가 지면 동쪽에서 뜨려고 대기하고 있던 달이 ‘언제 햇님이 오나?’ 하며 마중을 나와서 보니 해가 낮처럼 그대로 있어서 그 바람에 달도 그 전쟁을 구경하는 거다. 이걸 다르게 말하면 이스라엘이 이방인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얼마나 즐거웠으면 이런 역사를 하셨겠느냐?
이걸 동화처럼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해를 보고 ‘천지창조 때 해 너에게 낮을 주관하라고 했지?’ 하니까 해가 ‘예’ 라고 대답을 하고, 달에게도 ‘달 너에게는 밤을 주관하라고 했지?’ 라고 하니까 ‘예’ 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이스라엘의 싸움을 위해서 내가 그 법칙을 어기겠다. 편법을 써야 되겠다’ 라고 하니까 해와 달이 ‘아, 그렇게 하십시오’ 라고 해서 해와 달이 멈춘 거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성도가 진리를 가지고 악한 세력과 싸울 때는 당신께서 창조 때 만드신 자연법칙을 어겨서라고 승리하도록 하겠다는 거다. 이걸 생각을 해 봐라. 세상의 어느 왕이 싸울 때 이런 일이 있었느냐? 이순신장군이 싸울 때 이런 일이 있었느냐?
5절: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왕의 살’이란 화살을 말한다. 왕의 살은 날카로워야 만인을 엎드러뜨릴 수 있다. 날카롭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면에서의 예리성을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사람의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을 말한다.
인간들 속에는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정신 사상이 들어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도 거짓된 신앙정신과 사상이 많다. 양의 가죽을 둘러쓰고 양을 잡아먹고, 이리의 사상을 전하는 자가 많다. 세상운동이 많다 그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주장하는 지식의 기준이나 교회들의 소원 목적과 활동 속에 세상 주격적인 간구성과 추구성과 취미성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걸 볼 줄 모른다면 무딘 칼이다.
불타질 세상에 속한 교회 인도자들은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을 전혀 분별을 못한다. 또 분별을 안 하려고 한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왕의 신앙인들은 교인들이 무엇에 등을 기대고 자기의 힘이라고 하는 건지, 무엇을 성령이라고 하는 건지, 그들의 기준척도가 무엇인지를 안다.
사람이 칼끝에 찔리면 ‘아얏’ 하고 반응이 나오듯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살아있는 예리한 말씀에 찔리게 되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데, 회개로 하나님 앞에 거꾸러지든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감정과 성질이 올라와서 대적적으로 나오든지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칼로 찔림을 받았을 때 회개하는 자는 복이 되는 거다. 회개치 않는 자는 교만자로서 멸망을 받는다. ‘무조건 믿어라. 믿사오니’ 하는 것은 사람 잡을 소리다. 무조건 믿는 것도 진리이치를 알게 해서 무조건 믿는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토를 안 단다. 왜냐? 하나님의 말씀은 다 옳기 때문에.
힘이 있고 실력 있는 왕을 표현할 때 뭘로 말을 할까? 싸우러 가는 왕을 표현할 때 뭘로 말을 할까? ‘칼을 차고, 투구를 쓰고, 말을 타고’ 이런 표현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본문의 말씀들은 왕이 가져야 할 성품, 인품, 지혜지식 등을 우리에게 비유적으로 말해주는 거다. 자기도 이걸 가지면 왕이다. 실속 있는 왕이 되는 거다.
우리교인들이 이 교훈을 받았으니까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끼리 ‘예수 믿는 게 어떻고 저떻고’ 라고 말을 하면 거기에 끼어 들어서 ‘이게 왕이다’ 하고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이것도 일종의 싸움이다. 평소에 실력을 잘 닦아놓으면 이렇게 할 수 있겠지만 수 년 수십 년을 믿었어도 귀 밖으로 듣고 있었다면 그런 장면이 있을 때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한 마디도 못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