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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빼로 과자가 과자학교에 등하교할 때 과자학교 친구인 칸쵸의 가방을 매일 들어줍니다. 또 칸쵸의 준비물도 빼빼로가 다 챙겨다줍니다. 어느 날 이런 일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새우깡이 빼빼로에게 묻습니다.
“야 빼빼로야!! 너는 왜 키도 큰 녀석이 맨날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칸쵸에게 꼼짝도 못하고 쫄따구 같이 살아가냐?”
그러자 빼빼로가 새우깡에게 대답했습니다. “야, 너 칸쵸 등에 있는 문신봤냐?”
칸쵸는 등에 문신이 있어 대단히 무서운 존재로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문신 때문에 칸쵸가 군대 면제 받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도 있습니다.
또 하나 이야기해드릴까요? 호랑이에게 토끼가 잡혔습니다. 호랑이에게서 벗어나려고 꾀를 내어 호랑이에게 더 보다 더 강한 동물이 있다며 동물의 대왕인 사자에게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사자에게 호랑이녀석이 사자대왕을 우습게 본다고 말을 합니다. 당장 호랑이를 혼내줘야겠다고 호랑이를 사자앞으로 끌고 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자앞에 끌려온 호랑이를 보자마자 사자는 걸음아 나 살려라며 도망치는 것입니다. 토끼가 도망치는 사자에게 가서 묻습니다. “왜 도망가십니까?”그러자 사자가 대답합니다. “토끼야, 너 그 자식 온 몸에 그려진 문신 봤냐?”
세상에서 목욕탕, 찜찔방 같은 곳에 가서 어느 분이 문신을 새기고 와서 있으면 뭔가 거리감이 생기고 무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과장하기 위해 문신을 새기는 사람도 꽤나 있습니다.
문신뿐 아니라 권력과 명예, 지식, 각종 자격증과 석사, 박사 졸업장을 내세우며 자신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임재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목적이 바로 우리의 주어진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힘있게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상 무서울 것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과시할 것을 만들어서 살아가면서 능력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면서 자신감있게 승리하며 담대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명을 잘 이루기 위해 첫째로 우리는 일할 때가 되면 반드시 일해야합니다.
누가복음 4장 42절입니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라고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에 쉬시고 아침이 되면 일하시는 삶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모든 시간의 주인이신데 밤에도 일안하고 쉬는 인간처럼 사시겠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시면서 인성을 가지시고 오셨지만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신 분이 꼭 인간처럼 저녁이 되면 쉬고 아침이 되어야 일해야만 하는 존재로 볼 수 있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밤이 맞도록 일하시고 밤에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신 경우도 있지만 주로 밤이 되고 저녁이 되면 쉬시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쉬지않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역사를 행하시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살펴보시기에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해 낮과 밤을 만들어주시고 빛과 어두움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에서도 창조사역을 하시면서 밤이 되고 낮이 되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시며 하나님께서 밤동안에는 쉬신 것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밤동안에 마음을 놓고 전혀 신경쓰지 않고 쉬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할 때가 있고 쉴 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상징적인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일들속에서 오늘 본문에서는 밤동안 쉬시다가 날이 밝으니 사역을 시작하셨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때가 되면 일을 해야합니다. 낮이 되면 사역에 전념해야합니다. 일할 때에는 일을 하고 쉬어야할 때는 쉬어야하는 것이 모든 인생의 신체적인 본성입니다. 쉴 때와 일할 때를 분간하지 못하고 계속 쉬기만 한다든지 계속 일하기만 한다면 결국은 몸이 망치고 영혼이 망치고 결국은 관계도 망가지고 실패의 인생이 될 것입니다. 낮이라는 시간에는 우리는 일을 해야하고 밤이라는 시간에는 우리는 쉬어야 합니다. 물론 영적인 의미에서 오늘 본문이 말하는 낮,밤 그리고 성경전체적인 의미에서 낮, 밤은 다른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하는 것은 때가 되면 일을 해야하는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도 날이 밝아져서 아침이 되니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일해야할 때에는 일을 해야합니다.
요한복음 9장 4절 말씀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지금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고 있는 이 시간도 낮입니다. 지금은 바로 일할 수 있는 때입니다. 우리의 상황, 우리의 처지, 우리의 삶의 현장은 너무나 다르고 각자가 다양한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직업도 다릅니다. 지식적인 능력도 다릅니다. 우리가 하는 일도 다르고 만나는 사람들의 성향들도 모두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며 누구를 만나든지 우리의 사명은 바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업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예수님의 구원을 전하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구원얻도록 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분이요, 우리의 사명입니다. 날이 밝아 일할 수 있을 때 우리가 해야할 사명이 바로 그 사명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왜 이 곳에서 살아가고 우리 자신이 왜 여기 존재해야하고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하는 지를 알아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소명을 깨닫고 그 사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부르셨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 곳에 보내셨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나와 하나님은 서로가 특별히 사랑하는 존재라는 믿음의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부르심 앞에서 분명한 계획과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내가 발견해야 합니다. 이 소명 앞에 개인적으로 결단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 도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를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호세아 13장 13절입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때가 되어도 출산하지 못하고 때가 되었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저주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때가 되어도 상황이 되어도 행하지 않은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지금이 날이 밝아 일할 수 있을 때를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담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낡이 밝아서 일할 수 있을 때에 주저하고 낙담하고 쓰러져 있고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저주의 인생입니다. 밝은 때, 일할 수 있을 때에는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고 살아가야합니다. 그 사명으로 살아갈 때 놀라운 축복, 열매맺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명을 잘 이루기 위해 둘째로 우리는 주님과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4장 42절입니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오늘 본문을 보니 날이 밝아 이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는데 우리 주님은 제일 먼저 한적한 곳에 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적한 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하나님께 오늘 해야할 일을 묻는 장소입니다. 바로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는 말씀입니다.
유명한 미국 프로야구선수였다가 신앙전도자가 된 빌리선데이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회심하고, 교인이 된 때, 한 성도가 빌리 어깨에 팔을 얹고 말했습니다. “윌리엄, 나는 그대에게 세 가지 간단한 규칙을 주려합니다. 만약 이 규칙을 지킨다면 그대는 결코 신앙의 퇴보자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에 15분 동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배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15분 동안 하나님께 말하십시오.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루에 15분 동안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시오. 빌리 선데이는 깊은 감동을 받아, 이 세 가지를 자기 생애의 규칙으로 삼으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날부터 하루의 최초의 시간을 혼자 하나님과 함께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보내기도 결심했습니다. 매일 눈뜨자마자 편지도, 신문도, 전보... 하루생활 업무적인 것으로 꼭 읽어야할 것보다 먼저 성경말씀을 먼저 대했습니다. 이같이 하여 그는 하루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시작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말 복받은 전도자가 되어 평생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예수님의 본을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날이 밝자 아침 눈뜨시자마자 한적한 곳으로 나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입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우리 한국교회도 이런 예수님의 본을 따라 ‘새벽기도회’라는 것을 교회마다 진행합니다. 사실 한국교회의 자랑이며 예수님의 본을 따라 아침 첫 시간에 예배드리는‘새벽기도회’가 너무나 소중한 한국교회의 자산이지만 과연 이 시간을 통해 사명을 깨닫고 오늘 하루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기도하는 기도회의 시간이 되고 있는 지 반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철저하게 새벽 첫 시간, 새벽 미명에 하루의 삶을 시작하기 위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하루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 일들속에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가? 를 묻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선교에 일생을 바친 영국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어떻게 일생을 사역자로 보낼 수 있었습니까? 그리고 행복한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제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 악기를 조율합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조율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겠지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과 맞추는 일부터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보람있습니다.”
새벽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을 일치시키는 시간으로서 참으로 중요합니다.
시편 46편 5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매일 눈을 뜨자마자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루를 어떻게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의 일과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고민을 하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해주시기를 기대하며 기도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시간의 주인이시고 모든 상황을 인도하시며 사람들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루하루 정말 하나님께서 오늘 어떻게 인도하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물어보며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지를 깨닫고 하나님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참 소명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발견하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은혜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명을 잘 이루기 위해 셋째로 사람들의 반대에도 반드시 해야할 일을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누가복음 4장 42절입니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고 있다가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복음을 전하러 가려는 길을 막습니다.
우리가 힘든 일, 어려운 일을 하려고 할 때 가장 반대가 심한 사람들은 바로 우리와 가장 친한 사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입니다. 가족이 제일 첫째고, 친구나 친척들, 그리고 우리와 교제하는 이익관계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생각해준답시고 근본적인 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보다 우리의 평안함, 우리의 건강, 우리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마땅히 해야할 일, 힘들지만 반드시 해야할 일을 막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와 이해관계가 없고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을 하든지, 우리가 어떤 힘든 일을 하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서 해야할 일은 한 곳에 머물러 조용히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 4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이후에는 우리가 그 사명을 이어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이어받았습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우리가 있는 곳에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한국 땅 전체, 더 나아가 북한땅과 아시아지역, 그리고 오대양육대주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돈이 없어도 전도하는 일과 선교하는 일에는 투자를 해야하고 건강이 조금 약해져도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 내 몸을 바치며 전도와 봉사를 하고 선교하여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가진 권력, 우리의 가진 명예, 우리의 가진 시간, 우리의 가진 관계들을 탈탈 털면서 선교하고 전도하면 누가 제일 먼저 반대할까요? 우리의 신앙에 거부감을 느끼는 불신 가족들입니다. 요즘 우리 고주리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이 정말 교회에 재미를 느끼고 교회에서 좀 많은 시간도 보내고 집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일단 교회에 갔다오겠다는 말을 부모님들과 조부모님들께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직 교회에 대해 부정적이고 기독교신앙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이 반대하시는 이야기를 좀 듣게 됩니다.
이해합니다. 왜요?
기독교신앙이 없는 불신부모님들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가까이 가고 적극적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는 함께 나오는 부모나 부부, 가족, 친족중에도 우리가 선교하는 일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하면 반대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환자가 많이 찾아와서 돈벌이를 잘 하던 잘 나가는 의사가 갑자가 해외 오지 병원이 없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나라에 가서 돈도 안받고 치료해주는 선교를 하겠다고 할 때 내가 가족이면 어떻게 할까요?
영업을 잘하던 변호사가 그렇게 한다면요? 서울대학교 교수님이 갑자기 저 아프리카의 못사는 나라에 교육을 위해 돈 제대로 받을 수 없는 대학교 교수로 가겠다고 한다면요?
우리는 진짜 선교적인 사명으로 그런 일들을 해보고 싶은데 가족이 제일 처음 우리를 뜯어말립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결국 말세의 때가 되면 가족이 대적이 되고 결국 죽음의 자리에 내어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3장 12,13절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결국 신앙을 가지게 되면 죽음의 자리에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시대가 예전에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슬람문화권과 사회주의체제가 남아있는 국가에서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이 곧 죽음인 나라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사명을 위해서는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을 위해서는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걸어가야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선교사요, 탐험가인 리빙스톤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이 있는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
그는 아프리카 횡단 여행을 성공하였고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하여 유럽에 알렸습니다. 토착인들의 습격도 받고 맹수의 공격도 받고 풍토병에 걸리기도 하고 엄청나게 더운 아프리카의 날씨와 싸우면서도 그는 끝까지 그의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고백했던 자기의 사명을 다하기 전까지는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일, 우리 민족에게 맡긴 일, 우리 사회와 우리들의 직장, 우리의 직분에서 맡은 일을 이루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가져가시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엄청난 고문과 협박속에서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이 놓일 것이라는 성령님의 뜻을 발견하고도 담대하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믿음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저와 여러분, 신앙인들은 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가정생활도 하고 직장생활도 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내 나름대로 모든 상황을 경영하고 운영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소명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만들어가시고 내 삶의 상황을 이끌어가실 것인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하시고 선한 길로 가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에 음성을 내가 듣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향하신 부르심에 소명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세상의 소리에 민감하기 때문에 계속 초조하고 불안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신 소명을 확신하고 뜨거운 가슴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어 드리며 주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어떤 세상의 소리도 듣지 않고 주님만을 위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 뜻이 있어서 이 고주리마을에 보내시고 고주리교회를 섬기며 이 땅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고주리가 어디 있는 지도 모르고 우리는 이 땅에 들어와서 이제 교회를 세우고 마을을 섬기며 마을복음화를 넘어 화성시복음화와 열방에 선교역사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이 곳에서 신앙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인 낮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직 열심히 복음을 전할 때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며 놀라운 일을 경험할 수 있는 때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어떤 세상적인 이야기, 주변에서 우리를 걱정해주는 듯한 이야기에도 혹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 우리 주님의 계획, 우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반하는 내용이라면 그것 때문에 해야할 일을 접어두는 일이 없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묵묵히 잘 진행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주님의 사명을 깨달아 큰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소명을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 우리 예수님의 귀한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