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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증인(25)
말씀: 계 11:1-13. 2024년 12월 1일요일 오전 11시
일곱 천사들 중에 여섯 천사까지 나팔을 불었습니다. 다섯째 천사의 나팔에 전갈의 꼬리를 가진 메뚜기들이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와서 사람들을 다섯 달 동안 괴롭혔습니다(9:1-12). 이것이 첫째 화입니다.
여섯째 천사의 나팔에 뱀의 꼬리를 가진 말과 그 위에 탄자들의 2억 기병대가 396일 동안 사람들의 1/3을 죽이는데 이것이 둘째 화입니다(9:13-21). 그런데 둘째 화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세 가지 화를 선포했던 천사가 [둘째 화가 지나갔으며,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오리라. 하더라. ](계11:14)라고 말합니다. 계9:13-11:13절까지가 둘째 화였던 것입니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고 직접 큰 강 유프라테스에 묶여 있는 네 천사를 풀어 준 것부터 시작해서 두 증인이 사역을 끝내고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까지가 여섯째 천사의 나팔재앙에 속하는 둘째 화였던 것입니다. 여섯째 천사의 나팔과 일곱째 천사의 나팔 사이에 있는 계10:1-11:13절을 전혀 다른 내용이라 해서 대개 삽입장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히 말하면 둘째 화에 포함해야 할 내용들입니다.
계10장은 하늘에서 내려온 힘센 천사와 작은 책입니다. 하나님은 이 책을 요한에게 주어먹게 했고 요한은 그 책을 받아먹고 대언해야 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힘센 천사는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이 세상 왕국이 그리스도의 왕국이 되고 대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신비들이 이루어진다(계10:7)고 선포했습니다. 요한이 선포해야 할 대언이란 이것입니다. “......이세상의 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고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라. 하니”(계11:15).
이것은 왕국 복음입니다. 침례 요한이 일찍이 선포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이 이스라엘의 온 도시를 돌면서 선포했던 왕국 복음입니다. 이 왕국 복음을 처음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선포했으나 큰 환란 때에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다시 선포되어야 했으므로 작은 책을 먹은 사도 요한은 “많은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과 왕들 앞에서 다시 대언하여야”(계10:11)합니다.
큰 환란 때 증인들은 주의 말씀을 받아서 먹고 그 말씀을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 앞에서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으로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고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큰 환란 때 왕국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144,000명이 하나님의 종들로 선별되었고(7장) 그들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음으로써 큰 환란의 재앙들 속에서 해를 입지 않고(9:4) 온 세상 사람들에게 왕국복음을 전합니다. 첫째 화나 둘째 화는 이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그럼 유대 땅에서는 누가 왕국복음을 전합니까? 두 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놀라운 권능과 표적을 행하며 이 땅에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주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계시록 11장은 성경을 기록된 문자 그대로 믿는 자들에게는 아주 쉬운 책이지만 그렇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온갖 억측이 난무하는 부분입니다.
1절입니다. [또 내가 막대기 같은 갈대를 받았는데 그때 그 천사가 서서 이르기를,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계11:1).
하늘에서 내려온 강력한 천사는 요한에게 작은 책을 주었고(10:9) 이제는 막대기 같은 갈대를 주었습니다(11:1). 책은 먹고 다시 대언하라고 준 것이고 갈대는 측량 도구로서 무언가를 측량하라고 준 것입니다. 강력한 천사는 서서 말하기를,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라고 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큰 환란 때 유대 땅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건축해서 이곳에서 동물 희생제를 드리고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건축하고자 하는 성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뜻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사실 적그리스도의 성전이 됩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요, 또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 안에 앉아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스스로 보이느니라.](살후2:4)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이 재건하여 희생물을 드리고 경배를 드리던 성전에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가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처럼 앉아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스스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할 것이며 그가 그 이레의 한중간에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하고 가증한 것들로 뒤덮기 위해 심지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작정된 그것이 그 황폐한 곳에 쏟아지리라, 하니라.](단9:27).
적그리스도라 불리는 한 사람은 그 이레의 중간에 유대인들의 모든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경배하게 할 것입니다. 짐승의 형상을 세우고 가증한 것을 확산시킬 것입니다.
[날마다 드리는 희생물이 제거되고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세워질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이 있으리라.](단12:11). 큰 환란 때 지상에 세워진 성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예언의 시계와 같습니다. 언제 희생물과 봉헌물이 그치도록 하는가? 언제 가증한 것을 성전에 세우는가? 언제 자신을 하나님으로 보이는가? 이런 것들이 모두 예언을 계산할 수 있는 잣대입니다.
다니엘은 이 기간을 1290일이라고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마흔두 달 동안 짓밟는다고 말씀합니다(11:2). 주님이 다니엘에게 말씀하신 1290일을 큰 환난에서 육체로 살아남을 자들을 위하여 단축하십니다. [그 날들이 단축되지 아니하면 어떤 육체도 구원 받지 못할 것이나 선택 받은 자들을 위해 그 날들이 단축되리라.] (마24:22)하셨습니다.
1절에 강력한 천사가 요한에게 측량하라고 한 것은 세 가지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이 성전은 하늘의 성전이 아니라(계8:3-5). 땅에 세워질 성전인데 오늘날 유대인들이나 크리스천들은 이것을 제 3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이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 스룹바벨의 성전, 헤롯의 성전과 마찬가지로 큰 환란 때 이 땅에 세우게 될 문자 그대로의 성전 건물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방인 왕 느부갓네살에게 파괴되었습니다(583 BC). 스룹바벨의 성전은 안티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168 BC.). 헤롯의 성전은 로마의 타이투스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70 AD).
유대인들의 성전은 결코 교회 건물이 아니고 교회는 성전이 아닙니다. 아직도 일부 교회들은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 부르고 예배당을 대성전 이라 부르는데 이는 마치 불교에서 절을 지어놓고 법당이니, 대웅전이니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은혜시대의 하나님의 성전은 성도들의 몸입니다. 성령은 어떤 건물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몸 안에 거하십니다. 스데반이나 바울 사도는 이 시대에 주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전에 거하지 않는다고 선포했습니다(행7:48).
“막대기 같은 갈대”는 측량 도구로서 잣대입니다. 막대기는 징계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 성전은 큰 환란 때 파괴되고 천년 왕국 때는 에스겔의 성전이 이 땅에 다시 세워지는데 그 성전을 “아마 줄과 측량 갈대”를 가지고 측량합니다(겔40:3,5).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의 크기는 “금 갈대”를 가지고 천사들이 측량합니다(계21:15).
큰 환란 때의 성전은 요한이 직접 막대기 같은 갈대를 받아서 측량합니다. 저는 이 성전을 적그리스도의 성전이라 부르는데 이유는 적그리스도가 성전에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드러내고 이 성전 제단에는 환란 성도들의 목이 베어져 인신공양으로 짐승에게 드려지고, 제단 아래에는 목 베인 자들의 혼이 거하고 이 성전의 뜰은 이방인들이 마흔 두 달 동안 짓밟게 됩니다.
2절입니다. [성전 밖에 있는 뜰은 내버려 두고 측량하지 말라. 그것이 이방인들에게 주어졌으므로 그들이 그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발로 짓밟으리라.](계11:2).
주님은 “성전 밖에 있는 뜰은 내버려 두고 측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주셨고 이방인들은 “그 거룩한 도시”(예루살렘)를 마흔두 달 동안 발로 짓밟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짓밟는다는 것은 정복해서 지배하고 다스린다는 것과 완전히 파괴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마흔두 달 동안”은 후 삼년반입니다. 한 이레의 언약 기간 중 전 삼년 반 동안은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희생물과 봉헌물을 하나님께 드리지만 언약은 깨어지고 후 삼년 반은 완전히 적그리스도에게 짓밟힙니다. 예루살렘의 파괴는 역사적으로 여러 번 있었지만 큰 환란 때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살육과 철저한 파괴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큰 환난이 있을 터인데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때까지 그런 환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결코 없으리라.](마24:21)는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피로 가득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죽어 나갈 것이고 믿지 않는 자들은 마귀를 하나님이라며 경배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영적으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곳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그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발로 짓밟으리라.”(2)고 했습니다. 다니엘서에 이미 이 부분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또 그가 지극히 높으신 분을 대적하여 엄청난 말들을 하며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지치게 하고 때와 법들을 바꾸려고 생각할 것이며 그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그의 손에 주어지리라.](단7:25).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이를 다니엘은 마흔 두 달, 혹은 천이백육십 일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전체적으로 이런 표현은 일곱 번 나옵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단7:25,12:7, 계12:14), “마흔 두 달”(계11:2, 13:5), “천이백육십 일”(계11:3,12:6)로 기록했는데 이는 7년 큰 환란을 둘로 나눈 각각의 삼년 반 기간을 말합니다. 그중 후 삼년 반은 그야말로 큰 환란이라 할 수 있는 고통의 기간이 될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은 철저히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게 됩니다.
[{주}께서 자신의 격노를 이루시고 자신의 맹렬한 분노를 부으사 시온에 불을 지르시니 그 불이 그곳의 기초들을 삼켰도다.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들로 들어갈 줄은 땅의 왕들과 세상의 모든 거주민들이 믿지 못하였으리라.](애4:11-12).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의 발에 짓밟힌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며 그 사건들은 모두 장차 있을 일들의 모형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의 패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군대들에 에워싸이는 것을 너희가 보거든 그곳의 황폐함이 가까이 온 줄 알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고 그것의 한가운데 있는 자들은 밖으로 떠나며 시골에 있는 자들은 거기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날들은 원수 갚는 날들이니 이로써 기록된 모든 것이 성취되리라. 더욱이 그 날들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그 땅에 큰 고난이 있겠고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으리라. 또 그들이 칼날에 쓰러지고 모든 민족들에게 포로로 잡혀갈 것이며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눅21:20-24).
주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요령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1.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
2. 예루살렘의 도시 안에 있는 자들은 도시 밖으로 떠나라.
3. 시골에 있는 자들은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 이는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이 아니라 큰 환란 때에 관한 말씀입니다.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결사 항전은 무의미한 죽음일 뿐입니다. 도망할 수 있을 때 도망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42개월이란 시간을 숨어 지내고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 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것은 허락된 것으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핵으로 무장했다고 해서 그들이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정확히 성취될 것입니다.
3절입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능을 주리니 그들이 굵은베 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 동안 대언하리라.](계11:3).
강력한 천사는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능을 주리니.”(3)라고 함으로써 말씀하시는 천사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힘센 천사가 주 하나님이 아니라면 결코 “나의 두 증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들에게 권능을 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증인들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사도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셔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큰 환란 때에는 두 증인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능을 주리니...”라고 하시는데 이 증인들은 사도 요한이나 열 두 사도들 중 그 누구도 주님이 말씀하신 “나의 두 증인”이 아닙니다. 큰 환란 때에 천이백육 십일 동안 증언할 두 증인은 따로 있습니다. 한때 사도 요한과 야고보는 주의 좌우편에 앉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께서 영광 가운데 계실 때에 우리가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옵소서, 하였으나](막10:37). 그 때 주님은 [내 오른쪽과 내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니라. 다만 누구를 위해 그것이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그것을 받을 것이니라, 하시니라.](막10:40)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증인은 주님께서 따로 예비해 두셨습니다.
두 증인을 세우시는 것은 율법에 따라 증언의 효력이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민35:30, 신19:15). 그들은 주의 권능을 받고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 동안” 사람들에게, 이방인들이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발로 짓밟으리라”고 선포합니다.
두 증인이 입은 옷에 주목하십시오. “굵은 베옷을 입고”(3). 큰 환란 때 이들이 하는 사역, 증언을 잘 표현해 주는 복장입니다. 큰 환란은 슬픔과 고통의 날들이요, 징계와 심판의 날이며, 회개를 구하는 날입니다. 이들의 사역 역시 그러합니다. 두 증인의 사역 기간은 “천이백육십 일 동안”입니다. 그들이 대언한 내용은 앞으로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이방인들이 발로 짓밟으리라고 대언합니다.
4절입니다. [이들은 땅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나무요 두 등잔대니라.](계11:4).
이 구절에서 대부분의 설교자들과 주석가들은 “두 증인이 누구냐?” 이런 저런 해석을 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두 증인이 누구인지 이름을 밝혀 주지 않으시고 “이들은 땅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나무요 두 등잔대니라.”(4)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관련된 말씀을 봅니다. [또 그것의 옆에 두 올리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잔의 오른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왼쪽에 있나이다, 하니라.](슥4:3). 주께서 스가랴에게 보여 준 것입니다. 스가랴는 이 두 올리브나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내가 응답하여 그에게 이르되, 그 등잔대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이 두 올리브나무는 무엇이니이까? 하고 또 내가 다시 응답하여 그에게 이르되, 두 금관을 통해 자기들 밖으로 금기름을 비우는 이 두 올리브나무 가지는 무엇이니이까? 하니](슥4:11-12).
스가랴는 두 올리브나무가 무엇인지 물었고 주님은 등잔대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두 올리브나무에 대해 답변해 주셨습니다. [이에 그가 이르되, 이들은 두 명의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이며 온 땅의 [주] 곁에 서는 자들이니라, 하더라.](슥4:14). 두 올리브나무는 성경이 스스로 해석해 줍니다.
“이들은 기름 부음 받은 두 사람들”입니다. 성전이나 교회가 아닙니다.
두 올리브나무는 기름 부음 받은 두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온 땅의 주 곁에 서는 자들입니다. 자, 이것이 성경의 해석입니다. 두 올리브 나무를 성경과 외경이라고 주장하는 캐톨릭의 주장은 헛소리입니다. 두 올리브나무를 성경과 몰몬경이라고 주장하는 몰몬교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두 올리브나무를 구약 성경과 탈무드라고 말하는 유대교의 주장 역시 사사로운 해석입니다. 두 증인을 일컬어 성경과 성경의 열쇠라고 말하는 안식교도들의 주장은 그럴듯한 추론일 뿐 거짓입니다. 두 증인은 “기름 부음 받은 두 사람으로써 땅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4절에서 주목할 또 한 가지 표현은 “땅의 하나님”입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라 불리십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늘은 없고 땅의 하나님이라고만 말씀합니다. 창세기 24:3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신부를 구하기 위해 청지기를 보내며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이시며 땅의 [하나님]이신 {주}를 두고 맹세하게 하리니..........”(창24:3)라고 말합니다. 주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시며 하늘의 하나님이시며 땅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 주의 성전을 건축할 때 “......우리는 하늘과 땅의 하나님의 종들이며...”(스5:11)라고 성전 건축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는 너를 만든 자가 네 남편이기 때문이라. 군대들의 {주}가 그의 이름이며 그는 네 [구속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서 온 땅의 [하나님]이라 불리리라.](사54:5)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하나님은 아브라함, 성전 건축, 이스라엘의 구속자를 지칭할 때 사용합니다.
5절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들을 해치려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들의 원수들을 삼킬 것이요, 또 어떤 사람이 그들을 해치려 하면 그가 반드시 이런 식으로 죽임을 당하리라.](계11:5).
주의 권능을 받은 기름부음 받은 두 올리브 나무, 두 등잔대로서 두 증인은 땅에서 1260일 동안 대언하는데 어떤 사람들도 그들의 사역을 막거나 해치지 못합니다. 만약 누가 그들을 해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들의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어떤 사람을 대적하다 불에 타 죽는 장면을 봅니다. [그들 주위에 있던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였으니 이는 그 사람들이 이르기를, 땅이 우리도 삼킬까 염려하노라, 하였기 때문이더라. {주}로부터 불이 나와 향을 드린 이백오십 명을 태워버렸더라.](민16:34-35).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의 반역에 동참했던 당시 이스라엘의 회중들의 지도자들인 250명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구약성도들에 대한 궁금증들이 많습니다.
어떤 형제는 고라가 지옥에 갔을까요? 구약성도들은 홍해를 건널 때 모세에게로 침례를 받았으므로 징계는 받았으나 지옥엘 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대답은 다릅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재앙을 받지 아니하고 홍해를 건너며 모세에게로 침례를 받았어도(고전10:2)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버리십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그를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출32:33)하셨습니다.
신약성경도 분명히 그들의 멸망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들이 가인의 길로 갔고 대가를 위해 발람의 잘못을 따라 탐욕스럽게 달려갔으며 고라의 반역 가운데서 멸망하였도다.](유1:11) 주님은 고라를 출애굽 이전의 가인과 거짓 대언자 발람과 같이 취급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자들은 하늘의 불로 대적자들을 멸할 권능을 주십니다.
[엘리야가 오십인 대장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네 부하 오십 명을 태워버리기 원하노라. 하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부하 오십 명을 태워 버렸더라.](왕하1:10,12). 아하시야 왕의 명령을 받아 엘리야를 체포하러 왔던 오십인 대장과 그 부하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멸망당했습니다. 엘리야를 대적하고 그를 해하러 오던 자들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의 대언자들은 때리면 맞고 감옥에 가두면 갇히고 죽이면 죽었지만 모세와 엘리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려 하면 그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불에 삼킴을 당했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이 두 증인에게 준 권능도 모세와 엘리야에게 준 것과 동일합니다. 이들은 모세와 엘리야의 영으로 온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침례인 요한은 그들이 받아들이고자 했다면 그가 오리라고 한 엘리야였습니다. 그러나 침례요한은 자기는 엘리야가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영을 지닌 사람들이 두 증인으로 옵니다. 사람들은 두 증인을 볼 때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과 동일한 권능, 동일한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는 아닙니다.
6절입니다. [이들이 하늘을 닫을 권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들이 대언하는 날들에 비가 내리지 않게 하고 또 물들에 대한 권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들을 피로 변하게 하며 언제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모든 재앙들로 땅을 치리라.](계11:6). 두 증인이 갖는 또 하나의 권능은 하늘을 닫을 권능과 물들에 대한 권능입니다. 구약의 인물 중에서 하늘을 닫고 비가 내리지 않게 하고 물들을 피로 변하게 한 대언자는 모세와 엘리야뿐입니다.
그러나 그들, 두 증인은 결코 모세도 엘리야도 아닙니다.
첫째, 주님은 그들의 이름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변화 산에 부활의 모습으로 영광 중에 나타나셨을 때 주님과 함께 온 모세와 엘리야가 부활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마17:2-3). 그 때는 주님은 그들의 이름을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휴거되는 성도들의 모형입니다. 모세는 한 번 죽었다가 부활하는 성도들의 모형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의 영을 가진 특별한 사람들이지 결코 모세와 엘리야는 될 수 없습니다. 부활하거나 휴거된 자들은 또다시 이 땅의 썩을 육신을 입거나 죽음을 맛보지 않습니다. 이 땅의 육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죽을 몸이지만 부활의 몸은 결코 죽을 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시니] (요11:25~26)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이는 모세의 부활에 해당합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이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 엘리야에 해당됩니다. 또 한사람 휴거의 모델은 에녹인데 그는 지상에서 권능 있는 일은 하지 않았으나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걷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셨습니다(창5:24). 그가 바로 주님의 성도들이 환난 전 들림을 받았다가 주님 지상 재림하실 때에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올 것을 예언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일곱 번째 사람인 에녹도 이들에 관해 대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자신의 수만 성도와 함께 오시나니] (유1:14)
구원 받은 성도들이 부활과 휴거를 통해 이 땅의 몸을 벗고 하늘의 몸은 입을 수 있어도 부활하여 썩지 않을 몸을 입었던 자가 다시 세상의 썩을 육신을 입는 다는 말씀은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단 한 번 이 땅에 죽어주러 오셨지만 사람은 죽음을 연습하거나 번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죽어 큰 도시의 거리에 놓이게 된다고(11:8) 말합니다. 만약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라면 성경 자체가 모순이 됩니다. [이렇게 {주}의 종 모세가 {주}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 있는 그곳에서 죽으니 그분께서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그를 묻으셨으나 아무도 이날까지 그의 돌무덤에 대해 알지 못하느니라.] (신34:5~6)
그 모세가 부활의 몸으로 변화산에 주님과 함께 나타났었는데 다시 그를 데려다 세상의 썩을 육신을 입혀 일하게 하다가 육신의 죽음을 다시 맞보게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특별한 경우에 자신이 쓰실 사람에게 특별한 권능을 주십니다.
주님은 열두 제자들에게도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자기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그들에게 부정한 영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내쫓으며 온갖 종류의 질환과 온갖 종류의 질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는데] (마10:1)
주님은 큰 환난에서 두 증인들에게도 모세와 엘리야에게 주셨던 권능을 주셔서 사역을 하게 하십니다. 두 증인은 언제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모든 재앙으로 땅을 친다고 말씀합니다(6). 성경은 이들이 누구라고 이름을 밝히지 않는데 사람들의 상상으로 짐작하는 해석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엘리야나 모세와 같은 권능을 가졌다고 해서 주님도 이름을 말씀하시지 않는데 우리가 모세와 엘리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계시록을 강해하는 많은 목사들이 두 증인을 모세와 엘리야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도 하나님도 모르는 것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7절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증언을 마칠 때에 바닥없는 구덩이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켜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이므로](계11:7).
땅에서 사람들은 아무도 두 증인을 대적하거나 막지 못했지만 두 증인을 이기고 죽일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닥없는 구덩이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입니다. 그는 두 증인을 대적하며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큰 환란 때 주님의 성도들을 이기는 권능을 허락 받은 자가 있습니다(계13:1,7).
[내가 보니 바로 그 뿔이 성도들과 전쟁하여 그들을 이겼으나](단7:21).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온 짐승이 바로 그 자입니다. “자기들의 증언을 마치매...”란 말씀을 보십시오. 두 증인은 “천이백육십일” 동안 무엇을 증언했습니까? 거룩한 도시가 이방인들에게 “마흔두 달 동안 발로 짖밟으리라.”는 것을 대언했습니다.
물론 누가 참 하나님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온 땅의 주이시며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증언했을 것이며, 적그리스도의 왕국이 끝나고 우리 주의 왕국이 온다는 사실을 증언했을 것이고, 사람들의 사악함과 주의 심판에 대해 선포했을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인지 선포했을 것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심판들이 주께서 내린 재앙이요 심판임을 증언했을 것이며 성경에 나오는 대언들을 남김없이 다 선포했을 것으로 봅니다.
두 증인의 사역기간이 끝나는 시기에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온 짐승이 그들을 죽입니다. 이 짐승은 성경에 따라 정리하면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요 남자입니다. 이 사람은 바닥없는 구덩이의 천사이며 바닥없는 구덩이의 왕입니다. 이 사람은 아바돈(히)과 아폴리온(헬)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전에 있었고 지금은 없으나 큰 환란 때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올 자입니다.
주님은 이 자가 바로 마귀였으며(요7:70) 자기 자신의 처소로 가기 위하여 죄를 짓고 자살한 가룟 유다인데(행1:25) 그는 멸망의 아들이요(요17:12) 죄의 사람(살후2: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이 자를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하나님으로 보이며 사람들에게 경배를 요구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성전에서 사람들을 죽여서 희생물로 받을 것입니다. 파라오 앞에 선 모세와 아합 앞에 선 엘리야처럼 두 증인은 이 짐승 앞에서 증언할 것입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8절입니다. [그들의 죽은 몸들이 그 큰 도시의 거리에 놓일 터인데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고 불리며 그곳은 또한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계11:8).
두 증인이 죽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묻게 되어 있습니다(신21:22-23). 나무에 달린 자라 하더라도 내려서 묻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두 증인을 죽인 짐승은 그들의 시체를 묻지 못하게 하고 예루살렘의 거리에 놓아두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큰 도시의 거리에...”라고 했는데 계시록에서 언급한 큰 도시는 예루살렘, 바빌론, 하늘의 새 예루살렘 이렇게 셋입니다. 본문에서 큰 도시는 환난 중 땅의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고 하고 사탄이 거하는 곳입니다. 소돔은 동성애를 비롯한 자신들의 사악함으로 인해 주께 심판 받아 멸망한 도시입니다. 이집트는 주의 백성들을 죽이고 멸하려다 심판 받은 나라입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방인들은 사악함과 불법들로 가득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고 멸했습니다. 지금도 온 세상의 이교도들이 이스라엘을 지상에서 멸해버리자 외칩니다. 인종 청소를 하자며 유대인에 대한 극도의 반감과 증오, 저주를 표현합니다. 이방인들의 소원은 큰 환란 때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증인으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자기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두 증인이 죽었습니다. 그들의 시체를 거리에 두었습니다. 두 증인들이 죽어서 놓인 “그곳은 또한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고 말합니다.
9절입니다. [백성들과 족속들과 언어들과 민족들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죽은 몸을 사흘 반 동안 구경하며 그들의 죽은 몸을 무덤에 두지 못하게 하리라.](계11:9).
두 증인의 죽은 몸이 거리에 뒹굴고 “백성들과 족속들과 언어들과 민족들에서 나온 자”들이 그것을 구경하는데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이 완전히 점령한 상태입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방인들이 미국보다 더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와 같이 큰 환란 때 예루살렘에는 각양 다양한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두 증인의 죽은 몸을 사흘 반 동안 거리에 두고 구경하며 두 증인의 죽은 몸을 무덤에 묻지 못하도록 합니다.
“사흘 반 동안...”이란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두 증인은 삼년 반 동안 예루살렘에서 대언했습니다. 사흘 반이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곳에서 죽었고 그들의 시체는 그곳 거리에 놓여 “사흘 반 동안”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혼은 땅의 심장부 속에서 삼일 밤 삼일 낮을 계셨습니다(마12:40).
10절입니다. [이 두 대언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주었으므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그들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내리라.](계11:10).
두 증인은 자신을 대적하고 해하려는 자들을 불로써 멸했고 땅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표적을 행했습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두 증인이 자기들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두 증인의 죽음을 매우 기뻐합니다.
“그들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내리라.”(10)는 말씀은 오늘날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에 행하는 일들입니다. 세상은 크리스마스를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즐거워한다고 생각하나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추운 겨울 12월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장막절 절기가 있는 9월에 태어나셨습니다. 목자들이 들에서 밤에 양떼를 지키는 시기였습니다(눅2:8).
12월 25일은 동지 축일로서 바알의 생일입니다. 12월 25일은 오랫동안 이교도들이 기념하고 즐기던 동지 축일로서 태양신 숭배일입니다. 우리는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한 예를 볼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나 사도행전, 바울 서신에도 교회가 크리스마스를 기념했다는 구절이나 암시조차도 찾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생일이 아닌 것은 물론이요 캐톨릭이 이교도의 풍습을 교회 내로 들여와 성탄일로 꾸민 것입니다.
“그들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내리라.”(10).
사람들은 두 중인의 죽음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뻐해서 서로 선물을 보내는 날이 크리스마스의 기원입니다. 이들의 기쁨과 전혀 다른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들과 그것들 안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이는 마귀가 자기에게 때가 조금만 남은 줄 알므로 크게 진노하여 너희에게 내려갔기 때문이라, 하더라.](계12:12). 들림 받아(휴거) 하늘에 거하는 자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의 기쁨과 전혀 다른 기쁨입니다. 하늘들에 거하는 자들이 무엇을 즐거워하는지 보십시오. 마귀가 자기 때가 조금만 남은 줄 알고 크게 진노하여 내려 간 것을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뻐합니까? 땅의 기쁨이 아닌 하늘의 기쁨을 소유한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늘의 것들에 애정을 두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늘에 거하게 될 것을 기뻐하십시오.
11절입니다.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영]께서 그들에게 들어가시므로 그들이 자기 발로 일어서니 큰 두려움이 그들을 보는 자들을 덮치더라.](계11:11).
“사흘 반이 지난 뒤에”이는 전 삼년 반이 지난 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좋습니다. 이시점이 전 삼년 반이 지나면서 짐승 즉 적그리스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가 됩니다. 두 증인의 죽은 몸이 사흘 반이나 거리에 놓여 있었는데 시체가 썩어서 부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영께서 그들에게 들어가시므로” 그들이 자기 발로 일어섰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영은 죽은 자들을 살리는 부활의 영입니다. 이 영이 임하면 마른 뼈들의 골짜기에서 사람들이 일어나 군대로 나옵니다. 이 영이 들어가면 죽었던 자가 일어납니다. 죽은 사람의 몸이 정상적인 몸이 되고 자기 발로 일어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보는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은 자들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자기 발로 일어서자 “큰 두려움이 그들을 보는 자들을 덮치더라.”고 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선물을 주고받던 이들이 두려워 떨게 되었습니다. 두증인의 죽음과 부활을 보면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환란 성도들의 부활입니다. 이들의 부활은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봅니다. 신약 성도들의 부활과 휴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큰 환란 때 죽은 성도들은 부활의 표적이며 공개적으로 보입니다.
12절입니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자기들에게, 이리 올라오라, 하고 말씀하시는 큰 음성을 듣고 구름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들을 바라보더라.](계11:12).
두 증인은 하늘에서 “이리 올라오라.”고 말씀하시는 큰 음성을 듣고 구름 속에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올리브 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올라가시는 모습과 같습니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왕하2:11). 주님의 승천은 공개적이었습니다.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도 공개적이었습니다. 신약 성도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요한은 큰 환란에서 나온 큰 무리들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와 하프를 들고 유리 바다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로들 중의 하나가 이들을 일컬어 “큰 환란에서 나온 자들”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큰 환란 때의 휴거와 부활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잘 알지 못하는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은 구약 성도의 부활과 휴거, 신약 성도의 부활과 휴거, 환란 성도들의 부활과 휴거가 있다고 말해 줍니다. 첫 열매, 수확, 이삭줍기가 그것입니다. 이들 셋을 합쳐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13절입니다. [바로 그 시각에 큰 지진이 나서 그 도시의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그 지진으로 사람들 중의 칠천 명이 죽으니 남은 자들이 두려어서 놀라며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계11:13).
구약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날 때 땅에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마27:51-52). 큰 환란 때 환란 성도들이 부활해서 들림 받을 때도 마찬가지로 땅에 큰 지진이 나서 예루살렘의 1/10이 무너집니다. 이 정도 지진의 규모와 피해라면 도시 기능이 마비되어 버립니다. 그 지진으로 인해 사망자가 칠천 명이나 됩니다.
“남은 자들이 두려워서 놀라며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13). 이들은 누구입니까? 사람들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그 남은 자들은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회개일까요? 벨릭스는 바울의 말씀 선포를 듣고 두려워 떨었지만 그분을 믿지 않았습니다(행24:25).
예수님이 이적과 표적을 행할 때 사람들은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눅5:26).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능을 보았을 때 예수님을 인정하거나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거나 믿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놀라며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두 증인은 땅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4). 두 증인은 땅의 하나님을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에 왕국을 세우신다는 사실을 싫어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으로만 계시기를 원합니다. 죄인들은 가까이 있는 주님, 곁에 있는 주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 두려고 합니다. 멀리 하늘에 계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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