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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소크라테스 같은 튜터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는 질문으로 대화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걸 강요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자신의 역할을 <테아이테토스Theaetetus >에서 산파에 비유하기도 했다.
아이를 낳는 사람은 산파가 아닌 산모다.
산파는 그저 출산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자신은 학생들이 지혜를 낳는 데 도움을 주는 산파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도움을 주는 방법은 그저 '질문하기'뿐이었다.
4년간 학교를 다니며 재미있게 들었던 수업이 몇 개 있는데, 이 수업들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꼴찌가 내가 아니라 튜터였다는 것.
즉 교실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이해력이 떨어지고 진도를 못 따라가는 학생이 바로 튜터였다는 말이다.
이 수업들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꼴찌 역할을 하는 튜터들이 언제나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번 역시 질문이다.
질문하는 스승
내가 좋아한 수업들을 생각해보면 튜터들이 하나같이 다 질문하는 소크라테스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소크라테스 역에도 여러 캐릭터들이 있었다.
■꼬리물기 질문형
내 세미나 튜터 중 한 분은 언제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학생들을 쳐다보며 끊임없이 질문하셨다.
학생이 한마디만 꺼내도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학생: 애국가는 정말 지루해요.
튜터: (눈을 반짝이며) 왜 지루해?
학생: 뻔한 말만 늘어놓고 있거든요.
튜터: 어떤 부분이 뻔하지? 너에게 뻔하다는 건 어떤 의미지?
그 질문들에 답을 하고 있다 보면 별 고민없이 익숙하게 생각하고 판단했던 것들과, 습관적으로 사회적으로 받아들였던 생각들을 돌아보게 됐다.
그렇게 돌아보다 보면 어떤 때는 처음 말했던 내 의견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 어떤 때는 역시 내 의견이 옳았다는 걸, 그러나 거기에는 내 생각보다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는 걸 자세히 알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을 하는 튜터도 있었지만 아예 다른 스타일로 질문하는 튜터도 있었다.
■핵심 질문형
이 유형의 튜터는 학생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 말을 아끼다가 핵심적인 질문 하나를 툭 던지는 식이다.
그렇게 질문을 하고서 씩 웃으며 학생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A: 하늘은 하늘색이야.
B: 하늘은 파란색이지. 하늘이 하늘색이면 바다는 바다색이게?
C: 하지만 하늘을 파란색이라고 할 순 없어. 노을 질 때 빨간색이 되기도 하잖아?
A: 그렇게 색이 변하기 때문에 하늘은 파란색이 아니라 하늘색이라고 해야 해.
튜터: 그래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뭐야? 색깔에 대한 애기야, 아니면 하늘이나 바다 색깔에 대한 명칭의 의미를 정의하는 거야? (웃음)
이렇게 튜터가 질문을 하면 뭔가 대단히 심오한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다고 착각했던 학생들은 한 대 얻어맞은 것같이 멍해질 때가 있었다.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만 건드리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튜터의 질문을 통해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자발적 꼴찌형
그러나 그중 내가 제일 좋아했던 스타일은 대놓고 꼴찌 역할을 하는 튜터들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수학 수업의 튜터는 언제나 수학이 자신의 취약점이라며 자기비하(?)를 했다.
학생들과 비교(할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비교)하자면 당연히 제일 잘했지만, 늘 아닌 척했다.
그래서 학생 중 하나가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 언제나 조용히 다른 학생들이 먼저 말할 시간을 주었고 그래도 이해를 하지 못한 학생이 있는 듯하면 이렇게 질문했다.
"아, 정말 이해가 안 돼. 히히! (다른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다 이해했어? 이번에도 나 혼자만 이해 못 하는 거야? 다시 한 번 설명해볼래?"
또는 다른 학생이 무엇을 질문하면 언제나 그것에 맞장구를 처주기도 했다.
"오오! 맞아, 맞아. 실은 그게 내가 궁금했던 거였어!"
또 학생이 너무 어렵게 설명하는 것 같으면
"안 돼, 안 돼. 네 살짜리 내 딸한테 설명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말해줘봐. 너무 어려워"라고 더 쉽게 설명할 것을 부탁했다.
그런 식으로 무지를 가장하면서 모든 학생들이 이해할 때까지 계속 반복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덕분에 중요한 개념을 반복하고 또 다른 말로 설명해보고 하면서, 학생들은 스스로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되기도 하고, 그러면 다시 설명 해보려고 도전하기도 하고, 생각을 다시 정리하기도 하며, 더 정확히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온갖 종류의 질문형 튜터들이 있다.
유머와 함께 질문하는 튜터, 진지한 질문들을 시종일관 내던지는 튜터, 날카로운 학자 느낌으로 질문하는 튜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질문하는 튜터, 시니컬하게 질문하는 튜터, 호통을 치는 튜터 등 정말 많은 스타일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인트존스의 모든 튜터들이 다 소크라테스식 문답을 한다고 말할 순 없다.
각자 자신의 스타일대로 수업을 끌어가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처럼 오로지 질문만 던지는 튜터가 있는가 하 면 어떤 튜터들은 질문을 하는 대신 자신의 생각을 더 많이 이야기하기도 한다.
열정적인 학생이 한 명 더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튜터 들도 많았다.
토론해야 할 부분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읽고 와서 하 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다.
이처럼 여러 스타일의 튜터들 중 어느 누가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두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 역시 자신의 성격, 선호하는 스타일에 따라 좋아하는 튜터가 천차 만별이다.
하지만 튜터들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그 어떤 학생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수업에 온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세인트존스에서는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면 학생이나 튜터나 살아남을 수가 없다.
특히 읽은 책들을 읽고 또 읽고 반복해 읽어야 하는 튜터들의 경우는 더하다.
이런 튜터들은 나에게 그리고 학생들에게 배움에 대한 즐거움과 진짜 공부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강의를 통해 또는 조언을 통해 자신들이 어떻게, 얼마나 즐겁게 공부하는지 몸소 보여주면서 '깨닫게' 만들었다.
결코 가르치지 않았다.
학생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 스승
한번은 세미나 수업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책 읽고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움이 아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로 느껴져 튜터와 상담을 하기 위해 약속을 잡았다.
시간에 맞춰 튜터의 사무실에 갔는데 그는 꼭 사차원 세상에라도 있는 듯한 표정으로 골뜰한 생각에 잠겨서 나를 맞이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지금 시간 괜찮으신 거예요?" 하고 문자 튜터는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오늘 저녁에 있을 세미나에서 토론할 책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읽고 있는데 말이지, 신에 대한 인간들의 의견이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아. '철학적 측면에서의 신'과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서의 신'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 후로 내 공부 고민은 커녕 철학적 존재로서의 신, 정치적 리더로서의 신에 대해 튜터가 고민하고 있는 생각들을 들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는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할 말이 없었지만 튜터가 엄청나게 고민한 의견을 들으면서 끊임없이 동의했다.
그래서 같이 머리를 굴리며 생각에 생각을 하게 됐다.
그 후 튜터가 "오! 그러고 보니 어떤 고민으로 나를 찾은 거지?" 하고 물었고 그제야 나도 정신이 돌아왔는데 거의 한 시간이 흐른 후 였다.
순간 웃겨서 하하 웃어버렸다.
우리가 한 얘기는 내가 고민했던 '공부를 어떻게 즐겁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전혀 생뚱맞은, 신에 대한 것뿐이었지만 내 고민은 더 이상 고민이 아니게 느껴졌다.
이미 고민에 대한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 읽을 세미나 책이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이었다는 것을 튜터가 (전혀 의도치 않게) 자신의 생각 과정 속에 나를 끌어들임으로써 보여주었으니까. '이렇게 재미있는 공부였구나. 그런데 자꾸 잊어버리고 숙제처럼 생각하고 있었구나!' 튜터실을 나오면서 빨리 가서 책을 읽고 내 생각도 정리해보고 싶어졌다.
인생을 가르쳐주는 정신적 스승
사실 그럼에도 배움은 힘들다.
모든 수업은 미칠 것처럼 어렵다.
아니, 수업이 아니라 읽는 책이 어렵다.
재미있게 배움을 얻고 있는 거라고 마음먹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어럽다.
너무나 평범한, 심지어 하찮은 지식 수준을 가지고 있는 내가 어떻게 세기의 천재라는 뉴턴, 아인슈타인, 칸트, 하이데거 같은 학자들의 책을 읽고 이해만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와의 소통.. 좋은 말이다.
하긴, 소통을 하긴 했다.
매번 저자들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너 같은 바보는 이해 안 되지?" 하고. 과장 같지만 과장이 아니다.
그만큼 고전 읽기는 힘들었다(그리고 여전히 힘들다).
매일같이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저자는 천재고 나는 바보라고 인정하고 이미 죽은 과거의 천재와 비교당하는 건 그나마 영광이다.
나보다 훨씬 나아 보이는, 나보다 더 책을 잘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 옆자리 친구들과의 비교는 더 큰 스트레스다.
안 그래도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대는데 그렇게 하나 둘 비교하기 시작하면 완전히 늪의 밑바닥으로 내리꽃힌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 튜터와의 상담이었다.
자존감이 낮아지고 낮아져서 더 이상은 낮아질 수 없을 것 같을 때면 아무것도 위안이 안 돼 한동안 숨어 있는다.
그렇게 있다가 언제나 튜터와의 점심 약속(tuuor Iunch) 으로 그 은둔을 끝냈다.
tutor lunch: 학생이 학교 다이닝홀에서 튜터에게 점심을 사며 상담을 하는 것이 세인트존스의 전통이다. 물론 커피숍이나 튜터 사무실에서 보기도 하며, 장소와 시간은 서로 조율할 수 있다.
튜터들은 학생과 약속을 잡고 만나는 것이 익숙하다.
그들은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러면 그동안 쌓이났던 것들, 은둔하며 정리했던 내 생각들을 다 얘기했다.
한없이 바보 같고 아무리 노력해도 매번 좌절한다는 애기, 이 고비를 넘겼다 싶으면 그다음은 또 저 고비... 그렇게 끝이 없다는 얘기도 했다.
그런 애기를 하면 튜터의 성격에 따라 다른 조언들이 니온다.
수업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어떤 식으로 공부해보라고 현실적 조언을 해주는 튜터도 있고, 끝없이 용기를 주는 튜터도 있다.
호통을 치면서 이렇게 저렇게 할 것을 약속하게 하는 튜터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튜터는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를 해준 분이었다.
내가 세상의 온갖 좌절은 다 맛본 듯한 표정으로 더 이상 정말 못 해먹겠다고 돌려 말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 말을 다 들은 튜터가 갑자기 물었다.
"중국의 '욕심쟁이 농부' 이야기 알아?"
너무 생뚱맞아서 되물었다.
"그게 뭐예요?" 그러고 나서 다음의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에 어떤 부지런한 농부가 있었다.
그는 농사를 잘 지어보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고 불타는 열정을 보이며 발에 식물들을 잔뜩 심었다.
어찌나 열심히 나무들을 관리하는지 온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그를 칭찬했다.
그러나 다른 집 밭의 식물들은 무럭무럭 자라 열매를 맺는데 유독 그의 밭만 1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모두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마을 사람이 농부의 일과를 관찰하고 그 이유를 발견해냈다.
농부는 하루 종일 정성을 다해 식물들을 관리했는데, 과한 열정에 성질까지 급했던 나머지 밤이면 밤마다 밭에 가서 식물들이 잘 자라고 있나 하나하나 다 뽑아 뿌리를 확인하고 다시 심어놓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튜터는 덧붙였다.
오늘 하루 물 주고 내일 꽃이 피지 않았다고 우율해져서 그날 할 일을 포기하지 말라고.
오늘의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말라고.
당장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끈기를 가지고 꾸준히 하다 보면 발전하고 있는 모습이 분명히 보일 거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뻔한 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당사자인 나에게는 꼭 필요한 이야기였다.
적절한 시기에 훌륭한 조언을 해주고 나를 다시 일어나게 해주는 스승이 있다는 것에 정말 감사했다.
튜터로부터 받은 건 조언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복잡한 문제들이 한 번에 터지는 바림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3학년 때도 튜터와 상담을 했다.
튜터는 내가 너무 안돼 보였던지 시내 레스토랑에서 따 끈한 베트남 쌀국수를 사주었다.
아시아 음식을 먹고 원기를 회복하자고 말하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모습에 감동받아 펑펑 울기도 했다.
배움은 책 안에만, 학문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험 많은 현명한 튜터의 조언 한마디는 내가 배움에 좌절하고 혼자 해답을 찾기 위해 끙끙대다 지쳐 있을 때 언제 그랬냐 싶게 한 번에 다시 일어날 힘을 주었고, 그 과정 자체가 나에겐 배움이었다.
나는 잘난 거 하나 없는 학생이었지만 튜터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진정 어린 도움을 주었고, 그것은 이국땅에서 외롭게 공부하는 나에게 매번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혹시 누군가를 도울 일이 생긴다면 진심을 다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인트존스에 있으면서, 그리고 고전을 공부하면서 나는 홀륨한 스승들에게 인생을 사는 법까지도 배웠다고 생 각한다.
세인트존스의 고전 100권 공부법 중에서
진짜 공부하는 법 배우기
조한별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