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에서는 그 사람의 성향에 대해 기본적으로 탐(貪)ㆍ진(嗔)ㆍ치(癡)의 과소를 가지고 판단한다. 탐ㆍ진ㆍ치의 과소에 따라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을 가르기 때문이다. 선업은 착한 행동, 착한 말, 착한 생각(뜻)이 함축된 의미이다. 불선업은 그 반대의 행동과 말과 생각이다. 선업과 불선업이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윤회(輪廻)를 인정하는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다음 생의 복덕을 예측하게 하는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를 담은 아래와 같은 유명한 게송이 있다.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 -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 - 금생에 받는 것이 그것이라네.
욕지래생사(欲知來生事) -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 - 금생에 하는 일이 그것이라네.
인생은 현재의 나든 과거의 나든 미래의 나든 불멸하며 돌고 도는 것이다. 이것이 윤회인데, 이것의 주체가 ‘나’일진대 현재의 나보다 향상된 나를 바란다면 현재의 나를 어떻게 이끌 것인가 하는 것이 당면과제가 된다. 그러므로 종교적으로 보면 삼세(三世)를 지향하는 입장에서 현재의 ‘나’는 참으로 중요하다. 현재는 현재의 결실을 거둠과 동시에 미래를 향한 씨앗을 뿌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금생(今生) 외에도 태어나기 이전의 전생(前生)과, 죽은 이후의 내생(來生)이 있다는 것이 불교의 삼세설(三世說)이다. 전생에 자신이 저지른 행동 즉, 업(業)에 따라 다음 생(금생)에 어떤 모습으로 어느 곳에 태어날지가 결정되고, 금생에 지은 업에 따라 내생에 천상, 인간, 아수라, 지옥, 아귀, 축생 등 여섯 세계 중에 한 곳에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 윤회설이다.
부처님 재세 시 어느 날, 미모의 장자 부인이 허구 헌 날, 남편에게 두들겨 맞고 몸에 피가 낭자한 채로 부처님을 찾아뵙고 슬프게 울었다.
---자비하신 부처님이시여, 저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허구한 날 남편에게 맞아야 합니까. 제가 인물이 못난 것도 아니고, 아내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부도(婦道)를 지키고, 자녀교육에도 전혀 잘못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부처님께서는, ‘내 말을 잘 듣고 전생 인과(因果)를 깨달으라.’ 하시고, 팔을 들어 허공을 가리키셨다.
그 때 영상으로 어느 대궐이 허공에 떴다.
부처님께서는, 너는 전생에 저 대궐의 공주였다. 공주가 성질이 못돼서 허구한 날 아무 잘못도 없는 시녀를 꼬집고 때리고 피를 흘리게 하는 등 온갖 못된 짓을 했느니라. 시녀는 상전 앞이라, 한 마디 항변도 못하고 그대로 한을 품고 살다가 죽었느니라. 시녀는 전생의 한이 풀리지 않은 인과(因果)로 금생에 너의 남편이 됐고, 꼬집던 공주는 바로 너다. 너는 전생에 뿌린 씨를 금생에 받는 것이다. 네가 전생에 시녀를 때리고 꼬집은 것만큼, 네 남편이 너를 때리는 것이다. 전생으로부터의 인연과보(因緣果報)를 이제는 알겠느냐.
시녀가 너에게 꼬집힌 한을 품고 죽었듯이, 네가 또 금생에 한을 품고 죽으면, 내생에 또 네 남편에게 앙갚음을 할 것이며, 세세생생 주거니 받거니 앙갚음이 계속되느니라. 이제 인과를 깨달았거든, 너는 금생에 또다시 원결(寃結)을 맺지 말고, 지극정성으로 진참회(眞懺懷) 해서 다겁생(多劫生)을 두고 이어온 갚음을 금생에서 딱 끝내 거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깊이 참회하고 깊이 생각한 장자 부인은, 부처님께 제가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을까요 하고 여쭈니까, 부처님께서는 아난 존자를 불러서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 大愛道尼) 비구니에게 안내케 하셨다. 즉시 장자 부인은 삭발하고 비구니가 돼 부처님의 가르치심대로 열심히 수행했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의 눈으로, 부처님을 찾아오는 중생의 마음을 살피셨다. 중생의 근기가 상근기인가, 중근기인가, 하근기인가를 살피시고, 상대에게 합당한 가르침을 설해주시고 상대로 하여금 깊이 깨닫게 하셨다. 그리고 실천으로 유도하셨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을 찾아 온 사람을 가르쳐서 점차적으로 지혜의 눈을 뜨게 해서 서서히 견사(見思)의 미혹(迷惑)을 없애주시는데, 그 미혹을 없애는 방법은, 상대자의 근기에 따라, 또는 경우와 장소에 따라 각기 달랐다. 부언하면, 「때ㆍ곳ㆍ지위」를 분별해서 가르침을 주셨다.
• ‘때(時)’는, 지금은 어떠한 때인가, 어떠한 경우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 중인가, 전쟁이 끝난 뒤인가, 장마중인가, 가뭄중인가, 가난한 상태인가, 병중인가, 불행한가, 아닌가를 살피고 법을 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 ‘곳(處)’은, 지금 이곳 환경은 어떠한 곳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농촌인가, 도시인가, 학교인가, 교도소인가를 분명히 알고 법을 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 ‘지위(位)’는 설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의 관계, 그러니까 설하는 당사자는 어떠한 사람이며, 듣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공무원인가, 군인인가를 확실히 인식하고,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마음을 편안케 안정시켜 준다는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때ㆍ곳ㆍ대상」을 부처님께서는 소중히 생각하시고 항상 법을 펴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거룩해도 중생에게 그 깊고 오묘한 뜻이 전달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을 찾아오는 모든 중생의 신심과 근기의 날카롭고 둔함을 관해서 그에 응해 제도될 바를 따라 곳곳에서 설하셨다고 한다. 이는 부처님께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세심한 정서를 드러내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일체중생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구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편을 쓰시며 중생을 구제하시는 거룩한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을 나타내는 말이다.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설과 윤회설은 뭔가 막연한 요소가 있는 듯 보이지만, 잘 음미해보면 과거에 자신의 행동이 원인이 돼 지금이라는 결과를 낳고, 지금의 행동이 미래의 결과를 낳는다는 인과(因果)법에 다름 아니다. 은행에 저축을 하면, 점점 돈이 쌓여서, 언젠가 필요할 때 목돈으로 찾아 쓸 수 있다. 은행에 이런저런 담보로 대출을 받아쓰면, 그 빚이 점점 불어나 언젠가 큰돈을 갚아야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처럼 우리의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삶이 각각 별개가 아니라,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된다고 보는 것을 조금 더 거창하게 확대 표현해서 전생ㆍ금생ㆍ내생이라고 일컬었을 뿐, 막연한 신비주의를 지향한 것이 아님이 너무나 분명하다.
오늘 분주하고 힘겨운 하루를 보낸다면, 내일은 피로가 몰려 올 수밖에 없는 것이 전생ㆍ금생ㆍ내생의 삼세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인 전생과 현재인 금생과 미래인 내생이 각각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인과법인 것이다.
오늘 피곤에 지쳐 있다면 어제 무리해서 과로했음을 알겠고, 오늘 충분한 휴식을 통해 심신의 안정을 취한다면 내일의 삶이 편안하리란 것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제 불필요한 낭비를 일삼았다면, 오늘 주머니 사정이 말라붙으면서, 꼭 필요한 물건을 사는데도 망설이게 되고, 오늘 근검절약하는 검소한 삶을 살면 내일이 풍요로워질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이처럼 모든 것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인과법에 따라, 과거ㆍ현재ㆍ미래가 한 꾸러미로 이어지면서 쉼 없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지금 이 순간만이 온전히 실존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면서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느 곳으로 가고 있는지, 새삼 살필 필요가 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욕지미래(欲知未來) 선찰이연(先察已然) - 미래를 알고자 하면 먼저 이미 그러했음을 살펴라.
명경소이찰형(明鏡所以察形) 왕자소이지금(往者所以知今) - 밝은 거울이 내 모습을 알 수 있게 해 주듯이, 과거의 행동이 바로 현재의 모습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의 말씀에도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모든 것이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인과법(因果法)과 함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초대하지 않아도 인생은 저 세상으로부터 찾아왔고
허락하지 않아도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갔다.
그는 찾아온 것과 마찬가지로 떠나가는 것이다.
거기에 어떠한 탄식이 있을 수 있는가. - 자타카-
지금까지 엄청난 재산을 모은 사람도 많았고, 명성을 얻은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재산과 명성과 함께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무도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홀로 태어나 홀로 죽으며, 홀로 왔다가 홀로 간다.
옛날 중국에는 황제가 죽으면 살았을 때 시중을 들던 궁녀나 내시들을 함께 무덤 속에 묻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황제나 궁녀들이 함께 손잡고 가는 것일까?
어버이와 자식 간에, 또 아내와 남편이 아무리 끈끈한 정이 있어 서로 행복했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갈림길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제각각 갈라서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인생이라 해야 할까?
막막한 광야에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뒤에서 성난 코끼리가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듯 쫓아온다. 생사를 눈앞에 두고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보니 언덕 아래에 우물이 하나 보인다. 우물 속에는 등나무 넝쿨이 축 늘어져 있었다. ‘옳거니 됐다. 이제 살았다.’ 하면서 그 사람은 넝쿨을 붙들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코끼리가 이제는 해치지 못하겠지.’하고 겨우 숨을 돌리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우물 밑에 독룡들이 입을 쩍 벌리고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우물의 중간 벽에는 사방에서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등나무 넝쿨에 의지해서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있게 됐다. 시간이 갈수록 두 팔에 힘이 빠져 점점 지탱하기 힘들어진다. 설상가상으로 등나무 넝쿨 위에서는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나타나 넝쿨을 싸각싸각 쏠고 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형국이다.
그 와중에 머리를 들어보니 등나무 위에 있는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입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달콤한 꿀을 받아먹는 동안 그 맛에 취해서 곧 죽을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황홀경에 도취한다. 부처님이 우리 인생을 이렇게 비유 묘사하신 것을 ‘안수정등(岸樹井騰-우물속의 등나무 넝쿨)’이라 이름 한다.
위 이야기에서 막막한 광야는 중생이 지은 업에 따라 윤회하는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ㆍ인간ㆍ천상의 여섯 세계, 육도(六道)요. 코끼리는 예고 없이 목숨을 앗아가는 살귀(殺鬼)요, 우물은 이 세상이고, 독룡은 지옥이다. 또 네 마리 뱀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인 사대(四大), 지ㆍ수ㆍ화ㆍ풍이요, 등나무는 중생의 어리석음인 무명(無明), 등나무넝쿨은 생명줄, 흰 쥐와 검은 쥐는 일월이 교차하는 낮과 밤이요, 꿀물은 오욕락(제물 색 · 음식 · 잠 · 명예)이다.
우리가 사는 인생의 모습이란 이와 같이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막막한 상태 속에서 그때그때 잠시 찾아오는 꿀물에 취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 막막한 삶을 살면서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업(業)을 짓고 또 과보(果報)를 받는다. 그런데 보통 업(業)이라고 하면 소극적이고 피동적으로 팔자소관이라고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데 이는 전혀 잘못된 견해이다.
숙명적으로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정해져 있다면 인생에 희망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도 하느님도 다 소용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짓고 받는 업과 그 과보는 우리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바뀌게 돼있다. 자신이 짓는 업에 따라 팔자를 바꿀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당(唐)나라 때 <마의상서(麻衣相書)>라고 하는 관상학(觀相學) 책을 쓴 마의선인(麻衣仙人)이 있었는데, 마의선인이 하루는 시골길을 걷고 있는데 나무하러 가는 머슴의 관상을 가만히 보니 곧 죽을상이었다. 그래서 ‘마의선인’은 머슴이 딱하게 보여서 “얼마 안 가서 죽을 것 같으니 너무 무리하게 일하지 말게.”하고 말해주고 헤어졌다.
마의선인의 말을 들은 머슴은 낙심해서 개울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을 하는데, 마침 개울을 따라 떠내려 오는 썩은 나무껍질 위에 수많은 개미떼가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보였다. 머슴은 그 모습을 보니 꼭 자신의 처지와 같아 보였다. 그래서 측은한 마음에 나무껍질을 물에서 건져 개미떼들을 모두 살려주었다.
며칠 후 마의선인이 다시 그 머슴을 만났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 머슴의 얼굴에 짙게 깔려 있던 죽음의 그림자는 온데간데없고 부귀영화를 누릴 관상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마의선인은 머슴에게 그 동안의 경위를 물었다. 그 이야기 중에 그 젊은 머슴이 개미를 구해준 이야기를 했다. 이에 마의선인은 크게 깨달아 이런 말을 남겼다.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 얼굴 좋은 것이 몸 건강한 것만 못하고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 - 몸 건강한 것이 마음 착한 것만 못하고
심호불여덕호(心好不如德好) - 마음이 착한 것이 덕성이 훌륭한 것만 못하다.
백범 김구(金九) 선생은 젊은 날 입신양명을 위해 과거 공부를 하다가 조선 말 어지럽던 시절에 매관매직하는 부정부패를 보고, 열일곱에 과거에 낙방하자 아버지는 차라리 관상(觀相)이나 풍수(風水)를 공부하면 산 입에 거미줄을 치겠느냐며, 아버지가 권한 <마의상서>를 공부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하여 “관상불여심상觀相不如心相- 관상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 씀씀이보다는 못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관상 공부를 접고, 마음을 닦는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사람 얼굴은 뱃속에서 나올 때 부모가 만들어 준 것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전생의 행위가 금생의 나를 만들고, 금생의 내 행위가 나의 미래를 만든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착한 업을 쌓아 가는데 부지런해야 한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오백제자수기품’에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가 나온다.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란 과거 일곱 부처님의 공통된 훈계, 절대 절명의 가르침을 말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악막작(諸惡幕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실천하라, 그리고 그 마음을 비우라, 이것이 불교의 특색이다.」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幕作衆善奉行) -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실천하라.」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어느 종교도 할 수 있고 종교하고 관계가 없는 사람도 다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자정기의(自淨其意) - 그 마음을 비워라.」 이 때 "정(淨)"자는 청정하게 하라는 뜻인데, 청정이라는 "정(淨)"자는 비운다는 뜻이다. 따라서 청정은 텅 비운다는 뜻이다. 청소를 해서 깨끗하게 했다. 이런 뜻이 아니다, 완전히 비운 상태를 청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정기의(自淨其意)’란 그 마음을 스스로 텅 비워서 청정하게 하라는 말이다. "시제불교(是諸佛敎)"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 이것이 소위 칠불통계게이다. 우리는 부처님의 이런 가르침을 한번쯤 상기해서 공부하는 것이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