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시편 145:8-14
제목: 모든 무너진 자를 일으키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
●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은혜롭고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인자하심이 크신 절대자이며 성도들을 붙들고 돕는 분이라고 믿는 신앙입니다.
| 시145:8.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Slow to anger and great in lovingkindness) 14.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그 본성적 특징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끝이 없으신 절대자이십니다(시145:8). 여기서 ‘자비’라는 단어는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넘어, ‘끊임없는 동정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사람의 동정을 받는 것은 때로 비참함을 느끼게 하거나 스스로를 거지처럼 여기게 만들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동정을 받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에 임하는 가장 커다란 ‘은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실패하고, 삶이 망가지며, 결국에는 스스로가 보아도 비굴해질 만큼 무너지는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절망적인 상태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넘어진 우리를 반드시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시145:14). 우리는 지극히 당연하고 확실한 영혼 구원 외에도 구원의 다각적 의미(시119:41)를 아울러 알아야 합니다.
시119:41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공동: 사랑을 나에게 베푸시고, 약속하신 당신 구원을 내려주소서) 『제네바 성경』) And let thy loving kindness come unto me, O Lord, and thy salvation according to thy promise. |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구체적인 ‘구원’의 역사로 우리 삶에 나타납니다. 칼빈주의자들의 제네바 성경(Geneva Bible)을 살펴보면, ‘kindness’에 대해서
| He showeth that God’s mercy and love is the first cause of our salvation. 직역)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 구원의 첫 번째 원인임을 보여준다.” |
라고 각주를 달아 놓았습니다. 『제네바 성경』과 같은 계열의 사본을 번역한 KJV는 이 ‘인자하심’을 단수가 아니라 복수 형태인 ‘mercies’로 표현하였습니다. 왜 복수로 표현되었을까요? 그것은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 단지 우리가 죽은 후에 영혼이 천당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세에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공급받는 모든 삶의 자원과 은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사후의 영원한 구원뿐만 아니라, 신자가 오늘날 현실에서 당면하는 수많은 환란과 위기 속에서 건져내시는 구체적인 ‘구호(救護) 조치’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은 환란 날의 피난처(시59:16)가 되십니다.
| 시59:1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
이 고백에서 다윗은 자신이 죽은 후의 구원을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바로 그 당시에, 자신을 죽이려 쫓아오던 원수 사울 왕의 손아귀에서 구출받기(deliver)를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드렸고, 마침내 그 기도에 대한 실제적인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환난과 대적들(enemies)의 경우를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유비(類比, analogy)하여 적용해 본다면,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들은 여전히 유사하게 ‘죄와 환난(고질적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질적 문제들은 육체와 정신을 갉아먹는 ‘산 지옥’을 의미하며, 본질적 죄는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죽은 이후의 찐(眞) 지옥’의 원인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이러한 죄와 고질적 문제들에 대하여 강력한 구원의 능력으로 나타나며, 그 구원 안에는 내세의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뿐만 아니라, 현세의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문제의 해결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는 굳게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 성도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와 긍휼의 다면적 축복을 받습니다.
|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제때에 주시는 도움)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때를 따라 돕는 것은 성도의 필요에 적절히 반응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의 삶 속에서 ‘긍휼’로도 표현되는데, 이 긍휼은 우리의 삶에 '때를 따라 돕는' 놀라운 은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성도의 특권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때’라는 것은 미신이나 다른 타종교에서 흔히 말하는 막연한 타이밍, 혹은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운수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때’는 하나님께서 정확한 주권 속에서 보고 계시는 ‘우리에게 가장 영적으로, 육적으로 필요한 바로 그 시점’을 의미합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자가 현재 진행형으로 구원을 받고 있으면 믿음의 인내와 진정한 회개를 합니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때로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믿음의 인내를 통과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인내는 결코 낙심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담대함’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 담대함이 없다면, 우리는 현실의 무게 앞에 쉽게 좌절하거나 영적으로 침체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 속에는 영적인 축복(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의 수많은 용례가 보여주듯이 위기 상황에서 건져주시는 현실적인 공급과 고질적 문제들의 치유와 해결 등 인간 삶의 모든 다면적인 특성이 종합적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는 통전적으로 파악하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하는 것이 죄를 짓기 위함이 아니요, 개인의 사사로운 과욕(過慾)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정당한 모든 것을 기꺼이 도와주시는 ‘진정으로 인자하신’ 절대자이시며 참 아버지이십니다.
약4:2.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새번역: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고후1: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공: 위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진정으로 당당하시고 참으로 인자하시며 의로우신 분이 없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도 낮고 연약하며, 그중 많은 자들은 삶의 무게와 실패로 인해 처지가 더욱 비참하고 비굴해진 실패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비굴해지고 무너진 자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재기(再起)의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시145:14).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비참한 환경이나 상황만을 탓하며 불평만 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던 우리의 믿음 ‘없음’과 믿음의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 앞에 겸손히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회개입니다.
● 기독교 신자라고 자부한다면 기독교 신앙체계의 핵심 원동력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수양이나 노력으로 도달하는 종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하여 구원을 받고 삶의 모든 것을 공급받는 은혜의 신앙체계입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신앙체계를 움직이는 가장 핵심적인 원동력은 바로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인자하심’들(mercies)에 있습니다. 이 인자하심(loving kindness)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스스로에게마저 실망하여 무너진 모든 비굴한 자들(시145:14)을 조건 없이 품어주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절대자의 거룩하고 위대한 긍휼’입니다. 기쁜 주일에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이 놀라운 사랑과 현실적 구원의 능력을 마음 깊이 믿고, 삶으로 담대하게 고백하며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 구원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의 원인임을 보여주시는 성경 말씀들을 붙잡고 묵상하며 승리를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댓글 의미 있는 호국의 달 주말, 기쁜 주일 되세요!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포스팅의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래의 댓글과 주석은 시간이 많은 분들께 다양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알겠습니다
<호크마 주석: 시편>
=====145:8
은혜로우시며...노하기를 더디하시며 - 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죄악의 세력들에게 심판의 형태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두려운 일'에 관해 언급한 후(6절), 기자는 이제 하나님의 크신 자비에 관해 증거하고자 한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죄악 자체는 철저히 미워하고 징계하시지만 죄인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그분은 거역하는 자를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오래 오래 참으시는 것이다(느 9:30;롬 9:2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완악성과 사악성을 버리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초래된다(삼하 3:39;욥 20:5;전 8:13;살전 5:3).
=====145:9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 토브 예화 라콜) - 문자적인 뜻은 '하나님은 모든 것에 선하시다'이다. 몇몇 헬라어 역본들은 여기 '모든 것'을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들'로 번역하고 있는데 평행구인 본절 하반절에 비추어 볼 때 설득력이 없다. 하반절을 중시하여 '모든 피조 세계' 곧 '그가 만드신 모든 것'(103:19)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피조계 역시 규칙적이고 변동이 없는 우주 현상계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자비를 만끽한다(Eichrodt).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 속에는 그분이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임을 말하는 증거가 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사랑하시고 복 주시는 분이며, 우주 도처에 이것 저것들을 배열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또한 인간의 행복을 위함이기도 하다. 그분은 연약한 자, 실수하는 자, 고통당하는 자를 쫓아버리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으로부터 떠나 방황하던 자들을 기꺼이 다시 맞으신다. 그리고 그들의 배역(背逆)을 용서하시고 슬픔의 눈물을 그들의 눈에서 씻어 내신다.
=====145:10
주의 성도 - '성도'(* , 하시딤)은 언약적 충성을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하는 자이다(30:4;86:2).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돌보심의 수혜자라는 사실에 강조점이 두어져 있다. 이 같은 용례는 대체로 신약의 '성도'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7).
=====145:11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 사람은 대체로 관심있는 것, 기쁨을 느끼는 일, 바로 깨달은 바, 그리고 몹시 어려웠으나 해결을 본 난제를 이야기하기 원한다. 성도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들 역시 앞에 진술한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원한다. 그러한 바람은 성도의 특징 중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나라(* , 말레쿠트) - 본 용어는 구약 성경에서 정치적인 나라를 뜻할 때 흔히 사용되고 있다(삼상 20:31;왕상 2:12;대하 36:22 등). 그러나 여기에서는 '여호와의 나라', '통치' 혹은 '왕권'을 뜻한다. 한편, 여호와의 통치라는 개념의 더 깊은 의미는 신약에 가서 드러난다(Rad, Evans).
주의 능 -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뜻하는데 이 능력이란 어느 한 영역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존재의 확실성을 시사한다. 창조 사역, 섭리, 죄인들의 회심, 세계 도처에서 드러나는 말씀의 진리성, 죽어가는 자가 평화를 얻는 것 등 이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 이것이 바로 '주의 능'이다(Barnes).
=====145:12
인생(* , 베네 하아담) - 성경에서 '베네 하아담'은 일반적으로 '신분이 낮은 자', '비천한 자'를 뜻하고 '베네 이쉬'(* )는 '신분이 높은 자', '고상한 자'를 뜻한다(4:2;49:2;62:9;애 3:33). 따라서 '베네 하아담'과 '베네 이쉬'가 함께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땅 위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게 된다(49:2). 그런데 본절에서는 '베네 하아담'이 쓰였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본절은 '신분이 낮은 자', '비천한 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맥상 신분이 낮고 비천한 자라고만 고집할 수 없는데, 이런 경우 문맥은 어색해진다. 왜냐하면 본절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를 깨달아서 그 나라 백성이 되는 모든 성도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베네 하아담'은 단순히 신분이 낮고 천한 자가 아니라 오고 가는 모든 세대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듣고 겸손히 받아들이는, 그 마음이 가난한 자를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겸손히 받아들이는 자들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대비를 이루는 '어린아이들'로 묘사하고 있다.
귀신이 쫓겨 나가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가시화되었을 때 예수께서 그 나라의 임재, 곧 그 나라에 관한 복음을 깨달을 수 있는 자들의 자격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 사실은 잘 드러나고 있다(눅 10:21).
=====145:13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 이 와 유사한 구절이 단 4:3, 34 등에도 나오는데 아마도 다니엘 저자가 본절을 참조했던 것 같다. 주의 통치는 공간적으로 그 어느 곳에나 미칠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는 영원 무궁토록 계속된다. 공의와 자비로써 통치하는 여호와의 나라는 그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145:14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 '넘어지는 자'(* , 하고플림)란 '자신의 힘으로 계속 걸을 수 없는 자'를 뜻하지만 좀더 넓게는 인생의 무거운 짐 때문에 억눌려 피곤한 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자를 의미한다. 또한 '붙드시는'(* , 소메크)의 문자적인 뜻은 '지탱시켜 주는'이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짐을 지고 힘들어 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붙들어 주는 분임을 밝혀준다. 한편 전(前) 문맥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
위엄, 영원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들을 추상적으로만 생각하고 자신의 실제적인 삶과는 무관하다고 단정하기 쉽다. 바로 이 같은 시점에서 하나님은 구체적인 삶의 영역 속에서 인생의 짐을 지고 힘들어 하는 자들을 붙들어 주신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 구절의 문맥상 의의는, 추상적 개념으로만 여겨질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들이 인간의 실제적인 삶과 연관시켜 준다는 데서 찾아진다.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 - 여기서 '비굴한 자'(* , 하크푸핌)의 문자적인 뜻은 '그 몸을 구부린 자'로서 인생의 시련, 의무 따위로 정신적으로 억눌려 있는 자를 암시한다. 그러한 자를 일으킨다는 본 내용은 상번절과 그 의미에 있어서 평행을 이룬다 하겠으며 평행, 곧 유사 개념의 병행은 반복, 곧 강조를 나타낸다.
깊고 풍성한 내용에 공감합니다.
시119:41
<호크마 주석>
주의 인자하심 … 내게 임하게 하소서(이보우니 하사데카). 히브리어에서 동사의 모음 형태는 주어(명사)의 모음 형태와 수(단수 혹은 복수)에있어서 일치를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본 구절의 경우 주어(명사)에 복수를 뜻하는’요오드’이 생략되어 있어 단수를 나타내면서 동사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데이 같은 경우의 동사를 결어적 동사(혹은 결어 동사)라고 부른다. 이때 주어를 구성하는 명사 ‘하사데카’은 복수형으로 해석해야 한다. ‘헤세드’의 복수형 ‘하사데카’은 강조의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이것은 언약 관계가 유지되는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무수한 자비 행위를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앞의 ‘말씀’ 또한 하나님과 저자 사이의 언약 관계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주의 구원(테슈아트카). ‘당신의 구원’이란 뜻이다. 본 시편을 통하여 저자가 분명히 밝히는 사실 중의 하나는 모든 구원은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사실이다(123, 166, 174절). 구원은 결코 인간의 능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은혜에 속한 것이다(33:16, 60:12, 108:13).
아멘 🙏
시59:16
<호크마 주석>
15절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악인들의 비참한 결국을 묘사하는 데 반해, 본절은 하나님의 보호로 구출된 의인들의 행복한 결국을 대조적으로 묘사한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 '주의 힘'은 구체적으로, 다윗이 창문을 통하여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삼상 19:12-17), 하나님께서 사울과 그 자객들의 계획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신 일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노래하며'는 당
연히 그분의 능력이 심히 큼에 대한 찬양이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 다윗은 '아침'이 오기 직전에 자객들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며(삼상 19:11), '아침'에는 바로 이같이 '주의 인자'를 찬양할 수 있었다(삼상 19:18-20). 반면에, 악인들은 밤새도록 다윗의 목숨을 노렸으나 결국 실패로 끝남으로써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심히 피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 본 문구 앞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 )가 있다. 한편 이 문구에 대한 해석은 9절 주석을 참조하라.
네, 밑에 댓글에서 잘 참고하겠습니다.
시59:9
<호크마 주석>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 '산성'(* , 미스가브)은 '높다'를 뜻하는 동사'사가브'(*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쉽게 오르기 곤란할 만큼의 '높은 망대'(삼하 22:3) 혹은 '높은 곳'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다른 곳에서는 '피난처'로 번역되기도 하였다(46:7,11). 특히 이 단어는 1절의 '높이 드소서'의 히브리어와 그 어근이 동일하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보호자가 되심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저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 '저의 힘을 인하여'(* , 우조)는 단지 '그분의 힘'을 의미할 뿐이다. 이와 같은 맛소라 본문으로는 본절의 뜻이 불분명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70인역(LXX)과 다른 고대
역본 등을 근거로 하여, 맛소라 본문의 본 단어 '우조'를 '우지'(* )로 고칠 것을 주장한다(NIV, Weiser, Keil, Rawlinson, Kraus, C. B. Moll). 그럴 경우 '오 나의 힘이시여'로 번역될 수 있어, 매우 자연스럽다(17절). 한편 '바라리이다'(* , 사마르)는 원래 '지키다' 혹은 '보존하다'의 뜻이지만,
'굳게 의지하다'의 의미로 이해하면 적절할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저도 한번 요약을 해보았습니다^^:
* 하나님의 자비는 단순한 동정을 넘어 끊임없는 동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은혜의 시작입니다.
* 인생의 실패로 인해 비굴해질 만큼 무너진 순간에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죽은 후의 구원뿐만 아니라 현실의 환란에서 건지시는 구호 조치로도 나타납니다.
* 다윗의 역사적 고백처럼 하나님은 원수의 손이자 현대인의 원수인 죄와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 질병은 현세의 산 지옥을 의미하고 죄는 내세의 지옥을 의미하기에 구원에는 현세의 문제 해결도 포함됩니다.
* 하나님이 주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우연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정확한 시점에 임합니다.
* 응답을 기다리는 인내는 낙심이 아닌 담대함에서 비롯되며 이 담대함이 없으면 좌절하게 됩니다.
* 하나님의 긍휼에는 영적 축복뿐 아니라 위기에서의 물리적 공급과 신체적 치유 등 다면적 측면이 있습니다.
* 상황을 탓하며 좌절하기보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믿음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걸 보면 핵심 파악이 잘 됩니다 😀😃
* 세상의 동정은 때로 비참함을 주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무너진 인생을 존귀하게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참된 은혜임을 깨닫고 마음에 큰 위로를 얻습니다.
* 구원이 죽은 후의 천국 구원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마주한 삶의 환란과 질병 속에서 건져내시는 실제적인 구호 조치라는 말씀이 큰 힘이 됩니다.
* 막연한 타이밍이나 우연이 아니라 내게 가장 필요한 영육의 시점을 정확히 아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주님의 신실하신 주권을 신뢰하게 됩니다.
* 환경과 상황의 어려움을 탓하며 주저앉아 낙심하기보다 내 안의 약해진 믿음을 먼저 돌아보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겠다고 다짐합니다.
*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상하고 비굴해진 자까지도 조건 없이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내 삶을 움직이는 최고의 원동력임을 고백합니다.
아멘 🙏
* 내세의 구원뿐만 아니라 현세의 질병과 환란 중에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무너진 삶을 일으켜 세워 주옵소서.
* 환경을 탓하기보다 믿음 없음을 회개하게 하시고 낙심 대신 담대함으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온전히 실뢰하게 하옵소서.
아멘 🙏
아멘 🙏 🙏
저도 더 줄여 요약해 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단순한 동정을 넘어 비굴해질 만큼 무너진 인생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은혜의 시작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은 사후의 천국 구원뿐만 아니라 현실의 환란과 위기에서 건지시는 실제적인 구호 조치입니다.
우리의 원수인 죄와 질병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는 현세의 삶 속 문제 해결이 분명히 포함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우연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육 간에 가장 필요한 정확한 시점에 주권적으로 임합니다.
어려운 환경과 상황을 탓하기보다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던 믿음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돌이키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노력이 아닌 무너진 자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핵심 원동력 삼아 공급받는 신앙체계입니다.
잘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동정과 달리 우리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시고 무너진 자리에서 조건 없이 다시 일으키시는 주님의 신실한 사랑에 가슴 깊이 위로를 받습니다.
막연한 요행이나 타이밍이 아니라 나의 형편을 가장 잘 아시는 주님께서 영육의 위기 속에서 때를 따라 구호해 주시고 채워주심을 굳게 믿게 됩니다.
눈앞의 힘겨운 환경에 마음을 빼앗겨 낙심하기보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던 나의 연약함을 정직하게 돌아보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로 다짐합니다.
아멘!
하나님, 현세의 어려움이나 질병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가장 필요한 때에 임하는 주님의 구호 조치와 인자하심을 온전히 신뢰하며 다시 일어서게 하옵소서. 아멘 🙏
아멘!
진정으로 위로와 기쁨의 소식이 되는 귀한 묵상의 글을 올려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공감과 댓글 매우 고맙습니다^^
너무너무 좋은 말씀이에요. 대부분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는 단비같은 힘이 있다고 할까요.
처음 믿을 때에는 기도만 하고 나아가면 뭐라도 될 것 같았고, 세상과 우주가 다 내 품 안에 있어서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이 용기 백배 했는데, 점점 그런 믿음의 용기와 담력들을 잃어버리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그래도 이만하면 됐지 하는 마음으로 자위하며 지내왔던 것 같습니다. 비굴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의 믿음 없음과 연약함을 깊이 회개하고 주 안에서 재기하는 믿음을 보여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네요. 귀한 믿음의 묵상에 감사드립니다.
매우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