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줄에 매달렸다. 사방 천지 푸른 억새 풀이 바람과 더불어 눕고 일어서는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유월 초의 산뜻한 초록을 풀어놓은 동산답고 부드러운 능선이건만 몰아쳐 오는 섬 바람은 거칠고 맹렬하다. 굵은 줄 하나에 의지한 몸을 통째로 날려 버릴 기세로 여기가 바람의 영토임을 일러 준다.
바람과의 사투다. 높은 산도 아닌 오름에 불과하다고 만만히 봤던 예상은 곧 빗나갔다. 한 치 앞도 예측하지 못한 생각이 유지된 건 고작 십 분 정도. 가파른 계단 길을 오르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야자 매트가 폭신하게 깔린 천국의 계단인가 했는데, 세찬 바람에 비틀거리면서 오름의 계단도 뒤틀린다. 내 안목이 맹목이었나. 제주도다운 바람 앞에 자유자재로 휘날리는 머리카락이야 놔두고라도 심신이 간당간당하다. 한 손으론 동아줄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론 모자를 잡은 채 간신히 떼 놓은 갈지자걸음이 연신 허방을 딛는다. 생각지 못한 고난의 계단이라는 걸 알았을 즈음, 겨우 정상에 도착한다. 헉헉거리며 올라와 만나는 목적지, 끝점, 이보다 더 반가울 수가….
새별오름, 푸름이 물결치는 억새 풀 초원에 선다. 제주도 곳곳에 솟아 있는 수많은, 오름들, 중에 서부의 대표 오름이라 한다. 새털구름 점점이 그려진 하늘을 배경으로 눈 아리도록 청청한 문장을 언제쯤 보았는지, 억새라면 소슬바람 부는 가을날 흰 꽃 머리를 푼 모양새로 서걱거릴 때라야 제 모습인 줄 알았다. 이건 바람에 흔들릴수록 쌩쌩 긋는 역동적인 부호들,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라는 강렬한 시그널이다. 서늘한 결핍의 가을 억새만 기억한다면 새파랗게 직조해 내는 봄날의 억새를 필히 읽어 두어야 하리. 이 미학적인 순간에 터질 듯 팽창하는 가슴으로 푸른 문구를 받아 적는 사람 하나는 소진해 버린 무엇을 불러오려는 걸까.
어쩔 수 없는 일들은 언제든 일어난다. 세계적으로 창궐한 역병에 발이 묶이긴 생전 처음이다. 단숨에 넘을 수 없는 힘든 고개이며 쉽사리 통과할 수 없는 터널인지라 ‘집콕’하며 일 년을 보냈다.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은 세상에서 늦은 봄날마저 다 가고 있다. 빽빽한 아파트와 고층빌딩으로 에둘린 도시에서 내 삶이 낮달처럼 낡아 가고 있다는 절박감에, 죽이 맞는 선배 문인과 마침내 제주도행 바람길을 탔다.
바람을 안고 바람맞이 나선 길, 낯익은 삶의 모퉁이에서 낯선 삶의 모서리를 만나는 걸음걸음. 동행한 선배는 발길 닿는 곳마다 자연이 써 내려가고 연출하는 천혜의 작품에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숙소로 돌아와선 끙끙. 허리를 앓는다. 그러면서 시를 쓰고 다음 날이면 거뜬히 일어나 일정을 챙긴다.
뿌연 안개와 해류를 가르며 나아가는 유람선에서 갑판에 나앉기를 고집하는 그녀. 한 시간 동안의 뱃길에 자욱한 안개를 두르고 앉아 바람을 맞는다. 왠지 이번 여정에선 더 많이 감격하고 더 자주 탄성을 지르며 감성을 노출한다. 세상 살 만큼 살았다고 말하면서도 그녀의 감수성은 대책 없이 넘치고 두 눈은 아직도 고프다. 선실 창 안에서 안개 바다와 마주한 나는 또 왜 생뚱맞게 가슴 한쪽이 먹먹하다.
승객들의 기분을 북돋우려는 유람선 사회자가 음악을 틀어놓고 마이크를 든다.
“오늘 참 기찬 날을 받으셨습니다. 가도 가도 보이는 건 안개뿐입니다.”
“선내 왼쪽에 앉아 계신 분들은 그만 관광을 포기하셨습니다.”
“갑판에 계시는 여사장님들은 바람에 이 남자 저 남자 품으로 안기지 마시고 제자리에 꼭 앉아 계십시오.”
폭소가 터진다. 까딱하다간 시퍼런 물속이 아니라 시키먼 외간 남자 가슴으로 뛰어들 뻔했었나. 안개 낀 날씨도 그런대로 운치 있는데 풍랑 위에서 유유히 웃겨 주는 저 잘생긴 남자. 썩 괜찮다. 아슬아슬한 수면(水面)을 생활의 터로 삼기까지 세상이라는 격랑의 파도타기에서 마음 줄 잡는 자세쯤은 선 수련했는가 싶다.
일정을 마친 저녁에 비명을 지르는 선배의 허리에 파스를 붙여준다. 시큰거리는 내 발목에도 파스 두 장을 헌납하며 잠시 몸의 말씀에 귀 기울인다. 가는 세월에 어쩔 수 없는 변화는 내 몸에서부터 일어난다는 것. 뼛속에 무단 침입한 바람도 어떻게 길을 잘 틔우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몸과 수십 년 동고동락하며 내린 자가진단에 희망 처방을 붙여 볼 참이다. 남은 생이 잘 피고 잘 지도록.
다시 저 높은 하늘로 이륙할 시간이다. 비행기가 바람을 맞으며 제주공항 활주로를 달린다. 막힌 데 없이 쭉 뻗어 어디든 떠나기를 부추기는 활주로는 포장 두께가 엄청 두꺼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도로다. 이 단순해 보이는 직선과 사방에서 부는 바람의 상관관계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활주로에 부는 바람은 항공기 이착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착륙 시에 맞바람을 맞으면 양력(항공기를 공중에 띄우는 힘)이 향상하여 비교적 안전하게 이착륙을 할 수 있다. 뒷바람이나 옆 바람일 땐 양력이 감소하고 항공기의 자세 제어도 힘들다. 하여, 활주로의 방향은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대개는 맞바람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건설하게 된다고.
삶은 배움의 길일지니 바람의 섬에서 살아 있는 바람을 만났다. 팽팽한 맞바람을 맞는 게 인생이라면, 정면 돌파하여 오르는 이륙의 찰나는 막힌 가슴 터지는 생명의 극상, 최고의 돌파력을 발휘하는 그것은 삶의 불쏘시개가 되고 영혼을 승화 시키는 촉매가 되겠다. 권태와 절망이 위협적으로 몰려와 마음에 깊은 골을 파 놓을 때, 어딘가로 훨훨 이륙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막막한 현실에서도 시시때때 날아오를 꿈을 꾸는 걸 보면, 애초 사람의 허파 한구석엔 바람이 장전되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그리움, 거리낌 없는 자유, 버릴 수 없는 욕망과 갈망, 그리고 환상의 바람들…. 생명으로 춤추게 하고 흔들리게 하고 미치게 하는 바람의 증후군들이 오늘도 어둑한 삶을 들썩여 준다.
바람에게도 자연의 이치대로 흘러가는 길이 있는 법. 가슴속 뭇 바람이 사라지는 날엔 생명의 유효 기한도 단연코 그칠, 사람 몸은 바람도 함께 세 든 집이다.
첫댓글 염 작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셨는지요? 눈을 몇번 감았다 떳을 뿐인데 벌서 25년이 세 날이나 흐르고 있네요. '바람이 세든 집' 잘 읽었습니다. 어쩌면 이리도 유연하게 그리고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글을 쓰시는지? 염 작가님의 글을 읽고나면 벼랑위에 선 것 같은 시간들이 두렵지 않네요. 그저 그러려니. 마음이 평온 해 진답니다. 푸른 뱀의 해에 염작가님께 좋은 일만 이어지길 바라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