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철한 참회·계행으로 수행근기 갖춰야
전북 장수군 장계면 금덕리 산 32-2번지. 장계면의 넓은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늑한 산자락에 자리잡은 성관사. 주변 지형은 백학이 나는 형국으로, 남덕유산 지맥인 깃대봉에서 수많은 학이 날아와 모이를 쪼아먹는 곳에 성관사가 들어서 있다.
15일 구불구불한 산길을 헤치고 도착한 성관사에서는 설법전과 수련관 건립 등의 건립불사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수백 미터 위쪽에 자리잡은 대각선원은 19일 동안거 결제를 며칠 앞두고 이미 23명의 수좌들이 정진에 들어간 상태였다.
종무소에서 대각선원장 월성 스님을 친견하기에 앞서, 상좌인 주지 성진 스님을 만나 큰스님에 대한 이모저모를 여쭈었다.
“큰스님은 절 하기와 염불, 독경을 통해 망상을 정리하고 삼매를 체험한 후 화두를 잡으면 7일이면 화두가 타파된다고 하세요. 만약 스스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세월만 낭비할 뿐 화두 타파는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대각선원에서는 결제 동안 가까운 산으로 등산조차 금지될 정도로 계율이 엄격하다고 한다. 오신채는 물론 초콜릿, 우유, 빵도 함부로 먹을 수 없다. 사사로운 음식에서 나오는 인연법도 허투루 여기지 않을 정도로 선원의 청규는 서릿발 같다. 이렇게 3년만 공부하면 많은 악습이 떨어지고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 성진 스님의 말이다.
주지 스님과의 대화가 끝난 후 중화당에서 월성 스님을 친견했다. 온화한 미소가 시골 할아버지 같은 월성 스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목숨을 내건 정진을 강조하신다.
“옛날에는 조계 가풍에서도 염불은 기초수행에 들어갔습니다. 업연(業緣) 많은 중생은 머리를 깎아도 망상이 많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죠. 아만심이 수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절을 통해 참회하고, 계행을 철저히 닦아 수행의 근기를 갖추어 나가야 합니다.”
스님의 경험에 따르면 절은 망상을 제어하기에 가장 좋은 방편이다. 수천 배를 하다보면 망상이 들어올 여지가 없어지고, 저절로 하심(下心)이 된다. 그래서 월성 스님은 절 하기와 염불 정근을 잡초 즉, 번뇌와 업장을 녹이는 ‘배추밭 김매기’에 자주 비유한다.
배추밭에 잡초가 없다면 배추는 잘 자라게 된다. 이 때 배추 씨앗은 자성불(自性佛)이다. 다겁의 윤회를 통해 자란 잡초들을 정리하지 못한다면 힘든 고행도 소용이 없다. 수많은 전생의 수행을 통해 득력(得力)한 상태가 아니라면, 몸과 마음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득력해야 한다. 득력이 되면 자성불은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 때 화두는 타파된다. 참선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스스로 지치고, 가르침도 받을 수 없다.
스님은 45세가 되기 전까지 20여년간 하루 1만2천배 기도를 5∼6년씩 3회에 걸쳐 실시하는 등 거의 매일 3천배 절하기를 한 초인적인 원력을 보여주었다. 100일씩 나눠 300일씩 하는 1만2000배 기도를 통해 망상을 제거하고 참회를 통해 업장을 소멸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 1만2천배 기도는 반야심경 221편, 천수경 121편 독송, 참회의 절 3천배, 신도를 위한 절 3천배 등으로 진행되었다. 스님은 보리를 한 말 빻아놓고 보릿가루 한 컵을 마시며 24시간을 견뎠다. 한 말이면 100일을 먹을 수 있었는데, 소변과 대변은 열흘에 한번만 보아도 몸에 이상이 없었다.
그때 스님은 ‘절 삼매’에 빠져 하루 종일 1만2천배를 해도 1분을 했는지, 한 시간을 했는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신도들이 공양을 들라고 해도 며칠째 모르기도 했다. 스님이 계속 ‘석가모니불’만 부르며 절하다가 비틀거리며 걸어나오면 신도들이 ‘스님 돌아가신다’며 펑펑 울기도 했다. 이 때 돌아가실 것처럼 정진하던 모습을 지켜본 신도들도 따라서 열심히 수행했다 한다. 지금은 노인이 다 된 성관사의 신심 깊은 우바새, 우바이들이다.
“내가 3천배를 처음 시작할 때는 그래도 상(相)이 남아 못된 스님의 가사자락만 보아도 싫을 때가 있었지만, 1만2천배 정진에 들어갔을 때는 무아지경에서 업장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습니다. 눈은 아래를 보고 있어도, 등 뒤에서 엄청난 용광로와도 같은 불덩어리가 내 몸을 관통하더군요. 이 불구덩이가 지나갈 때 탐진치 삼독과 일체의 번뇌가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이 찾아드는 걸 체험했습니다. 여기서 혜안(慧眼)과 식(識)이 열리는 것이지요.”
진리의 말씀을 믿고 행하며 깨닫는 참된 ‘기도’는 그대로 스스로를 정화시키고, 주변환경을 진리공덕으로 장엄하게 한다. 즉 ‘절 수행’은 제불보살에게 구하여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원만구족한 불보살님의 마음으로 회복시키는 수행방편이었다.
엄청난 절 수행과 염불, 독경으로 수행력을 얻게 된 스님은 어느 절에 가도 조실 스님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특히 송광사 방장 구산 스님은 스님을 꼭 끌어안고 옆에 앉히시면서 상좌들에게 말씀하기도 하셨다.
“이 눈깔 먼 놈들아, 절해라.”
30대 중반 무렵, 하안거 결제를 하고 일주일쯤 접어들었을 때 구산 스님이 같이 살자고 말씀하셨다.
“결제 중에 어찌 그런 말씀이십니까?”
“자네는 결제가 필요없는 사람이야. 여기 나하고 같이 한 방에서 사세.”
“저질러 놓은 일도 있고 업이 많습니다. 스님,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한번 뵙겠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정진은 절, 염불, 독경에 머물수 없었다. 절 수행과 염불정진으로 나타나는 경지인 ‘절 삼매’와 ‘염불 삼매’는 참선정진으로 드러나는 ‘화두 삼매’와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절 삼매로는 무아(無我)의 세계를, 염불 삼매로는 화엄경과 법화경에 나오는 불보살의 세계와 33천 대천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두를 타파하면 필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우주와 하나가 되는 절대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스님은 3천대천 세계를 체험하고 화신불 응신불 법신불을 친견할 수 있는 ‘절 삼매’와 ‘염불 삼매’는 탐진치가 멸한 ‘화두 삼매’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염불 삼매는 이른바 팔지보살의 세계이며, 화두 삼매의 경지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절대세계로써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설명이다. 물론 스님은 환희심을 불러일으키는 염불 삼매의 경지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절과 염불로 삼매를 얻어 무아의 경지를 체득하고 망상을 조복받으면 화두는 저절로 타파되기 때문이다.
월성 스님의 화두 참구는 31세에 인천 용화사 조실 전강 스님을 친견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월성 스님이 전강 스님을 찾아갈 당시 용화사에는 담도 없어서, 2천여명 정도가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월성 스님이 들어갈 수 가 없어 대문 쪽에 그냥 서 있는데, 법상에 앉아 계시던 전강스님이 손짓으로 불렀다.
사람들이 길을 터주어 가까이 다가가니 전강 스님이 말씀하셨다.
“귀 좀 줘.”
“칼을 가져오지 않아 귀를 잘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귀를 이리 좀 대봐.”
그러시더니 전강 스님이 월성 스님의 귀를 잡아당기며, 소곤소곤 말하는 것이었다.
“얼굴을 보니까, 여기 2천명이 앉아 있어도 너밖에 공부할 놈이 없어. 그래서 내가 불렀어. 언제 기회가 되어서 화두를 공부하면 ‘이뭐꼬’를 챙겨라.”
그러나 본격적인 화두 참구는 36세에 성륜사 조실 청화 스님을 은사로 모신 뒤 염불선으로 득력한 후인 46세부터 본격화됐다. 결국 스님의 화두 참구는 49세에 경봉 스님 회상인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큰 결실을 맺는다.
극락암에서 엿새가 되는 날부터는 화두를 한번 챙기면 하루 종일 끝도 없었다. 그 때는 길을 가다가도 의심만 챙겨지면 알지 못하는 선정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한달 하루 동안의 선정체험을 통해 ‘나’라는 것을 찾을 길이 없으며, 우주와 하나됨을 알게 됐다. 21세부터 해인사, 통도사, 봉암사, 백양사 등 제방의 선원에서 정진한 후 30여년만에 얻은 실로 감격적인 소식이었다.
월성 스님은 화두 참구에 앞서 절 수행과 염불, 독경 등의 정진이 필요한 이유를 땅에 말뚝을 박는 데 비유했다.
“말뚝을 땅에 박을 때 계속해서 크게 해머질을 할 수는 없습니다. 몇 번은 살살 두드리고 다시 힘을 모아서 크게 내려칠 때 말뚝은 땅 속으로 깊이 박히게 됩니다. 화두 참구도 이와 같아서 평소의 정진에 의해서 얻어진 힘의 바탕 위에 용맹정진을 통하여 선정의 힘이 크게 증장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말뚝 박듯이 온 정성과 힘을 기울인다면 안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목숨을 건 스님의 용맹정진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스님은 28세에 삼각산 법화사 옆, 호랑이 굴에서 31세까지 토굴 정진을 했다. 당시 이 곳에는 호랑이 들이 많아 사람들이 얼씬도 못하는 곳이었지만, 스님은 호랑이와 몇 번이나 마주치면서도 ‘도를 닦는다는 사람이면 자기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각오로 위험을 무릎쓰고 동굴에서 정진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한 겨울 호랑이 두 마리와 맞닥뜨려 죽을 지경에 처했다. 호랑이가 혀로 스님의 얼굴을 거칠게 핥는 위기일발의 순간에 스님은 “내가 전생에 업을 많이 지어서 너희들에게 내가 잔인하게 굴었다면 내 목숨을 줄 것이며, 내가 너희를 도와줬다면 너희들도 나를 돕고 갈 것”이라며 태연하게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삼매에 들자 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월성 스님은 요즘도 깊은 잠에 들지 않는다. 20여분씩 잠깐 귀잠을 잘 뿐이다. 좌선할 때나 포행할 때는 물론 잠을 자면서도 숨소리를 들으며, 화두를 놓지 않는다. 이른바 보림의 과정이다. 옛 스님네들은 견성 이후의 수행 즉 ‘불행(佛行)’을 늦추지 않았다. 오랫동안 중생으로 살아온 습이 한 순간에 떨어져 나가긴 힘들기 때문이리라.
스님은 불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던 어릴 때부터 이웃을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평소 ‘중은 공인(公人)이다’고 강조해 온 스님은 요즘도 제자들에게 기도후 세계평화와 인류평화, 조국평화통일, 국가재난 소멸, 국가 안녕과 태평, 육도중생의 성불을 발원할 것을 꼭 당부한다. 남을 위한 기도는 결국 자신을 위한 기도요 수행이며, 이런 발원이 쌓여야만 보다 큰 그릇이 될 뿐만 아니라 성취도 빠르기 때문이다.
“얼마나 큰 공부를 하고 큰 성과를 얻느냐는 얼마나 큰 발원을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세계평화와 조국통일, 온 국민이 삼세업장을 소멸하고 왕생극락하길 발원하는 것은 큰 공부를 짓기 위한 것입니다. 진정 확철대오를 원한다면 남을 위해 살고 아상을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글=김재경 기자 jgkim@buddhapia.com
사진=임민수 기자 yminsoo@buddhapia.com
월성스님은?
절수행·염불정근·화두선 겸행 선사
“절 하기와 염불, 독경 등 기초수행을 통해 득력(得力)하면 화두 참구가 훨씬 빠르다.”
20여년간의 절 수행과 ‘나무 석가모니불‘ 염불정근을 기초로, 화두선 수행을 멋지게 마무리 한 선사이면서도 일반 신도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월성 스님. 1935년 충북 보은군 회북면에서 출생한 스님은 21세 때 성운 노사를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스님은 처음 ‘절 수행’을 통해 업장을 소멸하고 인욕바라밀을 닦았는데, ‘10년 동안 절을 해서 부처님 세계를 보지 못하면 스스로 떠나겠다’고 다짐했다.
월성 스님은 45세가 되기 전까지 하루 1만2000배 기도를 5∼6년씩 3번에 걸쳐 하는 등 하루 평균 3천배의 절을 하며 염불-독경하는 고행을 해 신도들을 놀라게 했다. 스님은 31세에 인천 용화사 조실 전강 선사로부터 ‘이 뭐꼬’ 화두를 받았지만, 본격적인 화두 참구는 36세에 성륜사 조실 청화 스님을 은사로 모신 뒤 염불선으로 득력한 후인 46세부터 본격화됐다. 이윽고 스님의 화두 참구는 49세에 경봉 스님 회상인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
이후 스님은 제자 양성을 위한 도량 건립 불사에 운력을 마다않고 정진하면서도, 잠시도 화두를 놓지 않고 있다. 현재는 서울 상계동, 남양주, 송탄에 창건한 같은 이름의 사찰 ‘성관사’ 네 곳과 대각선원에서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다. 25명의 출가상좌가 있으며, 이중 14명이 동국대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