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미 옥
우리는 일본의 역사 속에서 뛰어난 한 인물을 접할 수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년 일본의 교토(京都) 근방에 있는 오와리(尾張)라는 작은 마을의 한 가난한 백성의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최고의
권좌(權座)에까지 올랐다가, 1598년 오사카(大阪)에서 생(生)을 마감했던 이 인물의 행적에 대해서 재 조명해 보고자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릴 때 이름은 고자루(小猿)였다. 고자루라는 이름은 그의 모습이 원숭이를 닮았다고 해서 친아버지
기노시타(木下)가 지어준 것이다.
고자루는 7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후 어머니가 재가하게 되자 고자루는 어머니를 따라가서
의붓아버지와 함께 지내게 되었으나, 8살때 어느 사찰(寺刹)에 맡겨졌다.
그러나 고자루는 사찰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곳의 생활이 자신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있지 못하고 사찰에서 나와서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15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의 곁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고자루의 앞에는 자신이 가진 운명의 길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찾아서 여행을 하던 중에 자신이 태어난 지방의 중심지인 세이슈(淸州)를 지나 도우미(遠江)라는
곳에 다다랐다. 고자루는 그곳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는 동안, 어느 날 그곳을 지나가던 그 지방의 성주(城主)였던
마쓰시타(松下) 일행과 마주쳤다.
그때 마쓰시타는 길가에 서 있던 고자루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이끌렸다. 그는 마차와 일행을 멈추게 한 후 고자루를 불러
그의 신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알아보고 나서 이렇게 물었다.
"너는 나를 위해 일할 수 있겠느냐?"
고자루는 그 말을 듣자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마쓰시타는 고자루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의 시종으로 일하게 했다. 당시 고자루에게 맡겨진 일은 '조리토리'였다.
조리토리란 주인의 짚신을 들고 따라 다니는 일이다. 고자루는 그 일을 하면서 충실함을 보였기 때문에 마쓰시타의 신임을 얻게
되어 보다 나은 직책으로 옮기게 되었다.
두 번째로 그가 맡은 소임은 마쓰시타의 곁에서 직접 시중을 드는 일이었다. 그는 그 일에서도 남다른 충실함을 보였으므로 더
큰 신임을 얻어 이후에는 금전과 의복을 내주고 거두어들이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자루의 주위에는 동년배나 선배들이 많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일을 했지만 중요한 직책을 얻지 못한 그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음모와 모함을 받아 고자루는 도둑 누명을 쓰게 되었다. 결국 고자루는 마쓰시타의 불신을 받게 되었고, 어느 날 그
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고자루는 얼마 동안 다시 유랑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가 18세가 되던 해, 그는 고향인 오하리(尾張)로 찾아가던 중에 어릴 때
친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두 사람을 생각해 냈다. 한 사람은 본명은 알 수 없지만 별명이 간마쿠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같은 고향
사람인 이치와카였다.
고자루는 두 사람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고자루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그 지방의 성주였던 오다(織田) 가문(家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소개해 주었다. 그 곳에서 고자루는 다시 조리토리 일을 시작하였다.
그의 주인은 오다 가문의 후계자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다. 그는 신발을 들고 오다 노부나가를 따라다녔으며, 곧 그는
그의 충실함으로 인해서 주인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고자루가 더욱 크게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세이슈(淸州)의 성곽 축대가 태풍으로 무너질 지경이 되었을 때였다. 많은 원로들이
20여 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고자루는 복구계획을 수립하고 공사를 벌여 훌륭하게
마무리함으로써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
고자루는 25세 되던 해에 결혼을 하였다. 그의 처가는 무사(武士) 집안이었고, 그는 데릴사위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름을 도
키치로 히데요시(藤吉郞 秀吉)로 바꾸게 되었다.
1566년, 히데요시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노부나가가 다른 성을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미노(美濃)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 전투에 히데요시도 노부나가를 따라 병사들과 함께 참여했다.
그때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이끄는 군대의 말단을 지휘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한 번도 용병학(用兵學)을 배우지
않았지만 병사들을 부리고 전략을 수립하는 데에 뛰어난 재질을 보임으로써 노부나가를 놀라게 했다.
히데요시는 많은 전투에서 병사들을 지휘하여 혁혁한 승리를 이끌어내었으므로 노부나가로부터 오우미(近江)의 한 성(城)을
포상으로 하사 받아 성주가 되었다.
그는 이후에 더 큰 전과(戰果)를 올리게 되는데, 1577년에는 노부나가의 명을 받고 주코쿠 지방 정벌의 선봉에 나서게 되었다.
그때에도 그는 사람들의 예상을 뒤집고, 주코쿠 지방의 대군을 맞아 짧은 시간 내에 큰 승리를 이끌어 내었다.
그 승리 이후 노부나가는 자신이 낳은 여러 아들 중에서 셋째 아들을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주었는데, 그 일로 인해 두 사람의
정은 더욱 돈독해졌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1582년 6월에 한 사찰에서 머물던 중, 부하였던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이때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여러 참모들 앞에서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자고 외쳤고, 선봉에 나서서 암살자 아케치 미쓰히데를 살해함으로써
주군(主君)을 잃어버린 노부나가 군대의 실질적인 지휘자가 된다.
그때부터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하고자 했던 계획들을 그대로 추진하여 단시일 안에 일본열도는 히데요시라는 한 사람의 지휘
하에 있게 되었고, 히데요시의 뛰어난 활약으로 비로소 확고부동한 일본의 천하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일본의 천황은 그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히데요시에게 일본의 모든 정권을 장악하여 움직이는 관백(關白)이라는 벼슬을 주고,
도요토미(豊信)라는 성(性)을 하사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그 이후, 히데요시는 관백에 직결되는 5봉행(5奉行)이라는 정치기관을 신설하여 중앙집권적인 정권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행정과 모든 법률을 개혁하여 일본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는 기틀을 쌓기 시작했다. 그가 마련한 제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가 소농민(小農民)의 자립정책이다. 1582년부터 1593년 사이에 계속 실시된 토지조사에서 농지면적과 수확고, 경작자가
명확하게 기록되었으며 합당한 세금을 부담하는 자가 자유로운 농민으로 인정되었다.
히데요시가 경작자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점이 소농민의 자립정책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둘째로 무기 몰수령이다. 백성들의 무기류 소지를 금지하는 조치였다. 이유는 백성이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세금을 거두는 일을
어렵게 하고 반대행위를 함으로써 경작 부진을 초래하는 원인이 됨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분리되어 정권이 사(士)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역무(役務)의 제공뿐이었다. 이로써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시장이 활성화되어 정권의 경제적 기초가 되는 상업의 발전과 농업 생산성의 급격한 증가를 보게 되었다.
셋째로는 기독교의 금지령이다. 히데요시가 기독교의 금지를 명하게 된 동기는 그가 규슈 지방을 정벌할 당시에 하카타(博多)에서
자행되던 기독교의 폐해를 목격하고 나서부터였다.
그 폐해는 신사(神社)와 사찰(寺刹)의 파괴, 승려박해, 서민에게 입신강요, 그리고 일본인을 노예로 인도에 수출하는 일이었다.
더욱이 일본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국정을 보는 사람들 중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일본의 법도를 지키기보다는 기독교의
법을 따르려 하는 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이 제도의 중요한 점은 외국으로부터 몰려오는 종교를 막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순수한 일본 정신의 유지와
창달을 도모하고 사회의 혼란을 막을 수가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외에도 화폐(貨幣)의 통일, 광산(鑛山)의 직영 등을 실시하여 통일정권의 기초를 확고히 했다. 그때부터 일본에는
오랜 기간 동안 계속 되었던 전운(戰雲)이 사라지고 평화를 구가(謳歌)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히데요시의 임종 후, 후계자로는 여덟 살 된 친아들이 있었으나 이미 히데요시의 참모들이 늙고 병들어 권부에 큰 영향을 끼칠 수가 없었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등장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는 끝나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한 인물의 탄생과 활약이 그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며, 오늘날과 같은 일본
사회의 발전을 이루게 한 국력의 원천에는 일찍이 16세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실시한 제도가 그 밑바탕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본과 한국이라는 사회를 비교할 때 지난 수 백년 동안 일본사회의 국력이 한국사회를 앞질러 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사회에 존재하는 가르침 때문이었다.
일본사회에는 한국사람들이 미개한 나라라고 말한 이유처럼 특별한 가르침이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 역사
속에는 4백 여 년 전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이라는 한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서 일본이 통일되고, 그가 통치하는
일본에는 하나의 새로운 제도가 생기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는 일본에도 신이 있으니까 외국의 신은 필요 없다고 해서 기독교나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을 침략했던 임진왜란 때에 군대가 철수하면서 한국의 많은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예컨대 도자기 굽는 기술자로서 도공(陶工)들을 일본으로 데려 가서 도자기를 굽게 했다. 한국에서 끌려간 도공들이
여러 대(代)를 걸치면서 일본의 전통과 접목시켜 유명한 도자기 가문을 이루어 왔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4백년 전부터 현실에 대한 중요성을 제도적으로 일깨워준 셈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현실에
대해 뛰어난 사람들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웠는가? '공자 왈 맹자 왈'을 배웠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 속에는
현실이 빠져 있었다. 유교라고 하는 가르침은 사람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문제를 만들어 놓고는 그
과정에 있는 현실적인 일을 빼어 버렸다고 말 할 수 있다.
(유교가 지배한 사회에는 탐관오리가 들끓었으며, 백성들이 핍박 받았고, 남녀 차별이 심했으며, 나라의 기초산업인
기술과 농업을 천시했으며, 뗏거리가 없어 처,자식이 굶고 있는데도'공자왈 맹자왈' 체면치레를 중시했다.
만약 지금 처자식을 굶기고 자신의 체면만을 차리는 가장이 있다며 현명한 사회에서는 가장역할도 제대로 못하다 무시당한다)
현실에 눈먼 자들이 하나의 이상적인 가르침을 도입해서 그것을 가르치는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사람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현실에 눈 먼 장님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낳은 그 증거들은 한국의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쉬운 예로서 선비들이 집안에 땟거리가 없는데도 책만 읽고 있었다는 일화들이 지금도 많이 전해지는데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지금까지 4백년 동안, 일본사람들은 한국사람들보다도
현실에 현명했다는 증거가 된다.
일본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생활에 현명했고, 한국사람들은 그 반대로 이상적인 일에 치우쳤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한국사회에는 많은 어두운 일들이 항상 있었고, 일본에서는 이런 일들이 없었다고 하겠다.
선진사회, 즉 국력이 신장된 사회를 보면 현실적인 가르침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현실적인 가르침이
세계 속에서 뛰어난 사회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자연의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