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우회로
박목월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이 깔렸다.
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확대되어 가는 아내의 눈에
달빛이 깔린 긴 우회로
그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메스를 가아제로 닦고
응결(凝結)하는 피.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혼수(昏睡) 속에서 피어 올리는
아내의 미소.(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긴 우회로를
흔들리는 아내의 모습
하얀 나선 통로(螺旋通路)를
내가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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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윤사월(閏四月)
박목월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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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이 후끈한 세상에
박목월
참으로 남을 돕는 일이
저를 위하는
그 너르고도 후끈한
'우리'들의 생활 속에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인간'이 빚어지고
남과 더불어 짜는
그 오묘한 생활의
그물코에
오늘의 보람찬 삶
세상에는
완전타인이란 있을 수 없다.
눈에 보이는,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든든한 밧줄로 서로 맺어져
우리는 서로 돕게 된다.
다만 에고의 색맹자만이
나와 남사이에 얽혀진
그 든든하고 따뜻하고
신비스러운 밧줄을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남을 돕는 일이
저를 위하는
이 후끈한 세상에
오늘의 찬란한 아침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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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런 詩
박목월
슬며시 다가와서
나의 어깨를 툭치며
아는 체 하는
그런 詩,
대수롭지 않게
스쳐가는 듯한 말씨로써
가슴을 쩡 울리게 하는
그런 詩,
읽고 나면
아, 그런가부다 하고
지내쳤다가
어느 순간에
번개처럼
번쩍 떠오르는
그런 詩,
투박하고
어수룩하고
은근하면서
슬기로운
그런 詩
슬며시
하늘 한자락이
바다에 적셔지 듯한,
푸나무와
푸나무 사이의
싱그러운
그것 같은
그런 詩,
밤 늦게 돌아오는 길에
문득 쳐다보는,
갈라진 구름 틈서리로
밤하늘의
눈동자 같은
그런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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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이별가
박목월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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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청노루
박목월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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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평온한 날의 기도
박목월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평온한 날은
평온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게 하십시오.
양지 바른 창가에 앉아
인간도 한 포기의
화초로 화하는
이 구김살 없이 행복한 시간.
주여, 이런 시간 속에서도
당신은 함께 계시고
그 자애로우심과 미소지으심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해주시는
그 은총을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평온한 날은 평온한 마음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강물같이 충만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게 하십시오.
순탄하게 시간을 노젓는
오늘의 평온 속에서
주여, 고르게 흐르는 물길을 따라
당신의 나라로 향하게 하십시오.
3월의 그 화창한 날씨 같은 마음속에도
맑고 푸른 신앙의 수심(水深)이 내리게 하시고
온 천지의 가지란 가지마다
온 들의 푸성귀마다
움이 트고 싹이 돋아나듯
믿음의 새 움이 돋아나게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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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하관(下棺)
박목월
관(棺)을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알아보고
형(兄)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첫댓글 박목월 선생님의 시를 읽다보면...
시란게 그다지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마음 속의 말을 꾸밈없이 툭툭 던지면 그게 시 같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의 시가 가슴을 울리는가 보다. 감사합니다... ^^*...
저도 박목월의 시를 무척 좋아합니다. 왜 좋아하느냐고요. 그냥 좋아서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