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근접 경고 시스템 개발...수많은 생명 구한 항공안전 선구자 [홀오브페임]
(돈 베이트먼 1932~2023) 항공기 추락·충돌 방지 새 역사 열어
박건형 테크부장
입력 2023.06.12. 07:40
업데이트 2023.06.12. 09:52
<홀 오브 페임(Hall of F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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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안전의 선구자 돈 베이트먼
/허니웰
항공 안전의 선구자 돈 베이트먼 /허니웰
사람이 개발한 수많은 교통수단 가운데 가장 위험한 것은 무엇일까요. 실제로 가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단연 자동차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비행기라고 답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높은 하늘을 날고, 추락하면 탑승객 대부분이 사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1903년 오빌과 윌버 라이트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에서 날아오른 뒤 비행기와 항공 산업은 혁신적인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불과 수십년 뒤에는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 위치에 올랐고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와 ‘하늘을 나는 호텔’로 불리는 A380 같은 초대형 비행기도 등장했습니다.
이 항공 산업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지난달 21일(현지 시각) 워싱턴주 벨뷰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난 돈 베이트먼(Charles Donald Bateman)은 ‘항공 안전의 선구자’로 불렸습니다. 미국 교통안전위원회의 수석 항공우주 엔지니어였던 찰리 페리이라는 뉴욕타임스에 “돈 베이트먼과 그의 팀이 개발한 안전 시스템 기술은 항공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을 구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른바 지상 근접 경고 시스템(Ground Proximity Warning System·GPWS)라고 불리는 이 시스템은 비행기의 추락과 충돌을 방지하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그와 항공 전자회사 허니웰(Honeywell)에서 함께 일했던 밥 챔피언은 “돈은 생명을 구하는 데 진정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그는 조용했지만, 우리가 일을 해야 할 때는 투견이 됐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사망하는 비행기 추락
항공 안전의 선구자 돈 베이트먼
/시애틀타임스
항공 안전의 선구자 돈 베이트먼 /시애틀타임스
베이트먼은 1932년 3월8일 캐나다 서스캐처원주 새스커툰에서 보석상인 조지 베이트먼 아래에서 태어났습니다. 9살에 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학교에서 교실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두 대의 군용기가 공중에서 충돌한 뒤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와 친구들은 곧바로 학교를 뛰쳐나가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2012년 시애틀타임즈 인터뷰에서 그는 “인간의 피를 본 적이 없었던 내 입장에서는 가장 끔찍한 장면이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그는 비행기 잔해에서 조각 하나를 가져왔고 “내 평생 첫 번째 사고 조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1956년 서스캐처원 대학에서 전기 및 전자공학 학위를 받은 그는 TV 수리점을 차렸고, 2년 뒤 보잉에 입사했습니다. 다시 2년 뒤에는 항공기 전자 회사인 유나이티드 컨트롤(United Control)로 옮겼습니다. 유나이티드 컨트롤의 항공 계기 사업은 이후 허니웰에 인수됐습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항공 산업에서 일하던 1960년대 후반은 매달 치명적인 항공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조종사들은 사고를 피하기 위해 고도와 지형 차트를 활용하는 고도계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고도계는 시각에 크게 의존하는 기계입니다. 시야가 좋지 않거나 구름이 많을 때는 위험을 사전에 인지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최초의 지상 근접 경고 시스템 개발
돈 베이트먼이 개발한 비행 안전 시스템
/하브카
돈 베이트먼이 개발한 비행 안전 시스템 /하브카
베이트먼은 레이더 고도계와 대기 속도 표시기를 포함한 항공기 내부의 데이터를 통합하고, 조종사에게 15초 경고를 제공하는 최초의 지상 근접 경고 시스템인 GPWS를 개발해 특허를 받았습니다. 현재와 같은 속도와 방향이라면 15초 뒤에 지표면에 추락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계기였습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가 산비탈이나 땅에 너무 가깝게 운항할 경우 ‘전방 지형(CAUTION TERRAIN, CAUTION TERRAIN)’ 또는 ‘(조종간을) 당겨(PULL UP, PULL UP)’라고 알려주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치를 탑재한 알래스카항공 1866편이 주노에 착륙하는 과정에서 알래스카 칠캣산맥의 안개 덮인 산에 충돌해 탑승자 111명이 전원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2주 뒤 베이트먼은 자신의 장치를 소형 비행기에 탑재한 뒤 1866편의 경로를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몇 초 뒤에 충돌한다는 경보가 울렸지만, 베이트먼은 조종사가 실제로 반응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당시 베이트먼은 랜딩 기어가 내려진 다음에는 GPWS가 비행기가 착륙하고 있다고 인식해 고도 저하를 무시한다는 점, 가파른 경사면과 같은 급격한 고도 변화에는 경고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 등의 문제를 깨달았습니다.
◇FAA 의무화, 전세계 5만5000대 이상에 탑재
1974년 베이트먼은 이 시스템을 개선한 EGPWS(Enhanced Ground Proximity Warning Systems)를 개발했습니다. GPS를 지형 분석에 통합하는 방식으로 항공기의 경로를 미리 내다보고, 항공기 앞에 등장할 수 있는 지형을 미리 감안해 위험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더 빨리 위험을 경고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조종사는 한 눈에 항공기 앞의 실제 화면과 비행기 아래의 위험한 지형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됐습니다.
베이트먼은 연방항공청(FAA)에 “모든 항공기 탑재를 의무화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FAA는 심사를 서두르지 않았고, 이 해 TWA 여객기가 버지니아의 숲에 추락해 92명이 사망한 뒤에야 항공모함 항공기를 시작으로 EGPWS의 항공기 탑재를 의무화했습니다. FAA는 이 사건으로 미 의회와 여론의 질타를 받았습니다.
1990년대 들어 EGPWS는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습니다. 더 많은 지형 데이터가 입력됐고 정확성이 향상됐습니다. 위험을 2분 전에 알려줄 정도로 예측 능력도 발전했습니다. 2000년 FAA는 6석 이상의 좌석이 있는 모든 등록 동력항공기에 이 시스템을 설치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베이트먼은 EGPWS를 계속 보완했습니다. 착륙시 활주로를 넘어갈 수 있거나, 이륙 또는 착륙 전에 잘못된 활주로를 선택할 경우에 대한 경고도 보완했고 제3세계의 지형까지 계속 시스템에 업데이트했습니다.
EGPWS의 발전은 실제로 비행기 추락 방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보잉이 전 세계 상업용 제트기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로는 2001년부터 2010년까지 17건의 추락 사건에서 1007명이 사망했는데 1991년부터 2000년까지는 27건에 2237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는 사고가 6건으로 줄었고 사망자는 229명이었습니다. 그가 개발한 시스템을 탑재한 항공기는 현재 전 세계 5만5000대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관련 특허만 80개 이상 보유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에게 훈장을 수여받는 돈 베이트먼
/AP 연합뉴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1년 “현재 전 세계 항공기에서 사용되는 핵심 비행 안전 센서를 개발하고 진흥한 공로로 베이트먼에게 국가 기술 및 혁신 메달을 수여했습니다. 2005년에는 국립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그가 보유한 비행 안전 시스템 관련 특허만 80개 이상이었습니다. 베이트먼은 “기술이 향상됐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최소 5년마다 새로운 모델을 내놓았다”고 했습니다.
기술이 발달해도 결국 다루는 것은 사람입니다. 베이트먼은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이를 항상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2015년 인도네시아에서 시범 비행을 하던 제트기에서 발생한 추락사고는 현지 지형을 알지 못하는 조종사가 38초 동안 시끄러운 경고가 울리자 장비를 끄면서 발생했습니다. 그의 딸 캐서린은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항공을 더 안전하게 만들고 싶었고, 항상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면서 “84세에 은퇴하면서도 아쉬워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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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현
2023.06.12 08:32:34
박건형 부장님. 글이 짧아지고 문단 하나하나마다 문맥이 생기니까 읽기 편해지고 정보가 잘 전달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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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땡이
2023.06.12 11:38:32
우리나라 F15K 대구 지역 착륙중 추락사고도 비슷한 유형이었습니다. 안개가 끼었고, 착륙에 집중하느라 조종사가 고도가 떨어지는걸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랜딩기어가 내려가 있어 지상접근경고도 작동하지 않았죠. 랜딩기어 유무와 상관없이 지상접근은 조종사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알고도 비행하는것과 모르고 비행하는 것은 다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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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1917
2023.06.12 12:48:04
베이트먼이 아직도 미완성을 아쉬워하다니... 베이트먼 덕분에 전세계 항공여행자들이 안심하고 여객기에 탑승할 수 있게 된것에 감사한다. 하지만 베이트먼의 시각에서 항공기 안전은 아직 미완성을 의미. 역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맹목적 믿음이 아닌 항상 회의하고 중단없이 의심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듯. 베이트먼은 합리적으로 일해온 것이고 이것이 상식이다. 사이비종교와 좌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식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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