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하지 말라(출 20:14)
지난 주 대기업의 회장 가정의 이혼 소송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막강한 특권(?)을 누리던 이었지만 법원은 가정의 의미와 가치를 강조하며 의미있는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현대 교회가 더 이상 깨닫고 가르치지 못하는 죄의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개인의 선택과 권리를 존중한다는 명목하에 십계명의 칠계명 ‘간음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남의 가정을 파괴하지 말라(독일어, 네덜란드 성경)’고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가정은 결혼을 통해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하나님이 제정한 최초의 인간 공동체입니다. 그럼에도 구약에서는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간음은 결혼한 가정의 남편과 그 가정을 파괴하는 범죄였습니다. 간음은 혼인으로 이루어진 가정의 관계를 파괴하는 죄로 고발되어지고 그 죄 값은 반드시 죽음으로 갚으라고 성경은 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연합이 되어 땅을 정복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지켜야 하는 생물학적 관계이자 동시에 남자와 여자의 연합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해할 수 있는 신학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직 결혼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가정 안에서 ‘성’을 인정하고, 가정을 넘어선 것을 죄악으로 삼고 있는 중요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곡된 성인지로 우리는 성을 감추려고 하지만 역사를 통해서, 심지어 성경의 역사 속에서도 타락하여 추악해진 성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장면을 목도하게 됩니다. 성군이라 불리우는 다윗이 탐욕적인 성을 못이기고 자신의 부하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죄악을 범했습니다(삼하 11장). 그리고 거짓말로 성공을 꿈꾸던 야곱은 오히려 거짓말의 피해자가 되어 아내를 네 명을 얻어 기형적인 가정을 형성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창 29장).
성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할 때 그 자리를 피합니다(창 39:12). 이것이 유일한 성의 유혹의 대처법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명목하에 개방된 성의식으로 자유로운 성문화를 즐기는 것이 옳은 것인양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더 이상 결혼한 가정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타락한 성을 고발하며 개선할 의지를 상실한 듯 합니다. 예수님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심판하기 위해 데려온 유대인들을 향하여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요 8:7)’라는 말씀에 의지해서 교회가 침묵하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예수님은 생물학적인 간음을 심판하던 구약의 율법을 마음의 음욕조차 경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가르치셨습니다. 죄의 결과뿐만 아니라 동기와 과정도 헤아려야 한다는 기독교 윤리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정의 형성과 보존을 위한 생물학적 차원에 머물고 있던 명령이 남자와 여자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를 위한 명령으로 완성하셨습니다.
급격한 사회의 변화로 인해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도 모호해지고, 남성과 여성의 관계 역시 변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떠나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창 2:24) 창조의 비밀은 자신이 좋은대로 해야하는 시대의 풍조에 쫓겨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남자와 여자가 생물학적인 매력에만 이끌리어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는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연합되어지고 지켜가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주신 순결하고 풍요로운 가정의 비밀을 나누는 바다교회 가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