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快哉亭에서 山林四友.. 09:51:25
상주 쾌재정 (尙州 快哉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81호, 상주시 이안면 나한양범길 294
쾌재정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문장가, 중종반정이 공신으로 인천군에 임명되었던 나재 채수(1449~1515)가 중종반정 이후로 관직에서 물러나 시골로 이사해 지은 정자이다. 이세택, 이천섭, 조석철, 류재규, 정종로, 김한동 등 당대 문인들이 이곳에서 도의를 토론하고 학문을 닦았다. 건물은 이안천과 주변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을 후손인 채헌(1715~1795)이 새로 지은 것이다. 건물은 앞면이 3칸, 옆면이 2칸이고, 내부에 마루를 깔고 나무로 짠 창과 문을 달았다. 활처럼 크게 휜 지붕처마를 하였으며 둥근 기둥 위에 처마 무게를 받치는 대들보와 처마도리의 짜임새는 이익공이다. 기둥 사이에는 활짝 핀 꽃을 판자에 새긴 화반, 대들보와 종보와 함께 도리가 5줄로 짜인 오량가 형식 등이 돋보인다. 한편 쾌재정은 최초의 한글소설인 「설공찬전」이 지어진 역사적 장소이면서 18세기 누각과 정자의 건축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회장님의 수고로 이안1리마을회관에 주차후 주민에게 쾌재정 길을 물으니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이안1리 마을회관 건립
우리 마을은 東으로 오봉산이 병풍처럼 감싸주고 西로는 숭덕산 자락과 이안천 맑은 물이 흘러 예로부터 경치 좋고 살기 좋은 곳으로 명성이 자자하였을 뿐 아니라 덕망 높은 선비와 효부 열녀가 많이 나와 자자손손 물려 줄 예절 충절의 마을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中村이라 불리었으나 1992년 마을 유지들의 노력 끝에 利安리로 옛 지명을 찾게 되었다. 여기 동민 모두가 상부상조하고 공생 공영하는 지혜를 모으고 희로애락을 함께할 보금자리인 마을회관이 경향 각처의 뜻있는 분들의 정성으로 건립되었기에 그 고귀한 마음을 영원히 기리고자 이 돌에 새긴다. 2006년 7월 8일
추진위원장 김경영 부위원장 채효근 권창운 위 원 채항태 차성호 김경식 채종태 채영태
회관건립 협찬자
일천만원(채원식, 채건식), 오백만원(김중겸), 이백만원(채광태, 채종태), 일백만원(채한기, 채성원, 김준영, 김경식, 장봉현, 김주영, 채국현), 현판기증(채의진) 외58명 협찬 총액 5,251만원
부지기증자 채희주 부녀회장 김기숙 지도자 채귀묵 이장 김준영
이안천 제방을 따라 오르다가 왼쪽편 건너 산에 정자가 보여 붉은 대문집의 담을 따라 찾아 간다.
정자에 오르는 가파르게 계단을 오른다.
정자 앞에 보호수가 있다.
보호수
지정번호 : 11-24-18-1 지정일자 : 1997. 12. 19 수종 : 은행나무 수령 : 450년(지정일 기준)
수 고 : 23m 나무둘레 : 480cm 소재지 : 이안면 이안리 464
쾌재정이 아니고 모정이었음. 09:33:09
茅亭(모정)의 현판은 선명한데, 문중의 관리자가 그 동안 노고가 많았는데, 좀 더 힘을 모았으면 합니다.
붉은 대문집의 마당에 재미나는 이정표가 있다.
그랜드캐년(미국) 9827km 파타고니아(아르헨티나) 18944km 부다페스트(헝가리) 8310km
파 리(프랑스) 9090km 베 네 치 아(이탈리아) 8858km 푸 켓(타일앤드) 4367km
한국 이안 터미널...... 아마도 주인 양반이 여행을 다녀 온 장소 같습니다......
이안천 제방을 따라 계속 올라 가니 막히면서 너른 공간이 있고 좌측으로 포장길이 있다.
철교 넘어 흑암리 대가산(325.3m)이 우뚝하다.
쾌재정이 보이면서 양쪽에 비석이 보인다. 09:42:36
(좌측 비석) 懶齋(난재) 先祖 藏修之所 十六世孫 國會議長 蔡汶植 省掃(성소)
檀紀 四三一八年 乙丑 五月 日 宗中一同 謹竪 蔡漢永 謹書
(우측비석) 三佑通信會長 蔡健植 崇祖篤志碑(독지비)
蔡健植은 仁川人으로 襄靖公(양정공)의 十六代孫이며 尙州 利安里에서 나서 자라 淸淳한 성품으로 企業에 대성하였다. 先祖를 崇慕하는 마음이 돈독하여 평생에 宗事를 도와 정성을 다했으며 仁川君神道碑의 건립과 족보 乙酉譜 간행에 공헌이 크고 宗報의 창간 등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이에 우리는 이 작은 돌에 그 공적의 대강을 새겨 그의 德을 기린다.
西紀 二千七年 五月 日 仁川蔡氏襄靖公派 宗中 세움
快 哉 亭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설공찬전」
설공찬전
채수(蔡壽, 1449년세종31~1515중종10)가 경상도 함창에 내려와 쾨재정을 짓고 은거하면서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내던 기간인 1506녀~1511년에 창작된 소설로서, 「중종실록」에는 「설공찬전」, 「패관잡기」에는 「설공찬환혼전」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국문본은 「설공찬이」로 표기되되 있다. 「중종실록」에 1511(중종6) 9월, 화복이 윤회한다는 내용이므로 문자로 번역 전파함은 민중을 현혹시키기 때문에 금지되어 소각되었다고 전한다. 채수가 지은 한문 원본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1996년 이복규 교수(서강대 국문과)가 「묵재일기」 제3책(성주이씨 묵재 이믄건의 1545~1546의 일기)의 이면에서 <설공찬이>라는 제목의 국문본 13쪽(총 3470여자, 200자 원고지 18장 분량)에 걸쳐 필사된 작품을 발견하면서 설공찬전의 국문본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채수는 교수형에 처해질 뻔하다 중종의 배려로 파직되었는데, 그 만큼 이 소설은 민중에게 끼치는 영향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유교적 관념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후세계의 등장은 민속신앙의 부분인 무속의 원귀와 공수현상* 등으로 표현되어 민중에게 전파될 수 있었던 원인으로 작용하였으며, 이를 통해 당대 중종집권 세력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설공찬전」은 다양한 독자층에게 수용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소설로는 유일하게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였으며, 「홍길동전」 보다 100년 정도 앞선 시기의 작품으로, 이후 국문본의 창작에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국역의 대상이 된 첫 사례로 평가될 수 있는 등 국문학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 무당을 매개로하여 신의 의사를 전하는 행위
설공찬전 줄거리
순창에서 살던 설충란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딸은 혼인하자마자 죽고, 아들 설공찬은 장가들기 전에 죽었다. 설공찬의 혼은 사촌인 설공침에게 들어가 그를 병들게 만들고 혼령이 수시로 왕래한다. 이 과정에서 주술사 김석산이 조치를 취하나, 공찬의 혼은 공침을 더 괴롭게 만들고 삼촌인 설충수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비니, 설공침의 모습을 회복시켜 준다. 그 뒤, 공찬이 사촌동생들을 불러 모아 저승 소식을 전해준다. 저승은 순창에서 40리 거리로, 단월국이며, 저승 임금은 비사문천왕이다. 명을 다한 이는 책을 살펴서 연좌로 보내지며, 이 때 공찬도 심판을 받게 되는데, 저승에 먼저 와 있던 증조부 설위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이승에서 악한 이는 고생하거나, 지옥으로 떨어지고, 이승에서 어진 재상이면 죽어서도 재상으로 다니고, 이승에서 여자의 몸이었어도 약간이라도 글을 잘하면 저승에서는 약간의 소임을 맡을 수 있으며, 황제가 천자라 하더라도 염라왕의 권한에 대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그 사례가 다양하다. ※ 이복규, 「설공찬 연구」, 2003 참조
쾌재정에서 엄대장님이 지름길을 앞서서 내려간다.
울타리 밖에 미선나무꽃이 피어 아름다웠다.
이안교회당 첨탑이 보이고 직선 도로의 앞에 삼거리가 있다.
가장리 노인회관에서 철길과 고속도로가 보이는 길로 올라 간다.
우체국 집배원이 바쁘게 지나가고 건널목(철길 주위 울타리를 함)을 건너서...
덩그랗게 높은 곳의 느티나무는 옮겨 심었는지 주민에게 물으니 원래 자리라고 함.
고속도로 공사로 주변이 깎여 나감.
버섯 베이지 생산 공장을 지나며(숭덕 농원)...
가운데 난재채수선생 신도비, 왼쪽에 快哉亭記(쾌재정기) 오른쪽에 안내문 10:27:46
襄靖籃簡(양정남간)
奮義靖國功臣 贈資憲大夫 左參贊 兼知 經筵春秋館事 藝文館提學行 嘉靖大夫 禮曺參判 兼 弘文館提學 仁川君 諡襄靖 懶薺蔡先生 神道碑銘 幷序 1995년 乙亥 9月 日 立
快哉亭記(쾌재정기)
有川東走如垂虹也(유천동주여수홍야) 냇물은 무지게를 드리우며 동쪽으로 흐르고
有山臨流如蠶頭也(유산임류여잠두야) 산은 냇물을 내려 보는 누에머리 같다.
有亭翼然名快哉也(유정익연명쾌재야) 정자는 날아갈 듯 이름은 쾌재이고
東望鶴駕西俗離也(동망학가서속리야) 동쪽은 학가산, 서쪽은 속리산이 보이며.
南瞻甲長北大乘(남야첨갑장북대승야) 남쪽은 갑장산, 북쪽은 대승사를 쳐다본다.
江山鬱紆羅脚底也(강산울우나각저야) 강산은 나각산 아래 굽어 막혔으며
主人者何蔡耆之也(주인자하채기지야) 주인 분은 늙으신 채씨 어른이다.
少年登科濫龍頭也(소년등과남용두야) 젊어서 급제하여 용머리 꼭대기에 오르고
位至封君榮過分也(위지봉군영과분야) 군의 자리에 오르는 분에 넘치는 꽃을 피웠다.
年老辭祿來故鄕也(년노사록래고향야) 늙어 벼슬을 두고 녹을 사양하고 고향에 와서
衣食纔足餘無望也(의식재족여무망야) 살림이 겨우 족하여 바램이 없고
琴碁詩酒一閒人也(금기시주일한인야) 거문고와 바둑과 시와 한잔 술로 족하며
是非譽毁棇不知也(시비예훼총부지야) 명예를 모두 버리고 시비하지 않으며
優栽游哉聊卒歲也(우재유재료졸세야) 넉넉하게 처음으로 즐기며 한해를 보낸다.
正德甲戌 淸虛子 記
(뒷면)
懶齎蔡先生 神道碑改碣 誠金으로 五拾萬원 以上 出捐한 子孫의 名單을 이 碑에 새겨 崇祖敬親의 龜鑑으로 삼고저한다.
宗派 (利安)洪根 (서울)健植 漢永 淳英 原植 漢東 周植 昌根 昌善 正錫 熙文 (대구)渭植 秉植 (영천)昌煥 (군포)永振 (청주)道鉉 (안양)漢國 (화령)淳甲 (이안)基榮 (소암)淳彰 (이안)東植 (서울)利植 拙薺公派 (현리)瑃植 (서울)汶植 弘植 鴻俊 基泰 鴻景 弘植 (동해)永柱 (대구)正植 熙復 元基 (가은)鴻九 (은척)日植 (구미)月植 (문경)鴻彬 饒植 (달지)鴻洛 鴻浩 (점촌)政鎭 吉鎭 大鎭 熙永 (현리)俊植 甲植 永植 有植 商植 永泰 一鎭 鴻培 (점촌)鴻洙 進士公派 (지포)熙默 (서울)璇埈 釬洙 洪助 洪壽 東勳 (대구)丸錫
榮錫 穆熙 確錫 洪九 (서울)道榮 (부산)從洙 (군포)哲熙 (점촌)潤植 (상주)洪疇 敎益 (지포)鉉錫 泰錫 正錫 洪範 奉錫 洪吉 文錫 (화동)化默 (서울)洪燮 (강원)熙度 特贊 兪萬植 雩潭派宗中 尙州市宗親會 聞慶市宗親會 尙州市花樹會
懶齎蔡先生神道碑改竪推進委員會 一九九六年 四月 日 建立
안 내 문
이 비석은 난재(懶齎) 채(蔡)선생의 신도비입니다. 이름은 수(壽)요 자는 기지(耆之) 관향은 仁川이며 시호는 양정(襄靖)이고 난재는 그의 호입니다. 선생은 1449년 기사(己巳) 8월 8일에 한양명예방에서 탄생하셨으며 천성이 호탕하시며 남에게 얽매이지 아니 하셨으며 재주가 뛰어나시어 館試, 會試, 殿試 등 세 과거에 모두 연달아 장원을 하셨는데 이와 같이 삼장 연속 장원하신 분은 화헌樗軒 李石亨(1415~1477)과 두 분 뿐이셨다고 합니다. 선생은 여러 관직을 거치시면서 비록 남들이 두려워서 말을 못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서슴치 않으시고 주장하셨으므로 때로는 문초도 받으시고 귀양살이도 하셨으나 성종조의 명신으로 벼슬이 참판에 이러렀습니다. 중종반정 후에는 선생의 뜻과는 다르지만 정국공훈록에 올라 仁川君에 봉해지시고 장래의 영달이 기대되었으나 벼슬을 버리시고 함창 땅 이안으로 내려오셔서 쾌재정을 지으시고 즐기시다가 1515년(중종10) 11월 8일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조정에서는 의정부 좌참찬을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으며 후일에 유림에 의하여 웅연서원과 임호서원에 봉향되셨습니다. 여기서 서북쪽 300m되는 정향 언덕에 선생 부부의 산소가 있으며 1517년에 그 가까운 곳에 신도비를 세웠으나 오랜 세월의 풍파로 글자를 읽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비신이 두 쪽으로 갈라져 더 이상 보존하기 어려워 이곳에 새 비석을 세웠으며 옛것은 그 자리에 두고 보존토록 하였습니다.
1996년 월 일 인천채씨양정공파 종중 아룀
※ 난재懶齎 ? →懶 게으를 나(라, 뢰). ※ 화헌樗軒 ? → 樗 가죽나무 저 軒 처마 헌
나재 채수 신도비 (懶齎 蔡壽 神道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6호, 상주시 공검면 율곡리 산71
나재 채수 신도비는 조선 전기에 활약한 채수(1449~1515)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하여 1517년에 무덤 앞에 세운 비석이다. 채수는 「설공찬전」을 지었으며,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 보다 100여년을 앞선 최초의 한글소설로 평가 받고 있다. 비는 받침돌, 몸체, 머릿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몸체와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깎아 만들었다. 받침돌은 강한 근육을 가지고 웅크린 채 머리를 들어 오른쪽 전면을 향한 해태 모양이며, 몸에는 구름을 배경으로 나타나는 용이 새겨져 있다. 몸체는 대리석을 사각 기둥으로 다듬어 앞면과 뒷면에 글자를 새겼으며, 제일 윗면에는 ‘인천채공신도비명병서’라고 새겼다. 머릿돌은 두 마리의 용과 구름무늬를 오목하고 볼록하게 새겼다.
난재 채수신도비 우측 산에 있는 산소
옛 비석명 : (左) 資憲大夫刑曹判書蔡公之墓 (右) 貞 夫 人 天 安 全 氏 之墓
새 비석명 : 刑曹判書拙薺蔡先生之墓 配 貞夫人 天安 全氏 1990年 庚午 菊月 晦日 建
※ 菊月(국월): 음력 9월 ※ 晦日(회일) : 그믐날
도로변에 세운 난재선생 신도비 뒤편에서 휴식, 간식...
우복 정경세 신도비(愚伏 鄭經世 神道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1호, 상주시 공검면 부곡리 27-3
우복 정경세 신도비는 조선 중기에 활약한 정경세(1563~1633)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1758년에 세운 비석이다. 정경세는 예학에 밝아 조선의 예학자로 불렸으며 서예 류성룡의 수제자로, 선생의 학문은 영남과 기호지방에서도 널이 인정받았다.
정경세의 증손자가 경상감사 이명준으로 부터 기증받은 돌에 글을 새기고 미처 세우지 못하였는데. 4대손이 비석 뒷면에 글을 지은 뒤 6대손이 건립하였다. 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비의 몸체, 용 모양을 새겨 장식한 비의 머릿돌로 구성되어 있다. 비석의 규모가 크고, 해서체의 글이 잘 남아있어 신도비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晉州 鄭氏)
우복 정경세 문중의 제실 관리가 어려워져서 우측에 시멘트 건물을 따로 세움...
우복 정경세선생 산소
비문 : 文莊公愚伏鄭先生之墓 貞敬夫人眞城李氏 祔左 11:35:00
날씨가 더워서 우복선생 산소의 그늘에서 휴식...
우복선생의 산소 앞에서 山林四友...
버섯베이지 공장에는 지게차가 제품을 옮기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12:15:19
산수유 꽃이 노란 언덕 위의 이안교회당이 牧歌的이다. 12:30:33
도로 아래 터널을 지나면 옛 숭덕초등학교(현. 상주서울농장 80m)
내고향 가장리 300m 이정표...
왼쪽 이층 건물은 숭덕학구 노인회관.. 비석은 石傖蔡忠鎭抗日義士追慕碑
石傖蔡忠鎭抗日義士追慕碑
석창 채충진 항일의사 독립운동 활동 약력
경북 상주군 이안면 중촌리 209번지에서 출생 서기 1889년 4월 28일(己丑) 서기 1939년 5월 17일(己卯) 향년 50세
義兵活動 事項
雲崗 李康秊 義兵將軍 揮下에 入陣 參謀로 拔擢되어 1907年 黃澗戰鬪에서 倭敵 百余名을 射殺하고 同年 8月 葛坪戰鬪에서
敵을 大破. 1908년 召募將 徐相業將軍 휘하에서 좌우선봉장으로 활약.
大邱友弦書樓(協成學校)에서 活動(救國同志會의 産室) 1993년 8월 15일 세움
회장님이 주차한 차를 귀가를 위해 나온다.... 12:38:57
점심은 점촌에서 꼬막정식(1인만원)으로...
첫댓글 지역의 역사 인물을 직접 답사를 통해 난재채수선생(설공찬전, 인천군)과 우복정경세선생(의병장, 영남 안찰사,이조판서)의 유적을 살피면서 경치 구경도 좋고 후손들의 신도비 건립이 으뜸이며, 산소 관리도 잘되어 있었다. 한문이 짧아서 비문을 독해하지 못함이 안타까웠다. 이안1리의 석창채충진 항일의사추모비를 역곡산소에 가면서 지나쳤는데, 오늘에서야 내용을 알게 되어 부끄러웠다. 건강도 지키면서 정서적으로 도움을 주는 탐방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좋은 장소를 안내해준 엄대장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닉네임은 松崗이 지어준 海山으로 하겠습니다. 松崗 고마와요.
春來不似春.옷깃을 스치는 댓바람에 寒氣를 느끼며 利安里 快哉亭에 오르니 16代 後孫 蔡汶植 國會議長의 追慕碑가 入口에서 맞는다.咸昌平野를 觀照하는 아담한 東山에 자리한 快哉亭은 凡常하지 않은 亭子였다.난재 蔡壽선생께서 世波에 시달림이 싫어 妻家인 이곳으로 落鄕하여 글을 벗삼아 悠悠自適하던 곳이다.重修記 등 耽讀거리가 많았지만 日程上 떠나려니 아쉬움이 크다.古傳을 찾아나서는 길에 마을 이름처럼 순후한 村老들은 行先地가 어디냐고 묻곤하는 人情美를 느끼면서 고개마루에 올라서니 恭儉面이다.栗谷池 옆 난재 선생의 神道碑를 뵙는다.원래의 것이 마모되어 新築한 것이다.300m 지점의 墓所도 참배하고,이젠 제법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법구지를 지나 釜谷里 後山의 愚伏 神道碑와 齋室과 墓所 參拜를 하고보니 管理狀態가 소홀함이 보여 씁쓸함을 느낀다.朝鮮時代 尙州出身 으뜸 선비로 推仰받는 큰 어른의 遺跡이 소홀하여 안타깝다.恭儉校에 20년전 赴任하여 틈 날때마다 한가로이 돌아보던 公園같던 遺跡을 後孫뿐만 아니라 地域社會 차원에서 큰 觀心을 가져주길 期待한다.난재.우복,그리고 석창 선생의 많은 기록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모아 誌面을 장식해준 海山님께 感謝와 敬意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