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외젠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 1909-1994) |
국가 |
프랑스 |
분야 |
희곡 |
해설자 |
박형섭(부산대학교 인문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
1.
이오네스코의 연극적 상상력은 반(反)연극이라는 타이틀로 잘 알려진 <대머리 여가수>, <수업>, <의자들>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성공’은 무대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한껏 고무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젊은 이방인의 희곡이 파리 소극장 무대에 올려졌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성공이었다. 평론계와 대중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오네스코는 새로운 극의 구상에 몰두했다. 그 결과 몇 편의 단막극들이 쓰였고, 또 다른 중요한 극작품 <의무의 희생자>가 탄생했다. 이 희곡은 1953년 2월 카르티에라탱 극장에서 자크 모클레르의 연출로 초연되었다. 무대 음악은 폴린 캉피슈, 무대장치는 르네 알리오가 맡았다. 1954년 바빌론 극장과 1959년 샹젤리제 극장에서의 재공연은 자크 노엘이 무대장치를 맡았다. 무대는 전반적으로 진홍빛을 띠고 있다. 이오네스코는 이 작품에 “거짓 드라마(pseudo-drame)”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 작품은 심리극의 특성을 띠고 있다. 플롯은 1952년 자신이 발표한 동명의 1인칭 소설 ≪의무의 희생자(Une victime du devoir)≫에서 따왔다. 희곡의 주인공인 슈베르에는 이오네스코 자신의 모습이 투사돼 있다.
2.
작품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슈베르와 마들렌이 사는 아파트에 수사관이 방문한다. 그는 이 아파트에 세 들어 살았던 말로라는 사람에 대해 조사한다. 처음에 수사관은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지만, 점차 거친 폭군으로 변한다. 주인을 피의자로 취급할 정도다. 그는 슈베르에게 진흙으로 상징된 과거 속으로 들어가도록 명령한다. 슈베르는, 마들렌과 수사관이 자신의 부모 역할을 하는 과거로 회귀한다. 연극 속의 드라마, 즉 극중극이 전개된다. 슈베르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자살하도록 자극한다. 가족은 그런 아버지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수사관의 명령은 계속 이어지고, 아버지는 감독관이 된다. 한편 수사관은 그의 희생자에게 공중으로 비상(飛翔)하도록 명한다. 슈베르는 산으로 올라간다. 계속 높이 올라가다가 결국 하늘을 난다. 공중 보행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마들렌과 수사관에게 다시 붙들려 아래로 추락한다. 빛이 사라진다.
무대에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한 부인이 앉아 있다. 슈베르는 점점 어린애처럼 행동한다. 수사관은 의사로 변한다. 환자의 악의가 그를 화나게 만든다. 그때 새로운 인물 니콜라가 등장한다. 그는 슈베르의 친구다. 마들렌이 커피 잔들을 반복해 나를 때, 수사관은 슈베르에게 빵을 먹인다. 그리고 “기억의 구멍을 메우라”고 명령한다. 형벌이 시작된다. 니콜라와 수사관이 연극과 정치에 대해 토론하는 동안, 슈베르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울먹이며 빵을 씹는다. 니콜라는 친구의 고통을 의식한다. 그는 쓸데없이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수사관을 위협한다. 마들렌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니콜라는 수사관을 단숨에 칼로 찔러 죽인다. 마들렌은 수사관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말로를 찾기로 결심한다. 니콜라는 슈베르에게 이유를 대고, 죽음의 장소를 차지한 채 그에게 빵을 먹도록 강요한다. 부인이 개입한다. 그녀는 두 사람이 말하는 데 끼어든다. “씹어요! 삼켜요! 씹어요! 삼켜요!”
3.
이 작품은 이오네스코의 초창기 극에 나타난 ‘언어의 비극’을 벗어나 작가 개인의 고정관념, 고뇌, 환상이 잘 드러나 있다. 연극적 방향 전환인 것이다. 작가의 내면 일기를 참조해 보면 이 드라마는 마치 고통의 상흔을 몰아내 정신적 치료를 시도하고 있는 듯하다. 즉 사이코드라마적 특징을 보인다. 또한 <의무의 희생자>는 권위와 이데올로기로 인간을 옭아매는 상황에 대한 저항으로 읽힌다. 처음에 소심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보이다가 차츰 잔인한 존재로 변하는 수사관은 분명 <수업>의 교수와 닮았다. 그들의 행동 방식은 동일하다. 강제로 지식을 주입하기, 즉 빵을 강제로 삼키도록 하는 것. 그렇지만 슈베르의 죽은 아버지와 수사관을 동일시한 것은 이오네스코적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심리극이라 할 만하다. 실제로 작가의 죄의식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 그의 어린 시절 경험처럼 슈베르-이오네스코는 용서하라고 말하는 엄마의 말을 경청한다. “용서해야 한다, 얘야, 힘들겠지만… 눈물의 시간이 오고, 후회의 시간이 오고, 고백성사의 시간이 올 것이다… 아버지를 용서하렴.”
이 작품의 인물들은 <수업>의 영혼 없는 꼭두각시들과는 다르다. 슈베르는 다가갈 수 없는 진실을 탐색하는 섬세하고 복잡한 성격의 존재다. 그가 찾는 말로라는 인물은 현실의 상징인가? 아니면 슈베르의 심오한 자아를 표상하는가? 가령 슈베르의 모순, 회한, 대답 없는 질문들과 같은 것들. 슈베르는 진흙 속으로 빠져들면서, 그러다가도 빛을 향해 올라가면서 어린 시절에 겪었던 상처들, 늙음과 죽음에 대한 불안, 존재들 상호 간의 몰이해, 사랑의 불가능성 등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의 과거는 산산이 부서져 혼란스러운 조각들로 되돌아올 뿐이다. 그것은 경험한 현실인가, 아니면 정신의 투사인가?
슈베르는 하늘로 비상하면서 이오네스코 신화 속에서 땅과 하늘의 연결, 삶과 죽음의 연결, 이 세상과 저세상의 연결을 가능케 하는 불가사의한 구름다리를 발견한다. 어느 순간 그는 존재의 경이로움과 빛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는 아내 마들렌에게 붙들려 현실로 돌아온다. 마들렌은 수사관과 함께 가장 잘 정의된 캐릭터다. 그녀는 뭔가 비틀려 있고 앙심을 품고 있다. 그녀는 기성 질서의 승리자이자 권위에 복종하는 보수주의자인 것이다. 그녀는 잠재의식의 미로 속에서 망설이는 슈베르를 행동하게 이끈다. 수사관을 죽이는 니콜라 역시 ‘의무의 희생자’ 부류에 속한다. 이를테면 인간의 행복을 개인적 이념에 종속시키는 광적인 사람들에 속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들이 옹호하는 이념의 순교자들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니콜라는 그로테스크한 광신을 보여 주는 역할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오네스코는 그를 자신의 대변자로 삼아 연극에 대한 고유한 생각을 관객에게 설명하도록 한다. <의무의 희생자> 역시 연극 형식을 갖춘 전통적 드라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이를 통해 아방가르드 연극을 옹호한다. 쓰인 모든 희곡은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탐정극에 불과하다고 슈베르는 주장한다. 연극은 사실주의 극이거나 탐정극일 뿐이다. 모든 연극은 그럴듯한 결말로 향하는 일종의 탐색이다. 거기에 하나의 수수께끼가 있고, 그것의 정답은 마지막 장면에서 밝혀진다. 니콜라는 비이성적 연극, 몽환극, 초현실주의 연극에 대한 생각을 펼친다. 그의 주장에서 이오네스코의 연극관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이론적 성찰은 실천적으로 증명된다. 무대가 연극 그 자체로 탈바꿈하는 것. 이를테면 마들렌과 수사관은 슈베르가 배우의 역할을 하는 심리극의 관객들이 된다. 수사관이 마들렌에게 말한다. “앉으세요. 자리를 잡으세요. 자, 이제 시작합니다. 매일 저녁 공연됩니다.” 심연으로 밀어 넣기, 극중극의 기법이 도입되는 것이다.
4.
이오네스코는 자신이 이 작품을 쓰면서 ‘꿈의 무의식적인 논리’에 빠졌음을, 언제나 분명치 않은 것을 보았음을 인정했다. 그래서 극이 통일성이나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특히 슈베르는 반수(半睡) 상태에서 연기하는 듯하다. 몽환 속에서처럼 인물들은, 작품의 정신과 일치하도록 끊임없이 변화와 변신의 흐름 속에서 움직인다. 현실의 관객은 꿈의 세계로 들어가 있는 듯하다. 극의 흐름을 따라가는 일이 쉽지 않다. 이 점은 이오네스코가 의도한 바다. 자신의 의식 상태, 기억, 불안과 비교할 만한 어떤 불편함을 야기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의무의 희생자>는 이오네스코의 가장 의미심장하고 풍부한 연극성을 지닌 작품들 중 하나로 보인다. 이 극은 단순한 극작술을 넘어 증식, 리듬의 가속화, 장르의 패러디, 변신, 연극적 비평 등의 다양한 주제들로 확대된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다룬, 깨어 있는 꿈의 무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