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졸업식 노래는 국민학교 졸업식 노래만 기억합니다. 중학교, 고등학교는 졸업식 노래라는 것이 있는지 또 졸업할 때 노래를 불렀는지 조차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국민학교 졸업식 노래는 가사와 곡뿐만 아니라, 그때 노래를 부르며 억지로 눈물을 감추던 우리 얼굴들까지도 아련히 기억나게 합니다.
졸업식 노래 관련 신문기사를 보고 오려 두었던데, 여기 옮깁니다.
2008. 6. 6. 동아일보 ‘책갈피 속의 오늘’
(1946년 초등 ‘졸업식 노래 보급’)
【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매년 2월말이면 전국의 초등학교에서 울려 퍼지는 졸업식 노래. 이별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코흘리게 철부지 시절. 그래도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여학생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이 노래가 불리기 시작한 지 62년이 됐다.
1946년 6월 5일 동요작가 윤석중 선생은 문교부 국장으로부터 졸업식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차응렬이 지은 ‘잊혀진 이름...동요작가 정순철’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1946년 당시 문교부 최현수 편수국장이 윤석중을 불러 급히 각급학교의 졸업식 노래를 빨리 작사하고 작곡까지 부탁하여 가사가 순식간에 만들어 졌으며, 작곡은 정순철이 탁월한 악상을 띄우면서 불멸의 명곡을 탄생시켰다. 일제강점기 졸업식 노래는 ‘반딧불’이라는 스코틀랜드의 민요곡에 가사만 바꿔 불렀는데 우리나라의 독특한 졸업식 노래가 나왔으니 그 기쁨은 헤아릴수 없었다.」
‘순식간에 만들어 졌다’의 순식간은 하루였다. 문교부는 6월 6일 모든 초등학교에 이 노래를 보급했다.
그런데 동요작가로 금관문화훈장까지 받은 윤석중 선생이 문교부의 부탁을 받자 말자 찾아간 작곡가 정순철 선생은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6.25 전쟁당시 납북됐기 때문이다.
동학 2세 교주 최시형 선생의 외손자였던 그는 교사가 되기전 동학 3세 교주 손병희 선생의 사위인 방정환 선생과 일본에서 함께 유학하며 가깝게 지냈다. 이후 방정환 선생과 함께 ‘색동회’를 만든 그는 1920년대부터 수많은 동요를 작곡했다. 방정환 선생의 시 ‘날 저무는 저 하늘에 별이 3형제’로 시작하는 ‘형제별’과 윤석중 선생이 작사한 ‘엄마 앞에서 짝짜꿍’으로 시작하는 ‘짝짜꿍’도 그가 곡을 지었다. 잊혀져 가던 그의 생은 다행히도 최근 그의 고향인 충북 옥천을 중심으로 재조명 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한편 문교부는 졸업식 노래를 발표한지 13일 뒤인 6월 19일 남녀 중고등학교 졸업가도 제정해 발표했다. 그러나 이병기 작사 이유선 작곡의 이 졸업가는 졸업식 노래처럼 생명력이 길지 못했다. ‘쇠처럼 구슬처럼 달구고 갈아... 감사의 이 노래를 부르는 도다’라는 가사가 가슴에 잘 와 당지 않은 탓도 있었던 것 같다. 】
우리는 1971년 2월 어느날 야성국민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지금부터 41년전입니다. 학생들과 부모를 수용할 만한 강당이나 체육관이 없는 학교이라 두 교실을 구분지은 간이 가림막을 뜯어내고, 5학년 1반, 5학년 2반 후배들이 우리 뒤에 도열하고, 일부 부모님들은 옆에 늘어서고, 임시로 만든 단상에는 내빈들이 앉고.....우리는 졸업을 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불렀던 졸업식 노래, 부르며 눈물을 억지로 감추었던, 지금 불러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졸업식 노래..... 이참에 내가 한번 불러 보겠습니다
『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들도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첫댓글 누가 눈물 흘련런지 알제
상원아 내가 얘기 했쟤? 지난 시절이 너에게 뭘 남겨 주더노?
하고 싶으면 너 혼자 수집하고등등 ...조용히 하면 안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