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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두길
「시편」 제1장의 연구
1. 복 있도다. 악한 자의 의론대로 행치도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고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도 아니하는 자여.
2. 저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과 낮으로 그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3. 이 사람은 비(比)컨대, 시냇물가에 심은 나무가 그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하는 일이 모두 형통하리로다.
4. 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오직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도다.
5. 그런 고로 악한 자들이 심판 할 때에 서지 못하고
죄인들이 의인의 회중에 서지 못하리니
6. 대개 여호와 의인의 길을 아시나 악한 자의 길은 망하리로다.
복 있도다.
“복 있도다” 혹은 “오 행복스럽도다” 하는 감탄적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 국문역(國文譯)에는 “복 있는 사람은·······”으로 되어 있으나 원의(原意)에 충실하려면 “복 있도다”하는 감탄형(感嘆形)으로 함이 마땅하다. 이 말의 원어인, ‘아쉬레’를 비평학자들은 행복(happy)이라고 역(譯)하여 (복 혹은 축복(Blessed)이 아니고) 외적조건에 대한 의미로 취하려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70인역에는 ‘마카리오스’(makarios) 즉 산상수훈에 “복 있도다”라고 번역(翻譯)되어 있는 말과 동일한 말로 되어 있고, 더구나 이 시 전편을 숙독(熟讀) 완미(玩味)하여 본다면, 결코 외적 행복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지 시편 5권의 제1장 수(首)에서 우리가 이 ‘아쉬레’라는 말을 발견함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는 시 전편의 내용이 무엇인 것과 그것이 성경중에서 점유하는 지위가 여하한 것임을 염두에 두고 음미하여 보면 알 수 있다.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라는 것만을 흔히 말하나, 그 무서움은 결코 무자비한 폭군의 무서움이 아니요 축복하기 위한 자부(慈父)의 무서움이다. 인생에 대하여 비관하는 자가 있거든, 저로 하여금 우선 성경을 읽게 하라. 저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의하여 된 창세기의 벽두(劈頭)에서, 하나님이 전혀 즐거움으로 이 우주 인생을 창조하였고 창조된 자를 향하여 최초에 준 것은 실로 축복의 말이었던 것과, 경건한 심령의 소유자들이 인생을 대표하여 조물주에게 응대(應對)하는 기도인 「시편」의 첫머리는 복 있는 사람의 기록으로 시작되는 것과, 또 전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인자의 형상으로 온 ‘말씀’이 육성으로 되어서 제일 차로 전 인류를 향하여 발한 말이 역시 “복스럽도다”임을 발견할 것이다. 이로써 보면 인생은 행복스럽기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 과연 그렇다. 복스럽게 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언제까지 헤매이고 신음(呻吟)하고 비참 중에 있는 것이 인류의 운명은 아니었다. 비록 저희에게서 일시 빼앗기는바 되었으나 마침내는 축복의 상태에 귀환(歸還)될 것이다. 고로 저희에게는 행복에 대한 간절(懇切)한 동경(憧憬)이 있다.
그러나 대문제가 있다. 무엇이 행복인가. 어떤 것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는가. 이를 몰라서는 아니 된다. 영국의 에이브리 경이 그의 유명한 처세훈의 첫말에 “생명같이 사람이 아까워하는 것은 없으면서도 또 생명에 대하여 같이 사람이 등한(等閑)히 여기는 것은 없다”라고 말한 것같이,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으면서도 기실 어떤 것이 참행복인가, 어떻게 하면 그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를 진실되게 연구하는 사람은 드물다. 또 설혹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 각이(各異)한 것같이 그 정도와 성질이 각이할 뿐 아니라 역사는 그 모든 사람들이 물결 위에 번듯거리는 백조의 그림자 같은 이 행복을 붙들려다가, 혹은 붙든 줄 알고 있었다가 마침내 환멸(幻滅)의 비애를 맛본 것밖에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시인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
복 있도다. 악한 자의 의론대로 행치도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아니하는 자여.
즉 일언(一言)으로 하면 죄를 극히 무서워하여 피하고, 미워한다 함이다. 그러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한다. 세상에서 보통 말하는 행복의 내용과는 전연 성질을 달리함을 알 수 있다. 재산이 많다는 것도 아니요 권력이 있다는 것도 아니요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도 아니요 또 가장 현자의 말인 듯한 단념의 철학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죄를 미워하여 피하라고 한다. 매우 기괴(奇怪)한 말이라 할 수 있고 그로써 행복이라기보다는 항상 불안 속에 있는 불행이 아닌가고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진리다. 힐티 박사가 그 『행복론』에서 말하는 것같이, 허다한 사람들이 행복스럽기는 원하나 불행의 원인이 어디 있는가에 대하여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 이상 어떻게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행복은 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 원인이라는 것이 곧 죄의 가시에 있다. 고로 그를 제거하려고 애통해하고 피하고 증오하는 자가 행복한 사람이라 함은 진실을 말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 의미를 좀더 명료하기 위하여 후지이 다께시(藤井武)의 이 시 해석 중의 일언을 인용하자.
인생의 복지의 조건은 경우와 사공(事功)과 이지와 감정 등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디 있나. 왈(曰) 사람의 영혼의 태도에 있다. 죄에 대하여 또는 하나님에 대하여 영혼이 여하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이 한 가지에 의하여 우리 전 생애의 복지와 아님이 결정된다. (『藤井武全集』제5권, p.73)
영혼의 태도이다. 행복의 조건은 생활환경에 있는 것도 아니요 생활기능에 있는 것도 아니요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정당한 상태에 있는가 아닌가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결국 죄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는 마지않는다. 허다한 사람들이 행복은 원하면서도 그를 위하여 하나님과 화목(和睦)해야 하는 줄은 모르며, 그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화목이 필요한 줄은 알면서도 그것이 결국 죄의 문제임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천려(淺慮)다. 인생은 그 근원에 있어서 죄의 종자를 품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나가서 그와 정당한 관계에 있으려 할 때, 그는 우선 우리에게 자기에게 충실한 인생이기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그의 율법을 보내여 우리 영혼의 오실(奧室)을 탐색하고 시험하고 두루 비춘다. 그는 촌호(寸毫)의 음예(陰翳)도 넘보지 않는다. 과연 “법이 아니면 죄를 알지 못하리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를 무서워하고 증오하는 자가 복스럽다”고 한 시인의 말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진리임을 알 수 있다.
본문 중에 ‘악한 자’란 말은 ‘불안’을 의미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즉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써 아무 규범도 표준도 없는 불안 동요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죄인’이란 명백한 도덕상 악을 고의로 범하는 자요, ‘오만(傲慢)한 자’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하여 조롱(嘲弄)하고 모멸적 태도를 가지는 사람이니 현금(現今)에서 말하면 무신론자 유물론자 같은 것들이다. 이 세 구절을 병렬시킨 것은 아마 점진적으로 의미를 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즉 악한 자, 죄인, 오만한자, 의론, 길, 자리, 행한다, 선다, 앉는다. 이렇듯이 불의한 자와는 관계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의한 자를 배척함을 자기를 절대 성선(聖善)한 자리에 두고 불행한 범죄자를 굽어보는 오만 잔혹한 도덕가 심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내부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시인이 있어 부르짖기를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고 내 요(褥)를 썩이는도다. (「시편」, 제6장 6절)
내 생명은 근심으로 말미암아 사라지고
내 나은 탄식으로 말미암아 또한 그러하외다.
내 힘은 나의 불의함으로 피곤하고
나의 뼈는 쇠잔하나이다. (「시편」, 제31장 10절)
이로써 보면 그는 인류 중에 가장 슬픈 사람이다. 자기를 위하여 비통해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불행한 사람인가. 과연 그렇다고 대답할만하다. 그러나 시인은 말을 이어 말한다.
저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과 낮으로 그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고 한다. 무서워 복종하는 것이 아니요 스스로 열복(悅服)하는 것이다. 금, 많은 정금보다도 더 귀히 여기고 꿀, 많은 꿀송이보다도 더 달게 여겨 그 율법을 사모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밤과 낮으로 그를 묵상한다. 즉 역사 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 자연 속에 나타나는 그이 영광, 자기의 생활 사실을 통하여 체험되는 그의 성의(聖意)에 대해 그칠 줄 모르는 묵상을 하고는 즐거워하고 감사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여호와의 율법은 한 지식이 아니요 한 교훈만이 아니다. 그것이 곧 생활의 전부다. 생활력이 거기서 나오고 생활 목적이 거기 있고 생활 방법이 거기 있다.
이제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그가 악인과 자리를 같이하지 않는 까닭이 어디 있으며, 여호와 앞에서 비통해하는 이유가 무엇임을. 즉 그는 여호와를 사랑하므로, 죄인을 미워하고 그의 율법을 사모하는 고로 통회한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의 율법의 목적이 인류를 축복하는 데 있음을 안다. 그리하여 그는 여호와의 앞에서 복된 사람이다. 눈물을 흘리는 행복자요 탄식을 하는 복된 사람이다. 과연 시인이 읊는 바대로다.
그 허물을 사(赦)함을 얻으며 그 죄를 덮어주심을 얻은 이는 복이 있도다.(「시편」, 제32장 1절)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 계명을 극진히 즐거워하는도다. (「시편」, 제 112장 1절)
여호와를 율법을 즐거워하고 사모하는 것은 인생의 근원에 있어서 즉 영혼에 있어서 축복받은 일이다. 인생에 내재하는 불행의 원인을 근저에서 제거하고 생명을 그 근본에서 개조함이다. 고로 그러한 사람은 비록 여하한 곤란을 당하더라도 여하한 역경에 처하더라도 과연 죽음의 그늘의 골짜기를 걷더라도 항상, 충실한 인생을 가지고 있다. 그침없이 풍만이 있고 생장이 있고 결실이 있다. 시인은 이를 아름다운 비유(譬喩)로써 노래한다.
이 사람은 비컨대, 시냇물가에 심은 나무가
그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하는 일이 모두 형통하리로다.
청렬(淸冽)한 계수성(溪水聲)이 새소리와 곡조를 맞추는 곳에, 뿌리는 깊이 바위를 뚫고 물 밑에 들어갔고, 풍우에 찢기어서 장사의 갑옷 같은 견피(堅皮)에 싸인 수산(樹傘)이, 퍼지는 수산의 녹음을 지지하고 의연(毅然)히 서는 모양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람을 더 잘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풍한이 지나가고 서습(暑濕)이 교래(交來)하여도 깊은 물 근원에 서는 저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모든 간난에도 불구하고 때가 오면 그는 누누(累累)한 열매가 가지에 가득하여 복욱(馥郁)한 향기가 언덕에 찬다.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에까지 간근(幹根)을 내려 박은 인생은 어떤 경우이든지 그의 때가 오면 그 목적의 완성을 본다.
“여호와는 자기를 찾는 자를 버리지 않는다.”(「시편」, 제9장 10절)
“하나님에 신뢰하여서 실패할 염려는 절대로 없다고 보장한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 “때를 따라”서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열매다. 그때가 언제인가고 그는 묻지 않는다. 그는 이를 확정한 사실로 믿음으로써다. 절대의 신뢰다. 신뢰하는 고로 그에게는 “지금도 그때”다. 그는 다윗같이 장차 올 날을 오늘에 이미 본다. 과연 신뢰 있는 생애는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다.” 거세(擧世)가 다 이욕(利慾)에 인생을 학갈(涸渴)시킬 때, 중인(衆人)이 다 초려(焦慮)에 생명을 위축(萎縮)시킬 때에, 신뢰하는 저만은 만끽(滿喫)의 생명수로써 혼신(渾身)에 퍼지어 생생의 기를 발휘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하는 일이 모두 형통하리로다.” 크리스천에게 대하여는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 저에게는 하나도 무용인 것이 없고 하나도 실패인 것이 없다. 개개의 사물이다 그것이 아니면 대신할 수 없는 의미와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장래 올 세상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영혼의 일로 볼 때는 크리스찬은 현세에 있어서 이미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아멘 아멘” 할 수가 있다.
이상 1, 2, 3절에서 시인은 행복스러운 인생을 묘사하였다. 이제 그는 붓끝을 돌리어 불행한 자의 생애를 서술한다.
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오직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도다.
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다. 의인의 일과는 전연 반대다. 그와 같이 복스럽지 못하다. 그와 같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지 않는다. 전자가 충실한 인생을 가지는 반대로 후자는 공허가 있을 뿐이다. 그의 영혼의 상태가 그렇고 그의 품성이 그렇고 그의 하는 일이 그렇다. 전자와 같은 풍만도 없고 생장도 없다. 그는 생명의 근원을 가지지 못하는 까닭이다. 과연 전자에 비할 때는 “그렇지 아니하니”다. 이 구는 제1절에 “복 있도다” 하는 구만큼 강미(强味)를 가지는 말이다. 고로 70인 역에는 부정의 말이 절수(節首)에 올라와서 “그렇지 아니하도다. 악한 자는”이라고 되어 있다.
공허한 것, 헛된 것을 표시하는 말로 ‘겨’를 쓰는 것은 구약에서 흔히 보는 말이다. 겉껍질만이요 아무 실속을 가지는 것이 없이 조그마한 미풍에도 정처 없이 걷잡을 수 없이 불려가는 겨는 과연 불의한 자를 표시하는 적절한 비유(譬喩)다. 더구나 그 불안정한 상태와 위선적인 성질로서 보아 그러하다. 불의한 자, 곧 하나님에게서 떨어져나간 자같이 불안정한 인생을 갖는 자는 없다. 환란이 떠미는 대로 의혹이 습래(襲來)하는 대로 항상 동요한다. 그에게는 이욕의 만족이든가 그렇지 아니하면 번민(煩憫)과 초조(焦燥)와 분원(憤怨)과 비관이 있을 뿐이다. 과연 뿌리 없는 인생이다. 그런 고로 그들의 표어는 어떤 철학의 옷을 입고 어떤 예술의 분장을 하고 어떤 사상의 거동(擧動) 표정(表情)을 배운다 하더라도 결국에 있어서 “자, 먹고 마시자”다. 어쩐 연고인가. 왈 부유(蜉遊) 같은 인생밖에 가지지 안이함으로써다. 그럼에도 그들은 위선을 꾸민다. 제법 정곡(正穀)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하는 일이 그런 것같이 그 운명도 공허할 것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 위선을 행하여 땅 위에 활보하는 것은 주인이 키를 들고 탈곡장에 서기 전 이제 잠간(暫間) 동안이다. 고로
그런 고로 악한 자들이 심판할 때에 서지 못하고
죄인들이 의인의 회중에 서지 못하리니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고 있어서다. 원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결과를 내어서다. “그런고로”다. 위선을 꾸미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무시하고, 여호와를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를 섬기는 자를 향하여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조롱(嘲弄)하고, 진리라든가 신앙이라든가 영혼이라든가 하는 것은 일종의 환각이나 관념의 유희에 불과한 것이라고 모멸하면서도, 유구(悠久)한 역사라든가 문화라든가 가치라든가 하는 말을 하여 실재를 가지는 인생인 것처럼 꾸미지만, 그 원인이 무에 귀(歸)하지 않아 그들의 생애가 정곡으로 행세하던 것이 일시 영화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대우주의 앞에서 폭로하는 때가 온다. 그는 심판의 날이다. 그날에 그는 서지 못한다. 그의 살아온 생애가 그를 위하여 설 수 있도록 증거 하여주지 못함으로써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모이는 이날의 회중에 설 수가 없다.
대개 여호와 의인의 길을 아시나
악한 자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유는 명백하다. 옳은 자의 길은 여호와가 알아주신다.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그 생활의 목적으로 삼는 자다. 고로 그의 길은 여호와가 친히 보호하고 감시하고 기억하고 지도한다. 그리하여 자기의 곳으로 이끌어 영원한 행복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악한 자의 길은 여호와에게서 떠난 길인 고로 망하는 것이 그 운명이다. 일시 동안 그는 영화의 대로같이 보이나 마침내 사막 중에 들어가는 길같이 어디라고 지정할 수 없는 가운데 미실(迷失)되고 만다.
여러 주석가들이 이 시 제1편을 시편 전체에 대한 서곡으로 넣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럴 듯한 해석인 듯하다. 여하(如何)한 서적에서든지 그 서문은 전책의 내용을 요약 축사(縮寫)하여 그 근본정신을 수언중(數言中)에 표시하는 것이다. 고로 그 서문을 읽어서 그 책 전체가 여하한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 제1편은 「시편」 전체에 붙이는 서문으로 과연 적당한 시라 할 수 있다. 「시편」은 인생의 노래다. 인생의 목적을, 인생의 행로를, 인생의 복잡한 사상을 혹은 찬송의 형식으로 혹은 기원의 형식으로, 혹은 수소(愁訴)의 형식으로 혹은 묵상 혹은 서사의 형식으로 읊은 것이다. 고로 그 내용은 극히 풍부하다. 연대로 보아도 천 년에 긍(亘)하였고 작자로 보아도 각종 인물이 다 들어있다. 그러나 그 복잡 다양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편이 묘사하는 인생을 두 유형 중의 어느 것에 돌릴 수 있다. 그 두 유형의 인생이 항상 대립되어 나타나 있다. 두 유형이란 무엇인가, 왈, 의인과 악인, 하나님의 사람과 세상 사람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그 생활 원리로 삼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사람의 이욕을 그 생활 원리로 삼는 사람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 중에서 자기의 구원을 발견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자기의 권력과 지혜로 성공을 획득하려는 자다. 전자는 실재에 입각한 신뢰의 인생이요 후자는 영상(影像)중에 표류하는 공허의 인생이다. 그런데 이 진리를 특수인의 특수 경험으로가 아니고 인생 일반의 사실로 서술하는 것이 곧 이 시의 제1편이다. 고로 시는 불과 6절의 짧은 것이다. 그것이 지시하는 진리는 실로 억만 대의 억만 인에 비추어서 들어맞는 항구 불변의 진리라 할 수 있다.
두 인생,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어디로 발길을 놓든지, 그 둘 중의 어느 하나인 인생을 만나본다. 저들은 같이 존재하고 같이 자란다. 의인과 악인에게 다 같이 태양은 비춰주고 비를 내리는 하나님의 양육 중에서 저들은 지금 곡식과 가라지와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자라난다. 저들의 구별을 아는 자는 참으로 없는 듯하다. 때로 이따금은 가라지가 도리어 더 많은 영화를 가지는 듯하다. 그러나 영안으로 볼 때 이자(二者)는 명료히 별종이다.
눈을 들면 우리 앞에 두 길이 있다. 행복의 길과 멸망의 길, 둘은 내 발뿌리에서 갈라져서 영원히 만날 수 없이 갈라진다. 영혼이여, 네 걷는 길은 복스러운 길인가. 네 뿌리는 생명의 시냇물에 미쳤는가. 네 눈은 여호와의 입을 우러러보는가. 경건한 영혼이여, 네게 복이 있을지어다.
성서조선 1931. 11월, 34호
저작집30; 20-15
전집20; 11-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