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의 말에 떠올린 끔찍한 과거"전쟁 시 반국가세력 활용" 운운, 국민과 비국민 가르는 위험한 적대적 정치
23.08.22 11:11l최종 업데이트 23.08.22 11:11l
이태준(posttruth)
'욕도 아깝다'
윤석열 대통령의 8.15 광복절 경축사를 두고 한 시민단체에서 내놓은 논평 제목이다. 식민과 분단의 상처를 극복하기보다 '공산세력'을 언급하며 이념 대결에 앞장서고, 과거사 문제를 접어둔 채 일본을 "보편적 가치"와 "공동의 이익"을 공유하는 '파트너'라 치켜세운 대통령에게 적절한 5자 논평이었다.
더하여 이날 대통령은 "민주, 인권, 진보"를 '위장'한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며, 이를 "패륜적 공작"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역대 정부와 마찬가지로 국민 화합과 통합을 앞세워야 할 대통령의 입에서 나올 법한 발언은 아니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또다시 나온 "반국가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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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 및 제35회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윤석열 대통령 2023.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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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북한은 개전 초부터 위장평화 공세와 가짜뉴스 유포, 반국가세력들을 활용한 선전 선동으로 극심한 사회 혼란과 분열을 야기할 것입니다.
-8월 21일 오전 을지연습 실시에 따른 을지 국무회의와 정례 국무회의 주재 윤석열 대통령 발언
한·미·일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윤 대통령은 21일 오전 이날부터 나흘간 진행되는 을지연습을 두고 "북핵 위협, 사이버 공격"뿐만 아니라 "반국가세력의 준동"에 대응하는 "실전 같은 훈련이 진행"될 것이라 밝혔다. 더하여 북한이 개전 시 "반국가세력 활용 선전·선동할 것"이라며 "본격적인 싸움을 해보기 전에 패배하는 상황"을 우려하며 "(반국가세력의) 선전·선동을 철저히 분쇄하고 국론을 결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올해 들어 윤 대통령은 공식 자리에서 유독 '반국가세력'을 자주 언급하였다. 윤 대통령이 말하는 '반국가세력'의 범위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통령의 기준에서 자신이 지닌 역사관과 국가관에서 이탈된 시민사회단체 또는 정치세력을 겨냥하는 듯하다.
문제는 국가 권력을 쥔 대통령이 정부 운영에 있어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는 세력을 편견에 사로잡혀 낙인찍고 적대시 한다는 점이다. 특히 대통령 입에서 나온 '반국가세력'이라는 표현은 한반도의 비극과 맞물리면서 사회적 긴장을 부추기고 있다.
대통령이 망각한 비극의 역사
70년 전 한반도에서 '반국가세력'은 '빨갱이'라고 불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국가권력은 '빨갱이'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다. 빨갱이로 지목되는 순간 그 사람은 독립운동을 했어도 암살의 대상(김구)이 되었다. 빨갱이를 지목할 권력을 쥔 이는 과거 일제의 밀정이었어도 해방 정국에서 애국자(이종형)가 될 수 있었다. 일제 잔재 청산의 목적으로 설립되었던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하루아침에 역(逆) 청산 당했던 이유도 반민특위 내 '공산당의 주구'가 있고 이들이 '나라의 혼란'을 일으킨다는 이유였다.
빨갱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파리목숨처럼 토벌한 것도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빨갱이가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데 있다. 1949년 4월에 창설된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은 기구 이름에도 포함된 '보도(保導)'라는 뜻처럼 좌익 전력을 가진 사람들의 사상을 개조하여 국민으로 포섭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30만 명의 연맹원을 보유한 보도연맹은 '대한민국 정부 절대 지지', '북한 괴뢰 정부 절대 반대 타도', '공산주의 사상 배격, 분쇄'를 강령으로 두고 있었다. 이들은 과거 좌익 경력이 있거나 좌익 세력과 관계를 맺은 인물이었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 전향하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군·경을 동원하여 보도연맹원에 대한 대대적인 예비 검속을 지시했다.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적성 분자'라는 이유였다. 연맹원들은 전쟁 전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공동 작업 및 사상 교육을 위해 집합하였는데, 전쟁 발발 후 울린 사이렌 소리에 집합한 연맹원들은 집단 학살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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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벌어진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 및 보도연맹원 집단 학살 장면.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 총책임자인 에버트 소령이 촬영했다. 이 사진은 50년간 비밀문서로 분류돼 묶여 있다가 지난 1999년 말 해제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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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지 강제 노역의 현장이었던 경북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서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3000명이 학살당했다. 군대와 경찰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뤄진 보도연맹 학살에 희생된 이는 10만 명으로 추정되며, 전국 곳곳이 학살의 현장이자 뼈 무덤이 되었다.
그들은 빨갱이라서 학살당한 것이 아니었다. '적'과 '아'로 갈라치는 권력에 의해, 권력이 그들을 국민으로 포섭하기보다 '국가 반란을 주도하는 존재'로 지목했기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국가권력이 생산한 적대의 정치는 전선과 권력이 뒤바뀜에 따라 '보복 학살'이라는 비극으로 반복되었다.
'빨갱이', 이 단어에는 죽지 않아야 했던 사람들의 죽음과 그 죽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 채 숨죽여 살아온 사람들의 세월이 녹아 있다. 나의 할머님 또한 자식들한테조차 알려주지 않았던 비밀을 서른 넘은 손주인 내게 털어놓았다. '밤이면 인공, 낮이면 국군'인 세상에서 시아버지가 산사람에게 신발 몇 켤레 주었는데, 그 일로 목숨을 잃었다고. 신발 몇 켤레에 얼마나 진한 사상이 물들었기에 사람마저 죽여야 했을까. 전남 영광 어느 산골짜기에서 총에 맞은 시아버지 시신을 수습했던 며느리는 어떻게 그 긴 세월을 홀로 이 비밀을 간직하며 살아왔을까.
예고된 사이렌과 부활하는 적대의 정치
오는 23일 오후 2시 서울은 을지연습과 연계해 민방위 훈련이 진행되고 전역에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린다고 한다. 윤석열 정부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전쟁 대비 훈련에 국민이 적극적으로 동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전쟁을 멈추기로 합의한 정전협정 70년이 되는 올해, 전쟁 대비를 위해 국가의 통제 아래 국민 생활이 멈춰진다.
매일 신냉전으로 격화되는 세계와 고조되는 군사적 긴장에 국민의 불안은 깊어만 가는데, 오히려 윤석열 정부는 한·미·일 군사협력을 강화하며 신냉전의 불쏘시개를 자처하고 있다. 대내외적 긴장을 활용하여 독단적인 정부 운영에 대한 비판을 '반국가세력'의 '준동' 정도로 깔아뭉개려고만 한다.
'반국가세력'은 따로 있지 않다. 분열과 적대의 정치가 만들어 낸 고약한 환상일 뿐이다. 마르티 니묄러의 시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는 정확한 해답을 일러준다. '반국가세력'을 생산하는 적대 정치 아래 우리 모두 자유롭지 못하다. 국민과 비국민을 재단하며 궁극적으로 권력을 강화하는 국가에 우리 모두 침묵하지 말자.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