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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 목 한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시월이ㅓ
담배는 박래품(舶來品)이었다. 곧 외국에서 수입되었다는 말이다. 조일전쟁(임진왜란) 시기, 일본 군인들이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하나둘씩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일전쟁 이후 조선과 일본은 활발한 교류를 했다. 담배는 그런 관계 속에서 일본으로부터 수입되었다. 적어도 4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본 사람들은 담배를 ‘담박괴’(淡泊塊)라 불렀다. 담배의 원산지는 아메리카이다. 인디언들이 부르는 담배를 포르투갈 사람들이 ‘타바코’라고 적었다. ‘타바코’가 일본으로 수입되자 음이 비슷한 ‘담박괴’로 적은 것이다. 일본은 오랫동안 유럽 국가인 네덜란드와 무역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는데 그 무역품으로 묻어온 것이다. 또 일본에서 남양의 여러 나라, 곧 지금의 자바·필리핀 등지에서 생산되는 담배를 수입했다고도 한다. -처음엔 남녀노소 할것없이 피워- 우리나라의 담배 수입은 두 가지 설로 나뉘어진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분명하게 조일전쟁 시기에 전래되었다고 밝혀놓았다. 하지만 ‘인조실록’에는 1616년 무렵 바다를 건너 들여와 피우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고, 1621년 이후에 널리 퍼져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씨를 뿌리고 수확해 사람들이 서로 팔고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두 가지 기록이 모두 맞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가요 문장가인 장유는 담배를 매우 즐긴 인물이었다. 그는 1635년 담배에 대해 “맛이 쓰고 독성분이 조금 있어 사람들이 먹지는 않는다. 입으로 빨아 연기를 뿜어내는데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오래 피운 사람은 인이 박혀 어지럽지 않다. 그런데도 지금 세상에서 거의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다”(계곡만필)라고 썼다. 이 글은 1635년에 쓰여졌다. 우리나라에서는 담배를 처음에는 일본 음과 비슷한 담바귀 또는 담파고(淡婆枯)라고 불렀다가 차츰 담배로 굳어졌다. 한자깨나 아는 유식한 사람들은 남쪽 또는 일본에서 들어온 풀이란 뜻으로 남초(南草), 왜초(倭草), 남령초(南靈草) 그리고 연기를 피운다 하여 연초(煙草)라 불렀다. 중국 의학서인 ‘본초강목’에는 담배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이 책에는 중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물명을 적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니 중국에는 담배가 없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은 중세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런 탓으로 광해군이 청나라에 예물로 담배를 보냈으나 거절을 당한 적도 있었다. 아무튼 경상도 지방에서 널리 불린 ‘담바귀 타령’에는 “귀야 귀야 담바귀야, 동래나 울산의 담바귀야, 은을 주려 나왔느냐, 금이나 주려 나왔느냐, 은도 없고 금도 없고 담바귀씨를 가지고 왔네”라는 가사가 나온다. 일본군을 담배 귀신으로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가사는 두 가지를 시사하고 있다. 하나는 일본군대가 오래 주둔한 동래와 울산에서 담배가 생산되었다는 것과 담배 씨를 심어 생산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아무튼 담배는 전래된 지 몇 십년이 지나지 않아 급속도로 번져 나갔다. 목화씨가 수입된 지 100여년이 지나 널리 재배가 이루어진 것과 대비될 것이다. 다시 장유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 담배를 즐기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면 굶주림을 배부르게 하고 배부름을 주리게도 하며 추위를 따뜻하게 하고 더위를 시원하게 한다고 말한다. 지금 남초를 피운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도 이와 같이 펴져 나갔으니 100년 뒤에는 반드시 차와 이익을 다툴 것이다”라고 했다. -타바코→담박괴→담바귀→담배- 사실 이 예견은 맞아떨어졌다. 오랫동안 선비와 승려들이 즐기는 차를 곧바로 능가할 정도로 보급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서민들은 차를 마시는 대신 담배를 피우는 풍습으로 굳어졌다. 네덜란드 사람 하멜은 “지금 조선 사람들 사이에 담배가 매우 유행해서 어린아이들도 네댓 살부터 피우기 시작한다. 남자나 여자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피운다. 처음 담배가 들어왔을 때 많은 은을 주고 남만국(지금의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나라)에서 들여왔는데 그 나라들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나라로 우러러 본다”(하멜표류기)고 했다. 조금 과장인 듯하다. 담배 피우기는 벼슬아치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정의 대신들도 임금 앞에서 담배를 피웠던 모양이다. 광해군은 늘 병고에 시달린 허약체질이었다. 대신들이 광해군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연기를 뿜어내자 광해군이 이를 몹시 싫어했다 한다. 그러자 대신들은 하나둘씩 임금 앞에서 담배 피우기를 사양했다 한다. 또 광해군이 담배 냄새를 싫어해 신하들에게 피우지 못하게 했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신하들이 조정의 후미진 곳에서 몰래 피웠다고도 한다. 이런 조정풍습이 차츰 여염으로 퍼져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예절로 굳어졌다. 그럴 듯한 말일 것이다. 종들은 상전 앞에서,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낮은 벼슬아치는 높은 벼슬아치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했다. 어른일 경우, 10년의 나이 차이를 기준으로 했다. 담배를 많이 피우다 보니 물량의 확보를 위해 여러 곳에서 담배를 재배하여 보리, 콩 등 식량생산에 차질을 빚을 정도였다. 위에서 말한 동래 울산을 비롯해 경상도 지방에서 담배 생산이 많았고 차츰 전라도의 진안, 장수 등 산악지대로 번져 나갔다. 특히 마이산 주변은 토양과 기후조건이 담배 재배에 알맞아 담배생산을 생업으로 삼았다. 처음 남쪽에서 북쪽으로, 또 들판의 밭보다 산악지대의 화전지대를 중심으로 담배 재배가 이루어졌다. 이어 들판지대로 번지자 조정에서는 “비옥한 땅에는 담배를 심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중국과는 달리 담배금지령을 내린 적은 없었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서울의 시전에는 쌀, 면포, 어물 다음으로 담배 가게의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지경이었다. -장죽은 양반, 곰방대는 상놈이 사용- 담배 피우는 방법도 개발되었다. 처음에는 담배 잎을 그대로 말아 피웠다. 담배 잎이 입술에 직접 닿으니 쓰고 매웠다. 그리해 담배 잎을 잘게 썰어 절초(折草)로 만들고 담뱃대로 피웠다. 담뱃대의 끝에 붙인 담배통에 담배를 재여 넣고 불을 붙여 물뿌리로 빨았다. 개항 이후에야 외국 사람들이 궐련 피우는 것을 보고 차츰 궐련이 보급되었다. 담뱃대는 대나무를 이용하기도 하고 요란한 장식을 달기도 하고 길게 만들기도 했는데 이를 장죽(長竹)이라 불렀다. 장죽은 담배통과 설대와 물뿌리로 만들어졌는데 그야말로 우리나라만 사용하는 발명품이었다. 또 담뱃대의 길이는 신분을 드러내기도 했다. 긴 장죽은 양반들이, 짧은 곰방대는 상놈 또는 종들이 사용했다. -담배 전매제도-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기, 국가의 재정수입을 위해 몇 가지 물품을 독점적으로 생산하여 판매했다. 조선시대 홍삼은 중국에 수출하는 주요 무역품이었다. 그리하여 그 생산 공급을 공공기관 또는 궁중에서 독점했다. 그러다가 대한제국 시기 ‘홍삼전매법’을 제정하여 법률로 홍삼의 국가 전매를 확립했다. 이와 달리 담배에 대해서는 생산자와 판매하는 상인에게 적은 세금을 물리는 정도였다. 조선총독부 당국은 재정수입을 늘리려 홍삼·담배·소금에 대해 전면적 전매제를 실시했다. 이에 따라 ‘연초전매령’ 따위 법령을 제정했으며 1942년 전시체제 아래에서 이의 세수를 확실하게 확보하려 이른바 ‘조선전매령’을 공포했다. 그리하여 담배·홍삼·소금의 생산 공급과 판매의 값을 마음대로 올렸다. 이를 전담한 부서는 조선총독부 산하의 전매국이었다. 해방 뒤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표방하면서도 일제의 전매제를 그대로 살렸다. 식민지 잔재의 하나였다. 이에 따라 새로운 법률을 제정, 공포했다. 이들 가운데 소금은 1961년 전매제를 폐지했다. 홍삼과 담배는 오늘날까지 전매제를 풀지 않고 있다. 1948년에 발족한 전매청은 막대한 수입으로 인해 기구가 점점 확대되었다. 그 보기를 들어보자. 전매청의 세입 규모는 1970년에서 1980년 사이에 14배가 늘어났다. 또 잎담배와 인삼류의 수출은 같은 시기에 6배가 늘어났다. 전매청에서는 수매 값을 편리할 대로 올렸다. 특히 국가재정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담뱃값을 마음대로 올렸다. 소비자들은 그저 울분을 삭이며 참는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울며 겨자 먹기라 한다. 국민의 건강을 담보로 국가재정 수입을 늘렸던 것이다. 더욱이 전매청에서는 담배를 피우면 건강에 해롭다거나 폐암에 걸릴 수 있다는 정보를 국민들에게 감추고 쉬쉬했다. 물론 담뱃갑에 이런 문구를 쓰지도 않았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에서 빠지지 않는 흡연국이 된 1차적 책임을 여기에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전매청은 1989년 담배인삼공사로 개편되어 독립기구가 됐다. 그리고 경고라는 표지 아래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 특히 임산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습니다’는 문구를 넣었다. 세계적 추세와 끈질긴 요구를 어쩔 수 없이 수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이화/ 역사학자〉 |
첫댓글 그렇군요!
흥미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