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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북주의 관계
북주는 우문태의 서위를 이어받은 나라이다. 즉, 우문씨의 나라이다.
북주는 개국한 해가 557년이고 망한 해가 581년이니 24년간 존속한 나라이다.
그러나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갈라진 것이 534년이므로 실질적으로 47년간 존속한 나라이다.
고구려와 북주의 관계 기록은 주서 이역열전 고구려전에 있는 단 세 줄이 전부이다.
그만큼 두 나라는 교류관계가 없었다.
고구려는 동족의 나라인 북제와 관계를 돈독히 하였기 때문에 북제와 적국인 북주와는 교류를 끊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세 줄의 기록 중, 한 줄은 서위 시절 이야기이고 나머지는 북주시절 이야기이다.
서위 시절 때는 단 한번 고구려가 서위와 교역을 한 이야기이고 북주시절 이야기는 고구려는 북제가 망하고 나자 그때야
비로소 북주와 국교관계를 맺는데 그때의 기록이다.
주서 이역열전 고구려전에 있는 기록을 보자.
『연(璉)의 5세손 성(成: 고구려 제24대 양원왕)이 대통(大統) 12년(546년)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성(成: 고구려 제24대 양원왕)이 죽고 아들 탕(湯: 고구려 제 25대 평원왕)이 즉위하였다.
건덕(建德) 6년(577년)에 탕(고구려 제 25대 평원왕)이 또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바쳤다.
고조(高祖)가 탕(湯: 고구려 제 25대 평원왕)을 상개부의동대장군(上開府儀同大將軍)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요동왕(遼東王)으로 배수(拜授)하였다.
(璉五世孫成,大統十二年,遣使獻其方物。成死,子湯立。建德六年,湯又遣使來貢。
高祖拜湯為上開府儀同大將軍、遼東郡開國公、遼東王)』
이것이 전부이다.
고구려와 북주 관계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북사 열전 고구려전에도 있으나 주서 이역열전 고구려전을 부분적으로,
또 약간 고쳐서 기록한 것이 전부이다.
북사 열전 고구려전은 「성(成)이 죽고 아들 탕(湯)이 즉위하였다.」 이 한 단락을 빼고 약간 고쳐 쓴 것이다.
< 북사 열전 고구려전 >
『대통(大統) 12년(546년)에 사신을 서위(西魏)로 보내와 조공(朝貢)하였다.(大統十二年, 遣使至西魏朝貢)
(북)주(周) 건덕(建德) 6년(577년)에 탕(湯)이 사신을 (북)주(周)에 보내오니, 무제(武帝)는 탕(湯)을 상개
부의동대장군(上開府義同大將軍) 요동군공(遼東郡公) 요동왕(遼東王)으로 삼았다.
(周 建德六年, 湯遣使至周, 武帝以湯爲上開府儀同大將軍·遼東郡公·遼東王)』
삼국사기는 대통 12년(546년) 기록은 빼버리고 그 이하의 기록을 베껴 쓰면서 한 자를 빼버렸다.
< 삼국사기 고구려 제25대 평원왕 본기 >
『(평원왕) 19년(577)에 왕은 사신을 주(周)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주나라 고조(高祖)가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대장군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배수하였다.
(十九年 王遣使入周朝貢 周高祖拜王爲開府儀同三司大將軍 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원본인 주서 이역열전 고구려전을 가지고 북사와 삼국사기를 비교해 보면
북사는 고구려 임금을 고구려 왕으로 배수하였다(拜湯為)를 삼았다(以湯爲)로 고치고
「건덕(建德) 6년(577년)에 탕(湯)이 또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바쳤다」는 것의 정체가
「탕(湯)이 사신을 주(周)에 보냈다」로 밝힌 점을 빼면 원본과 거의 같은 반면
(사신이 남의 나라에 가는데 약간의 선물은 가져가는 게 관례임)
삼국사기는 대통 12년(546년) 교역 기록을 빼버리고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를 낮추어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로 기록한 점이 눈에 띈다.
그러나, 고구려 임금을 고구려 왕으로 배수하였다(拜王爲)는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가 대통 12년(546년) 교역 기록을 빼버린 원인을 생각해보면, 546년은 고구려 제24대 양원왕 2년인데,
그해 겨울 11월에 동위(東魏)와 교류, 교역한 기록이 있다.
그래서 그 반대편이자 적국인 서위(西魏)와의 교류, 교역 기록은 빼버린 것으로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핵심적인 기록인 배수(拜授)를 삼국사기가 북사보다 더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를 낮추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기록한 점과
북사(北史)처럼 사신을 주나라에 파견하였다(遣使至周)하면 되는 것을 굳이 선물을 가져갔다고 해서,
사신을 파견하여 주나라에 들어가 조공했다(遣使入周朝貢)고 한 것은 사대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의심이 된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고구려와 북주는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위 때도 단 한차례 교류가 있었을 뿐이고
북주 시절에도 단 한번 교류하고 국교를 맺었으나 감히 봉한다는 소리는 못하고 이러이러한 칭호를 드린다
(배수:拜授)는 표현을 하고 있을 뿐임을 보면 짐작이 간다.
또, 이 소리를 한 건덕(建德) 6년(577년)은 북주가 북제를 멸하고 북중국을 통일한 때여서 이때부터 북주는
가장 강성한 때인데 북주는 고구려와 더 이상의 교류, 교역이나 국교를 맺지 못하고 있는 점을 보면 고구려와
북주는 친밀하고 원만한 관계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혹시 더 나아가 적대관 긴장관계를 유지하였는지도 모른다.
고구려는 동족의 나라인 북제를 멸하였으니 좋아했을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긴장관계가 북주를 이은 수나라에 계승되어 고구려와 수나라가 대격돌을 벌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북주의 황제 가문인 우문술, 우중문이 앞장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고구려와 전진(前秦)의 관계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와 전진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1)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 본기를 보면,
『40년(370)에 진(秦)나라의 왕맹(王猛)이 연나라를 정벌하여 깨뜨렸다.
연나라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도망쳐 왔는데, 왕은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보냈다.
(四十年 秦王猛伐燕破之 燕太傅慕容評來奔 王執送於秦)』라고 되어 있고,
2)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 본기를 보면,
『2년(372) 여름 6월에 진(秦)나라 왕 부견(苻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내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7년(377) 사신을 부(苻)씨의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라고 되어있다.
이중에서
① 삼국사기 고국원왕 40년(370년) 기사는 진서(晋書)와 자치통감에 있다.
진서 권113, 재기 제13, 부견 상(上), 태화 5년(370년) 조를 보면 『곽경이 패잔병을 끝까지 쫓아가니
모용평이 고구려로 달아났다.
(곽)경이 추격하여 요해에 이르자 (고)구려가 (모용)평을 포박하여 보냈다.
(郭慶窮追餘燼,慕容評奔於高句麗,慶追至遼海,句麗縛評送之)』이렇게 되어있고,
자치통감 권102, 진기24, 해서공 하(下), 태화 5년(370년) 11월 신사(辛巳)일 기사를 보면 『곽경이 나아가서 용성에
이르니 태부 (모용)평이 고구려로 달아나고 고구려는 (모용)평을 잡아서 (전)진(秦)으로 호송하였다.
(郭慶進至龍城,太傅評奔高句麗,高句麗執評,送於秦)』이렇게 되어있다.
삼국사기는 이중에서 문장으로 보아 자치통감을 인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② 소수림왕 2년(372) 기사는 진서(晋書)에도 없고 자치통감에도 없다.
이 기사는 우리측 사료인 구삼국사(舊三國史)나 삼국사기 곳곳에서 보이는 해동고기(海東古記) 등에 있는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③ 소수림왕 7년(377) 기사는 자치통감에 있는데 봄으로 되어 있다.
자치통감 권104, 진기26, 열종 효무황제(烈宗孝武皇帝) 태원 2년(377년) 기사를 보면,
『봄에 고구려, 신라, 서남이(西南夷)가 모두 사신을 파견하고 공물을 (전)진(秦)나라로 들여 왔다.
(春,高句麗、新羅、西南夷皆遣使入貢於秦)』라고 되어 있다.
반면에 진서(晋書)에는 소수림왕 7년(377) 기사가 없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고구려와 전진(前秦)은 우호적 관계를 가졌다.
그것은
첫째, 서로 가까이 있는 공동의 적인 전연(前燕)을 멸망시키려고 멀리 떨어진 두 나라가 서로 교류 협력하였기
때문이고 (원교근공-遠交近攻)
둘째, 전진(前秦)의 부견은 동진(東晋)을 멸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와는 평화적인 교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무슨 책봉이라는 건방진 태도나 기록도 없다.
조공이라는 표현은 영국 왕이 들어와 조공하였다는 식의 춘추필법이니 그것은 거짓말이고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평화스러운 교역이 있었다는 말이다.
고구려와 후연((後燕)의 관계
글의 순서
1. 고구려와 후연((後燕)의 관계
2. 고구려와 후연의 관계 기록(삼국사기, 자치통감, 진서)
1. 고구려와 후연((後燕)의 관계
고구려와 후연의 관계는 모용수 시기와 참합피 패배 이후의 관계로 나눌 수 있다.
1) 모용수 시기(후연 초기)
2) 참합피 배패 이후
3) 결론
1) 모용수 시기(후연 초기)
후연을 세운 모용수가 전진과 결별하고 업(鄴)을 공격하였지만 지리한 공방이 이어졌다.
오히려 업(鄴)을 지키던 부견의 서장자 부비가 동진의 사현(謝玄)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유뢰지 등이 무리 2만
명을 인솔하고 모용수와 싸워 모용수가 패배 업(鄴)의 포위를 풀고 퇴각한 것을 유뢰지가 추격하였다가 대패
하여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때가 385년 4월이다.
이즈음인
① 385년 윤 5월 모용수가 대방왕 모용좌에게 명령하여 용성(龍城: 요녕성 조양시)에서 진수하도록 하였다.
② 385년 6월에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였으며 모용좌가 사마 학경을 파견하여서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구원하도록 하였으나 고구려에게 패하였으며 고구려는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켰다.
2) 참합피 배패 이후
① 후연은 395년 11월 태자 모용보가 참합피에서 북위에게 대패를 당하고 396년 윤3월 모용수가 직접 나서
북위에게 결정타를 가하나 참합피에서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 모용수가 분통이 지나쳐 4월 병사한다.
이후 후연은 결정적으로 기운다.
② 397년 3월 모용보는 북위의 공격을 견디다 못해 후연의 서울, 중산을 떠나 4월 용성에 도착하나 그 도중
에도 후연은 서로를 앙숙으로 여기고 죽이는 내분을 일으킨다.
③ 398년 2월 모용보가 다시 북위를 치기 위하여 군사를 동원하자 단속골 등이 반란을 일으켜 모용보는 결국
계성(북경시)으로 가고 단속골은 모용농을 죽인다.
④ 3월 난한이 단속골을 죽이고 모용보를 불러 죽이고 스스로 창려왕에 오른다
모용보의 서장자(庶長子) 모용성이 난한에게 가서 난한 일당이 서로를 죽이는 내분을 이용, 7월에 집권한다.
⑤ 모용성은 아버지 모용보를 반면 교사로 삼아 위엄과 형벌을 엄하게 하고 신하들에게 작은 혐의만 있으면
우선 모두 죽였다.
388년 8월, 12월, 399년 1월, 4월 6월 등 모반죄에 연루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
⑥ 이즈음인 399년 2월에 모용성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습격한다.
⑦ 결국 401년 후연에서 신하들이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키고 모용성을 죽인다.
그 뒤를 모용수의 아들인 모용희가 잇게 된다.
※ 후연의 계통(모용수→모용보→모용성, 모용보의 아들→모용희, 모용수의 아들)
⑧ 이러한 혼란이 벌어지자 고구려는 401년과 403년 후연을 공격한다.
이렇게 되자 404년 후연왕 모용희가 직접 침공하나 실패한다.
405년에는 모용희가 거란을 치다가 실패하고 고구려에 침공하였다가 다시 패배하고 돌아간다.
⑨ 이후 407년 풍발 등이 모용희를 죽이고 고구려 사람 모용운(고운)을 군주로 세웠다.
그러자 광개토왕은 고운에게 종족의 정을 베풀고 고운은 답례를 한다.
3) 결론
간단히 고구려와 후연의 관계를 정리하면 후연의 초기인 모용수가 살아있을 때는 후연이 자기들의 본고장인 용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데 대하여 고구려는 이를 저지하는 관계였고 참합피 패배이후에는 후연이 용성(요녕성 조양시)을
중심으로 국가 생활을 영위하여 고구려와 서로 부딪힌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서로 가까이 있는 나라로써 서로 공격을 한 사이이다.(원교근공-遠交近攻)
무슨 책봉이니 조공이니 이런 기록조차 없는 관계이다.
2. 고구려와 후연의 관계 기록(삼국사기, 자치통감, 진서)
< 삼국사기 고구려 제18대 고국양왕 본기 >
2 년 (AD 385) : 군사 4만 명을 내어 요동을 습격하였다
[번역문]
2년(385) 여름 6월에 왕은 군사 4만 명을 내어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나라(후연) 왕 [모용]수(垂)가 대방왕 [모용]좌(佐)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에 진주하게 하였다.
[모용]좌는 우리 군대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우리 군대가 그들을 쳐서 이기고,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겨울 11월에 연나라(후연)의 모용농(慕容農)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요동·현도 2군을 다시 차지
하였다.
처음에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유랑민들이 많이 투항하여 왔으므로, 모용농이 범양(范陽) 사람 방연(龐淵)
을 요동태수로 삼아 이들을 불러 위무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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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기사와 관련하여
1)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있다. 진기28, 효무제 태원 10년(385년)
윤 5월 경술일(4일) (모용수가) 대방왕 모용좌에게 명령하여 용성(龍城: 요녕성 조양시)에서 진수하도록 하였다.
6월에 고구려가 요동을 침공하였으며 모용좌가 사마 학경을 파견하여서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구원하도록 하였으나 고구려에게 패하였으며 고구려는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켰다.
11월 모용농이 그의 머리를 베고, 더 나아가서 고구려를 쳐서 요동과 현도 두 군을 회복하였다. 이보다 앞서 유주와 기주의 유민들이 많이 고구려로 들어갔는데 모용농이 표기장군부의 사마인 범양 사람 방연을 요동태수로 삼아서 그들을 부르고 어루만졌다.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 본기 >
9년(399년) 봄 정월에 왕은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연나라 왕 [모용]성(盛)이 우리 나라 왕의 예절이 오만하다고 하여 스스로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습격했는데,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과 남소성(南蘇城)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넓혀, 5천여 호를 옮겨놓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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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기사와 관련하여
1) 자치통감에는 ① 위에 있는 봄 정월 기사가 없다. ② 2월 기사는 399년이 아니라 400년 2월 15일인 진기33 안제 융안 4년 2월 병신일(15일)조에 있다.
2) 진서에는 ① 위에 있는 봄 정월 기사에 대하여 권124, 재기24, 모용성 조에 『연호를 장락으로 바꾸었다. ....(중략)... 고구려왕 안이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조공하였다. 改年為長樂。有犯罪者,十日一自決之,無撾捶之罰,而獄情多實。高句驪王安遣使貢方物。』라고 되어 있으나 날짜는 없다.
※ 중략된 부분: (모용성은) 범죄자가 있으면 열흘에 한차례씩 몸소 판결하였는데 고문을 가하지 않고도 대부분 그 실정을 알아냈다.
※ 고구려왕 안: 22대 안장왕을 가리키나 장락이라는 연호는 399년부터 401년에 쓴 연호이고 안장왕은 519년에 즉위 하였으니 고구려왕 안이라는 진서의 기록은 엉터리임
② 위에 있는 2월 기사에 대하여 권124, 재기24, 모용성 조에 『(모용)성이 무리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하여 신성 남소를 습격하고, 모두 함락하여 그 무리를 흩어버리고 그 5천여 호를 요서에 옮겼다. 盛率眾三萬伐高句驪,襲其新城、南蘇,皆克之,散其積聚,徙其五千餘戶于遼西』라고 되어 있으나 역시 날짜는 없다. |
11년(401) 왕이 군사를 보내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니, 연나라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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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기사에 대하여 1) 자치통감에는 위에 있는 기사가 없다. 2) 진서에도 없다 |
13년(403) 겨울 11월에 군대를 내어 연나라를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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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기사에 대하여 1) 자치통감에는 위에 있는 기사가 없다. 2) 진서에도 없다 |
14년(404) 봄 정월에 연나라 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침공해 왔다.
[성이] 함락되려 할 즈음에 [모용]희가 장병들에게 “먼저 [성에] 오르지 말라. 성을 깎아 평지가 될 때를 기다려서
내가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라고 명하였다.
이 때문에 성 안에서 엄히 방비할 수 있어서 [연나라는]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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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기사에 대하여
1) 자치통감에는 위에 있는 봄 정월 기사가 404년이 아니라 405년 1월 26일인 진기36 안제 의희 원년 정월(1월) 무신일(26일) 조에 있다.
2) 진서에는 권124, 재기24, 모용희 조에 『고구려를 연군에서 만나 약 백여명을 살해하였다. 모용희가 부씨를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여 충차와 땅굴로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모용희가 말하였다. 먼저 장병들은 (성에) 오르지 말라 성을 깎아 평지가 될 때를 기다려서 내가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 이에 성 안에서 엄히 방비하여 공격이 불능하게 되었다. 큰 눈비를 만나 사졸이 많이 죽으니 돌아왔다. 會高句驪寇燕郡,殺略百餘人。熙伐高句驪,以苻氏從,為衝車地道以攻遼東。熙曰:「待剗平寇城, 朕當與后乘輦而入,不聽將士先登。」於是城內嚴備,攻之不能下。會大雨雪,士卒多死,乃引歸。』 라고 되어 있는데 역시 날짜는 없다. |
15년(405)
겨울 12월에 연나라 왕 [모용]희가 거란을 습격하여 형북(陘北)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무리가 많은 것이 두려워 돌아
가려고 하여, 마침내 군대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채 우리를 습격하였다.
연나라의 군대는 3천여 리를 행군하였으므로 병사와 말이 피로하고 얼어 죽은 자가 길에 이어졌고,
우리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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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기사와 관련하여 1) 자치통감에는 『12월에 연왕 모용희가 거란을 습격하였다.』라고만 되어 있다. 진기36 안제 의희 원년 12월조(날짜는 없음)
2) 진서에는 권124, 재기24, 모용희 조에 『모용희가 부씨와 더불어 거란을 습격하였는데 거란의 무리가 많은 것이 두려워 돌아가려 하였으나 부씨가 따르지 않자 마침내 중무장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채 고구려를 습격하였다. (연나라의 군대는) 3천여리를 행군하여 병사와 말이 피로하고 얼어죽은 자가 길에 이어졌다.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熙與苻氏襲契丹,憚其眾盛,將還,苻氏弗聽,遂棄輜重,輕襲高句驪, 周行三千餘里,士馬疲凍,死者屬路。攻木底城,不克而還』라고 되어 있으나 날짜는 없다. |
17 년 (AD 407) : 봄 3월에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
[번역문]
17년(407) 봄 3월에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 종족(宗族)[의 정]을 베풀자 북연왕 운(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하였다.
운의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갈래로서,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자손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
모용보(慕容寶)가 태자였을 때 운(雲)이 무예로써 동궁에 시위하였는데, 모용보가 그를 아들로 삼아 모용씨의 성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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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기사와 관련하여 1) 자치통감에는 3월조 기사는 407년 3월이 아니라 408년 3월인 진기36 안제 의희 4년 3월 조에 있다. (그 아래 기사는 진서에 있음)
2) 진서 권124, 재기24, 모용운 조에 『할아버지 (고)화는 고구려의 갈래로서,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자손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 (고)운은 침착하고 두터우며 말이 적어 당시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지만 오직 풍발만이 그의 뜻과 법도를 기이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 친구가 되었다. 모용보가 태자였을 때 운(雲)이 무예로써 동궁 급사시를 하여 시어랑의 벼슬을 내렸는데 모용회군을 습격하여 무너뜨렸다. 모용보가 그를 아들로 삼아 모용씨의 성을 주고 석양공에 봉하였다. 祖父和,高句驪之支庶,自云高陽氏之苗裔,故以高為氏焉。 雲沈深有局量,厚重希言,時人咸以為愚,唯馮跋奇其志度而友之。 寶之為太子,雲以武藝給事侍東宮,拜侍御郎,襲敗慕容會軍。 寶子之,賜姓慕容氏,封夕陽公』라고 되어 있고 역시 날짜는 없음 |
고구려와 전연(前燕)의 관계
글의 순서
1. 고구려와 전연(前燕)의 관계
2. 고구려와 전연 관계사(史)
3. 고구려와 전연 관계 기록
1. 고구려와 전연(前燕)의 관계
전연(前燕)을 세운 선비 모용부는 고구려의 노예로 살았다가 고구려를 탈출하여 독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유리왕 때 선비가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는데 이후 고구려를 배반하여 탈출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선비가 고구려를 배반하고 탈출한 기록이 보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전을 보면
『백고(伯固: 고구려 8대 신대왕) 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요동(遼東)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胡)[族] 5백여 호(戶)를 받아들였다.
건안(建安) 연간(196~219)에 .......(중략).......
[지난 날] 항복했던 호(胡)[족(族)]도 이이모(伊夷模: 고구려 10대 산상왕)를 배반하므로 이이모(伊夷模)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이렇게 되어 있다.
즉, 산상왕 때 고구려가 내분이 일어나 나라가 풍비박산이 나자 이때를 틈타 선비가 고구려를 배반하고 탈출
하여 요서(遼西)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2) 선비 모용부를 일으킨 사람이 바로 모용외인데
진서 모용외 전을 보면
『(모용외의) 증조(曾祖)인 막호발(莫護跋)은 위(魏)나라 초 그의 여러 부(部)를 이끌고 요서(遼西)로 들어와
살았고, 선제(宣帝)(사마의)를 따라 공손씨(公孫氏: 공손연)를 치며 공을 세워 솔의왕(率義王)으로 임명되고
극성(棘城) 북쪽에 처음으로 건국하였다.
曾祖莫護跋, 魏初率其諸部入居遼西, 從宣帝伐公孫氏有功, 拜率義王, 始建國於棘城之北.』이렇게 되어 있다.
사마의가 공손연을 멸망시킨 때가 238년 8월이다.
그리고 선비족이 고구려를 배반하고 탈출한 때는 산상왕이 수도를 옮긴 때인 209년 10월이다.
다시말해서 선비 모용부는 209년 10월 경에 고구려를 탈출하여 238년 8월 이전에 요서(遼西)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3) 선비 모용부는 342년 10월 고구려를 침략하고 있는데 고구려의 지리를 아주 자세히 알고 있다.
자치통감 진기19 성제 함강 8년(342년) 10월조를 보면 고구려 서울인 환도로 가는 길이 남쪽과 북쪽 두 개의
길이 있고 남쪽 길은 험하고 좁은 반면 북쪽 길은 평평하고 넓다고 명확하게 알고있다.
옛날에는 지리적 정보가 비밀로 되어 있고 외국인에 대하여는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선비 모용부는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다.
왜일까? 선비 모용부가 고구려에 살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유리왕 때인 서기전 9년부터 산상왕 때인 서기209년까지 무려 200년 이상을 고구려에 살았으니 고구려의
지리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알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볼때에도 선비 모용부는 고구려에서 노예로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선비 모용부가 세운 후연은 결국 고구려의 품으로 돌아온다.
전연은 후연으로 이어지고 후연의 백성과 문무백관은 북연으로 이어지는데 후연은 북연과 충돌이 벌어져
나라가 위험하게 되자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나라가 망하게 되자 결국 왕과 대신, 백성 모두가
고구려로 망명한다.
같은 선비족인 북위에 통합되기를 거부하고 왜 고구려로 갔을까?
이런 걸 수구지심(수구초심)이라고 한다.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언덕 쪽으로 둔다는 것이다.
나라가 위험하게 되자 자기가 살았던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나라가 망하게 되자 자기가 살던 고구려로
돌아간 것이다.
5) 연나라는 모용황 때인 342년 10월, 고구려를 침략하고 5만명을 잡아갔는데 연나라에서는 고구려 사람들을
상당히 우대한 것으로 보인다.
고운은 모용보의 양자가 되어 나중에는 후연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데 이때 고운(그때의 이름은 모용운)을
황제로 세운 풍발이 모용운에게 한 말이 있다.
자치통감 권114, 진기36, 안제 의희 3년(407년), 가을 7월 계해일(26일)조를 보면
『공은 고씨(高氏)의 이름 높은 집안(名家)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양자가 될수 있으며...
(公,高氏名家,何能為人養子)...』이렇게 말하고 있다.
후연에서 고구려 사람들을 명문(名門)으로 말하고 있다.
포로로 잡혀갔는데도 왜 이런 대접을 받았을까?
전연과 후연을 세운 선비 모용부가 비록 자기들이 나중에 잘되어 천하를 호령하였지만 본래 자기들은 고구려의 하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생각되며, 본래 고구려 사람들이 자기들의 위에 있었던 존귀한 사람
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생각된다.
북제를 세운 고환의 증조 할아버지 고호(高湖)도 후연에서 산기상시라는 좋은 벼슬을 하고 있다.
(자치통감 권108, 진기30, 효무제 태원 20년(395년) 5월 갑술일(28일) 기사를 보면「산기상시 고호(高湖)가
간하였다.」고 하면서 고호(高湖)가 말한 내용이 나온다.)
6) 이러한 점은 북위때도 마찬가지였다.
북위 역시 선비족인데 북위 세종때의 권력자 고조(高肇) 열전을 보면 (위서 열전 권83 하, 열전 외척 제71 하)
고조의 아버지인 고양(高颺)과 고양의 동생인 고승신(高乘信)이 북위에 들어가자 북위는 여위장군(厲威將軍)과
명위장군(明威將軍)을 준다.
고조의 여동생 문소황태후는 풍태후가 직접 머나먼 용성까지 가서 데리고 온 사람이며 자기 여조카들이 황후로
있었음에 불구하고 직접 황제와 맺어준 사람이다.
문소황태후의 신분을 높게 보지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 다른 고구려 사람인 고숭(高崇) 열전을 보아도 고숭의 아버지 고잠(高潛)이 북위에 들어가자 개양남(開陽男)
의 작위를 주었다.
이렇게 고구려 사람들은 선비족에게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았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200 여년간 고구려 사람들이 자기들 위에 존엄한 사람들로 살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선비족들은
고구려 사람들을 높은 신분으로 대한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생각한다
2. 고구려와 전연 관계사(史)
209년 10월 경 고구려를 탈출한 선비 모용부는 238년 6월 이전에 난하 서쪽인 요서(遼西)에 정착하였다.
238년 8월 사마의가 공손연을 멸망시킬 때 모용외의 증조부 막호발이 함께 공손연을 치며 공을 세워
솔의왕(率義王)으로 임명되고 극성(棘城) 북쪽에 처음으로 건국하였다.
246년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환도성까지 함락시키고 돌아갔다.
이때문에 중국 북동부인 계(북경시)부터 고구려까지 힘의 공백이 생기자 선비 모용부는 세력을 키우기 시작
한다.
280년 경 모용외의 부친인 섭귀(涉歸)는 유성(柳城)을 보전한 공으로 선비선우(鮮卑單于)로 올려 임명되고
난하 동쪽인 요동(遼東)의 북쪽으로 읍락을 옮겼다.(서울을 자꾸 동쪽으로 옮김)
293년 가을 8월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하여 봉상왕(14대)이 피하였는데 모용외가 추격하여 거의 따라잡게
되었으나 북부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적을 만나 그들을 힘껏 치니, [모용]외의 군대가 패하고 물러
갔다.
296년 가을 8월 모용외가 침입하여 와서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는데, 인부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생기고, 또 구덩이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을까 두려워
곧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봉상왕이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으니 고노자가 선정을 베풀어 위세와 명성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302년경 모용외는 우문부가 침략하여 위험에 이르렀으나 나중에 반격하여 대파하였다.
319년 12월 서진의 평주자사 최비가 부추겨 모용외를 고구려, 선비족 단씨(段氏), 우문씨(宇文氏)와 함께
쳤으나 이간질에 놀아나 실패하였고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왔다.
320년 겨울 12월에 미천왕이 요동을 공격하였으나 모용인이 막아 실패하였다.
330년 미천왕은 화북의 새로운 강자로 나타난 후조(後趙)왕 석륵(石勒)에게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갖는다.
338년 후조(後趙)왕 석호가 수십만 군사로 공격하여 위험지경까지 갔으나 모용황이 반격전에 성공하여 대파
하였다.
후조 왕 석호는 도요장군 조복을 파견하여 배 300척으로 곡식 30만 곡을 운반하여 고구려로 가져다 주었다.
모용황은 이후 계속하여 서쪽으로 후조와 단요(段遼) 전쟁을 한다.
339년 연나라 왕 [모용]황(皝)이 쳐들어 와서 그 군사들이 신성에까지 미치게 되자,
고국원왕(16대)이 맹약을 요구하니 돌아갔다.
342년 10월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천도한 다음 고구려를 침략하자 고구려는 모용황과 싸워 북도(北道)
에서는 승리하였으나 남도(南道)에서 패하여 모용황이 환도까지 쳐들어와 남녀 5만과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시체와 고국원왕의 왕비, 어머니를 포로로 하여 돌아갔다.
343년 봄 2월에 고국원왕은 그의 아우를 연(燕)나라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연나라 왕 [모용]황이 이에 따라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었으나, 그 어머니는 여전히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345년 겨울 10월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을 시켜 쳐들어와서 남소(南蘇)를 함락시키고 수비군사를 두고 돌아갔다.
350년 모용준은 모용각, 모용평, 모용수 등을 이끌고 후조(後趙)를 물리치고 계(薊: 북경 서남쪽)를 함락하여
서울로 삼았다.
352년 후조의 서울인 업(鄴)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모용준은 제위에 오른다.
355년 겨울 12월에 고국원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쳐 어머니를 돌려받았다.
연나라 왕 [모용]준이 고국원왕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로 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 이때 처음으로 고구려 왕이 무엇무엇에 봉한 다는 소리를 들음.
이것은 어머니를 돌려받기 위한 일시적인 골육책에 지나지 않음.
이러한 것은 선비 모용부의 하나인 남연 왕 모용초도 407년 10월에 자기의 어머니를 돌려받기 위해 칭신 한
예가 있으니 피차 마찬가지임 >
357년 11월 모용준이 계(薊: 북경의 서남쪽)에서부터 업(鄴: 하북성 임장현)으로 도읍을 옮겼다.
369년 동진의 환온이 전연을 북벌하나 모용수가 패퇴시킴
370년 진나라(전진, 前秦)가 연나라(전연,前燕)를 멸망 시켰다.
이때 연나라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도망쳐 왔는데, 고국원왕은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보냈다.
3. 고구려와 전연 관계, 기록
< 삼국사기 고구려 제14대 봉상왕 본기 >
2년(293) 가을 8월에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하여 오자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행차가 곡림(鵠林)에 이르렀을 때, 모용외는 왕이 도망간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거의 따라잡게
되었으므로, 왕은 두려워하였다.
그때 신성 재(新城宰)인 북부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적을 만나 그들을 힘껏 치니, [모용]외의 군대가 패하고 물러갔다.
왕은 기뻐하고 고노자에게 작위를 더하여 대형(大兄)으로 삼고, 겸하여 곡림을 식읍으로 주었다.
5년(296) 가을 8월에 모용외가 침입하여 와서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는데, 인부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생기고, 또 구덩이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을까
두려워 곧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모용씨가 군대가 날래고 강하여 우리 영토를 거듭 침범하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다.
국상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 대형 고노자는 어질고 또 용감합니다.
대왕께서 만약 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시려면, 고노자가 아니면 쓸 사람이 없습니다.”
왕은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았다.
[그는] 선정을 베풀어 위세와 명성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 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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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봉상왕 본기 기사에 대하여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우리측 사료인 구삼국사, 혹은 해동고기에서 내용을 가져온 것이다. 따라서, 위 기사가 자치통감과 진서에 없을 것이다.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5대 미천왕(美川王) 본기 >
20년(319) 겨울 12월에 진(晉)나라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도망쳐 왔다.
이전에 최비가 은밀히 우리 나라와 단씨(段氏)·우문씨(宇文氏)를 달래어 함께 모용외를 치게 하였다.
세 나라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자 [모용]외가 문을 닫고 지키며 오직 우문씨에게만 소와 술[牛酒]을 보내
위로하였다. 두 나라는 우문씨와 [모용]외가 음모한다고 의심하고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씨의 대인(大人) 실독관(悉獨官)이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갔으나 나는 홀로 성을 빼앗겠다.”고 하였다.
[모용]외가 그 아들 황(皝)과 장사(長史) 배의(裵嶷)를 시켜 정예군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실독관이 크게 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최비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형의 아들 도(燾)를 시켜 극성(棘城)으로 가서 거짓으로 축하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니, [최]도가 두려워 머리를 조아려 사실을 고하였다.
[모용]외가 [최]도를 돌려보내고 [최]비에게 “항복하는 것은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은 하책이다.”라고
말하고,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 갔다.
[최]비가 수십 기마병과 함께 집을 버리고 [우리 나라로] 도망쳐 오고, 그 무리가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
하였다.
[모용]외가 그 아들 인(仁)으로 하여금 요동을 진무(鎭撫)하게 하니 관부와 저잣거리가 예전과 같이 안정
되었다.
우리나라 장수 여노(如孥)는 하성(河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습격해서
그를 사로잡고, 그 무리 천여 가를 사로잡아서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미천왕)은 자주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략하였다.
[모용]외가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을 보내 [우리를] 치게 하였는데, 왕이 맹약을 구하자 [모용]한과
[모용]인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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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에 대하여
1) 자치통감 2) 진서
1) 자치통감 진기13 원제 태흥 2년(319년)
『12월 을해일(9일) 평주(요녕성과 한반도 북부) 자사 최비가 스스로 중주(중원지역)에서 명망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요동지역을 진무하였는데 병사와 백성들이 대부분 모용외에게 귀부하자 마음이 평안하지 아니하였다.
자주 사자를 보내어 그들을 불러오려 했으나, 모두 오지않자 속으로 모용외가 그들을 억지로 머물러 있게 한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몰래 고구려, 단씨(段氏), 우문씨(宇文氏)에게 유세하여 함께 그를 공격하게 하고 모용외를 멸망시키면 그 땅을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최비와 친하게 지내는 발해사람 고첨(高瞻)이 힘써 간하였으나, 최비가 좇지 않았다.
삼국이 군사를 합하여 모용외를 정벌하자 제장들이 그들을 반격하자고 청하니 모용외가 말하였다. “저들은 최비에게 유혹되어 모든 이익을 얻으려고만 하고 있다. 군사세력이 처음으로 합쳐져서 그 칼끝이 아주 예리할 것이니 그들과 싸우는 것은 옳지 않으며 마땅히 굳게 지키면서 그들을 좌절시켜야 할 것이다. 저들은 까마귀가 모여서 오는 것과 같아 이미 하나로 통일된 것이 없으니 서로 복종하지 못할 것이고, 오래되면 반드시 두가지 문제를 갖게 될 것인데
그 하나는 내가 최비와 더불어 그들을 속여서 뒤엎어 버리려한다고 의심할 것이고, 두 번째는 세나라가 스스로 서로 시기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두 개로 흩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 다음에 그들을 공격하면 격파할 것이 분명하다.”
세나라가 나아가서 극성(요녕성 금주시 서북쪽)을 공격하니 모용외는 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고 사자를 파견하여 소고기와 술로 우문씨에게만 주면서 위로하니 나머지 두나라에서는 우문씨와 모용외가 모의한 것이 있다고 의심하고 각기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씨의 대인(大人)인 우문실독관이 말하였다.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가 버렸지만 우리는 마땅히 홀로라도 이것을 빼앗아야 한다.” 우문씨의 사졸들이 수십만 명이어서 군영이 40리에 이어있었다.
모용외의 사자가 그의 아들 모용한을 도하(요녕성 금주시)에서 오도록 불렀다. 모용한이 사자를 파견하여 모용외에게 말하엿다.
“우문실독관이 나라 전체를 들어서 침략하였으니 저들의 숫자는 많고 우리는 적어서 계책을 세워 격파하는 것은 쉬워도 힘으로 승리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성안에 있는 무리는 충분히 침략을 방어할 수 있으니 저 모용한이 청컨대 밖에서 기습병이 되어서 그들의 큼을 보다가 치게하며, 안팎에서 모두 분발하여 저들을 놀라게하여 방비할 곳을 알지 못하게 하면 그들을 깨드리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병사들을 합쳐서 하나로하면 저들은 오로지 성을 공격하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다른 걱정을 다시 하지 않아도 되게하는 것은 계책 가운데 제대로 된 것은 아닙니다. 또 많은 무리들에게 겁먹은 것을 보이는 것은 싸우지 않고도 사기가 먼저 상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모용외는 오히려 이를 의심하였다. 요동사람 한수가 모용외에게 말하였다.
“우문실독관은 상대방을 능멸하는 뜻을 갖고 있어서 장군은 교만하고 졸병은 게으르며 군사는 단잔하거나 조밀하지 않으니 만약에 기습하는 병사를 갑자기 일으켜서 그들이 아무런 방비가 없는 곳 한쪽씩을 잡아당기는 것이 반드시 격파할 계책입니다.” 모용외는 마침내 모용한을 도하에 머물러 있도록 허락하였다.
우문실독관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모용한은 평소 날래고 과감하다는 면성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 성으로 들어가지 아니하여 혹 화가 될수도 있겠으니 마땅히 먼저 그것을 빼앗아야 할 것이고 성은 걱정할 것이 못 된다.”
마침내 수천 기병을 나누어 파견하여 모용한을 공격하였다. 모용한이 이를 알고 거짓으로 단씨의 사자가 되어 길에서 그들을 맞이하여 말하였다.
“모용한은 오랫동안 나의 걱정거리였는데 듣건데 그들을 마땅히 치려고 하신다 하여 내가 이미 군사를 엄히 다스려 기다리고 있으니 의당 속히 나가십시오.” 사자는 이미 떠났는데 모용한도 바로 성을 나와서 군사를 매복시켜놓고 그들을 기다렸다.
우문씨의 기병이 사자를 보자 크게 기뻐하며 말을 달려갔고 또다시 방비 대책을 세우지 않고 매복한 지역 안으로 들어갔다. 모용한이 분발하여 쳐서 그들을 다 잡고 이긴 기세를 타고 지름길로 진격하면서 간사를 파견하여 모용외에게 말하여 군사를 내보내어 크게 싸우게 하였다.
모용외는 그의 아들 모용황과 장사 배억에게 정예의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하고 스스로 대병을 거느리고 뒤를 이었다. 우문실독관은 처음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다가 모용외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모든 무리를 내보내어 싸우게하였다. 선봉에 섰던 군사가 싸움을 시작하자 모용한은 1천 기병을 거느리고 옆에서 곧장 그들의 진영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멋대로 불을 지르니 무리들이 당황하여 소란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고, 드디어 대패하였으며 우문실독관은 겨우 몸만 죽음을 면하였다. 모용외가 그의 무리를 전부 포로로 잡았고 황제의 옥새 세 개를 얻었다.
최비가 이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그의 조카 최도에게 극성으로 가서 거짓으로 축하하게 하였다. 마침 세나라의 사자가 또한 도착하여 화의를 청하며 말하였다. “우리의 본래 뜻이 아니며 최평주(최비)가 우리를 교사한 것일 뿐입니다.”
모용외가 이것을 최도에게 보여주면서 무기를 들이대니 최도가 두려워서 스스로 자복하였다. 모용외가 마침내 최도를 돌려보내어 최비에게 말하였다.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이 최하의 계책이다.”
군사를 인솔하고 그 뒤를 쫓았다. 최비는 수십 기병과 더불어 집을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고 그의 무리들은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외는 그의 아들 모용인을 정로(征虜) 장군으로 삼아 요동지역을 진무하니 관부, 시가지는 옛날처럼 안정되게 하였다.
고구려의 장수 여노자가 우하성(요녕성 요녕시 동북쪽)을 점거하니 모용외는 장군 장통(張統)을 파견하여 습격하여 그들을 사로잡고 그의 무리 1천여호를 포로로 잡고 최도 고첨 한항 석종을 극성으로 돌아가게 하여 손님에 대한 예의로 대우하여 주었다. 한항은 안평(하북성 안평현) 사람이고, 석종은 석감의 손자이다. .......(중략)......... 고구려가 자주 요동을 침략하니 모용외는 모용한과 모용인을 파견하여 그들을 쳤고 고구려왕 을불리(乙弗利)가 거꾸로 와서 맹약을 맺자고 청하였으므로 모용한과 모용인이 돌아왔다.』
2) 진서 권108, 재기8 모용외 조(‘史랑방’에 있는 번역문을 복사해 온 것임)
『당시 평주자사 동이교위 최비(崔毖)는 스스로 남주(南州) 선비들 사이에서 신망이 있다 여기고 (유민들을) 품어서 모을 뜻을 지니고 있었으나 유망(流亡)하는 자들 중에 그에게로 오는 자가 없었다. (최)비는 (모용)외가 (그들을) 구류(拘留)한 탓이라 생각하고는 이에 고구려(高句麗)와 우문(宇文), 단국(段國) 등과 은밀히 연결해 (모용)외를 (쳐서) 멸하고 그의 땅을 나누어가지려 꾀했다.
(동진 원제) 태흥(太興: 318-321년) 초, 세 나라(고구려,우문,단국)가 (모용)외를 쳤다. (모용)외가 말했다,
“저들은 최비(崔毖)의 헛소리를 믿고 한때의 이익을 노려 까마귀가 모이듯이 하여 쳐들어왔을 뿐이다. (저들은) 통일되어 있지 않은데다 서로 귀복(歸伏)하지 않으니 우리가 지금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 그러나 저들은 군(軍)이 이제 막 합쳐져 그 예봉이 매우 날카로워 우리가 속전(速戰)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만약 (지금 바로) 역격(逆擊)한다면 저들의 계책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편안히 기다리면 필시 의심과 두마음을 품게 되어 번갈아 서로 시기하고 방비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우리와 (최)비가 함께 휼계를 꾸며 자신들을 무너뜨릴까 의심할 것이고, 둘째로는 세 나라 중 한 나라와 우리에게 한나라, 위나라의 모책과 같은 것이 있을까 의심할 것이니, 저들의 마음이 저혹(沮惑,어그러지고 미혹됨)되기를 기다려 그 연후에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세 나라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자 (모용)외는 성문을 닫고 싸우지 않고는, 사자를 보내 쇠고기와 술로써 우문(宇文)(의 군사들)을 호궤하고 무리들에게 “최비(崔毖)의 사자가 저번에 왔었다.”라고 크게 떠벌렸다. 그러자 두 나라(고구려와 단국)가 과연 우문(宇文)이 (모용)외와 한 편인 것으로 의심하고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실독관(宇文悉獨官)이 말했다,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갔으나 우리는 응당 단독으로라도 그 나라(모용외)를 겸병할 것이다. 다른 나라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모든 군사로써 (극)성을 핍박하고 30리에 걸쳐 영(營)을 늘어세웠다. (모용)외는 정예군사(銳士)를 가려뽑아 (모용)황(皝)에게 배속하여 선두에서 적진을 돌파하게 하고, (모용)한(翰)에게는 정예기병(精騎)을 거느리게 하여 기병(奇兵,기습군,正兵의 반대)으로 삼아 곁을 따라(우회해) 출병해 곧바로 그(우문실독관 의) 영(營)을 찌르도록 하고, (모용)외(廆) 자신은 방진(方陣)을 치고 진격하였다. (우문)실독관(悉獨官)은 그들의 무릿수를 믿고 방비하지 않다가 (모용)외의 군대가 이르는 것을 보고 바야흐로 군을 이끌고 이에 맞섰다. 전봉(前鋒,선두부대, 선봉)이 이제 막 교전을 시작했을 때 (모용)한(의 奇兵)이 자신의 영(營)으로 치고 들어와 불을 놓고 영(營)을 불태우자 그 무리들이 모두 놀라고 어지러워져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다 마침내 대패하였다. (우문)실독관은 간신히 몸을 피했으나 그의 무리들은 모두 붙잡혔다. 그의 영후(營候)에서 황제(皇帝)의 옥새(玉璽) 삼뉴(三紐)를 노획하고는 이를 장사(長史) 배억(裴嶷)을 시켜 건업(建鄴)으로 보냈다.
최비(崔毖)는 (모용)외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질까 두려워하여 형자(兄子,형의 아들.조카) (최)도(燾)를 (모용)외에게 보내 거짓으로 (승전을) 축하했다. 때마침 세 나라의 사자들 또한 (모용외에게) 이르러 화친을 청하며, “(쳐들어 온 것은) 우리의 본의가 아니고, 최평주(崔平州)(평주자사 최비)가 (그리하도록) 우리를 가르쳤습니다.”라고 하였다. (모용)외가 (최)도를 데리고 공격하며 포위한 곳을 보여주고는 군사들을 벌여놓고 그에게 말했다, “너희 숙부(叔父)(→최비)가 나를 멸하라고 세 나라를 가르쳐놓고는, 어찌 속임수를 쓰며 내게 와서는 축하하는가?” (최)도가 두려워하며 수복(首服,자복,자백)했다. 그러자 (모용)외는 (최)도를 보내주며 돌아가서 (최)비에게 전하라 하며 말했다,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이 하책이다.” 뒤따라 군대를 보내자 (최)비는 가실(家室,가족)을 버린 채 수십 기(騎)와 함께 고구려(高句麗)로 달아났다. (모용)외는 그의 무리를 모두 항복시키고 (최)도와 고첨(高瞻) 등을 극성(棘城)으로 옮기고는 빈객으로 예우했다. 이듬해,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침범하자 (모용)외가 무리를 보내 이를 공격해 격파했다.
時平州刺史·東夷校尉崔毖自以爲南州士望, 意存懷集, 而流亡者莫有赴之. 毖意廆拘留, 乃陰結高句麗及宇文·段國等, 謀滅廆以分其地. 太興 (318-321)初, 三國伐廆, 廆曰:「彼信崔毖虛說, 邀一時之利, 烏合而來耳. 旣無統一, 莫相歸伏, 吾今破之必矣. 然彼軍初合, 其鋒甚銳, 幸我速戰. 若逆擊之, 落其計矣. 靖以待之, 必懷疑貳, 迭相猜防. 一則疑吾與毖譎而覆之, 二則自疑三國之中與吾有韓 魏之謀者, 待其人情沮惑, 然後取之必矣.」 於是三國攻棘城, 廆閉門不戰, 遣使送牛酒以犒宇文, 大言於衆曰:「崔毖昨有使至.」於是二國果疑宇文同於廆也, 引兵而歸. 宇文悉獨官曰:「二國雖歸, 吾當獨兼其國, 何用人爲!」 盡衆逼城, 連營三十里. 廆簡銳士配皝, 推鋒於前, 翰領精騎爲奇兵, 從旁出, 直衝其營, 廆方陣而進. 悉獨官自恃其衆, 不設備, 見廆軍之至, 方率兵距之. 前鋒始交, 翰已入其營, 縱火焚之, 其衆皆震擾, 不知所爲, 遂大敗, 悉獨官僅以身免, 盡俘其衆. 於其營候獲皇帝玉璽三紐, 遣長史裴嶷送于建鄴. 崔毖懼廆之仇己也, 使兄子燾僞賀廆. 會三國使亦至請和, 曰:「非我本意也, 崔平州敎我耳.」 廆將燾示以攻圍之處, 臨之以兵, 曰:「汝叔父敎三國滅我, 何以詐來賀我乎?」 燾懼, 首服. 廆乃遣燾歸說毖曰:「降者上策, 走者下策也.」 以兵隨之. 毖與數十騎棄家室奔于高句麗, 廆悉降其衆, 徙燾及高瞻等于棘城, 待以賓禮. 明年, 高句麗寇遼東, 廆遣衆擊敗之.』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5대 미천왕(美川王) 본기 >
21년(320) 겨울 12월에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략하였는데, 모용인이 막아 싸워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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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에 대하여
1) 자치통감 진기13 원제 태흥 3년(320년)
『12월 고구려가 요동을 침입하자 모용인이 그들과 더불어 싸워서 대파하였고 이로부터 감히 모용인이 다스리는 경계를 침입하지 못하였다.』
2) 진서(위에 있는 진서 마지막 내용임) 권108, 재기8 모용외 조(‘史랑방’에 있는 번역문을 복사해 온 것임)
『이듬해,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침범하자 (모용)외가 무리를 보내 이를 공격해 격파했다.明年, 高句麗寇遼東, 廆遣衆擊敗之.』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 본기 >
9년(339)에 연나라 왕 [모용]황(皝)이 쳐들어 와서 그 군사들이 신성에까지 미치게 되자,
왕이 맹약을 요구하니 그제야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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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에 대하여
1) 자치통감 진기18 성제 함강 5년(339년) 9월? 10월?(11월 전에 나오는 기사)
『모용황이 고구려를 쳐서 군사들이 신성(요녕성 신빈현)에 이르니 고구려왕 고소가 동맹을 맺자고 빌어서 마침내 돌아왔다.』
2) 진서 진서 권109 재기9 모용황 조(‘史랑방’에 있는 번역문을 복사해 온 것임)
『그 해, (모용)황이 고구려를 치니 (고구려) 왕 쇠(釗: 16대 고국원왕)가 맹약을 청하므로 돌아왔다.其年皝伐高句麗, 王釗乞盟而還.』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 본기 >
10년(340)에 왕은 세자를 연나라 왕 [모용]황에게 보내 조회(朝會)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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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에 대하여
1) 자치통감에는 위 기사가 없고, 진서에 나오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2) 진서 진서 권109 재기9 모용황 조(‘史랑방’에 있는 번역문을 복사해 온 것임)
『...(상략: 위에 있는 진서 권109 재기9 모용황 조)... 이듬해 쇠(釗)가 그의 세자(世子)를 (모용)황에게 보내 조현하게 하였다. (其年皝伐高句麗, 王釗乞盟而還.) 明年, 釗遣其世子朝於皝.』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 본기 >
12년(342) 겨울 10월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천도하였다.
건위장군(建威將軍) [모용]한(翰)이,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후에 우문(宇文)씨를 멸망시키고 그 후에 중원을
차지하자고 청하였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는데 북도(北道)는 평탄하고 넓은데 남도(南道)는 험하고 좁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북도로 가려고 하였다.
[모용]한이 말하였다. “적은 상식으로 헤아려 반드시 대군이 북도로 올 것이라 여겨서, 당연히 북쪽을 중히
여기고 남쪽은 소홀히 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마땅히 정예군을 거느리고 남도로 가 그들을 쳐서,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때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환도(丸都)는 족히 취할 것도 못됩니다.
따로 적은 군사를 북도로 보내면 비록 차질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몸체가 이미 무너지면 사지(四肢)는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모용]황이 그 말을 따랐다.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날랜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와서,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㝢) 등을 보내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나와서 침략해 왔다.
왕은 아우 무(武)를 보내 정예군 5만 명을 거느리고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도
(南道)를 막았다.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싸우고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뒤이어 오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의 머리를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로 들어 왔다.
왕은 말 한 필을 몰고 도망가 단웅곡(斷熊谷)으로 들어갔다.
[연나라] 장군 모여니(慕輿埿)가 쫓아가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이때, 왕우 등이 북도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었다.
이로 인해 [모용]황이 다시 끝까지 쫓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왕을 불렀으나 왕은 나가지 않았다.
[모용]황이 장차 돌아가려 할 때 한수가 말하였다.
“고구려 땅은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왕이 도망하고 백성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어있으나, 대군이 돌아
가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나머지 무리를 모아 오히려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그의 친 어머니를 잡아가십시다.
그가 스스로 몸을 묶어 항복해 오기를 기다려 그 후에 돌려주고 은덕과 신뢰로 어루만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모용]황이 그 말을 좇아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의 여러 대의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그 궁실을 불지르고, 환도성을 허물고는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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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에 대하여
1) 자치통감 2) 진서
1) 자치통감 진기19 성제 함강 8년(342년) 『10월 연왕 모용성이 용성(조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건위장군 모용한이 모용황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 나라까지는 아주 가까이 있어서 항상 훔쳐보려는 뜻을 갖고 있으며 저들은 우문씨가 이미 망하기만 하면 그 화가 장차 자기들에게 미칠것을 알고서 반드시 텅 빈 틈을 타고 깊이 들어와서 우리들이 대비하지 않은 것을 덮칠 것입니다. 만약에 적은 병사를 무무르게 하면 지키기에 부족할 것이고 많은 군사를 머무르게 하면 진군 시키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중략)...... 우문씨는 스스로 지키기만 하는 오랑캐이니 반드시 멀리까지 와서 이익을 가지고 다툴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미 고구려만 빼앗고 나면 또 우문씨를 빼앗는 것은 마치 손을 뒤집는 것과 같습니다. 이 두나라가 평정되면 이익을 취하는 곳은 동해의 끝까지 넓어질 것이고 나라는 부유하고 군사는 강하게 되어 뒤를 돌아보아야 하는 걱정거리가 없게 될 것이니 그런 다음에 중원지역을 도모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용황이 말하였다. “훌륭한 말이오.”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다. 고구려를 가는길은 두 개가 있었는데 그 북족 길은 평평하고 넓으며 남쪽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좁아서 무리들은 북쪽 길로 가고자 하였다.
모용한이 말하였다. “오랑캐들이 보통 때의 마음을 가지고 이를 헤아린다면 반드시 많은 군대가 북쪽 길로 올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북쪽 길을 중시하고 남쪽 길을 경시 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의당 정예의 군사를 인솔하고 남쪽 기로 가서 그들을 공격하여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계책을 내면 환도는 빼앗는다고 말 할 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일부 군사를 파견하여 북쪽 길로 가게 하시어 설사 차질이 있다고 하여도 그들의 중심부는 이미 궤멸되었으니 사지(四肢)는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모용황이 이 말을 좆았다.
11월 모용황이 스스로 강한 군사 4만명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나가는데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 왕우 등이 군사 1만5천 명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나가서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고구려왕 고소가 과연 동생 고무를 파견하여 정예의 군사 5만명을 인솔하고 북쪽 길에서 막고 스스로는 노약한 병사들을 인솔하고 남쪽길에서 대비하였다.
모용한 등이 먼저 도착하여 고소와 싸우고 모용황이 많은 무리로 그 뒤를 이어주었다. 좌상시 선우량이 말하였다. “신은 포로로 잡힌 몸으로 왕의 국사(國士)라는 은혜를 입게 되었는데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이 신이 죽는 날 일 것입니다.”
홀로 몇 명의 기병과 더불어 먼저 고구려의 진지를 침범하여 가는 곳마다 꺾고 무너뜨렸다. 고구려의 진지는 움직였고 많은 무리들이 이것으로 인하여 기회를 타니 고구려 군사가 대패하였다. 좌장사 한수가 고구려의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의 목을 베고 모든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타고 그들의 뒤를 쫓아가서 드디어 환도에 들어갔다.
고소는 혼자 한 마리의 말을 타고 달아났는데 경거장군 모여니가 뒤쫓아 가서 그의 어머니와 처를 잡아서 돌아왔다. 마침 북쪽 길에서 왕우 등을 만나서 사웠는데 모두가 패배하여 죽고 이로 말미암아서 모용한은 다시 끝까지 추격하지 않았다. 사자를 파견하여 고소를 불렀으나 고소가 나오지 않았다.
모용황이 장차 돌아오려고 하는데 한수가 말하였다. “고구려의 땅은 수(戍)자리를 세워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주군이 도망하였고 백성들이 흩어져서 산골짜기에 숨어들었는데 많은 군대가 떠나버리고 나면 반드시 다시 비둘기처럼 모여들어 그들의 타버리고 남은 것들을 거둬들일 것입니다. 청컨대 그 아비의 시체를 싣고 그 어미를 가두고서 돌아가 자기 몸을 묶어서 스스로 귀부할 때를 기다렸다가 그런 다음에 그들을 돌려보내고 은혜와 신의를 가지고 위무하는 것이 정책 가운데 가장 좋은 것입니다.
모용황이 이 말을 좆았다. 그래서 고소의 아버지 고을불리의 묘를 발굴하여 그 시체를 싣고 그 부고에 있는 여러세대를 거쳐서 쌓아 온 보물을 거두고 남자와 여자 5만여 명을 포로로 잡고 그들의 궁실을 불 지르고 환도성을 파괴하고 돌아갔다.』
2) 진서 진서 권109 재기 제9 모용황 조(‘史랑방’에 있는 번역문을 복사해 온 것임)
『함강 7년(341년),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천도했다. 경졸(勁卒,굳센 병졸.강병) 4만을 이끌고 남섬(南陝)으로부터 들어가며 우문(宇文)과 고구려(高句麗)를 치고 또한 (모용)한(慕容翰)과 (모용황의) 아들인 (모용)수(慕容垂)를 전봉(前鋒,선봉)으로 삼고 장사(長史) 왕우(王㝢) 등을 보내 1만 5천 무리를 이끌게 하니 북치(北置)로부터 진격하였다.
고구려왕 쇠(釗: 16대 고국원왕)는 (모용)황의 군대가 북쪽길로 올 것이라 여기니 이에 그의 동생 무(武)를 보내 정예(精銳) 5만을 통수하게 하여 북치(北置)에서 항거하고, 자신은 약졸(弱卒)들을 이끌고 남섬(南陝)(남협南陜)을 방어했다. (모용)한이 쇠(釗)와 더불어 목저(木底)에서 싸워 대파하고 승세를 타고 마침내 환도(丸都)로 들어가니 쇠(釗)는 단기필마로 달아났다.
(모용)황은 쇠(釗)의 부친인 리(利)(→을불리乙弗利. 15대 미천왕)의 묘(墓)를 파헤쳐 그 시신과 (사로잡은) 그의 모친과 처, 진보(珍寶,보물)들을 수레에 싣고 남녀 5만여 구(口)를 약득하고 그의 궁실(宮室)을 불태우고 환도(丸都)를 허문 뒤에 돌아왔다.
그 이듬해, 쇠(釗)가 사자를 보내 (모용)황에게 칭신하고 그들의 방물을 바치니 이에 그의 부친 시신을 돌려주었다. 咸康七年(341), 皝遷都龍城. 率勁卒四萬, 入自南陝, 以伐宇文·高句麗, 又使翰及子垂爲前鋒, 遣長史王㝢等勒衆萬五千, 從北置而進. 高句麗王釗謂皝軍之從北路也, 乃遣其弟武統精銳五萬距北置, 躬率弱卒以防南陝. 翰與釗戰于木底, 大敗之, 乘勝遂入丸都, 釗單馬而遁. 皝掘釗父利墓, 載其尸幷其母妻珍寶, 掠男女五萬餘口, 焚其宮室, 毁丸都而歸. 明年, 釗遣使稱臣於皝, 貢其方物, 乃歸其父尸.』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 본기 >
13년(343)봄 2월에 왕은 그의 아우를 연(燕)나라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연나라 왕 [모용]황이 이에 따라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었으나, 그 어머니는 여전히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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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에 관하여
1) 자치통감 진기19 강제 건원 원년(343년)
『2월 고구려왕 고소가 그의 동생을 파견하여 신하를 자칭하면서 연(燕)에 들어와 조현하고 1천개를 헤아리는 진귀하고 색다른 물건을 바쳤다. 연왕 모용황은 마침내 그의 아버지의 시체를 돌려 보내고 그의 어머니를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2) 진서(위 342년 기사 끝에 있음) 진서 권109 재기 제9 모용황 조(‘史랑방’에 있는 번역문을 복사해 온 것임)
『그 이듬해, 쇠(釗)가 사자를 보내 (모용)황에게 칭신하고 그들의 방물을 바치니 이에 그의 부친 시신을 돌려주었다.明年, 釗遣使稱臣於皝, 貢其方物, 乃歸其父尸.』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 본기 >
15년(345)겨울 10월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을 시켜 쳐들어와서 남소(南蘇)를 함락시키고
수자리 군사를 두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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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에 관하여
1) 자치통감 진기19 목제 영화 원년(345년)
『10월 연왕 모용황이 모용각에게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여 남소를 뽑아버리고 수(戍)자리를 만들어 놓고 돌아왔다.』
2) 진서 진서 권109 재기 제9 모용황 조(‘史랑방’에 있는 번역문을 복사해 온 것임)
『모용각이 고구려의 남소(성)을 함락하고 수비병을 둔 뒤에 돌아왔다. 慕容恪攻高句麗 南蘇, 克之, 置戍而還.』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 본기 >
19년(349)에 왕은 전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을 연나라로 보냈다.
연나라 왕 [모용]준(雋)이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활(活)이라 바꾸고 중위(中尉)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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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에 관하여
1) 자치통감
진기20 목제 영화 5년(349년)
『11월(날짜는 없음) 고구려왕 고소가 전에 동이 호군이었던 송황을 연으로 보내니 연왕 모용준이 그를 사면하고서 이름을 바꾸어 송활이라고 하고 중위(中尉:용성 경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2) 진서 : 기록이 없음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 본기 >
25년(355)겨울 12월에 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
하였다.
연나라 왕 [모용]준이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 조감(刁龕)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왕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로 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
위 기사에 관하여
1) 자치통감 진기22 목제 영화 11년(355년)
『12월 고구려왕 고소가 시신을 파견하여 연에 가서 인질을 보내고 공물을 바치면서 그의 어머니를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연의 주군 모용준이 이를 허락하고 전중장군 조감을 파견하여 고소의 어머니 주씨를 호송하여 그의 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고소를 정동대장군 영주자사로 삼고 낙랑공으로 봉하였으며 왕이라는 직함은 옛날과 같이 쓰게 하였다.』
2) 진서 권110 재기10, 모용준 조(‘史랑방’에 있는 번역문을 복사해 온 것임)
『고구려왕 쇠(釗: 16대 고국원왕)가 사자를 보내 사은(謝恩)하고 그의 방물을 공물로 바치니, (모용)준이 쇠(釗)를 영주제군사(營州諸軍事)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로 임명하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였으며 왕(호)(王號)는 예전과 같이 하였다. 高句麗王釗遣使謝恩, 貢其方物. 儁以釗爲營州諸軍事·征東大將軍·營州刺史, 封樂浪公, 王如故』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 본기 >
40년(370)에 진(秦)나라의 왕맹(王猛)이 연나라를 정벌하여 깨뜨렸다.
연나라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도망쳐 왔는데, 왕은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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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에 관하여
1) 자치통감 진기24 해서공 태화 5년(370년)
『11월 신사일(10일) 곽경이 나아가서 용성에 이르니 태부 모용평이 고구려로 달아나고 고구려는 모용평을 잡아서 진으로 호송하였다.郭慶進至龍城,太傅評奔高句麗,高句麗執評,送於秦』
2) 진서 권112, 재기12 부견 상(上)
『곽경이 패잔병을 끝까지 쫓아가니 모용평이 고구려로 달아나 (곽)경이 요해에 이르자 (고)구려가 (모용)평을 포박하여 보냈다. 郭慶窮追餘燼,慕容評奔于高句麗,慶追至遼海,句麗 縛評送之』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