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세계 2016년 10월호
경이로운 이 지상의 모든 것
•조동범
시인은 어느 곳에 도달하려고 하는가? 그가 도달하려고 하는 곳은 천상인가? 아니면 지상의 어느 곳인가? 시는 지상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드러내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시가 언제나 현실의 어느 순간만을 응시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시는 현실 너머의, 닿을 수 없는 세계를 노래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시가 천상의 어느 지점을 호명하려고 할 때, 그것은 하나의 완전체가 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어느 날은 기시감에 어느 날은 미시감에 시달렸다. 그것은.전생의 기억이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 독백탄은 기시감이 앞섰고 족자섬은 미시감이 먼저였다 내용과 형식이 일치해도 일치하지 않아도 매번 기시감과 미시감 사이에서 시달린다면 어디서 무엇이 얼크러진 것일까
「압생트」 부분
우리 앞에 펼쳐진 세계는 기시감인 듯 미시감처럼 다가오고, 미시감인 듯 기시감이 되어 다가온다. 기시감이나 미시감처럼 다가오는 세계는 낯설거나 익숙한 모습을 드러내며 끊임없이 우리의 기억을 배반하려고 한다. 낯설고 익숙한, 이율배반적인 세계는 현재의 삶인 듯 아닌 듯 펼쳐지는 전생의 기억과도 같은 것이리라. 시인이 도달하려고 하는 천상의 세계는 낯선 곳이지만, 그것은 우리 삶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일견 익숙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기시감과 미시감은 끊임없이 시인의 의식을 헤집으며 번갈아 나타나게 된다. 그러한 세계는 마치 "경이로운 이 지상의.모든 빛' '풍경의 귀환)처럼 몽롱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조용미가 '나의 다른 이름들』에서 재현하려고 하는 세계는 총체성의 세계이다. 그 모든 것들을 내재하는 총체성의 세계를 통해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완성된 세계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총체성의 세계는 단순히 시인의 언어를 통해 제시된 시적 국면의 지위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의 모든 정신과 정서가 파악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시적 세계의 본질에 다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다른 이름들'은 조용미가 도달하고자 하는 시적 세계의 원형이자 종착지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의 다른 이름들은 시인의
시론이자 세계관이 되기에 이른다.
'나의 다른 이름들』은 구체적인 시적 공간을 제시하기보다 불분명한 시적 공간을 통해 시를 전개하고자 한다. 물론 시의 공간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불분명한 공간이 주된 공간감을 형성하기는 하지만 그곳에는 저수지가 있고 언덕이 있고 지중해가 있고 베네치아가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공간은 실제의 삶의 국면으로 기능한다기보다 현실 너머의 세계를 제시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따라서 나의 다른 이름들』의 세계는 실체를 지니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곳에는 말을 거는 창문과 침묵하는 창문들이 있다.
낮엔 거의 침묵하고 있지만
어둠 속에서는 제법 말이 많다
한집에 속한 각각 다른 크기와 모양의 모든 창문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집의 창문들 위로 밤이면 조금씩
물의 더듬이가 움직여 맨 위층까지 올라간다
불빛이 물의 일렁임을 벽으로 밀어 올린다
- '저녁의 창문들- 베네치아' 부분
'저녁의 창문들- 베네치아'는 제목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베네치아라는 명백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베네치아는 그 자체의 의미를 지니고 확장되기보다는 물을 소환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할 뿐이다. 물을 환기하는 베네치아가 아닌 경우, 이 시가 굳이 베네치아를 소환할 필요는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런 만큼 조용미의 '나의 다른 이름들』에서 공간은 실체를 지향하기보다 시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원형적 세계를 지향한다.
저녁의 창문들-베네치아의 "말을 거는 창문"과 "침묵하는 창문은 사물로서의 단편적인 창문이 아니다. 그것은 '말을 걸고 침묵하는' 세계를 제시하기 위해 탄생한 본질적인 지점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무엇 때문에 이렇듯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공간과 세계를 만든 것일까? 시인은 이제 시적 국면과 의미의 더 깊은 곳으로 떠나고자 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보다 깊이있는 세계를 통해 시인은 그간의 언어가 가닿을 수 없었던 시적 세계를 만들어내고자 했을 것이리라. 그러나 이와 같은 원형성의 세계는 피상적 인식을 철저히 배격하여 모호한 국면으로 흐를 수 있는 양상을 극복한다. 그의 언어는 가닿을 수 없는 것들을 끊임없이 호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조용미의 언어는 불투명한 세계를 제시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볼 수 없는 세계일 뿐이지 대상의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으로써 조용미의 시는 현실인 듯 환상인 듯 펼쳐진, 신기루와 같은 몽환적 감각을 전개하게 된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지 못하겠지만, 같은 시간을 겪지도 못하겠지만
새들이 날아간 허공 어디쯤 우리의 눈빛이 잠시 겹쳐지는 일도 없겠지만
그저 감각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곳의 멈추었다 미끄러지는 시간들을
순간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순간이 아무것도 아닌, 기이하고 아름답고 무서운 그런 풍경을
-「풍경의 귀환」 부분
시인이 발견한 것은 "시간이거나 “새들이 날아간 허공"이거나 "순간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순간이 아무것도 아닌, 기이하고 아름답고 무서운 그런 풍경이다. 이 사진은 제목부터 "풍경"이라는 개괄적 세계를 다룬다. 그러나 조용미는 개괄적인 세계를 곧바로 철학과 사유의 영역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시적 국면과 의지를 표명한다. 시는 구체적 삶의 국면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는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하지만 조용미가 만들어낸 시적 국면은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기는커녕 더 먼 곳으로 가고자 노력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조용미 식의 원형이자 본질인 것이다.
닿을 수 없는 세계를 지향하는 조용미의 시는 이제 극한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나의 다른 이름들에서 보여주려는 것은 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천상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렇듯, 잡을 수 없게 된 세계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조용미라는 하나의 세계는 시적 사유와 철학의 공동체를 완성하게 된다. 특히 이 시집은 자연을 주요한 소재로 다루고 있다.
자연은 우리의 삶이 닮고 싶어 하는 본질적인 존재이다. 그렇기때문에 조용미가 이번 시집에서 다루고 있는 시적 세계는 자연과 동일한 층위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으로써 조용미는 시적 세계가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지점까지 자신의
시적 세계를 몰고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기시감처럼 혹은 미시감처럼, 완전체가 되어 총체성의 세계를 구현하려는 의지의 산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