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013 / 믿는 데 왜 시험이? (약1:2-4)
많은 사람들이 편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살아온 인생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 중소기업 사장이 부도가 났습니다. 그동안은 사장이라는 대우를 받으며 잘 지냈는데 한순간에 빚쟁이들이 몰려와 빚 독촉을 하며 폭력까지 행사하는데, 이 정도야 참을 수 있다 했지만 가족들까지 수난을 당하는 걸 보게 되니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다고 하며 끝내 회사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인생에 고난이 닥치는 것은 당연히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인생을 그렇게 포기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누구라도 그래야겠지만 특히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이 닥쳐올 때면 고난이 주는 현실보다는 먼저 하나님 앞에 나가 고난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깊이 깨닫고자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를.
믿음은 평상시에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믿음을 발휘해야 할 때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쳐왔을 때가 아닐는지요?
‘나는 못 해도 내가 믿는 하나님이 해 주신다!’
이게 고난 중에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할 믿음입니다.
쉽게 시험을 일컬어 다들 고난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있게 되는 고난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받아서는 안 될 고난이 있고, 또 하나는 받아야 될 뿐만 아니라 감당해야 될 고난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받지 않아야 될 고난은 어떤 고난일까요?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청산하신 고난입니다.
믿음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오는 고난은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판사가 형량을 선고하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시려고 고난이 있게 하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죄 때문에 고난이 온다는 말은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임재가 부재하다 보니 우리 인생이 사탄의 통제 아래 있게 됨으로써 사탄의 역사가 우리를 죄로 인도하고 그 결과 고난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닐지라도 예를 들어 하나님을 우산에 비유한다면 비가 오는 날 우산 밖에 있다면 내리는 비를 쫄딱 다 맞게 됩니다. 그렇다고 내가 비를 맞은 것이 우산 때문은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아실 겁니다.
고난이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로 된 것이라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살다 보면 세상에서 쏟아져 내리는 수많은 고난들을 고스란히 다 당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인생은 죄 가운데 사는 것이기에 고난을 당하며 살아야 하는 결과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게다가 이런 고난의 시간들은 우리 인생에서 엄청난 허송세월이며 낭비되는 세월이기에 누구라도 이런 고난은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한 1년을 병석에 누워 있었다 치면, 그 1년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손해 보고 낭비하게 됩니까? 질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기간 동안엔 시간 낭비, 물질 낭비, 해야 할 일을 못한 낭비 등등으로 세월만 흘려보낼 뿐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에는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도 있게 되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난은 감당해야 할 고난이고 의미 있는 고난입니다.
설명을 이어가기 전에 먼저 믿는 사람에게 있게 되는 고난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까지도 여러분에게 고난이나 어려움이 있다고 하면 거기엔 반드시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감당해야 할 고난이라고 하는 즉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있게 되는 고난의 이유는 왜일까요?
그걸 알게 해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 의미를 깨닫게 될 때면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더 좋은 일로 바꿔 주시는 하나의 축복도 얻게 될 것이기에 이제라도 우린 믿는데도 나에게 고난이 있게 되는 이유를 알아야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를 봐도 요셉이 인신매매로 팔리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그 모든 과정에서 요셉을 버티게 했던 힘이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께는 이유가 있으시다! 믿음이었습니다.
지금은 노예로 살지라도 이유가 있으시다. 현재는 감옥에 갇혔어도 이유가 있으시다고 믿은 게 요셉의 믿음이었습니다. 결국 그런 믿음의 결과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으로써 지난 날의 고난에 대한 이유가 밝혀지는 날을 보게 됩니다.
이렇듯 요셉이 노예로 고난당한 것엔 다 이유가 있었고, 억울한 누명으로 시험당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에게 닥친 모든 고난에도 ‘하나님껜 다 이유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 이것이 진정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믿음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고난이 허락됩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고난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온전케 하기 위한 훈련’으로 나를 훈련시키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때 온전케 하기 위한 훈련이란 말에서 우선은 ‘온전케 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기억나시나요? 제자 훈련 과정에서 ‘온전케 한다’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외과에서 부러진 뼈를 다시 맞추거나, 어부들이 찢어진 그물을 수리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나를 온전케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약한 것을 강하게, 나의 망가진 것을 새롭게 만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훈련이 있게 하시고 연습이 필요하다 하시는데, 이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훈련을 시키기 위한 도구가 세상이 주는 고난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사람일지라도 곧바로 씨름 선수나 레슬링 선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듯이 믿음도 하나님을 믿자마자 믿음이 강하고 새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도 훈련을 받아야 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최근 들어 매우 염려스러운 것 중 하나가 우리나라 학교에서의 교권이 무너지고 갑질하는 학부모가 급증한다는 사실입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함함하다’라는 말은 ‘털이 보드랍고 반지르르하다.’는 말인데, 가시뿐인 고슴도치의 털이 그럴 리는 없지요. 그럼에도 고슴도치 어미에게는 제 자식이 그렇게 여겨진다는 겁니다.
짐승도 그러하건만 하물며 사람 자식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렇더라도 고슴도치처럼 내 자식만 함함하다라며 키우게 되면 결국엔 자식을 망치는 일이 되고 맙니다. 자식이 귀할수록 엄한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 교육 중에는 야단도 맞고, 책망도 받고, 그러면서 커야 바른 사람이 되게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 함함하다고만 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능력과 약점들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너에게는 이런 훈련이 필요하다.”시며 각 사람에게 합당한 훈련을 시키시는데, 이게 각자에게 있게 되는 고난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회초리의 용도가 무엇인지를 잘 아실 겁니다. 그러나 의외로 회초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분이 많습니다.
문헌에 보면 옛날의 학부모는 자식을 서당에 보낼 때면 반드시 회초리 한 다발을 잘 다듬어서 아이 손에 들려 함께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책 한 권을 떼고 나면 ‘책걸이’라 하여 떡과 음식을 장만해서 훈장님께 고마움을 표했다고 하는데, 이때 아이 부모는 자기가 아이 손에 들려 보낸 회초리 다발도 눈여겨보았다고 합니다. 그때 회초리가 얼마 남지 않았으면 훈장이 자기 아이를 잘 교육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 매우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어버이나 스승이 자식이나 제자의 잘못을 꾸짖기 위해 회초리로 볼기나 종아리를 때리는 것을 ‘초달’이라고 하는데, 이 초달이 교육이란 말이고 훈육 또는 훈련이라는 의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느 부모가 자식이 매 맞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훈련을 통해 아이가 올바른 어른으로 성장해 나갈 것을 알았기에 부모는 아이로 하여금 초달을 견디도록 아이 손에 자기가 맞게 될 회초리를 들려 서당에 보냈던 겁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제 후로는 내게 있는 고난을 단지 괴롬이나 고생쯤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이 나를 위한 ‘초달’이라고 여기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초달’을 통해 미숙한 아이에게 성숙한 인격이 생기고 인성이 자라듯이 ‘믿음의 초달’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는 성숙한 믿음이 생기게 되고 그 믿음으로 인해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고난을 다 막아주시는 게 아니라 때론 고난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온전케 하는 훈련을 받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약했던 믿음이 강해지고 우리의 망가진 인생을 새롭게 수리해 가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로마서 5:3절과 4절에서 권면하기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들이 커서 청년이 되면 군대에 보내는데, 처음엔 고생할 생각에 안쓰러워 눈물짓다가도 아들이 힘든 훈련을 다 마치고 늠름한 모습으로 첫 휴가를 나와서는 부모님께 걱정 마시라고 위로할 때면 그 흐뭇함에 또 한 번 눈물을 흘립니다. “얘가 군대 가더니 사람 됐네”라고 하며 오히려 흐뭇해합니다.
물론 군대에서의 변화가 일시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훈련이라는 것이 사람을 그렇게 달라지게 만듭니다.
같은 이유로 하나님도 훈련을 통하여 우리를 온전케 하시려는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의 순간을 괴롬이 아닌 믿음을 키우기 위한 훈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생의 고난을 고난으로만 당하느냐 믿음의 훈련으로 감당하느냐는 그 결과에 있어서 천지 차이가 나게 됩니다.
고난을 당하기만 하면 결국엔 괴롬과 고통만 남지만, 고난을 오히려 믿음을 키우는 훈련으로 감당한다면 결과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뒤따를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은혜는 우리가 받기 위해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만 있으면 은혜가 나를 찾아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혹여 나에게도 이런저런 고난이 있다고 하신다면 이제부터라도 “고난은 훈련이다!”라고 생각하세요.
이렇게 생각하면 당장의 고난을 이겨내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고난은 우리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허용됩니다.
야고보서 1:12에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 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전에 어느 분이 이 말씀을 해석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를 한 번 시험해 보십니다. 다시 말해 잠시 흔들어 보신 후에 “그래 니가 잘 견디었구나. 그러니 이젠 내가 복을 주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 해석대로라면 우리를 시험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건데, 이런 해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때론 하나님이 시험을 사용하시기도 하지만, 시험을 주는 건 늘 사탄이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따라서 야고보서 1:12절의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는 것은 ‘복이 있도다.’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참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말씀은 시험 중에 무조건 참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시험을 가져오는 사탄에게 지지 않는 믿음을 가지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마셔야 할 것이 시험은 마귀가 주는 것이고 하나님은 필요할 때면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한 믿음의 훈련으로 시험을 이용하실 뿐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아셔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에서 오해가 없게 됩니다.
실제로 고린도전서 10:13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성도에게 시험을 피하게 하시는 분이시지 결코 직접 시험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행여라고 내 인생에 시험이 닥쳤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피할 길을 내어놓으신 하나님을 믿어 시험을 감당할 힘을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듯 시험은 사탄이 가져오지만, 하나님이 그걸 허용하시는 이유는 시험당할 때에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는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또 다른 훈련 방식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고난의 목적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길을 잘못 들었으면 그때라도 방향을 바꾸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듯이 고난의 목적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은 살다 보면 고난의 때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고난의 때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들었거나 한 번쯤은 읽었을 정도로 유명한 기독교의 고전인 천로역정이라는 책은 교회 생활 좀 했다 하는 사람이라면 존 번연이라는 사람이 썼다는 정도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존 번연이 천로역정을 언제, 어떤 이유로 쓰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는 분이 많습니다.
천로역정은 존 번연이 감옥에 있을 때 쓴 책입니다.
당시 존 번연은 국교회가 국교였던 영국에서 청교도 신앙을 전파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뜻밖의 고난을 당한 겁니다. 그러나 존 번연은 고난에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을 활용하여 기독교 신앙 서적을 집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만약에 존 번연의 감옥 생활이 없었다면 천로역정이라는 고전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 말고 이것을 해라.”라고 하실 때면 잠깐이나마 고난을 이용하여 새로운 일을 하도록 우리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가십니다. 따라서 고난의 때를 만났다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찾아온 고난의 때를 어떻게 활용할지를 놓고 심사숙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번 찾아온 고난은 쉽게 물러가지 않습니다. 아닌 말로 어제 고난을 당했는데 오늘 고난을 극복했다는 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도 본문 3절에서 말씀하기를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고난을 활용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하는 고난에 일일이 대응하거나 저항하려 하는 대신 일단은 고난을 참아내고 견뎌내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엔 그렇게 고난 중에 인내하면서 그 고난의 때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방도를 찾음으로써 고난을 오히려 내 인생에 유익 되게 활용하려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우리가 고난을 활용할 수 있게 될까요?
당장 세상적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손 놓고 있지 말고 그렇다면 신앙적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나를 찾아보려고 해야 합니다.
행여라도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며 세월을 낭비하지 마시기를 바라며, 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라고 원망하며 인생을 허비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고난 중에 놔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에서도 보면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라고 권면하고 있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어찌 맘이 변하여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매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기도 중에 인내하시고, 닥쳐온 고난을 활용하여 내 믿음을 훈련함으로써 믿음을 향상시키는 기회로 삼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는 하나님이 결국엔 믿음대로 역사하셔서 내 인생에도 피할 길을 열어 주시고 고난을 잊을 만큼의 복된 인생이 되게 해 주실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