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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고요하게, 좀 더 고요하게 / 황인찬 - 구관조 씻기기
구관조 씻기기 작가 황인찬 출판 민음사 발매 2012.12.07 고요하게, 좀 더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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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성(神聖)한 신성(新星)
고요가 잎보다 꽃을 먼저 흔든다
(유희경, [느릅나무가 있는골목
유희경 시인의 시 [느릅나무가 있는 골목] 의 마지막
문장을 읽는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시적 허용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고요라는 추상이 잎이나 꽃과 같은 실체를 흔들 수 있다는 진술이고, 다른 하나는 고요가 '잎'보다 '꽃'을 먼저 흔들 수 있는, 선택의 가능성을 제시한 점이다. 이제 이 시적 문장에 대한 해석(감상)은 독자의 몫
이다. 나는 그의 문장을 이렇게 본다
꽃대에 꽃이 활짝 피고 잎사귀가 무성할 때, 고요는 잎보다 꽃을 먼저 흔든다. 상징적인 의미로 꽃은 주연이고
중심이며 잎은 조연이고 변방이다. 따라서 고요는 사물의 혹은 감각의 중심을 무엇보다도 먼저 흔들 힘을 가졌다고 받아들여진다. 어떻게 이를 입증할 수 있을까. 시에서 굳이 예를 찾고 싶다면 헤맬 필요가 없다. 최근에
가장 주목받는 젊은 시인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소개하는 데 조금 돌아온 감이 있다. 황인찬이다
그의 시가 신성하고 신비하다는 평가는 등단 이래 내내 있어왔다. 그가 시 안에서 구현해내는 어떠한 격리감, 괴리, 신비로움이 미세한 감각의 자극을 불러일으켰다는 의견들이 일반적이었다. 문단의 이러한 평가가 크나큰 찬사로 느껴지는 것은 근래에 보기 힘들 정도로
이 신인에 대한 문단의 관심과 조명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인찬을 신성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독특한 매력을 지닌 그의 작품들은 균일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제 그의 등단작에서부터 하나씩 시를
들여보려 한다.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황인찬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신성하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작품 해설을 쓴 박상수의 말을 빌리자면 대상과의 격리감, 대상을 통해 느껴지는 비실체성과 비현실감이 신성 그 자체의 증거라고 본다. 그래서 마치 신이 내려다보는 관점과 같이 느껴진다. 황인찬 시의 주체들은 대상에 대해 관조하고 사색하며 보존한다. 특히 내면의 연약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등단작인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은 대표적인 예다. 화자는 방안에서 백자와 여름을 관찰한다. 이 시가 고요한 이유는 방 안에서 오로지 화자와 백자 외에는 어떠한 등장인물이나 중심 제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 다. 중심 시어인 백자, 빛, 여름, 그리고 화자에는 모두 연결고리가 있어서 시가 꽉 결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간결한 흐름으로 툭툭 끊어서 쳐가는 식의 구성은 화자의 시점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에 화자가 있다. 홀로 백자를 천천히 들여다보면서 백자가 빛나는 모습이 흡사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느낀다. 그런 화자에게 단 하나의 질문이 있다. 이 질문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모호 함이 백자와 화자 사이의 긴장을 지탱한다. 백자는 당연히 대답하지 않으므로. 수많은 여름(시간)에게 화자는 백자라고 말해준다. 모든 것이 여전히 보존되었지만 백자는 단 하나의 여름으로 치환된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이제 화자는 단 하나의 여름을 본다. 여름은 빛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계절이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며 모든 것이 점층적으로 사라질 때 에도 백자는 그곳에 있다. 그 영원성이 백자에게서 마음 으로 옮겨간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화자의 혹은 누군가의 마음은 방 안에 백자로 남아있다.
영원성은 마지막 연에서 깨져버린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으므로. 여름이 지나가자 백자가 사라졌고, 영원성을 품었던 마음도 사라졌으며, 결국 화자도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이라는 표현은 처음 에는 백자의 형상을 수식하는 데 쓰였지만, 반복해서 썼을 때에는 소멸의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빛나는 것처럼 (= 폭발) 아니면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소멸).
황인찬 시의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반복-변주다. 이 시에서도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과 같은 표현이 반복되었고,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은 변주되어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의미의 강조와 심화가 함께 일어난다. 하나 더 짚고 넘어가자면, 이제 요즘 시에서 '언어의 경제성'은 그 필요성을 서서히 잃어버리는 듯 하다. 굳이 압축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장황하거나 연결고리가 약한 군더더기들은 당연히 걷어 내야겠지만). 어떤 표현만이 줄 수 있는 감각을 위해 문장을 늘여쓰거나 행갈이로 끊기도 한다.
가령,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면서'와 같은 반복-변주는 비경제적일 수 있지만, 이 표현이 가져가는 느린 호흡은 큰 장점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하얗고/그것 은 둥글다'도 마찬가지다.
이제 사색하는 화자의 모습을 다음 시 '발화'에서 관찰 해본다.
발화 / 황인찬
중간이 끊긴 대파가 자라고 있다 멎었던 음악이 다시 들릴 때는 안도하게 된다
이런 오전의 익숙함이 어색하다
너는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지?
왜 나를 떠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거지?
통통거리는 소리는 도마가 내는 소리다 여기로 보내라는 소리는 영화 속 남자들이 내는 소리고
어떤 파에는 어떤 파꽃이 매달리게 되어 있다
어떤 순간에나 시각이 변경되고 있다
저 영화는 절정이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이 끝나 버린다
그런 익숙함과 무관하게
찌개가 혼자서 넘쳐흐르고 있다
불이 혼자서 꺼지고 있다
나는 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지나친다
이 시에서는 관점이 계속 변하면서 연과 연 사이의 거리감이 만들어진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대상을 관조하는 태도가 이어짐을 볼 수 있다. 다만 그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고 산만한 듯 부지런히 바뀐다. 주변은 어지럽다. 음악이 멎었다가 다시 들리고, 대파가 끊겼다가 자라 나고, 도마 소리와 영화 대사들이 소음의 이미지를 연상 시키며 들려온다.
그러나 화자는 고요하다. 생각을 그저 지나쳐버린다. 어째서 그는 '발화'하지 않고 지켜만 보는가. 갑자기 화를 낸 이유를 모르고, 떠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이유를 모르는데. 이 점이 황인찬 시의 주체들이 가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동성이다.시안에서 관찰하는 대상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화자가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바꾸거나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현상들은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찌개가 혼자서 넘쳐흐르고, 불이 혼자서 꺼지 는 것처럼
나는 시 발화를 읽으며 감탄했다. 재밌는 구석이 많다.
연과 연들이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크게 세 갈래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물의 이야기(1,4,5,7연), 영화의 이야기(4,6연 ), 화자의 이 야기(2,3,8연)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지막 연 하나로 수렴된다. 각각의 이야기에는 주제가 될 만한 연이 있다. 사물에서는 5연이고, 이야기에서는 6연이며 화자에 대해서는 8연이다.
8연은 살펴보았으니, 5연을 읽어보자. 어떤 파에는 어떤 파꽃이 매달리게 되어 있다는 말은 운명론이다. 황인찬이 즐겨쓰는 'A는 A다'의 문장인데, 특정 종류의 파에는 특정 종류의 파꽃이 매달리게 되어있고 이것은 사람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너'에게는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상대가 화자를 떠난 건 단순히 화자가 상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이제 발화할 의지를 서서히 잃게 된다. 여기서는 6연이 단서가 된다.
저 영화는 절정이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이 끝난다. 화자와 '너'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제가 절정이었는지도 모른 채, 감정의 불이 혼자서 꺼졌을 것이다. 감정이 끓어올라 결국에는 찌개처럼 넘쳐버린 '너'는 그렇게 나에게 화를 내고 떠나버렸다.
화자가 전화를 걸지 않은 이유는, 그래서 체념때문이 아 니었을까. 생각은 했지만 실행하지 못하고 지나칠 때의 마음. 상대에게 떠나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만큼은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찾으나, '어떤 순간에나 시각이 변경되는 것'과 같이 금세 식어 꺼져버린 마음. 결말에 이르기까지 관조하는 화자의 모습이 시 [발화] 에서의 핵심이다.
표현 면에서 조금 더 말해보면, 그는 반대 의미를 갖는 시어를 문장 안에서 붙여쓰는 것에 능숙하다. 예를 들면, 2연의 '익숙함이 어색하다'와 같은 문장이 전형적이다 제목이 중의적인 것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여기서는 화가 세 가지 형태로 나오는데 하나는 불(X)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의 화이며, 마지막으로 말할 때의 화(이야기 화) 다. 또한 '너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생각을 지나친다'라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바꾼 것도 인상적인 대목이다.
단 두 편의 시를 통해서도, 황인찬의 시가 자아를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물을 향한 집요한 관찰과 사색을 거쳐, 주체들의 최종 목적은 스스로의 단면을 관조하는 것이다. 좀 더 밀접하게 연관된
다음 시를 읽는다
#2. 생각과 생각나지 않음
소용돌이치는 부분 / 황인찬
봄은 오고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것들 꺼지는 것들
실내의 가짜 꽃나무 아래 내가 앉아서
거리를 헤매는 나를 불렀다
이리 와 여기로 와
어서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채 떠났다
실망한 나머지
진짜 꽃나무에 목매달았다
굽어 가는 마음과 굽이치는 마음이 서로 부딪치고
소용돌이가 소용돌이치는 봄날이 조용히 계속되었다
이후로도 나는 드문드문 나에게 나타났다
여기로 오라고 나를 부르며
꽃나무에 매달린 채로 나에게 손짓했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만은 어쩐지 선명하였다
간혹 죽은 내가 잠든 나를 깨우기도 했다
소용돌이가 소용돌이치는
그 애매하고도 분명한 곳에서
자아가 분열한 시다. 진짜 꽃나무에 목매달아 죽은 내가 있고, 그런 꿈을 꾸며 잠든 내가 있다. 두 자아의 사이에서는 '굽어 가는 마음'과 '굽이치는 마음'이 서로 부딪히며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소용돌이라는 형상이 주는 기묘한 얽힘을 활용하여 시 전반의 분위기가 몽환적이고 오묘해졌다. '거리를 헤매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조차 다소곳해서 소용돌이가 소용돌이치는 봄날임에도 배경은 고요하고 차분하다
죽음의 이미지가 선명한 시라서 공연히 숙연해진다. 주체 안에 있는 두 자아는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데, 이 둘은 '앉아있는 나'와 '거리를 헤매는 나'로 나뉘고, '부르는 나'와 '듣는 나'로도 나뉘며, '죽은 나'와 '잠든 나'로 구분 된다. 그래서 둘의 얽힘은 소용돌이 같다. 그 배경에 자리 잡은 봄도 생명으로만 가득한 계절처럼 보이지만, 실은 피어오르는 것들'과 '꺼지는 것들'이 부대끼는 계절이다.
자아들은 서로를 인식하면서도 교류하지 못한다. 같은 '나'이면서도 다른 성질을 지니고 다른 행동을 하는 '나'여서 두 자아는 타인처럼 서로의 단면을 관찰한다. 그렇다고 자아가 교류에 대한 의지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로 오라'는 서로의 부름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질 뿐이라서,두 자아는 '관조' 이상의 결과를 얻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둘 사이의 단절이 고독감으로 표출된다.
이 시에는 모호한 구석이 있다. 시인의 표현대로 '멀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만은 선명한' 그런 시다. 세세 하게 말해보자면, 시의 몽환적 분위기가 무엇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인지부터 모호하다. 두 자아가 서로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호하다. 지난 시평에서 다룬 문인수의 시와 지극히 상반되는 지점에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학평론가 신형철도 황인찬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이 지금 무언가를 포착했고 느꼈고 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 그러나 모른다는 것의
매혹을 알 만큼은 현명한 시인'
이 시인이 매혹적인 이유를 전적으로 잘 보여주는 시를
읽으려면 다음 시 [개종] 을 읽어야 한다.
개종 / 황인찬
누군가 문을 두드리기에 나는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의 안쪽에는 나와 기원이 있었다
나는 기원을 바라보며 혹시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지 물었다
기원은 내게 잘못된 일은 없다고 발해주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올 여름의 아름다운 일들을 생각했다
아무런 일도 생각나지 않았다
뜨거운 빛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시에서는 언어의 미세한 변화가 큰 감각의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문장의 반복과 변주가 '시적인 문장'의 한 형태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시인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다. 김승일의 시처럼 유희적 으로 나올 수도 있고, 유희경의 시처럼 물기 어린 감정이 잔똑 배어나올 수도 있다. 방금 읽은 시에서도 언어를 조탁하는 시인의 능력을 재확인할 수 있다.
역시나 반의어 사용이 탁월하다. 예를 들면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고' 안쪽에는 화자와 기원이 '있었다'는 표현,
화자가 잘못된 것이 '있는지' 물었고 잘못된 일은 '없다'는 답변. 표현 속의 정서도 '불안했던' 감정이 "다행이다"라는 말과 함께 '평온한' 상태로 온다. 끝으로 아름다운 일들을 '생각했으나' 아무 일도 '생각나지 않았다'는 화자의 고백. 존재나 사건의 유무가 주는 말들의 감각이 시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황인찬 시의 특징들과 연관시켜보
자면, [개종]의 성스러움은 '기원'의 등장에서 나타난다. 그러니까, 화자와 화자의 '기원'이 함께 있다는 설정이 매우 독특하면서도 독자를 사로잡을만큼 매력적으로
꾸며졌다. 문을 두드렸는데 밖에는 아무도 없다는 기이한 상황에서, 화자의 불안함을 잠재워주는 '기원'의 대답은 명료하다
잘못된 것은 없다고
뜨거운 빛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방 안이다(화자는 누군가 문을 두드렸기에 문을 열었다고 했다). 아무도 없지만 빛이 쏟아진다. 영적이고 고요한 분위기는 여기서 비롯되는 건가. 모든 상황을 담담하게 말하는 화자가 애처롭다. 무더운 여름에, 화자는 아무런 일도 생각나지 않는 여름에 대한 생각을 하니. 애처롭지 않을 수 있는가.
시 [개종] 은 연작이다. 왜 시의 제목을 개종으로 정했는지 명쾌하게 들어오진 않지만, 아주 적절하게 붙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나는 시집을 읽으며 황인찬의 시가 문단에 주목을 한 몸에 받을만하다는 것에 동의했지만, 그 이유를 조리있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어째서 그가 쓴 문장들이 기억의 한 켠에 남아, 잊을만하면 떠오르는 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확신할 수 있는 건 모두가 그의 다음 시집을 눈여겨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고마운 지인 덕분에 그의 시집을 받아들어 하나씩 읽는 동안, 가을이 지나가고 있었 다. 정말이지,
쓸쓸하고 고요한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