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길산 첫머리길목에는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언제나 익숙한 꽃들이 얼굴을 내민다. 채송화, 봉숭아, 해바리기, 호박꽃,....내가 이름을 아는 거라곤 이 정도뿐이지만 정작 녀석들의 입장에서는 이름따윈 그다지 필요치도 않은 듯한 표정이다. 어차피 잘 불러주지도 않는 이름이니 말이다.
봉숭아를 보니 조금 더 반가웠던 것은 일전에 한 친구놈이 밤을 잊은 채 아파트화단 꽃에 물을 주고, 또 제 딴엔 자랑스러워서 사진을 카톡으로 전송하기를 수차례 해댄 덕분에 안면이 트였던 탓이다. 꽃이나 사람이나 늘 가까이하는 편이 친숙하다는 의미일 게다.
녀석들의 습관은 사람들을 만나면 늘 제 몸을 흔들어대는 것이다. 표정을 봐서는 반갑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오늘 그 녀석들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시무룩해 보였다. 어떤 놈은 짜증스러운지 사람들이 지나가는 대도 인사는 커녕 얼굴을 반대로 돌리고 있다.
"넘 덥거든요! 나라고 아저씨들 보고 꼭 웃어야 됀다는 법이라도 있어요? "
인상도 잔뜩 찌푸리고 목소리도 짜증이 섞여있다.
오늘은 절기상 입추(立秋)라고는 하지만 운길산초입부터 경보음이 울렸다. 날씨가 엄청 더우니 활동을 자제하거나 주의라는 당국의 배려메시지이다. 이 정도 배려라도 받고 있으니 어느정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해마다 입추가 되면 나는 습관적일 만큼 떠올리는 한 사람이 있다.
춘원 이광수 (春園 李光洙)
왜 하필이면 그 분일까?
한국초기문단의 최고문호이자 최악의 매국노라는 오명을 지니고 있는 양면의 그늘을 지니신 분!
어릴적 어머니는 이따금씩 춘원 선생이야기를 해주셨다. 특히 '색일'이라는 글을 읽고 무척 인상에 남으셨던 모양이다. 오지였던 어머니의 고향 경북 봉화마을에서도 춘원선생의 명망은 두터웠던 모양이다.
내가 춘원선생의 저작들을 사실상 피부로 대하기 시작한 것은 나의 큰매형의 책장에서 부터 였다. 중학교 2학년쯤이다. 매형은 책도 많이 읽고 또 세상사를 보통사람이상으로 겪은 사람처럼 입담도 거칠었다. 그는 춘원 이광수 양장본전집을 소장하고 있었다.
나는 이 전집에 호감이 갔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빌려 읽었다. 그 중에서 <입추(立秋)>라는 한편의 산문제목의 글을 잊지 못한다.
내용은 춘원 자신이 산길을 걷다가 우연히 한마리의 죽은 새를 발견하고 그 새를 지팡이로 걷어내어 한 곳에 묻어 주면서 문득 떠오른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을 서술해가는 것이다. 그 글의 대한 전개는 이제 기억에서 희미해져 있지만 해마다 입추가 되면 아직도 글의 여운이 이따금씩 남는다.
오늘 입추!
나는 산길을 올라가다가 길가 언덕에서 버섯을 발견했다. 독버섯이다.
그는 섬짓할 만큼 화려한 흰색의상차림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백구두에 흰슈트를 입은 사람을 보면 근거도 없이 그 사람을 일단 날라리쯤으로 편견을 박아버리 듯 이 친구도 늘씬한 몸매에 흰 의상을 입은 채 꼿꼿하게 길가에 서 있는 것이다. 그의 의상과 나의 등산복을 비교하자니 거대한 자연생산대비 세상에 찌든 싸구려복장의 초라함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일단 나는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좀 더 가까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오히려 시쿤둥했다. 멀리서 서로 마주보는 것은 인정하되 피차 가까이 하지는 말자는 표정이 역력했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섰다가는 그는 자신의 백구두로 정강이를 걷어 찰 기세다.
" 마이클 잭슨.... 당신 마이클 잭슨이지? "
물론, 이것은 나의 순간적인 실언이었다. 그의 태도가 슬쩍 착각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 야, 이 병신새끼야! 내가 어딜봐서 잭슨이냐? 어디서 잭슨이름은 알아 가지고... 그 자식은 벌써 뒤진지가 오래 됐잖아 ! 이 놈아 난 운길산의 백구두야 백구두!
너처럼 막 돼먹은 놈은 처음이야.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너 같은 놈 진짜 싫다. 우선 생김새부터 마음에 안들어. 추잡스런 멧돼지새끼라도 너 보단 낫겠다."
나도 기분이 상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나 녀석의 모양을 보면 볼 수록 섬짓섬짓했다.
" 네 꼴을 보니 볼짱사납네. 난 너같은 녀석들을 볼 때마다 한심스런 생각부터 든다. 너 오늘 여기 왜 온거야? "
그는 골이 올라서 막말을 서슴없이 지껄여댔다.
"ᆞᆞᆞᆞᆞ"
" 틀려먹었군. 넌 아무런 방향성조차 없는 놈이야. 매사 자신감도 없고 희망도 빈약하지. 그렇게 의미없이 살다가 언젠가는 독성이 네 왼쪽다리를 타고 퍼져서 죽고 말껄.....물에 물탄듯 술에 술 탄듯 싱겁떠는 네놈. 내 맛 좀 볼래? 히히 "
나는 녀석을 걷어차고 싶을 정도로 잔뜩 골이 났지만 녀석과 맡붙기는 여간 겁나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부담스런 것은 그의 흰색 차림이었다. 잘못 걷어찻다가 녀석의 백색피붓가루가 내 몸 어딘가에라도 엉겨붙기라도 할 경우엔 당장에라도 119구급차를 불러야 할지도 모를 형상이다. 이럴땐 가슴을 쥐어 짜듯 참는 수밖에 없다.
"에이 마이클 잭슨같은 놈!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콧구멍은 들창코에 눈두덩은 푹꺼져서 해골같은 놈. 너 피부껍데기를 몇 번 갈았지? "
녀석의 성깔을 재보면서 슬슬 신경을 건드렸다.
녀석의 몸체가 점점 불어나는 것같았다.
다시 정면을 피해 슬쩍 쳐다보았다. 화려한 독기가 금방이라도 내 눈동자속으로 파고 들 것만 같았다. 머리를 치켜든 자세가 마치 독사과일 수도 있다.
그래도 오기삼아 녀석에게 살금살금 다가가서 스마트폰카메라를 가까이 들이댔다. 렌즈를 조정하자니 손목이 덜덜 떨렸다. 하이얀 죽음의 공포! '그래, 백색이 이처럼 두려움을 줄 수도 있구나'하고 내심 놀랐다.
언젠가 읽었던 신문기사를 떠올렸다.
한번도 뱀(snake)을 본 적이 없는 어린 원숭이가 뱀을 보자마자 극도의 공포심을 느낀다. 말하자면 천성적으로 DNA자체에 어떤 공포감지물질이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다.
녀석의 백색의상앞에서 나는 겨우 한 컷을 찍었다. 그리고 엄마야! 외마디소리를 지르곤 재빨리 도망치다시피 자리를 피했다. 사진을 살펴보니 그것은 마치 화려한 공포영화포스터를 연상시켰다.
" 겉으로 화려하고 매력적이라고 해서 속내까지 그렇지는 않은 경우도 많지. 남자앞에서 겉으로는 온 갖 교태를 부리지만 정작 중요한 마지막 순간에서는 속옷을 벗지 않는 그런 여자와는 물론 다른 거겠지. 이건 태초부터 죄악인 거야. 악마의 유혹! 저기 박수무당같은 거 말이야. "
이제 마음을 가다듬으며 여기저기 온 갖 모양새를 부리는 녀석들의 버섯부족들을 찰깍찰깍 찍어 대기 시작했다.
만약, 입추(立秋)산행길의 춘원선생님과 함께 이 산 길을 거닐었다면 그 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첫댓글 첫번째가 운길산 백구두입니까?
저 버섯은 식용과 독버섯이 똑같이 생겨서 더욱 골치 아픈 녀석이지요
백구두 앞에서 떨었던 김이진 선생님 모습이 상상이 되어 즐겁습니다.
선생님은 자연과 이렇듯 대화를 잘 하시니 판타지 동화 한 번 써 보시지요.
기대해 볼게요,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