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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1년 10월 24일 주일 오전 예배
사도행전 설교
성경낭독 : 욥 42:1-6, 10-17; 막 10:46-52
본문 : 행 8:1-4
제목 : “우리는 문 뒤를 볼 수 없다”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87편 1,2,3,4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53편 1,2,5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47편 1,4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5편 8,9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72편 1,2,5,10
성찬식 찬송 – 시 132편 8,9 (고정)
폐회찬송 – 시 139편 1,3,12 (고정)
우리는 문 뒤를 볼 수 없다
중국 속담 중에 “물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물고기에게는 절대로 묻지 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하게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인 러디어드 키플링은 “잉글랜드 깃발”이라는 시에서 “잉글랜드만 아는 이들이 잉글랜드에 관해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 속에’ 있는 이들은 그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없음을 알려줍니다. 선입견이라 할 수도 있고, 한계 속에 갇혀 있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이것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한 시스템의 의미는 그 시스템 밖에 있다”라고 말했는데, 어떤 작가는 이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말은 인생과 세계, 시간과 역사에 관한 한 진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세계에 매여 있고, 시간에 매여 있고, 역사 속을 살아가는 인생들로서는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에 대하여 명확하게 보거나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물고기에게 물은, 그리고 잉글랜드인에게 잉글랜드는 자기가 벗어나거나 탈출할 수 없는 세계이면서,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선입견과 한계를 결정지어주는 환경이 됩니다. 즉 인생은 살아가면서 결코 자신의 한계치 그 너머를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 인생에서 여러 가지 측면에 적용해 볼 수 있지만, ‘우리 삶의 절대적 의미’라는 차원에서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판단을 내립니다. 하지만 내가 인생에서 겪는 그 일이 궁극적인 의미, 절대적인 차원에서 볼 때 옳은지 그른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잘한 선택인지 잘못한 선택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조금 더 쉽고 구체적으로 우리가 늘 만나는 삶의 문제로 이것을 한 번 두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아침에 출근을 합니다. 지하철을 타는 옵션이 있고 버스를 타는 옵션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좋은 길일까요? 자, 지하철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어떤 정신병자가 지하철 역에 폭발물을 폭발시켜 이 사람이 출발한 바로 그 다음 역에서 대형 사고가 일어났고, 이 사람과 또 동승한 전체 승객들은 지하 갱도 속에 갇혔습니다.
사고가 일어나고 나서야 “그때 버스를 탔어야 했어!”라고 하겠지만, 그걸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마침 그날, 마침 그 시간에, 마침 거기에서 정신병자가 폭발물을 거기 터뜨릴 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일들은 ‘대비 불가능한’ 재해들이고, 우리는 언제 이런 ‘대비 불가능한 재해’를 만날지도 모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 바깥에서 인생을 조망할 수 있는 신 외에, 누가 자신의 인생에 어떤 선택이 더 바른 선택인지, 자기 삶에서 어떤 것이 더 좋은 환경일지 결정할 수가 있나요?
어떤 소년에게는 쾌적하고 부유한 재벌가의 환경이 국내 굴지의 기업을 선도해나가는 경영 능력을 키워나가는 데 최적의 배경이 되기도 하지만, 똑같은 환경이 다른 어떤 소년에게는 십대 때부터 마약과 여자에 빠져 살아가도 되는 환경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소년에게는 가난하고 불우한 어렸을 때의 환경이 평생의 올무가 되어서 저주거리로만 남기도 하지만, 다른 어떤 소년에게는 막노동하는 아버지와 술집을 다니는 엄마가, 이를 악물고 살아가게 하는 환경이 되어,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낼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미덕 중의 하나가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때 ‘겸손’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 곧 “나는 무능하고 당신은 전능합니다.”라는 겸손, “나는 현재일을 알지 못하고 당신은 모든 일을 아십니다.”라는 겸손, “나는 환경과 일어나는 일이 굳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파악할 수 없지만, 당신만이 모든 것에 대한 참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라는 겸손입니다.
인생은 결국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을 갖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 전자를 ‘신자’라고 하고, 후자를 ‘불신자’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생에 대한 알량한 몇 꼬투리의 경험과 지식 때문에, 내가 내 인생을 잘 컨트롤하고 있다고, 나는 잘 걸어가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부자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16-2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각 장면들을 우리는 ‘전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깊이 생각하도록 합시다. 성경의 지혜란 결국은 하나님께의 겸손인데, 이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갖출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큰 핍박”
오늘 말씀은 한 장면을 두 각도에서 보는 것으로 풀어가 보도록 합시다.
먼저 우리가 살필 첫 번째 각도는 1절의 뒷부분에 나와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의 모습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큰 핍박이 났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핍박이라는 것은 헬라어로는 ‘메가스’인데, 영어의 Mega가 여기에서 왔습니다. “거대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엄청나게 큰 교회를 일컬을 때 ‘메가 처치’라고 하고, 초광역 도시를 일컬을 때 ‘메가 시티’라는 말도 씁니다. 여러분이 영화를 보러 다니시는 ‘메가박스’도 이런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1절에서 “큰” 핍박이 났다는 것은 이제까지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보아 왔던, 사도들이 공회에 잡혀가거나 옥에 갇혀 있었는데 천사를 통해 풀려났다거나, 이런 종류의 일과는 차원이 다른, 굉장히 무시무시한 핍박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트리거
이 핍박의 트리거, 곧 방아쇠가 된 것은 바로 ‘스데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데반의 죽음이 핍박의 트리거가 되었다”라는 사실을 통해서 당시의 유대 사회를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요약되어 있는 성경의 몇 장, 몇 구절만을 읽을 뿐인 것이기 때문에, 이 작은 분량을 가지고서는 당시의 분위기, 당시의 사회적 동향 같은 것을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일어나는 일들이 강하게 보여주는 성격을 통해서, 비록 성경에는 상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더라도 정황을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곧 오늘 본문과 같은 이런 상황속에서는, 스데반을 죽이는 일을 통해서 폭발해버린 당시의 민심, 당시 유대인들 전체에 흐르고 있던 감정적인 기류, 이런 것들을 강력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곧바로 전체 기독교회를 향한 탄압으로, ‘메가’, 즉 ‘강력한’ 핍박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때 유대 사회 안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강력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위험하다!”, “이들을 가만 내버려둬서는 큰일이 나겠다”하는 정서가 유대인들 안에는 강하게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그러한 공감대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발화점이 되는, 극단적이고 도발적인 행동인 ‘스데반을 죽이는 일’이 나타나게 되니까, 이 잔뜩 눌려있던 정서들이 갑자기 폭발하면서, ‘극단적인 핍박’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보통 폭동이 일어나거나 할 때, 역사적으로 항상 그렇습니다. 보통 이런 격한 일들은 사실은 ‘아주 작은 일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그 작은 일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물 밑에서 공감대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그것을 폭발시킬 어떤 일이 일어나면서! 그것으로 인해 전체가 확 터져나오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죠. 딱 지금 사도행전 8장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인 불안감, 위기감, 이단이라고 생각되는 기독교회의 성장으로 인한 굉장히 큰 위협......이런 것들이 정서 속에 들끓고 있었는데, 이것이 실제로 행동으로 표출은 되지 않고 있었다가,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 극단적인 상황이 하나 딱! 발생을 하니까, 마치 홍수에 둑이 무너져 내리듯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게 된 상황, 그런 것입니다.
핍박의 강도, 그리고 지속되는 핍박
1)
그리고 이 핍박의 강도를 보십시오.
우리는,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이제까지 사도들이나 기독교회를 향하여 공회나 유대인들이 행해 왔던 핍박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핍박이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이제까지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 직접적으로 목숨에 위협을 받는 그런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인 증거로......이제까지는 아무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모두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핍박이 강력했던 것입니다. 곧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지요.
이제까지는 사실 사도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들이 이 새 언약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회는 1) 말로만 권고하거나, 2) 매를 때리거나, 3) 옥에 가두는 정도의 핍박으로 그쳤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을 죽임으로 인해서 이제는 핍박의 강도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직접적으로 사람을 학살하는 단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굉장히 강력한 표현입니다. 한 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루마이노라는 동사는 ‘야수적이고 병적인 잔혹성’을 나타낸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핍박의 강도가 무시무시해졌습니다.
2)
그리고 동시에, 이 핍박은 이제 일시적이거나 잠깐 피하면 지나가는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한 주석에서는 “이 박해는 스데반이 처형당하는 날 시작되었으며, 그리고 일정 기간 지속되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9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니라.”
사도행전의 세계는 오늘날과 같이 전화나 팩스가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 진행되는 데에는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상황을 보면,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하거나(행 22:4에 보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라고 나온다. 본문에 결박만 나온다고 죽이지는 않은 것이 아니다)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는 일을 위하여 공적인 문서를 받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정부나 관공서에서 어떤 행정건을 결정하고 처리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과거에는 당연히 지금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렸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인데 이것이 진척되어 갈 정도로 핍박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장 4절과 5절에도 보면 사울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사울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공문을 받고, 또 다메섹까지 가고, 또 거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고, 끌고 가고 하는 일들이 나옵니다. 이것이 하루 이틀에 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인 사도행전 8장의 말씀에는 ‘스데반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완전히 판도가 바뀐 것이 현격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핍박은 ‘강도’에 있어서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게 되어버렸고, 뿐만 아니라 이 강력한 핍박이, 단지 잠시 잠깐 몸을 엎드리고 있으면 지나갈 폭풍 같은 것이 아니라, 이제 완전히 세상이 바뀌어버렸기 때문에, 도무지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 즉 이전까지는 기독교가 유대사회 안에서 극악한 집단으로까지는 인식되지 않고 있었지만, 이제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뇌관이 터지면서, 유대 사회 전체가 이 집단을 궤멸시켜야 할 집단으로 여기게 되어버렸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상황이란 어떤 것인가?
따라서 우리가 오늘 말씀의 첫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은,
• 이제까지 예수라는 이를 믿고 따르면서 나름 신앙을 얻는 기쁨을 누렸던 사람들이,
•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서 큰 능력과 확신을 얻게 되고,
• 또 나아가서는 이것을 사람들에게 담대히 전파하기도 하고,
•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하여 자기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도 하면서,
• 평온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해왔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이 모든 것이 일순간에 파산해버린, 한순간에 모든 평화가 다 박살이 나 버린 그런 상황입니다. 이제까지는 ‘복되고 행복한 신앙생활’이었다고 한다면, 앞으로는 ‘전쟁 같은, 생존이 담보로 내걸려 있는’ 그런 종류의 신앙생활이 눈앞에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루살렘 교회’라는 장면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장면, 그래서 오죽했으면 자신이 살아왔던 삶터를 모두 다 버리고 뿔뿔이 다른 곳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장면이었습니다. 심지어 이것도 잠시가 아니라, 아예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마리아에, 그리고 11장에는 페니키아나 구브로, 안디옥에 정착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거기 영구히 거주하게 되었을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교회’라는 장면은 일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신앙의 평화, 생활의 안정을 한순간에 모두 박탈당해버린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가끔 그런 때가 있지요.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위기 상황, 어려운 시기를 만날 때 말입니다. 재해에 가까운 삶의 위기를 만날 때, 그런 때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직면한 상황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죽음의 위기에 내몰렸고, 따라서 집도 절도 없는 곳으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상황은 암울했고, 장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장면
우리의 한계
여기까지가 우리의 한계, 우리가 볼 수 있는 지점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현재’까지밖에 볼 수 없고, 그 현재조차도 ‘모든 국면의 현재’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한 상황의 현재, 곧 물에 있는 물고기, 잉글랜드 안의 잉글랜드인으로서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현재의 이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어떤 미래를’ 불러올 것인지, 또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 일들이 ‘궁극적인 분의 어떤 목적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인지......이런 것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통상의 모든 사람들, 오고 오는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다 이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스런 문제가 벌어지고 있을 때의 사람들이란,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또 고통스러워하면서 이 일을 맞닥뜨립니다.
오늘 본문의 정황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성경이 상세히 기술하고 있지 않을 뿐, 이 장면들 속에는 유대인들에게
•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가 끌려가서 살해당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 엄마나 아빠가 감옥에 갇혀서 살 방법이 사라진 어린아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 평생 다니던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생계의 수단이 끊어져버린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 1절의 “흩어지니라”라는 이야기에서 보듯, 몇 대를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싸그리 잃어버리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내어쫓긴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은 수였을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일을 만났을 때, 우리 중 누가 이것을 두고 “아니야, 이건 장차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을거야”라고 말할 수 있나요? 우리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모르니까요. 지금의 일이 나에게 좋은 일이 될지 나쁜 일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무책임하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환란이 닥치고 있을 때 “환란은 좋은 것”이라고 무책임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들이 학살당할 때 “이건 장차 좋은 일이 될 거야”라고 말할 수 없듯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학살을 당하거나, 감옥에 끌려가거나, 가족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때, 그에 대해 무책임하게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는 ‘현재’밖에 볼 수 없고, 그 현재조차도 ‘매우 국한되게’ 볼 수밖에 없다는 우리의 한계로부터 비롯됩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일들에 몇 가지 있습니다.
이제 그것들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사마리아와 에티오피아
첫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은 사도행전 8장 말씀이 바로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에 ‘두 지역’이 언급되면서 ‘빌립’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8장은 모두 ‘빌립’의 이야기인데, 앞부분에서는 그가 사마리아에서 행한 일을, 뒷부분에서는 그가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7장에서는 스데반이 죽었는데 8장에는 빌립이 나옵니다. 두 사람은 모두 6장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로 임명받은 사람으로, 그 이름이 첫 번째, 두 번째로 나온 사람입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행 6:5)
그러니 여기 스데반의 죽음 이후 빌립의 행보에 집중하는 것은 스데반의 사역의 연장선상임을 보여주는 의도가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2)
그런데 스데반의 죽음이 트리거가 되어서 촉발되게 된 핍박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계 곳곳으로 뿔뿔히 흩어졌을 때, 마찬가지로 그 여파로 흩어지게 된 빌립이 가게 된 두 곳이 어디입니까? 첫째 지역은 ‘사마리아’이고, 그 다음 지역, 그 다음으로 만나게 된 사람의 지역은 ‘에티오피아’입니다.
사마리아는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에게는 복음의 바깥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사마리아는 외국 유입 민족들과의 혼합과 종교 다원주의로 인하여 유대인들에게는 이교도와 같은 취급을 받았던 지역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이미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사건’ 같은 것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개같이’ 여겼다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빌립이 처음 복음을 전한 지역이 바로 이 ‘사마리아’였지요. 어둠에 묻혀 있던 지역, 하나님의 복음의 빛이 들어가지 않았던 지역, 소외 당하고 죽음 가운데 있었던 지역이었던 사마리아에, 스데반의 죽음이 촉발한 핍박과 그로 인하여 뿔뿔히 흩어지게 된 유대인들로 인하여, 복음이 선포되게 되었다는 것이 ‘사마리아’라는 지역이 보여주고 있는 일입니다.
특히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 8절을 보십시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비록 “기쁨”이 매우 일반적인 단어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용법에서 이 말은 ‘복음으로 인하여 나타는 결과’를 나타낼 때 종종 쓰이는 말입니다.
행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신학사전은 오늘 본문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 8절에서 기쁨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고, 그들이 믿을 때, 그리고 이적이 나타날 때,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이다.”
즉, 빌립의 사역은 ‘사마리아에 전해진 복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을 통한 핍박은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3)
‘에티오피아’는 어떻습니까? 주석에 보니까 왜 성경이 굳이 ‘에티오피아’ 내시를 사용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당시 사람들에게 뜨거운 남쪽에 있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의 맨 끝 경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제가 과거에 설교를 통해서 “땅 끝”에 대해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땅 끝”은 복음 전도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그 때 주해를 통해서 신약 성경의 “땅 끝”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이방을 가리킨다는 것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즉 실제로 땅의 끝이 어디인가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보다 성경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땅 끝이 어디냐고 여겼다는 것과, 또 땅 끝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사도행전이 보여주려고 하는 ‘교회의 진전’, 즉 ‘복음의 단계의 진전’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복음의 진전, 교회의 진전은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에 나오는 데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입니다. 즉 옛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그리고 거기서 소외된 백성이었던 사마리아, 그 다음은 “땅 끝”으로서의 이방인입니다.
그렇다면 에티오피아 내시는, 이제 10장에 가면 고넬료를 통하여 처음,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될 ‘이방인 선교’, 곧 하나님의 구속 역사 안에서 교회가 이방인에게도 확장되게 될 일이 드러나기 전에! 그 일의 전조 혹은 전초적 사건으로서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셈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하여 촉발되게 된 핍박은 무엇을 불러일으켰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진전, 곧 복음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까지도 그 울타리를 넘어서서 이방인에게로, 세계 바깥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바로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선정된 사람이 ‘에티오피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즉 스데반과 똑같은 위상으로 선택된 집사였던 빌립은 첫째로 사마리아를, 둘째로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행함으로 인하여, 스데반의 죽음이 불러오게 된 핍박과 환란이라는 이 환경적인 요소가, 어떤 방식으로 작용되게 되는지, 무엇을 위한 큰 배경이 되었는지, 그것을 아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유앙겔리조
그리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는 ‘유앙겔리조’라는 동사를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말로는 “복음을 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놀랍게도, 사도행전 8장에는 이 “복음을 전하다”라는 말이 무려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4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
스데반의 죽음 이후 핍박이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흩어지게 해서 그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졌다”라는 말씀입니다.
12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여기는 “복음을 전하다”라는 말을 “전도함을”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일관되지 않은 번역입니다만, 원문에서는 똑같은 단어입니다. 12절의 이 말은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로 인하여 큰 열매를 얻었습니다.
25절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여기에서 “복음을 전하다”는 스데반의 사역의 열매로 인해 이제 사도들이 사마리아를 방문했고 그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역시 빌립의 사역의 연계선상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35절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우리가 조금 전에 살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면을 말씀하는 부분입니다. 일관성을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서도 “복음을 전했”고(아쉽게도 우리말로는 일관되지 않게 “전도함”이라고 번역했지만), 역시 똑같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경이 이것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빌립의 사역이 바로, “이 두 지역에 복음을 전한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죠.
그리고 끝으로 40절을 보시면
40절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마지막 장면으로,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준 후에 여기 저기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빌립의 사역을 끝맺습니다. 이후에 빌립은 더 이상 사도행전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빌립이 오픈해 놓은 이 사역을 바울이 끌고 가야 하겠기 때문이죠. 빌립은 여기 40절에서 가이사랴에 정착했는데, 나중에 21장에 보면 바울이 전도 여행 도중에 가이사랴에 가게 되는데, 거기에서 2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는 빌립을 만납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행 21:8-9)
그러니까 이런 증거를 통해서 보면, 빌립은 오늘 본문에서 이후 펼쳐지게 될 복음 전도 사역의 서론 역할을 충실히 다 한 후에 가이사랴에 정착하여 20년 후 바울이 들르게 될 때까지 거기 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8장에서 다섯 번이나 사용된 “복음을 전하다”라는 단어를 통해서 사도행전 8장이 무엇을 말하려하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알게 됩니다. 이 장은 우리에게 ‘복음 전도’라는 주제를 알려주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목적,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길고 장황한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는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계십니까?
사도행전 8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그림의 정확한 의미를 여러분은 발견하셨습니까?
인생은 마치 거대한 대양의 만 한쪽 끄트머리에서 서서, 그 만의 가장 끝단에 있는 바위, 그리고 그 바위 끝에 붙어 있는 조개 껍데기 위의 해초 한 포기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해초 바닥에는 조개 껍데기가 있고, 그 조개 껍데기는 바위에 붙어 있으며, 그 바위는 만의 수천만 개의 바위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만 또한 전체 대양의 한쪽 귀퉁이에 있는 지형의 일부일 뿐입니다. 인생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1세기의 교회 속, 그러니까 사도행전 8장의 상황 속에서 살고 있었다면, 당장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이런 일들일 것입니다.
• 옆집에 살던 생선가게 아주머니의 남편이 아침에 공회원들에게 끌려갔습니다.
• 사촌 오빠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언도받아 그저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 평생을 우리 동네에서 함께 살았던 단짝의 가족은 지난 주말에 아소도로 떠났습니다.
• 아버지는 우리도 추적당할 수 있으니 탈출해야겠다며 새벽에 상인들을 만나러 집을 나갔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이런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이런 일들일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핍박’이라는 도구를 무엇을 위하여 사용하고 계십니까? 온 세계를 향하여 복음이 뻗어나갈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하시지 않습니까? 복음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를 수 있게 되도록 사용하는 도구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은 바로 ‘신자의 핍박’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런 도구들을 사용하시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 ‘놀라야’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우리의 삶의 각 부분들이 ‘경이로움’임을 우리들에게 증거해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하는 작고 미미한 일 하나가, 하나님의 크신 일을 굴러가게 하는 동력이 될 지도 모릅니다.
• 학창 시절에 혼자 가기 심심해서 친구를 데리고 교회를 갔는데, 30년 후에 만난 그 친구가 목사가 되어 있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 나는 크게 마음을 두고 도운 것이 아니었는데, 내가 베푼 작은 친절 하나에 감명한 사람이 이후 큰 자선사업가가 되어 수많은 헐벗은 이들에게 생명을 베푸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 나는 그저 평소 생각하는 것을 말했을 뿐인데, 신앙의 근원적인 문제에 해결을 받고,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을 받는 사람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에 대해 ‘작위적’일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이것은 ‘모의’가 불가능합니다. ‘계산하여 만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계산해본들 계산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죠. 여러분이 제아무리 천재라 해도, 여덟 살 짜리 소년을 감명시켜서 50살이 되었을 때 대통령이 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종류의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결국 우리는 ‘문 뒤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거기는 하나님만 보십니다.
핍박을 만났다고 해서 놀라지 마십시오. 두려워하거나 떨지 마십시오.
자연적인 공포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극악한 수단’을 도리어 사용하셔서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을 성경 역사를 통해 너무도 많이 보아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닥쳤던 것과 같은 핍박들은 교회 역사 안에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온 세계로 복음이 퍼져나가게 된 계기가 된 것은 교회 역사 안의 모든 핍박들에 해당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추후의 이야기를 오직 ‘하나님만 아실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나는 문 뒤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이 문의 뒤를 모두 보시는 분께서 이 일을 모조리 주관하고 계심을 믿는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장 보기에는 공포밖에 없었던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을,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확장되게 되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는 알 수 없는 일이었고, 1세기 교회의 성도들도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빌립은 그저 자신이 가게 되는 곳에서 복음을 전했을 뿐,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의 시작점이었다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만 끝에 서서 바위 위에 붙어 있는 조개 껍데기 위의 해초 한 가닥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밖에 보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입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덧붙여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양을 지으신 분이 여호와시오, 그분께서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를 위하여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나는 문 뒤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 뒤를 보시는 분께서 일하시고 계시고, 나는 거기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습니다.
1세기 교회 안에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속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믿으며, 이 말씀을 통해 날마다 힘을 얻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