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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세이브 저장시켜놓은 컴퓨터를 어떤 아저씨가 차지하더니 오면 하루도 빠지지않고 의자에 붙어있
군요. 포기하고 투르크로 연재를 해야할듯 합니다. 이번에는 세이브파일을 다른 곳에 저장시켜서 중도
포기란것이 없도록 할까 합니다.
본 연재물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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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셀주크투르크1)는 1대 술탄 토그릴베그2) 선제가 건국하신 이래 45년째를 맞이하게 되었소."
이코니움3)에 위치해있는 왕궁에는 수많은 대소신료들이 모여있었다. 셀주크투르크의 3대 술탄 자랄
4) 은 그들을 향해 연설을 하고 있었다. 1082년. 이 해는 1037년 토그릴베그가 셀주크투르크를 건국한
이래 45년이 되는 해였다. 문관이나 무관이나 구별없이 참석자들의 표정에서는 기쁨과 흥분이 만연했
다. 어떻게보면 셀주크투르크는 험난한 여정을 계속해왔다. 수많은 난관을 넘으며 술탄이라는 칭호를
얻기까지, 그리고 2대 술탄 알프아르슬란5)이 만지케르전투에서 비잔틴군과 싸워 대승하기까지, 셀주
크투르크는 강적들과 맞서싸우면서 성장을 거듭해왔다. 그리고 이제 셀주크투르크는 이코니움, 트레비
존드6), 아다나7), 카에사리아8), 예레반9), 모술10) 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는데 성공했다.
"그간 우리 셀주크투르크는 건국기조인 팽창정책을 훌륭히 수행하게 되었소. 특히 알프아르슬란선제께
서 만지케르에서 비잔틴황제를 격파한 것은 대대로 우리 셀주크의 전설로 남을만한 업적이셨소.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본받아 계속적인 확장을 통해 드디어 아나톨리아 전역을 손에 얻게 되었소."
대소신료들은 박수를 쳤다. 자랄은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그러자 신료들의 박
수소리가 멎었다.
"나는 아바스왕조11)의 칼리프12)로부터 술탄13)의 칭호를 받았고, 지금까지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해
왔소. 알라를 대신하여, 수니파14)를 대표하여 말이오. 그리하여 이제 국경은 서로는 비잔틴, 동으로는
아바스, 남15)으로는 예루살렘왕국, 북으로는 설원까지 확장시켰소. 그리하여 나는 밤낮으로 이런 생각
을 했었소. 우리 수니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리하여 나는 이맘 바라카와 고민을 해봤소. 그리
고 결국 바라카와 함께 앞으로 셀주크투르크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게 되었소. 이 모든 것이 알라의
섭리이며 코란의 뜻이라 생각하오. 바라카!"
"네, 술탄."
이맘 한명이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그의 오른손에는 코란이 들려있었다. 그는 높은
의자에 올라가 코란을 펼치고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코란의 지하드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예루살렘을 빼앗겼는가 고민을 해보고, 지
하드를 통해 예루살렘을 수복해야 합니다.16)"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셀주크왕조의 코란연구 권위자 중 한명인 바라카의 주장에 대
해 직접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랄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왜 예루살렘을 빼앗겼는가? 코란 5장 21절에서는 뒤돌아보고 돌아서서는 안된다고 했다. 하지
만 우리는 그동안 어떠했는가?같은 이슬람교도들끼리도 질투와 반목, 전쟁을 벌이지 않았는가? 따라서
알라께서는 우리에게 참회케 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빼앗기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알라의 뜻을 겸허
히 받들어 이슬람인들을 뭉쳐서 예루살렘을 탈환해야 한다. 이것이 알라의 뜻인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예루살렘왕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인가? 그들은 예루살렘
왕국의 철갑병사들을 상상했다. 아무리 찔러도 상처가 안나는 갑옷. 십자군과 전투를 치룬 적이 있던 노
장들 중에는 분한 마음에 얼굴이 벌게진 장수도 있었다.
자랄이 말을 이었다. 보다 굳세게, 보다 크게.
"지하드! 이것은 성전인 것이다! 언제까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수중에 넘어가게 놔두어야 하는가? 예
루살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것을 잊었는가?"
사람들의 동공이 커졌다. 예루살렘 학살.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것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뇌리속에 박혀있었다.
그들 역시 예루살렘을 탈환해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디까지나 생각이었을 뿐, 제대로된 계획은 어
느 나라에서도 실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자랄은 지하드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예루살렘탈환의
정당성을 역설하였고. 그의 호소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퍼지기 시작했다.
"지하드! 이것은 성전인 것이다! 예루살렘을 탈환하자!"
자랄이 자기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다시 한번 지하드를 강조하자 대소신로들은 우렁찬 함성으
로 답했다.
1082년 4월. 바라카에 의해 지하드 결성.
1082년 8월
자랄은 예루살렘왕국을 공격하기 전에 알레포를 점령, 후방을 굳건히 하였다.
1082년 10월
마침내 양군이 교전을 벌였다. 장소는 다마스커스에서 북쪽으로 30km 떨어진 곳이었다. 최초의 접전에
서 양군이 동원한 병력은 기록에 의하면 투르크군은 2천, 예루살렘군은 1천명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투르크군이 자랑하는 궁기병대는 원진을 짜고는 화살을 퍼부었다. 투르크군 1진이 먼
저 예루살렘군과 접전을 벌였고, 뒤이어 2진이 참전하려고 하였으나 예루살렘군 기사단에 의해 차단당
하고 1진이 예루살렘군 본대와의 전투에 들어갔다.
1진 대장인 말릭은 용병대장이었다. 그는 자랄에게 선봉에 서면 승리를 보장하겠다고 호언장담했었고,
자랄은 그런 그를 선봉대장에 임명하여 예루살렘군과 싸우게 했었다. 말릭은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적
극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수적 우세도 잠시, 십자가를 뒤에 배치시킨채 예루살렘군은 말릭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다. 이윽
고 말릭의 기병대는 하나둘 죽어가더니 두부대가 패주하기 시작했고 보병대 역시 무너졌다.
"크윽! 싸워! 싸우란말야!"
말릭은 계속 외쳤으나 소용없었다. 투르크군이 아무리 예루살렘군 병사들에게 칼을 찔러넣어도 예루
살렘 병사들은 약간의 상처만 입을 뿐 전투를 계속했다. 반면 투르크군 병사들의 방어구는 취약하기 짝
이 없었으므로 시간이 지나갈수록 투르크군의 피해만 커져갈 뿐이었다. 투르크군은 점점 전의를 상실했
다.
결국 투르크군의 대열은 무너졌고, 병사들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평원에는 투르크군 병사들이 즐비하
게 늘어져있었다. 예루살렘군 병사들은 패주하는 투르크군 병사들을 쫓기 시작했다.
"대장, 일단 목숨이 중요합니다. 살고보죠."
"하지만 나는 술탄한테 승리하겠다고 큰소리 뻥뻥치고 나왔단 말이다!"
말릭은 부하에게 화를 내었지만 그라고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후 말릭은 오히려
앞에 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투르크병사들은 예루살렘튜튼기사단에게는 좋은 사냥감이 될 뿐이었다. 이들의 갑옷은 전체
가 피로 뒤덮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때 살아서 도망치는데 성공한 한 병사의 증언에 따르면 흡사 피에
홀린 악마같았다고 한다.
보병들의 후퇴를 막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 투르코만기병대 한부대가 튜튼기사단과 단병접전을 벌였으
나 이것은 누가봐도 무모한 상황이었다.
결국 전투는 예루살렘군의 승리로 끝났다. 예루살렘군은 2백여명을 잃은 반면 투르크군은 배가 훨씬
넘는 1천6백명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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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주크는 족장 이름이고, 투르크는 투르크족을 뜻한다. 셀주크투르크는 이 두 단어의 합성어.
2) 트랜스옥시아나에 거주하는 오그스족 유목민의 추장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1037년 가즈니왕조의 군
단을 격파하고 호라산의 주요도시 니샤프르를 점령한 뒤, 대(大)셀주크왕조를 창건하였다. 왕조의 기초
가 확립된 것은 1040년에 단다나칸에서 가즈니왕조의 대군과 싸워 대승하면서부터이다. 그 이후에 그
는 레이(테헤란 근교)에 수도를 정하고 이란 본토의 경략에 나섰다. 1055년 아바스왕조 칼리프의 요청
으로 바그다드의 부와이왕조 세력을 소탕하고 이라크 북부지역을 정복한 후 칼리프로부터 ‘동서(東西)
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 때부터 술탄이라 칭하고 칼리프의 수호자로서의 지위를 수니파(派) 이
슬람세계로부터 승인받게 되었다.
하지만 셀주크투르크는 하나의 나라가 아니다. 아나톨셀주크투르크, 시리아셀주크투르크 등 분가가
많았다.
3) 로마시대에는 이코니움(Iconium)이라고 하였다. 앙카라 남쪽 240km,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고원
남쪽 해발고도 1,027m에 위치한다. 12∼13세기에는 셀주크 투르크의 수도로서 번영하였으며,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 후 한때 쇠퇴하였으나, 아나톨리아 종관(縱貫) 철도의 개통(1895)으로 부흥하였다.
제당·시멘트·식육·융단 등의 공업이 활발하며, 구시가 주변에 신시가가 발달하였다. 사도 바울로의 제1
회 전도지이다.
4) 실제 3대 술탄은 말리크샤 이다.
5) 페르시아인(人)인 재상 니잠 알 물크의 보좌를 받으며 국가체제의 정비에 노력하여 황금시대를 실현
하였다. 1063년 하트란 ·헤라트 ·시가냔 등 동부지방을 정복하고, 소아시아에서도 동로마군을 격퇴하였
다. 1064년 아르메니아를 점령, 1065년에 젠드를 빼앗고 파루스 ·케르만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1070년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장악하고, 1071년 파티마왕조로부터 알레포 ·메카 ·메디나를 탈취하는 데 성공
하였다. 투르크 기병대를 중심으로 한 정병(精兵) 1만 5000명으로 반호(湖) 북쪽 만지케르트에서 로마
누스 4세가 거느린 20만 명의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로마누스를 포로로 잡았다. 1072년 가을에 중앙아
시아의 카라한을 정벌하다가 중상을 입고 죽었다.
6) 혹은 트라브존이라 불린다. 흑해 연안 동부에 있는 항구이며, 상업 중심지이다. BC 7세기 무렵 트라
페주스라는 명칭으로 그리스인이 창건한 이후 오리엔트에 있어서 그리스 문화의 일대 중심지로서 번영
하였으며,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로 통하는 무역로의 기점으로 알려졌다.
비잔틴 양식의 성당과 박물관, 사원 등의 유적이 있다. 배후산지는 임산자원과 구리·철 등의 광산자
원이 풍부하며, 잎담배·홍차를 산출하고 포도주를 수출한다. 항공편으로 앙카라와 배편으로 이스탄불과
연결된다
7) 세이한강(江)의 하구에서 50km 떨어진 지점의 좌안에 있다. 이곳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히
타이트 시대부터 알려졌으며, 도시의 중심에 있는 구릉의 발굴로 헬레니즘 시대부터 이슬람 시대까지의
층위(層位)가 확인되었다. 킬리키아문(門)에 가깝기 때문에 예로부터 군사상의 요충지가 되었으며, 알
렉산드로스대왕 때부터 이브라힘 파샤 때까지 여러 차례 정복되었다.
세이한강의 삼각주인 아다나 평야는 상류의 세이한댐 때문에 관개의 편의를 누리고 있으며 터키 최
대의 목화 산지인 동시에 곡물·담배·과실 등을 산출한다. 아다나는 그 중심지로서, 세이한댐에서 공급하
는 전력을 이용한 방적·시멘트·비누·올리브유(油) 등의 공업이 활발하다. 세이한강의 우안에는 782년에
H.알라시드가 건조한 성채의 폐허가 있다.
8) 현재 터키 중부 카파도키아에 남아 있는 도시이다. 지금은 카이세리라 한다. 서기 17년 로마 황제 티
베리우스가 카파도키아를 로마의 속주로 삼고 카에사리아를 수도로 하였다. 카파도키아 지방은 1174년
셀주크 투르크에 예속되고 1515년부터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예속되었다가 터키로 귀속되었다.
9) 캅카스산맥의 남부 고원(900∼1,300m)에 있으며, 라즈단강을 끼고 있다. 남쪽에는 아라크스강의
넓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아라라트산이 있으며, 북쪽에도 산들이 둘러서 있다.
이 도시는 7세기부터 문헌에 나타나고, 8세기에는 돌로 지은 요새가 있었다. 1826∼28년에는 러시
아령이 되었다가 1920년에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세반호(湖)의 수력전기를 이용한 전기기계·알루미늄야금·카바이드·합성고무·폴리비닐아세테이트·전
구·시계·공작기계 등의 공업지대가 남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밖에 코냑·통조림(과일·고기) 등의 식품
가공 공장도 많다. 과학 아카데미, 국립대학을 비롯한 10개 이상의 고등교육·연구기관, 역사박물관, 마
테나다란 고문서관 등이 있으며 북쪽의 언덕에는 승리공원이 있다.
10) 인구는 약 57만(1992). 아랍어로는 마우실(Al-Mawsil)이라고도 한다. 티그리스강 서안(西岸)에 위
치하며, 부근에 있는 자그로스산맥의 영향을 받아 여름은 건조하고 기온이 50℃까지 올라가며, 겨울은
영하로 내려가 한서의 차가 심하다. 연평균 강수량은 400mm이며, 남부에 비해 훨씬 많다. 중세부터 직
물의 산지로 알려져왔고 모슬린 ·메린스 등의 명칭은 이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
드 다음가는 큰 도시이며 북부 이라크 경제의 중심지이다.
주변에서 나는 밀 ·과실 ·가축 등을 집산하고, 면직 ·제당 ·시멘트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금속기구의 제조는 일찍부터 유명하다. 1939년에 북부 교외에서 유전이 발견된 후 석유개발기지 및 교
통의 요지로서 급속히 발전하였으며, 철도와 도로는 수도 바그다드는 물론 인접한 터키와 시리아까지
통하고 있다. 티그리스강 대안(對岸)에는 고대 아시리아 왕국의 수도 니네베의 유적이 많고, 유명한 자
미알카비르 이슬람사원의 사탑(斜塔)도 있다. 주민은 쿠르드족이 대부분이다.
11) 옴미아드왕조의 뒤를 이어 750∼1258년에 동방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왕조
12) 아랍어로는 칼리파(Khalifah)라고 하며, 본래는 '칼리파트 라술 알라(Khalifat rasul Allah)'로 그 사
전적 의미는 '신의 사도의 대리인'이다. 칼리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이슬람 교리의 순수성과
간결성을 유지하고, 종교를 수호하며, 동시에 이슬람 공동체를 통치하는 모든 일을 관장하는 이슬람 제
국의 최고 통치자를 가리킨다.
13) 이슬람교의 종교적 최고 권위자인 칼리프가 수여한 정치적 지배자의 칭호.
14) 셀주크투르크는 수니파이다.
15) 실제 셀주크투르크는 알프아르슬란때 이미 메카, 메디나까지 세력을 확장시켰었다.
16) 지하드의 본래 뜻은 '분투'이다. 이 말이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을 빼앗기자 이슬람인들은 '왜 예
루살렘을 빼앗겼는가'에 대해 코란에서 그 해답을 찾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지하드'라는 단어에 주목하
기 시작한 것이다. 이리하여 '지하드'는 '성전'을 뜻하게 되었다.
첫댓글 우와아아앙 - ! 장장 1주일이나 기다려왔던 팍스님의 캠페인 진행 일지-! ㅇㅏㅆㅏ 조쿠나!!! 제가 호랑이 기운을 드리죠! 힘내세요 [초반부터 발리는 우리 투르크 -_ㅠ]
감사합니다. (__)
ㅎㅎ 글을 참 잘 쓰시는 군요.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아 연재 그만두시지 않으셨군요.^^
네 ㅎㅎ
역시 이슬람만세입니다~! 알라후크아크바르!~
굽신굽신
휴.. 요즘 까페 못들어와가지구 지금에서야 보네요 ㅎㅎ 잘봣어요.
감사합니다. (__)
대단하시다...이런글을...쓰시다니...우와~
굽신굽신 (__)
아 이런걸 연재하다니....... 님이 자랑 스럽습니다
아 이런걸 연재하다니....... 님이 자랑 스럽습니다
와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