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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방 ♡ 스크랩 요시모토 에이미(吉本詠美) 여사(女史)
nolboo 추천 0 조회 191 14.01.24 15: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요시모토 에이미(吉本詠美) 여사(女史)

요시모토 에이미(吉本詠美) 여사(女史)

                                                                                            글쓴 사람: nolboo0906 : 李尙俊

 

 ( 20년 쯤 전. 우연히 만나 몇년간 교감(交感)과 교정(交情)을 가졌던 '에이미' 할머니와의 추억담(追憶談)입니다. 내가 지금 그때 그 할머니의 연세쯤 되었고, 그때 그 할머니가 지금 내 나이 쯤 되었을 적 이야기입니다.내 블로그를 찾는 고마운 젊은이들을 위해 근대(近代) 한국 동란사(動亂史)의 편린(片鱗)도 적었습니다.)

 

1주일에 한번씩 생수를 구하러 나갑니다.

두 식구만 살고 있으니까 많이 필요하지 않아, 매주 일요일 20L들이 1통씩만 날라오면 충분합니다. 대문산에 위치한 탄금대 공원내 시민들이 많이 애용하는 '탄금 약수터'는 생수 분출량(噴出量)이  많지는 않지만 주변이 깨끗하고, 편의(便宜)시설이 잘돼 있으며 시청에서 정기적으로 수질 검사를 해 광고판에 게시하기 때문에 믿을만 합니다.

공휴일이나, 아침저녁 시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2-3시간 정도를 대기해야 되는 불편 때문에 직장인 들이 늦잠을 즐기는 일요일 아침 일찍 나옵니다.

생수를 1통 받아 차에 실어 놓고, 탄금대 공원이나 목행동까지 이어지는 강변 산책로를 2시간 정도 걷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요일 내 중요 행사입니다.

 

오늘도 잠자리에서 눈을 뜨자마자 바로 집을 나왔습니다. 약수터에는 할머니 한분이 10L짜리 물통에 물을 받아 놓고 긴 의자 한켠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자전거 한대가 세워져 있습니다. 약수터에 드나들면서 한번도 뵌적이 없는 초면(初面)의 할머니였습니다.

약수를 받으면서 다소곳이 앉아 묵상(默想)에 잠기신 할머니를 유심히 살펴봤습니다.

길지도 짧지도 않게 기른 백발(白髮)의 하얀 머리를, 검은 색의 연꽃 모양의 악세사리로 목 뒤에 단정히 묶어 고정 시켰습니다, 엷은 회색의 여승복(女僧服)을 입으셨고, 목에는 백팔염주를 걸으셨습니다. 보이는 옆면의 얼굴에 잔 주름은 있지만, 하얗고 고운 피부를 가지고 있어 마음씨가 너그럽고 자상하신 부잣집 큰 마님 같은 풍채로 보였습니다.

내 시선을 느끼셨는지, 할머니는 엷은 미소를 띄우시며 고개를 내 쪽으로 천천히 돌리셨습니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으라는 손짓까지 하셨습니다.

그 자상하신 배려와 품위 있어 보이는 태도에 호감이 갔습니다.

"할머니, 혹시 비구니 스님 아니십니까?" 아주 조심스럽게 여쭈어 봤습니다."

할머닌 천천히 고개만 가로 저으셨습니다.

"할머니, 연세도 높으신 것 같은데, 왜 여기까지 자전거를 갖고 나오셨어요? 넘어지시면 크게 다치실 수도 있어요. 할아버님과 함께 나오시면 몰라도요."

할머니는 멍한 시선을 들어 허공을 바라 보더니,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천천히 흐느끼십니다.

어깨의 잔 흐느낌이 차츰 소리 없는 큰 율동으로 변해 갔습니다.

나는 몹시 당황했습니다.

얼굴을 감싸고 있는 할머니의 두 손 위에 내 손을 얹었습니다.

"할머니, 제가 하지말아야 할 말슴을 드렸거나, 할머니의 아프신 마음의 상처를 건드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후에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 저으시며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내신 다음에 "미안합니다. 저는 한이 많은 사람이라 울음도 많아요, 추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더 이상 아픈 상처를 건드리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득 차 넘치는 물통의 마개를 막아 들고 일어섰습니다.

" 그럼, 기회 있으면 또 만나 뵐 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나서려는데

"저-------."하고 할머니가 할 말이 있으신 듯 했습니다.

"예,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하세요."  하고 멈춰 섰습니다.                     

"시내로 바로 들어가실 겁니까?"

"아녜요. 두어시간 산책이나 하고 들어가려고 하는데요. 무슨 부탁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사실은 제 자전거 뒷바퀴 타이어가 펑크가 났어요,"

"아, 그러셨군요"하면서 할머니의 자전거를 보니 뒷바퀴에 바람이 빠져 착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나도 자전거로 멀리 나갔다가 도중에 이런 황당한 경험을 가진 적이 몇번 있었습니다.

"할머니, 저 산책 안해도 돼요. 곧 바로 들어 가겠어요. 자전거 제차 트렁크에 싣고, 할머니 댁까지 모셔다 드릴께요. 일어 서세요."

"아닙니다. 저는 자전거를 끌고 가다가 단골 수리점에 맡겨 놓고 올라갈 테니, 산책 하시고 물통만 전해 주세요. 대단히 죄송합니다."

거듭 같은 말을 되풀이 해도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고집을 부리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할머니댁을 모르쟎아요?" 하고 여쭈었습니다.

할머니께서 아주 자세하게 일러 주셨습니다

"아, 계명산 정상에서 북쪽길로 거의 다 내려와 평지에 있는 전원 주택단지네요. 거기 여러 집이던데요?"

"네. 나 사는 집은 문패가 없어요. 내가 동네 앞, 느티나무 밑 벤치에 나와 기다릴께요. 만약 오셔서 내가 안 보이거들랑, 지나는 동네 사람에게 '에이미' 할머니 댁을 찾으세요. 내 이름은 '요시모토 에이미(吉本詠美)에요."

"아니 그러면 할머니는 일본 사람이세요.?"

"네 맞아요. 지금 국적은 한국 사람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이름은 그대로 쓰고 있어요."

 나는 공원 산책로를 한바퀴 돌고  내려와, 차를 몰고 '에이미' 할머니가 사시는 마을로 갔습니다, 할머니는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내 차 소리도 못 들은 채 독서삼매경(讀書三昧境)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약수터에서 보던 흔들리던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조용히 차를 주차시키고 옆으로 닥아가 헛기침을 한번 했던니 그제서야 알고 반기셨습니다.

물통을 내려 놓으면서 가겠다고 했더니, 화들짝 놀라시며 내 손을 잡으셨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난 것도 전생(前生)의 업보(業報)일진데  어찌 바로 가시려 합니까? 잠시라도 들렸다 가셔야 합니다." 한사코 이끄시는 것을 뿌리칠 수 없어 따라 들어 갔습니다. 들어 가면서 보니 손에 들고 계시는 책은  광덕스님이 엮으신 까만 표지의 '지장 기도집'이었습니다.

현관을 들어서니 맞은편 벽에 크기가 1M*1M는 됨직한 아주 큰 남자의 사진 액자 두개가 세로로 나란히 걸려 있고 탁상 위에는 양쪽으로 촛대 두개와 가운데에 젯상이 차려 있습니다.

"잠시만 앉아 계세요. 차를 준비 하겠습니다."

거실을 둘러보니 책이  온 벽을 둘러 싸고 있었습니다.

일본, 한국어로 된 책이 대부분이었고 불서(佛書)도 많았습니다.

 

에이미 할머니는 차를 준비해 가지고 나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습니다.

"혼자 사십니까?" 나는 궁금한 것이 많았습니다.

"아니에요, 세식구에요. 저 벽면에 걸려 있는 두사람과 함께 살고 있는걸요. 위의 사진은 남편 '재웅'씨고요, 그 밑에 있는 사람은 하나뿐인 아들 '민수에요." 에이미 씨는 씁쓸하게 웃으셨습니다. 씁쓸하게 웃으시는 얼굴 속에서 깊은 우수(憂愁)의 자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에이미할머니는 차를 드시다 말고, 전화로 점심식사 두 사람 분을 배달시켰습니다. 아마 단골 식당인 듯 했습니다.

"혼자하는 식사에 아주 질렸어요. 모처럼 만난 분과 맛난 식사를 좀 해봐야겠어요. 점심 시간도 지났으니 저를 좀 도와 주세요."

사시는 환경을 둘러 보니 경제적으로는 흡족하신 것 같은데, 그 먼 탄금대 약수터 까지 힘겹게 자전거를 타고 오셨던 것이 궁금했습니다, 연세도 많은신 분인데.

"할머니, 여기서 약수터 까지는 꽤  먼 거리에요. 힘도 부치시고 위험하기도 한데 왜 자전거를 타고 오셨어요? 다음 부터는 전화로 택시를 불러 타고 다니세요?"

할머니는 나를 쳐다 보고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우리 재웅씨는 각종 운동에 만능이신 편인데, 나는 운동을 좋아 하지도 잘 하지도 못해요. 내가 자신 있게 하는 운동은 자전거 타기 뿐이에요, 아주 어려서 부터 유일하게 좋아하는 거였어요. 저는 시장에 갈때도 이 자전거를 타고 다녀요.

결혼해서도 남편과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함께 탔어요. 그리고 한국에 와서도 거의 매일 빠뜨리지 않고 우리 부부는 자전거로 운동도 하고, 탄금대로 약수를 뜨러 다녔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렇게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남편이 저 세상으로 가고 없는 지금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그 옛날의 추억을 회상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고요."

 

에이미씨댁에 머문지 3시간이 넘었습니다.

초면(初面)의 할머니 댁에 예의(禮義)없이 너무 긴 시간 머문 것 같아서 일어났습니다.

"할머니. 너무 긴 시간 실례했습니다. 가 보겠습니다."하고 나오려니까.

"아니에요. 저는 사귀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마을 사람들 하고도 왕래가 별로 없고요. 처음 만난 분과 이렇게 주책 없이 이야기를 길게 늘어 놔서 흉은 안 보실시 모르겠네요.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가끔 만나 대화를 해도 될까요?"

하면서 전화번호를 적어 조심스럽게 내 밀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보통 날은 직장에 나가 야 돼요.----.

다만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엔 시간이 많아요. 저도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이 좋았어요.

불러 주시면 꼭 찾아 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도 내 전화 번호를 적어 드리고 나왔습니다.

 

 우리 두사람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고, 대화를 계속하는 동안 서로의 불편함이 차츰 사라져 오래 전에 헤어졌던 , 허물 없이 친한 막역지우(幕逆之友)처럼 되어갔습니다. 국적과 연령과 성별의 벽을 뛰어 넘은 새로운 친구를 만든 셈입니다. 나는 주로 들어 주는 입장이었지만, 친구 하나 없는 낯선 타국에서 오랫동안 토(吐)해 내지 못하고 가슴 밑바닥에 억눌러 간직했던 희노애락(憙怒哀樂)의 응어리를 풀어 내는 에이미 여사는 감정(感情)의 기복(起伏)이 따라 웃다 울다를 되풀이 했습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외국 국적인(國籍人). 에이미 여사를 만나 일방통행(一方通行)의 대화이긴 했지만 같은 감정을 공유(共有)하며 지루하지않았습니다. 누님 같기도, 형수님 같기도 한 그런 정감(情感)을 느꼈습니다.

 

 요시모토 에이미(吉本詠美)할머니. 에이미씨는 분명한 일본사람입니다.

에이미씨는 당시 아버지가 교수로 계시는 일본의 사립(私立) 명문(名門)인 와세다(早稻田:조도전)대학 같은 학부에서 조선의 유학생인 남편 재웅(在雄)씨를 만났습니다.

당시엔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범해 자기네 속국(屬國)으로 만들고, 식민통치(植民統治)를 할 때입니다. 일본 학생들 까지도 우리 조선 학생들을 멸시, 학대하고, 가까이 하지 않는 경향(傾向)이 있을때 입니다. 학생들의 써클 활동에도 한국 학생들은 잘 끼워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재웅씨는 달랐습니다. 머리가 뛰어난 수재(秀才)여서 공부도 잘 했고, 키 크고, 잘 생겼습니다. 모든 구기(球技) 경기, 특히 축구를 잘해 학교 대표 선수로 대회에 출전 했습니다.

재웅씨에 대한 소문이 학교 내에 퍼져, 입학한 지 일년도 안가 교내에서 재웅이 학생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여학생들 까지도 재웅이의 곁에 많이 몰려 들었습니다.+

 

에이미씨는 성격이 내성적이었고 남의 앞에 자기를 들어내려 하지 않는 조용한 학생입니다.

여학생들이 모이면 재웅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관심들을 가졌지만 에이미씨는 관심 밖이어서 귓전에 흘려 들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지 재웅씨가 자기 곁으로 닥아 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강의실이나 도서관에서 자기 옆 자리가 비었을 때, 슬며시 찾아 드는 사람은 재웅씨였습니다, 만남이 잦아지고 대화가 많아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 편한 사이가 되었습다.

그렇게 삼년을 지나면서 사랑이 싹터 자라, 친구가 연인이 되고, 연인은 평생을 함께 할 반려자로 약속을 하게 되었습니다, 

 3년의 세월이 흘러 졸업반이 되었습니다.

재웅씨는 조선 학생인 자기를, 학생들에게 조그만 실수도 용서하지  않으시는 요시모토 호랑이교수님이 사윗감으로 받아 드릴 수 있을지가 문제였습니다. 요시모토 교수님은 학식이 높으신 명 교수로 학생들에기 알려져 있으며, 성격이 대쪽 같이 곧은 분으로도 유명하십니다.

 

어느 날 저녁, 나란히 앉아 계시는 부모님 앞에 에이미는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무슨 할말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하고 어머니는 웃음을 띄셨습니다.

아버지도 다소곳한 다 큰딸의 태도에 흐뭇해 하시는 표정이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꿇어 앉은 에이미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말은 하지 못한채 진땀이 흐르고 머리가 아래로 차츰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얘가 오늘은 왜 이래? 어서 말을 해봐."

평상시에 없던 딸의 태도에 어머니는 불안한 표정으로 재촉을 하셨습니다.

"그래 말을 해 봐라," 아버지도 엄마의 말을 거드셨습니다.

에이미는 얼굴이 홍당무 처럼 붉어진 채 기어드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래? 그게 누구냐? 뭣하는 사람이냐?" 엄마의 재촉이 있었지만 에이미는 말을 못합니다.

"그러고 보니 너도 벌써 남자를 사귈 나이가 됐구나. 말해봐라." 아버지가 거드셨습니다,

"학생입니다. 우리 대학 우리 학부 학생입니다."

"우리 학부 학생이라고? 그럼 나도 알겠구나. 누구지-----." 

이번엔 아버지가 재촉하셨습니다.

"이 재웅 학생입니다,"

"조선 학생, 이 재웅이를 말하는 거냐?"

에이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뭐라고, 조센징이라고------."

엄마는 소리를 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미에게 달려들어 머리채를 휘어 잡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어허! 그 무슨 체통 없는 짓인가? 다 큰 애를 데리고. 손 놓고 이리 와 앉으시오!"
벽력 같은 아버지의 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우리 집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어머니는 마지 못해 손을 놓고, 분을 참지 못해 식식거리며 자기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멍하니 벽을 바라 보시며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그래, 얼마 동안이나 사궜느냐!" 별로 동요(動搖) 되시지 않는 표정이셨습니다,

"1학년 부터 죽 사귀어 왔습니다."

"결혼하기로 약속 한거냐?"

"아버님, 어머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음---."하고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알았다. 돌아오는 토요일 저녁에 집으로 데리고 와 봐라."

이것으로 이날의 소동(騷動)은 끝이 났습니다.

재웅씨는 같은 대학내의 교수님들 사이에서도 모르 분이 거의 없었습니다.

 더구나 아버지와 에이미씨와 같은 학부입니다. 아버지 요시모토 교수의 강의를 듣습니다.

일본 학생이라도 누가 감히 이재웅 학생을 '조센징'이라고 얕잡아 볼수는 없었습니다. 학교 성적, 운동, 인품 등 어느 면에서나 일본 학생들을 제압했습니다.

" 그 학생을 당신도 잘 알아요?"

"알고 말고. 잘 알지. 우리 학교 교수나 학생들 중에 그 학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거야. 함부로 '조센징'이라고 얕잡아 보거나, 멸시하지 말아요. 우리학교 전교생을 통털어 봐도 그만한 녀석은 없어. 절대로 조센징이라고 얕보지 말아요."

"네 방으로 건너가거라."

에이미씨는 지옥의 문턱에서 풀려난 것처럼, 숨 죽이며 가두어 두었던 목구멍 너머의 긴 한숨을 소리 없이 토해냈습니다. 부모님께 목례를 올리고 나왔습니다.

 

에이미씨는 대학을 졸업한 해에 재웅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재웅씨와 에이미씨는 양가(兩家)의 도움으로 아담한 집과 살림을 마련하여 대학 캠퍼스와 가까운곳에 살림을  차리고, 행복한 생활을 했습니다.

한국의 재웅씨의 집안도 지방에서는 재산이나 세력이 매우 막강(莫强)한, 소위(所謂)  문벌(門伐)이 좋은 명문양반(名門兩班) 집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결혼한 그 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름을 민수(敏秀)로 지었습니다.

민수는 잘 자라줬습니다. 자라면서 아빠와 꼭 닮았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느끼게 되었습니다. 키와 덩치도 크고, 인물도 좋았습니다. 두뇌(頭腦)가 명석(明晳)하고, 착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에이미씨와 재웅씨는 민수를 한일(韓日) 합작인(合作人)으로 키우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아버지의 나라, 한국의 풍습을 따라 '민수'로 지었지만, 사람은 오로지 한국인도. 오로지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과 일본인의 좋은 품성을 고루 갖춘 사람으로 키우기로 했습니다. 어려서 부터 한국말과 글, 그리고 일본 말과 글을 가르쳤습니다.

재웅씨와 에이미씨는 앞으로 이 아이가 크면 함께 한국으로 가 아이 아버지의 고향에 뿌리를 밖고 살도록 키우기로 작정 했습니다,

그렇게 하자면 민수를 좀 일찍 한국으로 데려가 한국 사람, 한국 학생들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데 두 내외의 생각은 일치했습니다. 그 시기가 빠를 수록 민수에게 더 효과적, 능률적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에서 민수의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전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재웅씨도 귀국하여 한국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습니다.

  지금 에이미 여사가 살고 있는 집이 바로 그때 새로 지어 입주(入住)한 집입니다.

 민수는 이 곳의 중학교에 입학하여 어머니와 함께 살고, 아버지는 서울의 대학에 교수로 있으시면서 서울과 이 곳을 오르내리셨습니다.

 

1904: 러-일 전쟁으로 승리한 일본은

1905: 강제로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 보호 조약을 체결 했으며.

1910: 강제 한일합병(韓日合倂)으로 한국을 일본의 속국(屬國),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1937.7.7: 일본제국은 중화민국을 침략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미국. 영국, 네덜란드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응했습니다.

1941. 미국은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와 석유 금수 조치를 취했으며

1941.12.8 일본은 미국의 조치에 반발해 항공대와 특수잠항정으로 미국 태평양 연안의 진주만을 공격했습니다.

1945.8.6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에 20KT 원자폭탄을 투하한데 이어

1945.8.9 미국은 또 일본의 나가사끼에 20KT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1945.8.15 일본 천황은 라디오 방송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우리 나라는 해방을 맞았습니다.

천번지복(天飜地復), 하늘과 땅이 뒤집혀 질서가 없고 매우 어지러운 새 세상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빼앗아, 우리 국민을 혹독(酷毒)하고 포악(暴惡)한 식민정치(植民政治)로 다스렸던 일본인들은 살아 남기 위해 한국인으로 변장 하고, 야음(夜陰)을 틈 타 달아니기에 바빴습니다.

광명천지(光明天地), 새 세상을 만난 한국인들은 숨겨 놨던 태극기를 꺼내 들고, 남녀노소, 모두가 거리로 뛰쳐나와 춤을 추며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거리에서 맞난 낯선 사람들끼리도 서로 얼싸안고 울다, 웃다를 되풀이 하는 진풍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반도의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들어와 나라를 두 동강이로 갈라 놓았습니다. 북위 38도 선(線) 북쪽은 김일성이 통치하는 공산 국가로, 남쪽은 총선거에의해 선출된 이승만 대통령이 다스리는 민주국가로 분단국이 되었습니다.

남한, 대한민국은 역사상 처음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을 선출하고,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 공포하여 나라의 기틀과 안정을 쉽게 되찾아 갔습니다.

재웅 교수, 민수학생은 각자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 하던 일과 학업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 6.25. 북한군의 남침에 의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8.15해방 후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받아 5년간 전쟁 준비했던 북괴군의 남침을. 우리 군이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力不足)이었습니다. 더구나 북괴군은 당시의 신무기인 탱크와 따발총으로 무장했습니다. 북괴의 남침을 상상도 못했던 우리 대한민국은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했습니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가 필사적(必死的)으로 방어전을 펼쳤던 우리 군은 다행히 미국과 UN군의 도움으로 사기를 회복하고 전열을 가다듬어 북진을 시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미국 제1해병 사단을 이끌고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진격하여 9월 26일 서울 입성(入城)에 성공할 수 있었고, 28일에는 빼앗겼던 중앙청 청사에 태극기를 꽂았습니다.

 

이 무렵 가족과 함께 부산까지 피난갔던 민수는 입영명령서(入營命令書)'를 받고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 혼란기에는 군 훈련소가 별도로 없고, 배치된 부대에서 전투에 관한 기본 훈련과 교육을 1-2주 정도 시켜 전쟁터에 투입할 때 입니다.

그 무렵 공산군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과 서울 수복으로 사기가 추락했습니다,

우리 아군(我軍)과 UN군은 사기가 충천(衝天)하여, 퇴로(退路)가 끊길가봐 낙동강 진지를 포기하고 허겁지겁 북쪽으로 달아나기에 바쁜 북한 공산군을 쫓아 추격했습니다 .

민수도  달아나는 공산군을 추격하거나 퇴로를 막아 섬멸(殲滅)시키는 작전에 투입됐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생각했던 것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사(死)와 생(生)의 갈림 길에서 최후의 발악을 하는 공산군의 저지선(抵止線)을 뚫기도 힘들었지만, 기후(氣候)와 풍토(風土)가  낯설고 험난한 이국(異國) 땅에서  오랜 동안 치열한 전쟁을 치룬 UN군과, 아군의 전력 소모가 결정적인 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1951년 1월에는 압록강 유역까지 북한군을 밀고 올라가 머쟎아 통일이 되는 듯 했습니다. 눈 앞에 닥아 온 통일의 그 날을 기대하며 우리 국민은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풀었던 꿈도 중공군의 참전(參戰)으로 하루 아침에 물거품같은 사상루각(砂上樓閣)으로 허물어졌습니다.

 

 북한 김일성의 구원 요청으로 30만명의 중국공산군이 북괴 지원군으로 이 전쟁에 투입됐습니다. 압록강 물은 꽁꽁 얼고 그 얼음위에 무릎까지 파묻히는 깊은 눈이 쌓였는데. 머리에서 부터 발끝까지 하얀 방한복(防寒服)으로 감싼 중공군이 불개미떼 처럼 죽고 죽어도 밀물처럼 몰려왔습니다.

아군(我軍)은 지상(地上)과 공중(空中)에서 총알과 포탄을 쏟아부었지만, 앞에 쓸어져 죽어가는 자기네 주검을 넘어 계속 닥아 오는 소위 인해전술(人海戰術)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1951년의 1.4후퇴라고 합니다.

전쟁은 다시 우리측에 불리(不利)해져 국군과 U.N군의 필사(必死)적인 저항과 방어에도 불구하고 남쪽으로 서서히 밀리게 되었습니다.

해가 바뀌여 1952년, 우리 군과 유UN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지금의 휴전선 근처에 최후의 마지노선(Minginot 線)을 구축하였습니다. 죽음과 삶이 결정되는 매우 위태한 고비, 사생관두(死生關頭)에 서서 지금의 휴전선 인근(隣近)에서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며 치열한 공방전(攻防戰)이  계속 되었습니다. UN군과 한국군의 지상(地上)과 공중(空中)에서의 무력도 대단했지만, 선진(先進) 무기를 갖고 있는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과 북괴군의 최후의 발악으로 승패를 가리기가 힘들었습니다.

 

1952년 10월

강원도 철원평야와 김화평화가 펼쳐져 있는 백마고지에서는 6.25 사상(史上), 그리고 세계의 어느 전사(戰史)에서도 유례(類例)를 찾아 보기 힘든 가장 극렬(極烈)하고 참혹(慘酷)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낮에는 UN군의 공군력(空軍力)을 지원 받는 우리 아군(我軍)이, 밤에는 선진포탄(先進砲彈)을 대낮 처럼 쏟아 붇는 중공군이 백마고지(白馬高支)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백마고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사투(死鬪)에 쌍방(雙方)은 병사(兵士)들을 일회용 소모품으로 탕진(蕩盡)했습니다. 총알 받이로 앞 전선에 계속 투입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 백마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국군의 총 사상자는 2500명, 중공군의 총 사상자는  14000명으로 사료(史料)에 기록 돼 있습니다.

애석(哀惜)하게도, 에이미씨의 아들 민수군도 칠흑(漆黑)같이 어두운 밤,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宏音) 속에 중공군 야포탄(野砲彈)의 파편(破片)을 맞아 산산 조각이 되어 산화(散化)했씁니다. 이때 재민은 꽃다운 나이, 방년(芳年) 20세였습니다.

중부전선에서의 전투를 계속하는 한편, 중공군과 미군은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을 계속하여,마침내 1953년 7월 27일, 당일 까지의 전선을 기선(基線)으로 휴전 협정을 조인(調印)했습니다. 이 휴전선이 없어지고 남북 통일이 돼야 하는데.

 

6.25남북전쟁, 지난 3년 1개월 동안

한국군과 UN군 인명 피해 18만명

북한군                         52만명

중공군                         90만명

민간인(남한)                 99만명,   등 259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건물 파괴                  660640동

철로 파괴                     329KM

교량 파괴                     312KM    물적 피해액 410589759000환(당시 화폐단위)

공업시설 파괴                   43%                                        (2281054217달러)

발전시설 파괴                   41%

탄광시설 파괴                   50%     

 

금수강산(錦繡江山) 삼천리(三千里) 아름다은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전쟁의 포화(砲火)로 까맣게 타버려 초토(焦土)가 됐고. 사랑하고 의지할 가족이 죽거나 뿔뿔이 흩어져 천애고아(天崖孤兒)가 된 우리의 어린것들은 살아 남기위한 최후(最後)의 발악(發惡)으로 미군부대 음식찌꺼지, 짬뽕통을 뒤져 입속에 꾸여꾸역 쑤셔 넣으며 목줄기가 꿈틀거리도록 서러움을 삼켰습니다. 전장(戰場)에서 총, 대포, 폭탄에 맞아 참아 눈 뜨고 볼수 없는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환자(患者)나 불구자(不具者)가  마을마다 거리마다 즐비(櫛比)했습니다.

비 가릴 오막살이 집을 잃어 포탄에 맞아 무너진 다리 밑에 짚거적을 주워 깔고, 덮고. 밤하늘의 별을 세며 잠들었습니다. 길거리엔 빈깡통을 들고 먹이를 구걸하러 다니는 어린이,  사랑하는 부모, 처자식을 잃고, 울부짖으며 찾아 헤메다 정신이상으로 미쳐 날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견디다 못해 병들고 굶어 죽어 버려진 시체도 거리마다 즐비했습니다.

 어떠한 명분, 어떠한 변명으로라도 전쟁을 일으켜, 죄없고 힘 없는 양민(良民)을 살상(殺傷)하거나 괴롭힌자는, 천신(天神),지신(地神), 인신(人神) 그리고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그 누구도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용서하는 그날 부터 그는  선신(善神) 또는 구세주(求世主)가 아니라 악마(惡魔)이거나, 악마와의 동업자(同業者)입니다. 

 전장(戰場)에서 죽은 병사도, 죽인 병사도 피해자입니다. 그들 모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권력,명예,축재,안일(權力,名譽,蓄財,安逸)을 위해서 그 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죽여 놓고도 큰 소리로 호통치며 살아가고 있는 악마(惡魔)들이 있습니다.

 

천번지복(天飜地覆)  하늘과 땅을 뒤엎어 사람 사는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만인지통(萬身瘡痍)  온 백성의 몸과 마음을 갈기 갈기 찢어 깊은 상처를 내 놓은 자.

 

천경지곡(天驚地哭) 하늘이 놀라 소리치고, 땅이 슬퍼 통곡하는 이런 전쟁을 일으킨 자는

만사무석(萬死無惜) 만번을 죽여도 아깝지 않습니다. 절대로 용서해 줄수 없습니다.

 

백마고지에서 전사한 육군 일병 이재민, 에이미 여사의 아들의 유골은 휴전협정이 조인된 다음 달에서야 흰 사각 상자에 담겨 흰 장갑을 끼고 흰 마스크를 쓴 헌병 세사람이 앞가슴에 받쳐 들고 아침 일찍 집으로 찾아와  배달 했습니다.

"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다 그랬겠지만 민수를 군대에 보낸 뒤에는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어요. 음식 맛도 없고, 제대로 편안한 잠을 이룬 적도 별로 없었어요. 오직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빨리 끝나 우리 민수가 건강한 몸으로 돌아 오기를, 긴 목을 늘여 뻬고 맥빠지게 기다리다, 지치고 늙은 학(鶴)의 꼴이 된거지요. 편지 연락도 없었고요.

그러다가 휴전이 성립 되어 전쟁이 끝나자, 곧 올거라고 믿었습니다. 병신이 되어서라도 살아돌아와만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밤잠을 못자 눈이 충혈(充血)된 지친 몸을 이끌고, 아침이 되면 동네 앞 느티나무 밑에 나와 앉아, 해가 져 땅거미가 질때까지 기다렸어요. 밤에는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온 집안에 불을 밝혀  밤 새워 기다렸어요."

여기에서 에이미 여사는 말을 끊고, 눈을 들어 벽면에 걸린 민수의 사진을 바라 보았습니다.두 줄기 굵은 눈물이 주름진 볼 위로흘러 내렸습니다.

"그러다가 민수의 유골함이 온 거지요. 흰 붕대 끈을 목에 건, 헌병의 앞가슴에 매달린 유골함을 보는 순간,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하얀 상자가 작아지면서 가물가물 춤을 추며 하늘로 오르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딛고 있는 땅 바닥이 풍랑(風浪)을 만난 바닷물 위의 조그만 조각배 처럼 심하게 뒤뚱거렸어요. 나는 하늘로 춤을 추며 올라가는 유골함을 잡으려고 손을 들어 허위적 거렸어요. 그날 내 기억은 거기 까지였어요."

에이꼬 할머니는 아직까지 눈물 고인 눈을 들어 나를 쳐다 봤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먼 산에 매장(埋藏)하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 속에 묻힌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드디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십니다.

어떠한 말씀으로도 위로해 드리지 못하는 멍청이가 된 나 자신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웠습니다. 못난 내 자신이 미웠습니다.

나는 할머니의 양 손을 포개어 쥔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쓸어 드렸습니다.

"눈을 떴을 땐 병원 침대 위였어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던 재웅씨가 조심스럽게 나를 안아 주었어요. '고맙다, 당신이라도 살아 줘서 고맙다. 당신이 그대로 가면 나도 바로 따라 가려고 각오하고 있었어, 우리 민수가 이렇게 된 현실을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쟎아. 우리 가슴에 묻혀진, 어린 민수 영혼의 통한(痛恨)을 위로(慰勞)하고, 하늘 나라에서 나마 영혼(靈魂)의 안식(安息)을 얻도록 기도하며 살자,"

기웅씨는 눈물과 콧물로 뒤법벅이 된 얼굴을 내 얼굴에 비벼대고, 몸부림을 치며 꺼억꺼억 울어댔습니다. 내 입술로 스며드는 찝찔하고, 씁쓸한 미각(味覺)을 느끼며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며칠 더 병원 생활을 하고 퇴원해 집으로 왔습니다.

민수의 유골함은 거실 탁자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재웅씨는 선조(先祖)로 부터 물려 받은 종산(宗山)이 몇 곳에 있었습니다.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에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명당(明堂)자리, 양지 바른 터를 잡아, 민수의 유골을 안치(安置)했습니다.

그리고 남편 재웅씨는 아내, 에이미씨를 앞으로 손짓해 불렀습니다.

"민수의 왼쪽이 내 자리고, 오른 쪽이 당신의 자리다. 우리 세 사사람은 죽어서도 한자리에 묻혀 영원히 함께 살자. 사랑하는 재웅이를 가운데에 누이고, 우리 부부가 양쪽에 자리 해, 서로 손을 뻗어 잡고 이승에서 못다하고 가슴에 묻어뒀던 얘기와, 더 하고 싶었던 사랑의 이야기를 오손도손 속삭이며 영원히, 영원히살자."

재웅씨는 팔을 뻗어 에이꼬씨릉 당겨 가슴에 폭 안았습니다.

 

"새털 구름 헤엄치는

저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고,

주변의 수목들이

흘러가는 바람결 따라 어깨를 걸고 합창하는 고운 노래 소리,

가끔 찾아드는 새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듣자.

 

비 내리고, 눈 내리는 날이면,

이승에서 못 다한, 아쉽고 애달픈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를

당신의 고운시에

내 멋진 곡을 부쳐

우리 세 식구 멋진 합창으로

빗줄기와 눈발에 띄워 멀리---, 또 멀리---실어 보내자.

 

(두 부부는 손을 펴 들고,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의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통곡하며 큰 소리로 외칩니다,)

 

(남편) 나,                  이재웅

(아내) 나,      요시모토 에이미

(합창) 우리가 사랑하는 이재민, 이재민, 이재민------------.

         이승에서 못다한 애달픈 우리들의 사랑을

         저승에서 맞나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 시킨다,

 

재웅씨는 대학의 교수직을 버렸습니다.

시골집 거실 출입문 맞은 편 벽에 크게 확대한 민수의 사진을 걸어 놓고, 그 밑 탁자 위에 하루에 한번  자기 내외가 먹는 식사를 차려 놓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초에 불을 붙이고, 향을 피우고,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기도 하며 명복을 빌었습니다.

낮에는 부부(夫婦) 함께 자전거로 민수의 산소에도 가고, 강변 자전거 도로를 산책했습니다.

그러나 부부는 말과 웃음과 즐거움을 잃었습니다. 부부가 하루를 함께 하면서도 나누는 이야기가 몇마디 되지 않았습니다. 식욕(食慾)을 잃어 음식도 전처럼 먹지 못했습니다.

재웅씨는 몸이 많이 여위었습니다.

어지럽다며 몸의균형을 잘 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때가 잦아졌습니다.

두통이 심하다고도 했고, 가끔 구역(嘔逆)질을 할때도 있었습니다. 눈이 침침해 물건들이 잘 안보인다고도 했습니다.

그때의 의료 환경은 아주 많이 열악(劣惡)했습니다, 병원에 가도 의료기기가 없어 제대로 된 검사 한번 못받고 의사의 짐작으로 판단하여 간단한 몇가지 약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더구나 지방의 병원에서는 형편이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뇌졸증의 전기(前期) 증상이라는 것을 의사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는 날, 에이미 여사가 아침밥을 준비하는 동안, 뒷동산으로 잠간 산책을 다녀 오겠다고 나간 재웅씨가 돌아오고도 남을 충분한 시간이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에이미 여사도 집을 나와 늘 함께 산책하던 길을 따라 걷다가 바위 위에 뒤로 넘어져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남편을 발견했습니다.

달려가 보니 숨은 쉬고 있는데 말도 못하고, 눈도 뜨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외부로 피를 흘린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을에서 가까운 곳이라, 소리를 질러 동네 사람들이 올라와 재웅씨를 집안으로 모시는 한편

이 곳에서는 제일 크다는 의료원으로 연락해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의료원에 들려 젊은 의사와 간호원을 한사람씩 동승(同乘)시켜, 재웅 교수가 재직하던 대학부설 종합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전화 연락을 해 놓은 터라, 미리 나와 대기하고 있던 담당 의료진이 검사에 착수했습니다.

미쳐 한시간도 안 된것 같은데 의사들이 검사실에서 나오며 가운을 벗었습니다.

대개 의사들이 검사실이나 수술실에서 나오면서, 밖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간단한 검사 결과를 이야기 하는 것이 통례(通例)로 알고 있는데, 모두가 하나 같이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바쁜 걸음으로 지나갔습니다.

에이미 여사는 전에 몇번 뵈온 적이 있는 담당 윤교수님을 뒤딸아 들어갔습니다.

교수님은 뒤를 돌아 보시더니, 꾸벅 절을 하며 자기 자리에 앉아 앞 의자를 가리키셨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감싸 쥐고 잠시 고민을 하는 듯 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교수님의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에이미 여사의 마음은 천길, 만길 낭떨어지로 추락하며 심한 어지러음증으로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뒹굴었습니다.

간호원들이 황급히 달려들어 에이미 여사를 침대로 모시고, 주사를 몇대 꽂고 사지(四肢)를 주물러 드렸습니다. 교수님도 침대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지시를 하시며 지키셨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릅니다.

에이미 여사는 편한 잠을 잔 사람 처럼 눈을 떠 사방을 둘러 보고 윗몸을 일으켰습니다.

곁에 앉아 있던 윤교수가 황급히 일어나 에이미씨를 거들어 자리에 다시 눕혔습니다.

"사모님. 지금 일어나시면 안됩니다. 조금 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에이미 여사는 자기가 왜 이자리에 누워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습니다.

곰곰히 생각을 더듬어 보니 책상에 마주 앉아 있는 윤교수의 눈가를 흐르는 두 줄기 눈물까지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고 아침에 남편과 함께 구급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오던 기억까지.

"윤교수님, 우리 집 바깥양반 어떻게 됐습니까?"  아주 조심스럽게 여쭈어 봤습니다,

윤교수는 크게 심호흡(深呼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에이미 여사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아쥐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모님. 제가 어떤 말씀을 드리셔도, 사모님의 마음이 흔들리거나 격해시시면 안됩니다. 이재웅 교수님은 제가 존경해 따르던 가장 훌륭한 분이십니다. 든든한 맏형님 처럼 저를 귀여워해 주시고, 선생님처럼 모든 것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잠깐동안 사모님 마음 편하시라고 지어낸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위로 말씀을 안드리겠습니다.

내 마음 이해 하시고 마음을 차분히 가지셔야 합니다,"

윤교수가 필요 없는 잔소리, 사설(辭說)을 길게 늘어 놓는 것으로 이미 짐작이 갔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윤교수는 내 손늘 다시 힘주어 쥐고 다음 말을 시작 했습니다,

"이 교수님은 뒤로 넘어 지시면서 거센 타박상(打撲傷)을 입으셨습니다, 단단한 바위일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뇌(腦)속에 큰 핏줄이 터져, 뿜어 나온 피가 머리 속에 꽉 찼습니다. 병원에서 말하는 뇌출혈로 인한 뇌졸증입니다. 그러고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벌써 상한 상태입니다, 수술을 해서 소생시킬 수 있는 확률이 단 1%도 안됩니다.

사모님!  맏형님 같은 내 형님,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키워내 주신 내 참스승님을 살려내지 못하는, 이 못난 사람을 차라리 벌하여 주세요."

이제는 윤교수가 에이미씨의 손을 감싼채 그 큰 어깨까지 들먹이며 통곡을 합니다.

에이미씨도, 주변에 서 있던 조교수와 간호원들도 모두 얼굴을 감싸고 몸부림 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천둥 번개가 물러간 뒤 고요는 한층 더 적막(寂寞)합니다.

"우리 남편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에이미 여사도 많이 진정돼 있었습니다.

" 아직은 운명(殞命)하시지 않으셨어요.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에 의해 연명(連命)하시고

계세요. 18시 부터 면회 시간이니 4시간 남았어요. 사모님 오늘 내내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사모님이 좀 잡수시고 기력을 회복하셔서 가시는 영혼을 편안히  모실 수 있어요."

그리고 윤교수는 손짓해 간호사를 불렀습니다,

"사모님께 영양제 주사 놓아 드리고,꼭 옆에서 간호해 드려요."

 

이 재웅 교수님은 가족묘원(家族墓園) 민수의 묘 왼쪽에 묻혔습니다.

에이꼬 할머니는 집 거실안 출입문 맞은 편에, 남편 이재웅 교수와, 아들 대한민국 육군 일등병 이민수군의 큰 사진을 세로로 나란히 걸어 놓고 매일 가족 좌담회를 갖는다고 합니다.

 

한달에 한번 정도는 에이미 할머니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만났습니다.

주로 전화를 먼저 거는 쪽은 에이미 할머니였고, 찾아가는 쪽은 나였습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났습니다.

에이미 할머니의 전화가 3개월째 끊겼습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아 찾아 갔습니다.

아랫집 텃밭에서 일하고 계시는 할아버지께 여쭈어 봤더니 두달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집은 사람이 살지 않고. 민수의 큰 아버님 되시는 분이 관리 하신다고 했습니다.

마을 가게에서 막걸리 한병과 북어 세마리를 사서, 전에 에이미 할머니와 함께 가 본적이 있는 그리 멀지 않은 묘원을 찾았습니다.

 

왼쪽에서 부터 검은 비석 세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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