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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현의 월계순 검사에 다달아 월계포에 배를 놓아두고 육지에 올라 서양령 허가산을 지나 시오포에 닿았다. 또 가다가 백교령, 진서방을 지나 영해현의 백교역에 닿았다. 그리고 동산포 매림포 강격령 항공포 해구포를 지났다. 그 중간에 큰 내 셋과 큰 다리 둘이 있었다. 밤 2시경 쯤에 서점역에 이르러 유숙하였는데 윤1월 27일 큰 비가 내려 시냇물이 불어 넘쳤으므로 서점역에 하루 묵었다. 윤 1월 28일 큰 비가 내려 다들 주저하는데 인솔을 담당한 적용이 법령이 엄정해서 조금이라도 더디고 늦어지면 처벌을 받는다며 머무를 수 없다고 이끄는 통에 모두들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를 무릅쓰고 책허포 타계령 산황포를 지나고 또 대령 방문포를 지나 쌍계포에 이르렀다.
시냇물이 불어 넘쳤으므로 모두 옷을 입은 채 건너서 상정포 봉화현의 연산역에 유숙을 했다. 그리고 윤1월 29일 또 비가 내렸지만 큰 내를 건너 행군은 계속됐다. 허백관 금종포 남도포를 지나 광제교에 이르렀는데 다리를 지나면 그 땅이 영파부의 영역이니 그 다리는 옛날 명주였을 적 세운 것이다. 또 다시 다리 하나를 지나 거룻배를 타고 석교 열 셋을 지나 20여리를 갔는데 제방에 민가가 가득했고 서남방에 사명산이 보였다. 산의 서남쪽에는 천태산에 연해 있고 동북쪽으로는 회계산 진망산등과 연해 있으니 곧 하지장이 젊엇을 적 머물던 곳이었다. 노를 저어 영파부성에 이르니 높은 집들이 언덕 좌우에 죽 이어져 있었고 자석으로 기둥을 만든것이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기이한 광경과 좋은 경치는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최부가 영해현을 떠나 영파부에 이르는 여정을 그가 쓴대로 일부러 그대로 옮겨 보았다. 솔직히 우리는 감조차 잡지 못할 곳곳으로 무감한 노릇인데 그의 세세한 기억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더욱 더 경탄을 금치 못하는 것은 '영파부 하지장이 젊었을 때 살던 곳' 이라 하듯 연도(沿道) 의 전고(典故)를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장은 당나라의 시인으로 풍류지사로 유명한 데 현종을 섬겼고 시인 이백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 자신도 호방한 성격으로 술을 좋아하여 음중 팔선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런 그를 최부가 딱 찍어 말을 하니 역사는 물론 지리 학문 등 모자라고 빠질 것 없이 최부는 대단한 문사임에 틀림이 없을 테다. 오죽하면 동방견문록과 겨룰만한 걸작이라 칭하며 -조선인 최부의《표해록》에 대한 고찰-이란 논문을 발표한 고전문학 대가(당․송 문학)인 현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겸직연구원이며 현 청화대학 중문계 겸직교수인 부선종(傅璇琮)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영파 출신이다.
<최부는 지리적인 개념에 있어서도 아주 정통하였다. 남북의 여정을 기록한 책에서 보면 거쳐간 도시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도시안의 향(鄕)과 진(鎭)등의 작은 도시들까지 언급되어 있고, 더 나아가 교(橋), 포(鋪), 문(門), 언(堰)등의 아주 작은 지명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록해 놓았다. 이와 같이 상세한 지명표기는 기존에 있었던 외국인들의 중국 기행문인 일본인 원인(圓仁)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이탈리아인 마르코폴로의《동방견문록》에서도 일찍이 찾아 볼 수 없는 것일 뿐아니라, 중국고대 기행문에서도 극히 적은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여정의 초기인 절강 동쪽을 지날 때, 즉 봉화(奉化)에서 영파(寧波)로 갈 때 영파부(寧波府)에 도달할 때쯤에 이와 같이 적어 놓고 있다. “허백관(虛白觀), 금종포(金鍾鋪), 남도포(南渡鋪)를 지나 광제교(廣濟橋)에 도착하였다.” 또한 진사리(進士里), 문수향(文秀鄕), 연산역(連山驛)등을 모두 이야기 해 놓고 있는데, 이러한 지명을 이야기 할 때도 시적 정취가 풍부하게 기록해 놓았다. 또 영파(寧波)에서 자계(慈溪)를 지나갈 때 신청교(新淸橋), 진사향(進士鄕), 석장군묘(石將軍廟), 경안포(景安鋪), 계금향(繼錦鄕), 개희교(開禧橋)등등을 기록해 놓고 있다. 본인은 영파(寧波)사람으로 20세기 90년대 중화서국 총편집을 맡은 바 있으며, 그 기간동안 영파시(寧波市)와 은현(鄞縣)을 구분하여 중화서국에서 출판된《영파역사지리기록서》,《은현역사지리기록서》의 학술고문과 원고심사를 맡은 적이 있다. 또한 본인은 이 두 권뿐만 아니라, 당․송문학가들의 여러 기록서, 송․원이후의 여러 역사지리 기록서들 모두를 조사하고 읽었던 일이 있다. 그러나 이 책들 어느 것도《표해록》보다 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영파부근의 지명을 기록해 놓은 문헌은 없었다.>
한마디로
그 동네 사는 사람들보다도 더 소상히 알고 있으며 세세하게 기록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이쯤부터서는 그가 적은 지명을 모두
옮기지는 않겠다. 우리와 인연이 깊이 닿지 않는다고 여기기때문이다. 가급적 조선과 지금의 우리와 연이 닿는 여정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나는 최부가
말한 영파라는 곳이 무척 마음에 든다. 얼마전에 가본 강남 수향마을을 다시 보는 듯 싶어진다. 비록 비는 오지만 온화한 느낌으로 다시 읽어 본다. 꿈에
그리는 한 편의 서경수필이다.
<우두외양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연산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봉우리들이 줄을 지어 어지럽게 얽혀 높이 솟아 있었으며, 냇가에는 암벽이 얽히고 굽어져 어지러웠다. 이 강에 이르니 평평하고 넓은 들이 막힘이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멀리 보이는 산은 눈썹 같았다. 강의 북쪽 언덕에 패(壩)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패는 배를 위로 끌어올려 지나가게 하는 곳이다. 패의 북쪽에 둑을 쌓고 강을 팠는데 나룻배들이 강 언덕을 둘러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노를 저어 영파부에 이르렀는데 성은 강을 막아 축조되어 있었다. 성은 모두 중문이고 문은 모두 중층으로 되어 있었다. 성문 밖은 중성이고 성의 주위의 해자 역시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성은 모두 홍문이고 문은 쇠빗장이 있었으며, 배 한 척만 드나 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노를 저어 성안으로 들어가 상서교(尙書橋)에 이르렀는데 강의 넓이는 100여 걸음쯤 되었다. 또 혜정교(惠政橋)·사직단을 지났다. 무릇 성안에서 큰 다리를 지난 것 또한 10여 개에 이상이었다. 높고 넓은 집들은 강 언덕에 줄지어 서 있었는데, 붉은 돌기둥이 거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기묘함과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노를 저어 북문으로 나오니 북문 역시 남문과 같았다. 성 둘레의 넓고 좁음은 알 수 없었다. 부의 치소, 영파위(寧波衛)·은현(鄞縣)의 치소, 그리고 사명역은 모두 성안에 있었다. 대득교(大得橋)를 지났는데 다리에는 세 개의 홍문이 있었다. 비가 심하게 내려 강 가운데서 정박하여 머물렀다.>
영파부, 최부는 그곳에서 해적을 만나 목숨이 달아날 뻔 하였으니 좋은 추억은 없으련만 영파부는 글에 있듯이 고려까지만 해도 명주라고 하던 곳인데 '
명'자가 명나라와 겹치다보니 영파로 개명을 한 것이고 지금은 또 닝보로 개명을 하였다. 물을 낀 홍문 사이로 거룻배가 다니고 장사를 하며 오가는
사람들이 눈에 선한 느낌의 곳인데 지금의 닝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달라져 있다. 상하이 때문 가려지긴 했지만 아니 지금도 상해 출신
부자들 절반은 모두 닝보출신들이라고 한다. 상하이에서 자동차를 타고 남쪽으로 2시간 정도 걸리는 저장성 닝보시. 중국에서도 최초로 대외에 문호를
개방한 항구도시 중 하나다.
물동량 기준으로 중국 2위, 세계 4위를 차지하는 콘테이너 항구라 하면 믿을텐가. 그동안 상하이에
치여 한국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지만 수심이 깊어 30만t급 화물선이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천혜의 항구다. 경제 성장 둔화에도 계속
들락거리는 컨테이너선으로 인해 항만 근로자들은 24시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배후에 상하이와 항저우 등 대도시를 두고
있는데다 다른 항만으로 보내지는 환적화물로 쉴 샐 틈이 없는 것이다.닝보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한국 기업들에 대한 관심은 유별나
요즘도 사업설명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한다. 사실 닝보는 우리와 역사의 뿌리가 깊다.
고려시대
사신들이 닝보를 통해 당시 북송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북송은 고려에서 오는 사신들을 융숭하게 대접하고자 영빈관격인 고려사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이 사관은 지금도 닝보시내 한복판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송나라와 교류하던 고려 초기는 주로 황해도 연안의 웅진 항구에서 바다를 건너
산동성 등주나 밀주 등지로 상륙하는 항로를 이용했다. 그러다 고려 문종 28년(1074)에 사신 김양감이 거란을 피해 명주로 들어가고 싶다고
송나라에 요청하자 황제 신종이 이를 허락했다. 이후 명주는 송나라와 고려 무역의 중요한 항구로 떠올랐다. 고려사신은 통상 예성강에서 배를 출항해
명주로 들어갔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도 송나라 흠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명주로 들어가 수도 변주(우리는 포청천 덕에
개봉이라 해야 잘 안다. 카이펑.)로 향하는 길에 금나라 군사들에 의해 차단을 당해 명주에서 머물다가 돌아온 적이 있다.
그것으로만 이름이 난 것이 아니다. 바로 최부가 헤매던 영파부 하산근처에 보타섬이라는 곳은 절강성 주산군도에 속하는 곳으로 주산군도 1300개나 되는 섬 중의 하나로 문수보살을 모신 산서성의 오대산, 보현보살을 모신 사천성의 아미산, 자장보살을 모신 안휘성의 구화산과 더불어 중국불교의 4대 명산이다. 요즘은 상해와 묶어서 패키지로 불교신자들이 그곳을 드나드는 관광코스로 유명하다. 우리의 장보고는 신라시절의 청해진 대사이고 고대 해상왕으로서 오늘의 산동반도에 중국땅 연해 신라방의 주축을 이루는 적산법화원을 세운 인물로 유명한데 절강 주산군도 보타산에도 신라초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다. 장보고는 필시 명주와 주산군도쪽에서도 활동한 역사적 인물이었을 테다.
영파에 이를 무렵에는 백발노인에게 천태산하고 안탕산이 어디쯤이냐고 물었던 바로 그 천태산이 나온다. 이는 고려시대 불교를 알아 차려 물어 본 것은 아닐까 싶다. 고려 명승 의통(927~988)은 명주에 와서 불법을 전수하다가 그 시절 명주군 주사이고 고려와 친선관계를 가지고 있던 오월국 국왕 전숙의 아들인 전유치의 거듭된 만류로 귀국을 포기하고 명주에 남아 포교의 삶을 살아간다. 968년에 송나라 관리 고승휘는 의통에게 주택을 기증하여 살게 하는데 이 주택이 《전교원》이라는 사찰이고 의통은 이 사찰에서 주지로 활약한다. 982년에 송태종이 《보운선원》이란 편액을 하사하자 전교원은 보운사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 사찰의 유적지는 오늘의 녕파시 문물고고연구소 임사민씨에 의해 현재 녕파시제1병원 서쪽의 거주지역으로 밝혀져있다. 의통은 20년간이나 명주에서 불교의 천대종 교리를 펼치다가 988년 62살에 세상을 하직했다. 또한 고려 명승이며 대각국사인 의천은 한국 불교 천대종의 시조로서 송나라에 와서 14개월이나 있으면서 항주와 소흥 가까이 천태산 불교성지, 명주 등지에서 활동모습을 보인 비범한 인물이었다.
첫댓글 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