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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1년 10월 24일 주일 오후 예배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설교
제 40주일
성경낭독 : 시 34:1-8; 히 7:23-28
본문 : 창 1:28-30; 9:1-4; 사 11:6-9
제목 : “죽이지 말라”
주일 오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100-2편 1-4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101편 2,3,5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9편 1,5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5편 8,9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68편 7,8,9
성찬식 찬송 – 시 132편 8,9 (고정)
폐회찬송 – 시 139편 1,3,12 (고정)
제 40주일
105문 : 제 6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내가 이웃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그들을 미워하거나 해치거나 죽이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생각이나 말이나 몸짓으로, 무엇보다도 행동으로 그리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해도 안 되며 오히려 모든 복수심을 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해쳐서도 안 되고 부주의하게 위험에 빠뜨려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살인을 막기 위해서 국가는 또한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106문 : 그런데 이 계명은 살인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까?
답 :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을 금함으로써
살인의 뿌리가 되는 시기, 증오, 분노, 복수심 등을 미워하시며,
이 모든 것들을 살인으로 여기신다고 가르칩니다.
107문 : 앞에서 말한 방식으로 우리 이웃을 죽이지 않으면 그것으로 이 계명을 다 지킨 것입니까?
답 :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기와 증오와 분노를 정죄하심으로써
우리가 우리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여
인내와 화평과 온유와 자비와 친절을 보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해악으로부터 보호하며,
심지어 원수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죽이지 말라
그리스도인은 매우 어려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학교를 다니고 회사를 다닙니다. 아니면 좀 더 쉬운 예로는, 여러분이 스포츠 선수라고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네 삶에는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이 있는데, 바로 ‘경쟁’이라는 것과, 그 ‘경쟁을 통한 승리’에 무언가 보상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학교를 다녀도 성적에서 타인을 눌러 이겨야 하고, 회사를 다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스포츠 선수라면 상대를 배려하면서 경기한다면 절대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할 것이고, 곧 퇴출당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경쟁’이 곧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 학생이라면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을 배려해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공부 못하는 아이에게 져줄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 회사원이라면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반드시 제쳐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즉시 ‘생존’에 있어 위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스포츠 선수라면 스포츠는 그 존재 의의 자체가 ‘승부’이며, 승부는 무조건적으로 ‘경쟁’이며(경쟁이 없는 스포츠는 없습니다), 이 경쟁은 반드시 한쪽을 낙오자로 만들고야 맙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내가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 가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겠다는데 거기에 무슨 그리스도인이니 어쩌니가 있는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여섯째 계명을 한 번도 고민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여섯째 계명을 대한다는 것은 단지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니 괜찮아”라던가, 심지어는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살인을 마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까지 확장하여 적용했으니,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는 ‘증오심’이 포함돼”라는 정도까지로 이해한다면, 여섯째 계명을 ‘아주 조금’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섯째 계명을 주신 것은 단지 누군가를 칼로 찔러 죽이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더 나아가서 성품을 좋게 만들어서 하루 종일 살아가면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정도의 내용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여섯째 계명은 “우리가 어떤 나라의 국민인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조금 더 설명해 보자면, “세상은 어떤 나라이며, 그 세상 나라에 속하지 아니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나라의 국민인가?”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곧 살펴보겠지만, 답을 먼저 말해보자면 ‘죄가 침투한 세계’란 ‘타인을 죽이는 세계’이며, 그리스도 때문에 ‘죄를 극복한 세계’인 교회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타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위하고 아껴주는 세계’의 백성인 것입니다.
오늘은 이 사실을 살펴보겠습니다. 여섯 번째 계명, 곧 “살인하지 말라.”
어떤 것이 ‘살인하지’ 않는 삶인지, 원어를 따라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살인”, 곧 ‘사람을’ 죽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지 말라”, 곧 모든 종류의 파괴 행위에 대한 계명인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나라의 국민인지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을 갖는 우리들이 되도록 합시다.
창세기의 식물 규례
1. 하나님이 처음 지으셨던 세계
창세기의 식물(食物), 곧 먹거리 규례가 알려주는 내용을 숙고해 보도록 합시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될 수 있지만, 창세기 1장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세계, 곧 죄가 침범하기 전의 세계에서는 모든 동물들의 식량은 풀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29-30)
여기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수수께끼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자가 어떻게 풀을 주식으로 삼을 수 있는지 그에 대해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육식동물의 구강구조는 원래 하나님께서 타락 이후를 염두에 두고 만드신 것일 수도 있고 죄로 인하여 변형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일이므로 일단 놔두도록 하고, 성경이 알려주는 사실에만 주의를 기울이도록 합시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신 세계는 ‘먹는 것’, 곧 생존을 위해서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세계였습니다.
혹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성경적 사고’를 갖지 않은 사람들, 단순히 생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그럼 풀은 생명이 없어? 풀은 생명이 아니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창조의 구조를 잘 보십시오. 창조는 3일 동안의 배경 창조와, 3일 동안의 그 배경 안의 주권자들의 창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러분이 알고 있는 식물들, 곧 풀과 나무와 꽃과 과실들은 모두 셋째 날에 창조됩니다(1:12). 즉 성경의 세계에서 식물들은 ‘배경’입니다. ‘생명체’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성경적 사고에서는 풀이나 나무나 꽃들은 생물학적 개념에서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명체야, 꽃들도 음악을 들으면 더 잘 자란다구!”라는 개념에서 이해되지 않고, 배경, 곧 베이스가 되는 토양으로 이해됩니다.
자,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우리는 이 창세기 1장 29절과 30절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세계’의 분명한 요점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설교의 서론으로 들은 것을 잘 기억하면서 이 부분을 소화하십시오. 지금의 우리, 곧 죄 이후의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다른 이들을 ‘죽여야만’ 되는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반드시 악의를 가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육식성 동물들을 생각해 보시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사자가 악하기 때문에 노루를 잡아먹는 것은 아닌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이 처음 지으신 세계는 그렇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오늘날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다른 동물들을 ‘잡아 먹어야만’ 자기가 ‘생존할 수 있는’ 육식동물들조차도, 그 때에는 모조리 ‘풀을 먹는’ 세계였습니다. 이 사실이 보여주는 뚜렷한 주제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단지 “사자가 풀을 먹었다고?” 이런 이야기를 훨씬 뛰어넘어서, “내 생존을 위해서 다른 누군가를 파괴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가 하나님이 원래 지으신 세계였다는 사실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지으셨던 세계, 곧 죄가 없었던 세계는 가장 궁극적인 문제인 ‘자신의 존재’,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필연적으로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만 되는 그런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를 밟아야만 하는 세계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로서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 그것이 죄가 없는 세계였습니다. 맹수들조차 토끼를 먹지 않아도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한 세계, 곧 나의 존재를 위해서 다른 누구의 희생이 요구되지 않는 세계가 하나님이 처음 지으신 세계였고, 그것이 이 “모든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창 1:30)라는 말씀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2. 죄로 인해 망가진 세계
하지만 이것이 어느 시점에서 변경되는지를 보십시오.
여기에는 문장 구조상 흥미로운 점이 있기 때문에 아주 쉽게 비교가 됩니다.
먼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말씀, 즉 창세기 1장에서 이 “식물에 대한 규례”의 시작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29절과 30절의 “식물에 대한 규례”는 28절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입니다. 즉 이 “식물에 대한 규례”는 사람들에게 이 온 세계를 다스리라고 명령하신 것 안에 주어졌습니다. 이 온 세계를 다스리되, 잡아먹지 말고, 다른 생명체를 죽이지 말고, 그렇게 이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창세기 9장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창세기 9장에는 “먹는 것에 대한 규례”의 급진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3절과 4절을 읽겠습니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창세기 9장 말씀은 먹는 것에 대한 변화가 나타나 있는 곳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동물들이” 식물(食物), 곧 양식으로 언급됩니다. 창세기 9장에 와서 비로소 이제 모든 동물들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육식이 허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9장의 내용은 어떤 말씀으로 시작합니까?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우리가 좀 전에 살폈던 1장의 내용과 똑같습니다. 1장에서도 “생육하고 번성하라”의 명령 다음에 먹는 것에 대한 규례였고, 9장에서도 똑같이 “생육하고 번성하라”의 명령 다음에 먹는 것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점에서 ‘구조적 동일성’을 발견합니다. 말하자면 1장도 이 땅에 대한 정복과 다스림의 규례 속에 먹는 것에 대한 규례가 나온 것이고, 9장 역시 노아 홍수가 일어난 이후의 세계에, 동일하게 이 땅에 대한 장복과 다스림의 규례 속에 먹는 것이 대한 규례가 나온 것입니다.
단지 차이가 무엇입니까? 1장은 ‘죄 이전의 원래 세계’였고, 9장은 노아의 홍수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죄악된 세계를 인정하신 후의 세계’입니다.
이제 세계는 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며 하신 말씀이 “육식을 허용한다”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즉 ‘육식 허용’이라는 것은, 단순히 ‘식습관’에 대한 주제가 아니라, ‘이 세계의 큰 변화’를 보여주는 개념입니다.
이전에는 ‘나의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체를 죽이지 않아도 되는’, 곧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한’ 세계였습니다. 무죄 세계 때는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죄가 저질러졌고,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어떤 세계로 떨어졌습니까? ‘나의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체를 죽여야만 하는’ 세계, 곧 ‘평화로운 공존은 불가능한’ 세계가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육식의 세계’란 죄 때문에 발생하게 된, ‘죽음이 필연이 될 수밖에 없는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작용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죽여야만 하는 것이 옵션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선택이 되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때때로 옵션으로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죽음이 필연이 된 세계이죠. 즉 육식의 세계는 죄가 정복하게 된 세계는 평화로운 공존 대신에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는 타인을 죽여야만 되는 세계가 되었음을 보여죽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자는 풀을 뜯어 먹으며 살 수 없게 되었고, 자기가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노루와 양을 잡아 먹어야만, 곧 죽여야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 이후의 세계의 특색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도 고스란히 반영됩니다. 죄 때문에, 사람들 역시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인을 죽이고 밟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를 살아야만 하게 된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죽여야만 하는 세계, 바로 그 죄악의 특질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식물에 대한 규례”이며, 우리가 여섯째 계명, 곧 “죽이지 말라”라는 계명을 배울 때,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세계’와 ‘죄로 인하여 망가진 세계’의 특징을 깨닫는 것입니다.
식물에 대한 규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세계의 ‘평화와 공존’이라는 핵심을 알려주고, 반대로 죄로 인해 파괴된 세계는 그 죄가 가진 궁극적인 특징인 ‘사망’ 때문에 자기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을 죽여야만하는 것이 필연이 된 세계라는 것을 동시에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것을 제대로 파악했을 때에만 “죽이지 말라”라는 여섯째 계명의 본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여섯째 계명은 단지 ‘살인’이라는 행위에 국한되거나, 더 나아가 “증오조차 살인에 포함된다” 뭐 이 정도를 말하는 계명이 아니라, 죄로 인해 파괴된 세계 전체를 다루고 있는 매우 심오한 주제의 계명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역할
3. 이사야
그러면 이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세 번째 항목에서 다룰 주제는 바로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 곧 여섯째 계명에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역시 이것 또한 ‘식물에 대한 규례’의 연장선상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세 개 읽었으니, 세 번째 본문의 차례입니다. 다 함께 이사야 11장을 봅시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으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이사야 11장의 이 말씀을 읽을 때, 아마도 대다수의 성도들조차,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 말씀을 대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라는 말의 의미는, 이 이사야의 본문을 읽을 때, 이 장면을 단지 ‘그저 이상향을 그리기 위한 도구로서’, ‘단지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풍경을 그려 평화로운 세계를 나타내기 위한 방편으로서’만 여기 동물들이 사용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전에 창세기 1장과 9장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것”을 말했습니까? 왜 이사야서의 말씀은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는 것”을 말했습니까? 왜 이사야서의 말씀은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암소와 곰이 함께 먹는다”고 말했습니까? 왜 이사야서의 말씀은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괜찮다”고 말했습니까? 결정적인 힌트가 7절 마지막에 있지요.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그렇습니다. 이사야 11장이 그리고 있는 이 목가적인 풍경의 정체는 ‘단순히 평화롭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이 동물들이 동원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생존을 위하여 다른 생명체를 죽이지 않는 세계”, 곧 창세기 1장의 세계가 회복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세계가 회복된다는 것이며, 창세기 9장에서 죄로 인하여 파괴된 세계, 곧 나의 생존을 위한 남을 죽여야만 하는 그 ‘죄와 사망의 세계’가 이 이사야 11장의 세계에 오면 종식되고, 다시 창세기 1장의 세계로 복귀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요?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9절을 보십시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장 말씀은 ‘메시아 왕국’을 그리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메시아 왕국’은 우리가 아는 대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도래하게 될 왕국’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를 살고 있으니, 이 세계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사야 11장의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를 그리고 있음은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10절을 보면 명확해집니다.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한 싹이 나서 만인의 기호로 설 것이요......”
“이새”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말씀은 ‘장차 오실 다윗’, 곧 다윗의 뒤를 이을 참 왕이신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사야서 11장이 말씀하고 있는 이 때는 ‘메시아 왕국의 도래’이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왕국’의 특성이라는 말입니다.
이 특성이 무엇입니까? 죄로 인하여 파괴된 세계, 곧 “나의 생존을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해할 수밖에 없던 죄악된 세계”가 메시아 왕국에서는 ‘새로운 질서로 재편’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메시아 왕국 안에 들어가면! 그 왕국 안에서는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분의 성취된 왕국 안에서는 “더 이상 나의 생존을 위하여 타인을 해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질서 속에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4. 부활의 의미
여러분!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루셨는지를 생각합시다!
우리가 “살인하지 말라”, 곧 “죽이지 말라”라는 계명을 대할 때 오늘 배운 것과 같이 ‘식물에 대한 규정’과 연결하여 생각하게 되면, 이 여섯째 계명이 ‘평화와 공존의 세계’를 구상하신 하나님의 본 뜻과, 거기에 대항하여 죄 때문에 발생하게 된 ‘파괴적인 세계’와의 대립구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좀 더 쉽게 말해 보자면 여섯째 계명은 우리에게 ‘죄가 가진 죽음과 파괴의 본성’과 그 반대편에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일깨워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섯째 계명을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의 규례가 아니라 ‘죄의 속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고, 그 죄가 가져다주는 ‘사망’이라는 궁극적인 본질을 간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역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죄와 사망’이라는 그늘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죄에 저항하는 사역은 ‘생명을 빼앗는 대신 생명을 주는 사역’, 곧 ‘부활’이 됩니다. 말하자면, 세상 곧 죄악의 세계가 ‘타인의 폭력’과 ‘타인의 죽음에 대한 위협’에 대항하여, 똑같이 ‘나도 폭력을 행하고’, ‘나도 그런 상대를 죽이려고 하는 것’과는 반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이에 대한 대응은, “죽음에 대하여 생명을 주시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교리적인 용어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 부활을 성취하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3-5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죽음’에 대응하신 방식은 ‘끝없이 죽음을 반복해서 양산애 내는 죄악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복수는 복수를 낳고, 그 복수는 다시 다른 복수를 낳습니다.” 조폭 영화에서 다른 조직을 깨 부수고 주먹으로 누군가를 때려 눕히는 일은 ‘통쾌해’ 보이지만, 그렇게 굴복당한 조폭들은 절대로 가만히 순순히 마음을 다하여 자기를 때려눕힌 이의 부하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폭력이 가해지고, 다시 복수가 가해집니다. 기회만 있다면 반드시 상대를 죽입니다.
죄악된 세계가 가르쳐주는 방식은 ‘죽음을 끝없이 반복하는 방식’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죽음에 대응하신 방식은 “죽음을 생명으로 변모시키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말씀이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된다”고 말씀한 것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죄와 사망이 여전히 작동할 수 없도록, 곧 그들의 시스템에 맞춰 행동하면 여전히 그 방식이 득세할 것이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그 방식을 완전히 끊으시고, “죽음이 부활에 삼켜지는 방식으로” 그렇게 이 죄악과 죄악의 결과물은 사망을 극복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사망으로 사망을’ 찍어 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부활’, 곧 ‘생명으로 사망을 삼키는’ 방식으로 이 죄의 문제를 극복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 부활을 경험한 자로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로마서 12장 17절,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로마서 12장 21절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는 은연 중에 세상의 방식에 익숙해서, 힘을 내리누르는 방식은 ‘더 큰 힘’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세상의 사고 방식 안에서는 ‘죽이는 것’, 곧 나의 생존을 위하여 타인의 생명을 죽이는 일은 ‘더 큰 힘’이며,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이것을 창세기의 용어로 말하자면 ‘라멕의 방식’(창 4:23)입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그리스도인이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은 악에게 조종당하고 이용당하는 것이지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악에게 진정으로 이기는 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이에게 ‘더 큰 악으로’ 갚는 대신, 선을 행하는 것을 통해 악을 “이기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 21절 바로 앞의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섯째 계명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참 세계, 곧 ‘메시아 왕국’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참된 삶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나의 생존을 위하여 타인을 죽이는 대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경험한, 곧 생명으로 사망을 극복한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사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섯째 계명 “죽이지 말라”라는 계명을 하나님께서 주실 때의 그 본연의 의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교회 됨에 기대하시는 태도는 그야말로 “상대를 위한 세계”, “나의 생존을 위해 상대를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상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세계”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생명으로 변모시키시는 분이시니까요!
회복된 세계를 살아야 하는 교회의 의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여섯째 계명을 가진 성도가 살아가야 할 방식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기독교적 이념’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세상과 똑같은 방식을 사용하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동성애가 악하니까, 또 사학법이 문제가 있으니까, 혹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생 인권 조례가 반성경적이니까, 이에 대해 교회들이 어떻게 합니까? 세상이 하는 것과 똑같이 ‘힘의 논리’로 대응하고 맞받지 않습니까?
소위 ‘보수’라고 하는 정치 세력을 지지하는 이들이 교회 안에도 많이 있는데, 이들은 종종 태극기 부대로 잘 알려진 그룹을 만들어 과격한 시위를 합니다. 일간에 ‘가스통 할배’라고 불리는 이들이 가스통을 들고 나와서 시위를 하는 것도 보기도 했습니다. 여기 교회의 성도들, 장로들, 집사들이 가세합니다. 목사라고 하고 장로라고 하는데 “저놈들을 죽여야 나라가 산다”라고 합니다.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신앙을 거스르는 행위도 언제든 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이것이 여섯 번째 계명을 아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노동자와 사측을 대립과 결별의 관계로 만드는 마르크스 주의가 세상의 방식이고, 남성과 여성을 화합과 상호 도움의 관계로 이해하지 않고 상대방을 죽이고 짓밟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세상의 방식이라면, 어떻게 기독교가 똑같은 방식으로 기독교의 이념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를 짓밟고 죽이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의 본 이념은 ‘나의 생존을 위하여 남을 죽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여섯 번째 계명의 가르침은 “이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은 나의 생존을 위하여 남을 죽여야‘만’ 하지만, 너희는 교회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도 쉽게 이런 성경의 가치관보다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념’, ‘내가 가치롭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위해서,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믿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납니다.
여러분! ‘폭력적 반응’이라는 것은 원래 대부분의 경우 ‘폭력 그 자체를 위하여’ 시행되지 않습니다. 보통의 경우,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이런 폭력적 자세를 갖게 만드는 이유는 ‘자신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여기고, 내가 신뢰하고 있는 이념이 손상당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폭력적인 대처를 하는 것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옳은데! 내가 믿는 것은 옳은데! 저녀석은 틀렸는데! 그런데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고 나는 그렇지 않다......이렇게 생각할 때 폭력적 반응이 나오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생각에 대하여 토마스 아퀴나스가 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화조차 내지 말라고 우리에게 이르신다(마 5:21-22). 이 말은 우리가 의분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혹할 정도로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는 억측을 낳게 만드는 우리의 시기와 자만심에 빠지게 하는 유혹에서 건져 낼 성품을 함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섯째 계명의 핵심은, 앞서도 말씀드린 대로 “나는 어느 나라의 국민인가?”입니다.
우리는 폭압 속에서도 ‘인내하고 온유하도록’ 요구받는 백성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런 방식으로 “죽이지 말라”를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연의 세계가 ‘평화와 공존이 가능한 세계’, ‘나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세계’였다면, 그것이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왔을 때, 우리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유익’과 ‘나의 이념’을 위하여 타인을 죽일 수 없습니다.
정 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에게, ‘자신이 어느 나라에 속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잣대가 됩니다. 자신의 정당함, 자신이 받는 부당함, 자신이 이루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을 내리 눌러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모든 것이 세상 왕국에 속한 이들의 공통된 품성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온유와 인내’를 품성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을 따라 살아갑시다. 여섯째 계명을 이루어갑시다. 비록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성령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