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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밤은 언제나 날선 창과 같이 날카로우며 흡사 고대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처럼 보인다. 기괴하게 뒤틀린 스카이스크레퍼는 거대한 하늘을 예리한 창처럼 이리저리 유린하고 찢어발긴다. 고층건물 안에는 창백한 형광등의 빛이 새어나고 있는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생기가 없는 모습이다. 월급이 뛸수록 그들의 심장은 뛰지 않는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인간은 오히려 거대한 시스템의 부품따위로 전락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의 증명이었다. 뭐 그래야만 진보할 수 있다면 그리 대수롭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지만 한낱 볼트와 너트 정도로 전락한 희생자의 입장에서 볼 땐 너무나 가혹한 처사이다. 그림자와 그림자를 디딤발 삼아 더 큰 어둠이 그 빈 자리를 집어삼킨다. 그 모습은 마치 깊은 바닷 속의 그것과 비슷한데 싸이코 기질이 다분한 흡혈귀 사냥꾼 아기네스딘은 그러한 의미에서 자신과 이 도시가 닮았다고 생각을 했다. 내 편오의 깊이를 헤아리다 보면 그 끝을 알 수 없을테고 마침내 심해어를 만나게 될꺼야. 그리고 그 심해어에게 목이 물려 죽어버리는거지! 여태까지 아둥바둥 살아온 사냥꾼의 삶치고는 허망하지만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다고 그는 스스로 결말을 맺었다.
" 후아……… 만월이라니.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운 밤이로군. "
거친 숨소리를 내며 묘하게 중얼거렸다. 문득 손바닥을 위로 들어보니 손가락 사이에 보석처럼 떠 있는 달이 보인다. 오늘은 만월. 어떤 방식으로든 그럴듯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밤이 아니던가. 이렇게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흡혈귀들이 떠오른다. 생살을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흡혈귀들. 사회권력을 잡고 있는 지배층으로서 그들은 인간을 끊임없이 착취하고 노예처럼 부린다. 흡혈귀의 권좌와 재산, 명성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것이지 아니한가! 자본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인민의 뼈와 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되는 공산주의 사상과 다를 바 없는 그의 생각을 보면 아기네스딘은 아직까지 1980년대 이전을 살아가는 듯 하다. 뭐 어쨋거나 불법적인 무기로 온몸을 도배하다시피 하는 흡혈귀 사냥꾼은 지배층인 흡혈귀들에 비하면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오늘도 흡혈귀 사냥꾼인 아기네스딘이 어둠으로 몸을 두르고 사냥감의 숨통을 끊으려는 미친 짐승에 비유한다면 흡혈귀들은 오히려 인간에 가까웠다. 그들은 값비싼 차로 출퇴근을 하고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정경을 즐기며 와인 잔에 달콤한 피를 담아 마신다. 높은 학력으로 사회에서 인정받고 고소득을 올리며 정신적으로는 보헤미안의 풍요를 즐기는 이들은 흡사 보보스족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 비하면 흡혈귀 사냥꾼은 짐승이나 다름 없다.
" 하지만 너희들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 결국 사람 잡아먹는 한낱 괴물에 불과하지. "
그렇게 중얼거리며 상가 옥상에 잠복 중인 아기네스딘은 드라구노프 SVD 를 꺼내들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망한 뒤 너무나도 많은 양의 무기가 뒷세계를 통하여 풀려나갔고 그 영향으로 아기네스딘도 값싸고 성능좋은(?) 러시아제 무기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옥상 위에 잠입하여 한 흡혈귀를 노리고 있는 중이다.
" 자아, 그럼 오늘도 시작해 볼까. 피나 마시는 흡혈귀, 이번엔 비릿한 쇠맛를 드셔야할 거야. "
열흘 동안 점 찍어놓았던 흡혈귀의 거처를 이제야 알아냈으니 그 다음 순서는 식은 죽 먹기이다. 흡혈귀란 녀석은 대게 자외선에 약하기 때문에 은신처가 확보되면 그 다음 생활패턴은 거의 변화가 없어서 다음 행방을 예상하기 쉽다. 이제 막 멘션 현관을 통하여 나간 흡혈귀가 주차장에 세워둔 재규어 XF 의 문을 열었다. 이제 시작이다. 스코프에 눈을 붙이고 주시한다. 녀석이 시동을 걸는 찰나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 이제 막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 어머, 설마 그런 험악한 총을 쏘시려구요? "
등 뒤에서 약간 높은 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젠장, 들켰나? 하긴 요번에 단독으로 감행했던 폭탄 테러는 확실히 화끈하긴 했다. 아기네스딘은 태연하게 말했다.
" 등 뒤를 점해놓고도 말을 걸다니, 악취미인걸? "
" 헌터의 피는 다른 인간의 피보다도 감미로운 법, 즐길 필요가 있어요. 어때요, 오늘밤 절 사랑해주시겠어요? "
드라구노프를 내려놓고 돌아보니 왠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금발 여고생이 뒷짐을 진 채 수줍게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사는 흡혈귀인만큼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부류도 많다. 인간의 곱절은 먹었을 법한 나이일텐데 여고생 교복이라니. 화가 나기도 전에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나온다.
" 제 고백을 받아주실거죠? "
" 미친…… 내가 여고생 좋아하는 일본인인줄 아나본데, 꺼져주실거죠? "
쉭!
아기네스딘의 다리에 있던 미제식 해병대 군용단검이 흡혈귀의 목을 향해 튀어나갔다. 그녀가 팔을 들어 막자 놀랍게도 군용단검의 이가 쑥 들어간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쉽게 부러지는 스테인레스가 아닌 신뢰도가 높은 강철이었는데 이게 사람팔에 막힌 것이다. 아기네스딘은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리는 반동으로 그녀의 가슴팍에 뒷차기를 꼿아넣었다. 그러나 흡혈귀는 무서우리만치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피하더니 발을 잡아올렸다. 헐 젠장!
" 꺄하하하하하, 오빠 오늘 나랑 찐~하게 노는거다? "
아기네스딘의 입장에서는 천지가 뒤집혔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40kg도 안되보이는 여자 흡혈귀가 쓰다버린 헝겊인형마냥 아기네스딘을 잡아 던지니까 허공을 붕 날아가 반대편 벽에 꼴사납게 쳐박혔다.
" 커헉! "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별반 대수롭지 않지만 콘크리트 벽에 부딪힌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저지력 측면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효과적이다. 낙법이란 걸 할 사이도 없이 쳐박힌 거라 그런지 사물이 빙글빙글 돌고 창자가 꼬이는 기분이었다. 비명이 절로 튀어나오고 뼈마디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아기네스딘이 콜트 거버먼트 45 구경을 꺼냈다. 하지만 흡혈귀가 빠르게 접근해 와서 바로 아기네스딘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 매력적으로 생겼는데? "
흡혈귀는 흡사 고백편지를 주는 소녀처럼 새빨간 홍조를 띄며 손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아기네스딘은 상반신을 젖히며 앞차기로 흡혈귀의 몸을 걷어차고는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리고 공중에 떠있는 도중에 몸을 비틀어 권총을 연사했다. 그러나 흡혈귀는 그림자를 남기며 빠른 속도로 움직여 물탱크 위에 올라서고 있었다. 아기네스딘도 백스탭을 밟으며 뒤쪽 옥탑방 코너로 몸을 숨겼다. 방금 전 사격이 제법 유효했는지 몇 발의 피격음이 들린 것 같다. 그러나 아기네스딘 역시 이번 공격으로 무리하게 몸을 움직여서 관절마다 삐그덕거리는 것을 느껴진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흡혈귀는 다 죽여버리네 마네 궁상 떨었건만 이대로 가다간 오히려 흡혈귀에게 잡아먹힐 판이다.
' 아이고, 다음부턴 그냥 보이는대로 조져야겠다. 젠장. '
" 오빠 몸 부실하구나, 그래서야 날 흥분시킬 수 없잖아아아앙"
" ………… "
저런 실없이 미친년을 보았나. 그렇게 말할 시간 있으면 가서 장어구이나 가져오지 그래? 아기네스딘은 빠르게 몸상태를 체크했다. 전신의 근육들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만 아직 그렇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니 불행 중 다행. 아기네스딘은 곧바로 벽을 박차고 뛰어넘어 맞은 편 건물 옥상으로 몸을 던졌다. 어찌됬던 간에 이 적은 해치워야 한다. 이런 정신병 걸린 자객을 놔두면 언제라도 습격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 나처럼 인기있는 남자를 상대로 아양을 피우다니. 얼굴에 자신 좀 있나봐? "
콜트 거버먼트의 탄창을 갈아끼우며 투덜거렸다. 더 이상 대답은 없다. 나지막한 중얼거림이지만 고요한 밤, 그것도 자객으로 온 흡혈귀가 못 들을 리는 없지. 일단 한숨 돌리기 위해 말을 걸며 템포를 늦추는 것일 뿐. 이제 곧 파상공세가 시작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뒤쪽에서 차가운 느낌이 들면서 전신에 소름이 곤두섰다. 예상보다 빠르다! 아기네스딘이 재빠르게 몸을 옆으로 틀자 아슬아슬하게도 흡혈귀의 주먹이 빗나가 콘크리트로 쌓은 벽이 대신 무너져내렸다.
철컥!
아기네스딘은 콜트 거버먼트를 들어 흡혈귀의 머리를 겨누었다. 이런 근거리에서 실버칩이 잔뜩 박힌 은탄환을 맞게 된다면 제아무리 흡혈귀라도 일격에 죽일 수 있다! 그러나 흡혈귀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톱으로 콜트를 쳐냈다. 권총을 버린 아기네스딘은 뒤로 살짜 빠지는가 싶더니 스위치 스탭을 밟으며 다가왔다. 설마 흡혈귀를 상대로 접근전을 벌이겠다는 생각인가? 여고생 흡혈귀는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리도 멋진 헌터였을 줄이야! 그러나 그런 감상과는 별개로 채찍같은 하이킥이 여고생 흡혈귀에게 작렬했다. 반사신경이 뛰어난 흡혈귀답게 여유로운 자세로 팔을 들어 막았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 큭! "
팔뼈가 박살나고 살점이 한웅큼이나 뜯어져 나간다. 아기네스딘이 신고 있는 워커는 발등에 철판을 심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슈타이크아이젠까지 박혀 있으니 맨손으로 막으면 제아무리 흡혈귀의 팔이라도 성치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대로 반동을 실려 왼발 뒤돌려차기를 길게 하더니 멀직하게 거리를 두었다.
" 키킥. "
얼굴이 어둠에 반쯤 가리워져 찌그러진 가면처럼 불길하게 웃는데 그건 흡혈귀인 그녀가 보아도 충분히 위험한 모습이다. 흡혈귀 사냥꾼 중에서도 미쳐있거나 싸이코 부류같은 녀석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이 녀석은 상등품이라 여길 만큼 미쳐있었다.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는 더할나위 없이 섹시한 사냥꾼이긴 하지만.
" 우우웅, 지금 내 매력을 시험해보는거야? 좋아, 마음껏 시험해보라구! "
귀엽게 말하는 흡혈귀를 그대로 무시, 아기네스딘은 자세를 잡고 더킹으로 근접하며 흡혈귀의 주먹을 피했다. 고개를 깊게 숙이며 그녀의 품으로 순식간에 파고든 그는 전형적인 컴비네이션으로 원투 펀치의 레프트 다음에 라이트, 그리고 뒤이어 무릎관절을 노린 곡괭이 같은 깔끔한 로우킥을 성공시켰다. 흡사 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아드레날린이 활성화되는지 몸동작 하나하나가 가볍고 유려하다.
쯔컥!
제아무리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반사신경이 뛰어나더라도 접근전에서 체중과 신장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법! 과연 몸무게 40kg 도 안되는 여자 흡혈귀라 그런지 체중이 실린 그의 정타를 먹으니 몸이 휘청거렸다. 다리도 길고 리치의 차이도 명확하다. 아기네스딘이 유리하다! 곧이어 팔꿈치를 들어 그녀의 턱을 찌르려는 순간 그녀는 옆으로 뛰어서 벽을 박차더니 빙글 돌아서 아기네스딘의 뒤에 내려섰다.
콰직!
갑작스런 위치변화에 놀란 아기네스딘이 앞으로 몸을 던지며 뒤를 돌아보았으나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예리한 손톱이 왼쪽 어깨에 쳐박혔다. 피가 분수처럼 얼굴에 튀기며 흘러나온다. 게다가 이 흡혈귀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어깨 속에 파고든 손가락들을 움직여 안을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이렇게 생생히 뼈가 갈라지고 근육들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으니 수술을 해도 앞으로 팔이 움직여질지 의문이다.
" 크아아악! "
아기네스딘이 비명을 지르자 흡혈귀도 흥분한 듯 그대로 찍어눌러 그를 눕히고는 위에 올라탔다. 곧이어 흡혈귀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피로 적셔진 아기네스딘의 얼굴을 탐욕에 찬 눈으로 보더니 흡사 아이스크림처럼 핱아마시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탄 아름다운 흡혈귀의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를 바라보니 너무나도 선정적이다. 그 모습은 매혹적이고 아름답기에 아기네스딘마저도 잠시나마 이렇게 죽는 것도 그린 나쁘지 않구나 생각했다.
" 하아, 하아, 하아. 오빠 너무 멋져, 이대로 오빠의 모든 걸 나에게 줘. "
" 키킥, 키키키킥……… 나이를 생각하시지? 인간이라면 증손자를 볼 나이는 넘었을텐데! "
피와 흡혈귀의 타액으로 정신 못차리던 아기네스딘의 비아냥이 끝나기도 전에 흡혈귀의 두손이 아기네스딘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리고 진하게 키스를 하는데…… 아릿한 혈향이 입안 가득히 퍼진다. 흡사 초원을 정복하는 약탈자인마냥 혀를 굴리는데 남자 깨나 섭렵했을 법한 테크닉이다. 혀로 종이학이라도 접을 생각인가 보지? 대게 흡혈귀란 녀석들은 식욕이나 성욕보다 흡혈욕을 우선시해서 그쪽으로 모든 욕구가 종속되기 마련인데 이 또라이 교복매니아 흡혈귀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이래서야 얼마전 여자 흡혈귀를 상대로 자기가 한 짓거리와 똑같잖는가! 아무리 광기의 칼날을 밟고 춤을 추는 아기네스딘이라 할찌라도 이 상태로 가다간 정말 위험하다. 어쩌면 자기도 모르게 매혹이 걸려서 정신 못차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미녀가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고있는 경험은 매우 유쾌한 즐거움이지만 그것이 흡혈귀라면 이제 슬슬 끝내야 할 시간!
탕!
콜트 거버먼트는 한 자루만 있는게 아니였다. 그는 비교적 부상이 덜한 오른손으로 콜트 거버먼트를 꺼내 정신없이 자신의 혀를 탐식하는 그녀의 가슴팍에 연달아 총알을 꼿아내렸다. 그와 동시에 여자 흡혈귀의 복부를 걷어차 밀어냈다.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선 흡혈귀는 손톱을 세우고 달겨들었지만 아기네스딘은 번개같은 동작으로 일본도를 꺼내든 뒤였다.
" 얼굴은 내 취향이지만 교복이라니. 그건 너무 매니악하다구!"
" 캬약! "
크게 한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수직으로 내리긋자 흡혈귀의 팔이 잘려나가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한팔로 휘두른 주제에 이 정도면 대단한 완력이다. 아기네스딘은 이걸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몸을 반전, 일본도를 역수로 꼬나쥐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등 뒤를 향해 찔러 넣었다.
푸욱!
흡혈귀의 복부를 꿰뚫고 칼날이 등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깔끔하게 칼을 회수하자 아기네스딘의 등 뒤에 서 있던 흡혈귀는 엄청난 피를 흘리며 뒤로 나뒹굴었다. 그의 피에 취해 정신없이 마시고 있을 때 총탄을 너무 많이 허용한 것이 패배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따금 너무도 오랜 세월을 살아온 흡혈귀는 종종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가 많아 스스로가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자각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는데 지금이 딱 그 케이스이다.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유령처럼 몽유하는 사람이 늘 그렇듯, 과정을 밟던 도중에 어느새 목적 잃어버리고 스스로의 본분을 망각해 버린다. 자기자신의 공허를 새카만 증오와 분노로서 가득가득 채우고 교활함과 치밀함으로 무장하여 초자연적인 존재를 사냥하는 미친 사냥꾼과 기나긴 시간의 철퇴를 이기지 못해 현실로부터 도망친 정신병 걸린 교복 흡혈귀와의 싸움은 애초에 그 결말은 뻔한 것이었다.
철컥!
바닥에 널브러져 간간히 경련을 일으키는 그녀는 분명히 아름다운 존재이다. 비록 사람을 잡아먹는 흡혈귀이지만 그 전에 기나긴 세월 속에서 영혼을 침해받은 가련한 여성이기도 했다.
" 소, 손을…… 손을 잡아 줘……… "
간절한 눈으로 아기네스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또 가만 생각해 보니 이 흡혈귀는 애초에 자객의 신분으로 자신을 찾아온 게 아닌 듯도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낱 헌터에 불과한 자신에게 키스까지 하며 방심 할 이유는 없지 아니한가. 흡혈귀들은 정신병 걸린 흡혈귀를 자객으로 보낼만큼 어수룩하지 않다. 결국 아기네스딘이 좋아서 덤벼든 거라고 밖에 결론지을 수 밖에 없었다. 아기네스딘은 금속성 부품으로 만든 기계처럼 무심한 표정을 짓고는 아무 말없이 그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혹시 모른다는 예방차원이란 상식은 그의 행동에게 충실함을 요구했다. 탄창 한개를 그 자리에서 고스란히 쓴 아기네스딘은 다시 한번 탄창을 끼운다음 다시 사정없이 쏘았다. 그렇게 몇 차례나 더 그녀의 머리에 쏘는데…… 아기네스딘은 문득 자신의 눈꼬리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으로 눈을 비비며 그만 흘러나오게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기네스딘은 결국 비가 내린다고 생각했다. 그래, 비일거야. 비가 내리고 있는거야. 아기네스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별빛이 유난히 밝은 건 왜일까.
사냥꾼이 사냥당하는 밤. 밤하늘 위에는 눈이 시릴만큼 쾌청한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첫댓글 즐감
1편과 2편이 없는 3편.
어헛, 정독하시지 않았군요! 전부터 써왔던 것이랍니다. 낄낄